- 7권 23화
173화
휘노소프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서준의 입가에 헛웃음이 홀러 나온다.
“완전히 미쳤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 로파가 이런 무례를 보인 이유가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정치 싸움을 하 려 할 줄이야.’
일전에 우르누이와 나눴던 대화
에서도 유추할 수 있던 이야기였다.
지금 드워프는 왕정파와 원로파 로 세력이 나누어져 있었다.
사실, 왕정파는 파벌이라고 부르 기에도 민망했다.
최고 원로, 왕, 휘노소프와 우르 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로파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극명한 세력비를 가지고 있으니 실권이 강한 것이 어느 쪽 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원로파가 이렇게 막무가 내로 나올 수 있었군.’
원로파가 어떻게 왕을 뛰어넘는
강권력을 쥐게 되었는지는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었다.
우선 지금 중요한 것은 원로파는 왕국도 모자라 리벨리온, 서준까지 휘어잡아 제 입맛대로 다룰 수 있 는 권력을 쥐려 하고 있다는 것이 었다.
“원로파가 왕인 저와, 인왕님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일부러 이런 식 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죠.”
이어진 휘노소프의 부연설명으로 상황이 완벽히 이해되자, 앞으로 원로파가 보일 행동에 대해서도 짐 작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보여주려 하겠군.’
본래, 계급 사회에서는 회의에 늦게 등장하는 것까지도 가진 권력 을 과시하는 용도로 쓰이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왕과 서준의 뒤에 입장 함으로써 본인들의 위용을 각인시 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불경하고 상도덕이 없는 무례였 다.
‘재미있는 짓을 벌이네.’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 르고 있던 찰나였다.
“드워프 왕국의 진정한 대장장이 들!”
나팔수의 외침이 회의장에 크게 울려 퍼진다.
동시에서준이 입장할 때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우렁차면서도 장엄한 음악들이 터져나오기 시작 한다.
“왕국과 차원을 지탱하는 기둥이 자 숙련된 대장장이이며 우리 수도 의 든든한 용사! 열 개의 망치님들 께서 입장하십니다!”
나팔수의 우렁찬 외침에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귀빈의 자격으로 호출된 사람뿐 만 아니라, 왕국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왕보다 훨씬 늦은 등장.
심지어 회의장에 들어서는 열 개 의 망치라고 불리는 작자들은 조금 의 미안한 감정도 없는지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시선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사람 긁는 재주는 상당히 뛰어 나네.”
서준의 입에서 서슬 퍼런 말들이 홀러나온다.
그러나 악단의 연주가 워낙 큰 탓에 원로들은 그런 서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들었다 할지라도 오히려 기세를 잡아냈다는 것으로 좋아했 을 것이다.
이런 만행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악단은 우렁찬 곡을 연주하길 계 속했다.
“아누키스의 현자, 드워프의 전 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나팔수의 모습에서준이 가늘어진 눈매로 문을 바라 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 팔수가 이 정도로 핏대를 세울 만 한 인물은 한 명, 원로파의 핵심 인물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 드워프 왕국을 이끌어 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테메누 님 께서 입장하십니다!”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 어난다.
‘저놈이 우두머리.’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원로 파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이자, 리 벨리온과 불카누스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드워프 중에서는 제법 큰 키, 넓 게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체격,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테메누 의 주변으로 많은 원로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테메누 님!”
“근래 새로운 무구 제작에 들어
가셔서 엄청나게 바쁘신 몸일 텐데, 이리 발걸음을 바삐 옮겨 오시다니 요.”
귀빈의 자격으로 데려온 서준은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테메누의 등 장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그에게 아양 떨고 있었다.
원로들과 한창 화기애애한 대화 를 나누던 테메누가 걸음을 옮겨 왕과 서준의 앞으로 다가온다.
“너무 늦게 인사를 드리러 와서 죄송합니다. 하하, 보시다시피 안부 를 건네 오는 이들이 많아서 무시 하고 올 수가 없었네요.”
도를 넘어선 무례를 보이고 건네 오는 태연한 인사,
이것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더 어이없는 건 회의장의 그 누구도 테메누를 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욕을 하기는커녕 원로들은 테메누의 눈치를 보기까지 하고 있었다.
테메누는 그 분위기를 등에 업은 채로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는 왕 과 서준을 응시하며 인사에 대한 대꾸를 기다리는 듯했다.
쏘아내는 눈빛은 위압적이기 그
지 없었다.
왕 정도의 권력을 가진 존재라고 해도 움츠러들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지금 테메누의 앞에서 있는 서준은 왕 따위로 형언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구, 아니마, 프리실라, 그리고 중원까지.
자그마치 4개의 차원을 거느린 존재이자, 하늘의 주인 옥황마저 굴복하게 만든 마선.
고작 테메누의 기세 따위에 밀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서준은 움츠러들기는커녕, 테메
누의 눈동자를 당당하게 응시한 채 로 입을 열었다.
“죄송한 일이라는 걸 알아? 그럼 이런 태도는 상당히 무례 아닌가?”
날이 선 서준의 말에도 테메누는 조금도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 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피식- 미 소를 흘리며 서준을 향해 질문했다.
“소신이 미천하여 인왕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 겠습니다만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말 씀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 다.”
당연하지만, 자칭 정치꾼이라는 작자가 서준의 이야기의 진의를 파 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모르는 척 약을 올리려는 거겠 지.’
선을 넘어서다 못해 부숴버린 태 도의 테메누였지만, 서준의 눈에는 한 치의 당황도 존재치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대화가 통할 것 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 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이편이 편하지.’
혹여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했다 면 처리를 한번 다시 생각해야 하 지 않겠는가?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 없어졌다 는 것이었다.
서준은 고개를 돌려 왕좌에 앉아 있는 휘노소프에게로 시선을 향했 다.
“드워프의 지도자이자 왕이신 휘 노소프 님께 묻겠습니다. 드워프들 은 지금처럼 왕가에 대한 도 넘은 무례를 보인 이를 어떻게 처벌합니 까?”
별안간 서준의 질문에 휘노소프
가 화들짝-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고서 입을 열었다.
“……물론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 을 수가 없겠습니다만, 왕의 재량 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보통은 지 하 감옥에 3개월 가둬놓는 편입니 다.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목을 베어 효수하지요.”
“그렇다면 지금 사건은 후자에 해당하겠군요.”
서준의 발언에 원로의 눈이 휘둥 그레진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업무가 바쁜 것을 누가 뭐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효수라니, 당치 도 않지요!”
회의장 곳곳에서 불만 섞인 소리 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런 반발에 물러설 것이 었다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드워프의 왕이시여, 혹, 왕법에 대한 반기를 드는 이들은 역모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모의 형량은 어떻게 됩니까?”
“효수는 물론이고 삼족을 멸합니
다.”
휘노소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서슬 퍼런 말에 일순간 적막감이 감돈다.
원로들은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연주를 이어가던 악단 조차도 분위기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테메누는 조금도 움츠러 드는 기색이 없었다.
“과한 처벌은 아니라고는 생각하 나, 저, 테메누를 비롯한 원로가 없 다면 왕께서도 많이 불편해지실진 대, 조금은 선처를 해주시는 게 어
떻습니까?”
여전히 당당한 테메누의 언행에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건 또 무슨 소리죠?”
“……오랜 과거부터 원로들은 꺼 지지 않는 불의 관리를 맡고 있습 니다.”
드워프 왕국 수도의 중심에는 꺼 지지 않는 불꽃이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꺼지지 않는 불꽃이 존재하였기에 아누키스가 드워프의 수도가 될 수 있었다.
“드워프들에게 대장간은 삶 그 자체입니다. 동시에 드워프들이 아
누키스에 모이는 이유기도 하지요. 그런데 만약 꺼지지 않는 불꽃이 사라진다면 아누키스는 더 이상 드 워프들의 왕국으로 남지 못할 겁니 다.”
왕이 왕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꺼지지 않는 불꽃을 다뤄 낼 수 있는 아티팩트는 특정 인물, 가문만이 다룰 수 있었다.
본래 과거부터 왕에게는 대장 기 술을 진보시킬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의 아티팩트, 원로파의 핵심인 테메누의 가문에게는 꺼지지 않는 불꽃의 관리 권한을 넘겨주어 한쪽
의 독주를 막고, 권력을 나누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대의 왕이 위대 한 존재가 남겨 둔 아티팩트와 함께 됐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왕권이 급격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테메누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사 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당당 한 태도를 보일 수 있던 것이었다.
“어찌, 저희를 효수하시겠습니 까? 삼족은 멸하고요?”
입을 열지 못하였지만, 휘노소프
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웠고, 얼굴은 와락-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니, 없던 일로……
고민을 이어가던 휘노소프가 마 침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이 없어서 그렇 게 고민한 것이었습니까?”
“그렇게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 다. 말씀드렸다시피 드워프 일족에 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니까 요.”
“만약 제가 그 불꽃을 내어 준다 면 테메누의 처분을 확실히 하실 건가요?”
서준의 말에 테메누가 코웃음 친 다.
“꺼지지 않는 불꽃은 위대한 존재님께서 피워내신 불꽃입니다. 저 희 같은 불완전한 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테메누는 지금 서준이 내뱉은 말 이 무지에서 나온 오만이라 여겼다.
물론, 서준은 아무런 생각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 이런 거 면 되는 거잖아?”
서준의 손 위에 붉은 불꽃이 화 르륵- 피어난다.
허나, 테메누는 여전히 코웃음을 치며 건방을 부린다.
“하! 보시지요. 역시나 억지를 부 린 것이지 않습니까?”
당연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꽃은 일반적인 불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꺼지지 않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었고, 화력 또한 여느 불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높은 온도와 화력만큼이 나 그 색깔부터가 남달랐다.
찬란한 백화(白火), 그것이 진정 한 꺼지지 않는 불꽃의 상징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볼 수 없고 피워낼 수 없었다.
그러나, 천마이자 최강이자 최악 의 마선인 서준이라면 이야기가 달 랐다.
본래 천마를 상징하는 불꽃은 색 은 백색.
전대의 천마, 과거 서준이 펼친 기술들은 그저 능력들이 부족하여 묵색의 불꽃을 피워냈을 뿐이었다.
진정 천마(天魔)를 논할 정도의 무위를 가진 존재들은, 찬란한 백
화를 피워냈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의 서준은 왕이 그토록 목매고 있던 백화를 피워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화륵-!
서준의 손 위에서 붉게 피어오르 고 있던 불꽃이 발작하듯이 치솟아 오르더니 회의장을 불가마로 만들 었다.
“어찌, 이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맞느냐?”
비릿한 미소를 홀리는 서준의 손 바닥 위에 새하얀 불꽃, 백화.
드워프들이 그토록 애원하는 꺼
지지 않는 신의 불꽃이 피어나고 있는 모습에 테메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