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권 16화
166화
수화기 너머 사내의 목소리가 낮 게 가라앉았다.
-이제야 상황을 좀 자각한 거 같 군.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주제에 맞게 행동하는 게 어떤가?
“……그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다시 한번 그런 고압적인 태도 로 나를 겁박하려 든다면 협상은 없 는 것으로 하겠다. 가족을 무사히
다시 만나고 싶다면 리벨리온의 의 장으로서 우리 교황청이 요구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해라.
계속되는 사내의 협박에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애초에서준이 걱정하고 있는 것 은 사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 제였다.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너희 십 자군이고 교황청이고 몰살이니까, 빨리 명령을 철회하라고.”
교황청 최고의 무력집단 십자군.
그럴싸한 이름으로 제법 명성을
날렸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대다수가 B〜A등급의 각성자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시그나투스도 S 급 각성자에 불과했다.
서준의 가족들의 무위를 고려했 을 때, 그 안위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것도 아니었다.
‘아직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 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의 확률이라도 패배를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반신의 경지를 넘보고 있는 서연
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고, 조 화경의 끝자락에 이르러 있는 양친 의 상대조차 되지 못하고 교황청은 몰락할 것이었다.
문제는 바로 사람과 전투를 치른 실전 경험이 없었기에 힘 조절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혹여나 실수로 사람을 해치게 된다면……
육체의 강인함이 꼭 정신의 견고 함과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도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적으로 부담감 혹은 죄책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종국에는 그 부담이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그렇기에 흔히들 마음, 멘탈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무너지게 된다면 육체는 그저 평범한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
계속해서 뭐라고 짖어대는 사내 와의 통화를 끊어낸 서준은 곧장 강석호를 비롯한 연합의 일원들에 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내부.
두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는 서 연의 움직임에 시그나투스의 동공 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린다.
‘벌써 이렇게 성장했단 말인가?’
서준의 성장 속도야 너무나도 유 별났기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 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운
의 요소, 포스 시스템이 내려준 특 수한 스킬들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족 전체가 말도 안 되 는 성장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 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했다.
한서준의 동생, 한서연조차도 말 그대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에도 교황청의 자랑거리였던 십자군이 우후죽순 쓰러져 나간다.
이윽고 여섯 명에 달하던 십자군
정예 중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자 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됐다.
“준비한 건 이게 끝이야?”
여유로운 서연의 모습과 널브러 진 십자군.
받아들일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이 고 싶지 않은 현실에 시그나투스의 입가에 헛웃음이 흐르기 시작한다.
“하하......
모든 것이 절망적이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 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국가와 시민은 리벨리 온을 지지하는 추세였다
천사를 지지해오던 교황청은 과 거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는 말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상황에 만약, 협박하기 위해 서준 일가를 납치하려 했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 려지기까지 한다면.
크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 다.
‘교황청의 몰락……:
이것은 평생을 몸 바쳐온 교황
청, 인간 시그나투스의 모든 것이 달린 문제라는 것이었다.
황급히 정신을 다잡은 시그나투 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 아 들어 자세를 다잡는다.
“이 자리에서 반드시 네놈을 쓰 러뜨려 주겠다.”
시그나투스가 굳센 결의를 다지 며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듯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서연은 현경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는 고수.
극강기를 다뤄낼 수 있는 강자였
다.
그리고 극강기는 오롯이 극강기 로만 막아낼 수 있었다.
지금 시그나투스의 결의는 전부 부질없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시그나투스가 휘두르고 있는 마 나를 불어넣은 검이, 서연의 주먹 에 두부처럼 으깨지고 부서진다.
“괴, 괴물……
넋두리와 같은 말을 흘리던 찰 나, 아찔한 고통과 함께 허공이 신 형을 노닌다.
단 한 번의 짧은 공방이었지만, 시그나투스의 확고했던 의지가 허
공에 흩어진다.
‘절대 이길 수 없어……
십자군만을 대동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한서연은 교황청의 모든 전 력을 쏟아부어도 감히 승리를 논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의 격차였다.
이렇게 서연의 힘을 목도하고 나 자 시그나투스는 현실을 제대로 바 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교황청이 과거의 망령이 되어가고
있다는 급박함에 눈이 멀어 건드려 서는 안 될 존재를 건드려버렸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지만, 너무 때늦은 후회 였다.
어느새, 묵색의 기운이 둘러진 서연의 손이 시야를 가득 메워오고 있었다.
방어하고 싶었지만, 이미 부러진 칼날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꽈악-
곧 밀려올 끔찍한 고통에 시그나 투스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네.”
돌연 들려온 목소리, 느껴지지 않는 고통.
시그나투스의 눈에 희망이 깃든 다.
‘설마, 다른 십자군이 성공한 건 가? 지원을 보낸 것인가?’
당연하지만, 헛된 희망에 불과했 다.
아니, 헛된 희망조차 아니었다.
시그나투스가 가장 피하고 싶었 던 존재, 커다란 절망이 찾아온 것 이었다.
“ 오빠?”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서연의 모 습을 바라보던 서준은 피식- 미소 를 홀리더니 시그나투스를 향해 쇄 도하고 있던 묵색의 극강기를 강제 로 흩어낸다.
“S급 각성자는 네가 생각한 것처 럼 그리 강하지 않아. 이렇게 극강 기가 둘린 공격이면 한 번에 죽을 수도 있다고.”
“……미안, 각성자와의 전투가 처음이다 보니 너무 흥분했었나 봐.”
“괜찮아, 아직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니까. 대신……
고개를 푸욱- 숙인 채로 기가 죽 은 서연의 모습에서준은 활짝 미 소를 지은 채로,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연다.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기라고.”
고개를 주억이는 서연의 모습을 확인한서준은 고개를 돌리어 시그 나투스를 바라본다.
당연하지만, 시그나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서준의 표정에는 온화 했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싸늘하다 못해 시릴 정도의 차가 운 눈동자가 시그나투스를 향한다.
시그나투스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죽는다.’
동시에 떠오른 결론에, 시그나투 스가 황급히 발을 내디디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나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되게 바빠 보이긴 하는데……
툭-!
삽시간에 거리를 좁혀내며, 수혈 을 짚은 서준이 바닥에 쓰러지고 있 는 시그나투스의 신형을 받쳐 든다.
“갈 땐 가더라도 네가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가야지.”
그것이 시그나투스가 의식을 잃 기 전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길드 건물 지하의 밀실.
서준이 시그나투스를 데려온 장 소였다.
그 안에서 눈올 뜬 시그나투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보이는 회색빛 벽면에 창백해진 안색으로 몸을 벌
떡 일으켰다.
“여, 여긴……?”
다소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되짚어 본다.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시그나투 스의 얼굴에 그늘이 진하게 드리워 져 간다.
‘한서준.’
그자의 공격에 당한 뒤 의식을 잃고, 이상한 밀실로 끌려왔다.
상황들이 정리되어 가자 덜컥,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이런 밀실에 잡혀 온 경험 자체
도 처음이거니와, 심지어 자신을 이 밀실에 가둔 이가 적이면서도 세계 제일에 올라있는 각성자, 한서준이었으니 말이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고 있었지만 억지로 용기를 쥐어짜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난 시그나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 내가 감히 누구인 줄 알고 이런 데 가둬둔 것이냐! 당장 풀어 주지 않으면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항의를 받게 될 것이다!”
한번 붙은 자신감 덕분인지, 시 그나투스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교황청! 교황청이 무섭지도 않 나! 지금이라도 풀어주면 이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
시그나투스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밀실의 구석 편에 놓인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딱딱한 로봇 음성이 먼저 들려왔고, 시그나투스 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릴 준비 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발악이라도 해보 려고 하였으나,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한다.
항거할 수 없는 공포와 압박감에 발걸음이 굳어버리고 말았기 때문 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문 을 열고 들어온 사내의 얼굴이 너 무나 낯익은 탓이다.
“한서준……. 아직 이곳에 남아 있었었나?”
“당연하지, 우리 서로에게 볼일 이 있잖아.”
서늘한 목소리를 흘린 서준이 앞 으로 나서자 시그나투스는 저도 모 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선다.
처음 보는 밀실, 얼음장보다 차
가운 서준의 눈동자까지.
시그나투스도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맞붙고 벌벌 떨었던 한서 연보다 강한 이가 한서준이었다.
어설픈 발악 같은 것이 통할 상 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머리가 분주히 회전했다.
시그나투스가 고를 수 있는 최선 의 선택지를 찾아낸다.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단 한 가지, 대화뿐 이었다.
“잠, 잠깐 일단 내 이야기를 들
어주게!”
시그나투스가 다급하면서도 간곡 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하나 차가운 한기가 담긴 눈동자 는 여전히 시그나투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교황청의 추기경, 핵심 인력 이란 말이네! 그런 나를 무사히 돌 려보내 준다면 교황청에서 충분한 보상을 내리겠지! 그러니까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게.”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협상안에
도 멈추지 않은 서준의 걸음걸이에 시그나투스는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손이 닳도록 빌기 시작한다.
“그, 저, 나와 교황청이 욕심에 눈이 너무 멀었었네. 부디 한 번 만……. 용서를 해주게나.”
천천히 걸음을 옮겨오는 서준의 모습에 시그나투스는 간절한 목소 리를 흘렸다.
“시그나투스.”
“제발, 제발 살려만 주시오……
시그나투스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단순한 용서로 끝날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교황청이 아무리 압박을 가한다 고 할지라도 소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상대는 세계 제일의 각성자이자, 리1켈리온의 의장이었다.
세계 권력의 중심에서 있다 해 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다.
제아무리 s급 각성자라고 할지라 도 이 자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계속해서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는 말이었다.
그 서늘한 감각에 시그나투스의 몸이 다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