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권 7화
157화
서준 일행은 객점을 벗어나 곧장 혈옥군으로 향하였다.
전과 달리 걸음에는 여유가 묻어 났다.
“곧 싸워야 할 테니까, 체력 안 배를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벨리드의 사도, 에노스가 중원 대륙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간악하기로 둘 째 가라면 서러운 혈교를 두고 있
‘더군다나 운남성까지 오는 동안 일부러 혈교의 잔당을 소탕하면서 소문을 내기까지 했으니.’
상대는 지금 서준 일행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감옥, 혈옥군(血獄郡)에 쉽게 접 근하게 해줄 리가 없었다.
결국, 실제로 서준 일행은 혈옥 군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높은 성벽 이 우뚝 서 있는 양강관이라는 관 문을 맞이해야만 했다.
양강관(兩江關).
본래라면 대도시인 운남성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로 북 적였어야 할 양강관이 개미 한 마 리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하여 양강관의 위에는 무장 한 병사들과 무인이 사나운 기세를 내뿜으며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
“화려하게도 준비해줬네.”
병사와 무인의 선두에는 중무장 한 갑주를 차려입은 장수들과 조화 경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는 강자들 이 자리했다.
서준은 그 중심지에 있는 한 사 내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린다.
“아니, 흑마(黑馬) 놈도 혈교에
붙어먹은 거냐?”
“전대 교주님께서 잘못되신 후에 곧장 혈교로 찾아갔다는 소식만 있 었습니다만……. 진짜인지는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 른다.
“혹마 녀석 다운 행동이네.”
다소 쓰라리긴 했지만, 미리 마 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덕분인지 크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사실, 천마신교가 몰락했다는 소 식을 들었을 때부터 흑마가 혈교에 들러붙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
다.
“혹마 놈은 계산에 능하고 욕심 이 많은 자였어. 초류영이 죽고 패 배가 확정된 천마신교에 붙을 리가 없지.”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있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습니다.”
“사과할 거 없다니까, 내가 자리 를 지키고 있던 것이 아닌 이상 천마신교의 그 누구라도 혈교의 간계 를 막을 수 없었어.”
더군다나 먼저 천마신교를 떠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찌 단 한 순간도 변심 하지 않고 진정한 충신으로 남아온 무명신의를 핍박할 수 있단 말인 가?
“그러니까, 이건 내가 저지른 실 수니 내가 직접 만회하겠어.”
“저도 돕겠습니다.”
무명신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 를 지은 서준은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고는 선두로 나섰다.
“아니, 흑마는 내가 처리할 테니 쉬고 있어.”
욕심이 많은 자였기에, 쇠락해가 는 권력을 견딜 수 없어 혈교에 붙
은 자였다.
그건 흑마의 크나큰 실수였다.
‘애초에 내가 돌아올 줄은 몰랐 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 그 누구도 예상하 지 못한 일이었다.
서준 본인조차도 말이다.
흑마의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였다.
지금 서준이 느끼고 있는 배신감 만큼 절망하도록 말이다.
물론, 단순한 죽음 정도로 서준
을 비롯한 상처받은 자의 마음을 모두 메꿀 수는 없었다.
쿵-
끝없는 중압감을 발산하며 걸음 을 옮겨오는 서준을 향해, 관문 위 의 병사들이 시위를 겨눈다.
저들의 지휘관인 흑마의 명령이 떨어지면, 하늘에서 화살 비가 쏟 아질 것이었지만 서준은 조금도 움 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마저 흐르 고 있었다.
“흑마, 너도 알고 있잖아, 이런 화살들 따위로 날 막을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을 것이 다.
그러나 흑마도 지금은 혈교의 지 휘관 격이었기에, 쉽게 물러날 수 는 없는 입장이었다.
“정지! 정지! 접근을 불허한다!”
병사들의 중심에 선 흑마의 목소 리가 들려온다.
나름의 위협을 가하려고 하는 것 인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내재한 공포심을 모두 숨길 수는 없었다.
‘계산이 빠른 흑마라면, 이미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서준은 이런 흑마의 능력을 실로 높게 샀었다.
험난한 중원 대륙에서 살아남으 려면, 흑마 정도로 약삭빠르고, 계 산에 능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이 길바닥을 떠돌던 흑마에게 몇 가지 무공들을 사사하고는 함께 천마신교에서 살 아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심지어 중원 제패를 끝마친 이후 에는 흑마에게 천마신교의 장로라 는 권력과 힘을 주기까지 했다.
한때는 스승이기도 했고, 때로는 부모와도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감히 흑마, 네가 나를 배신해?”
한없이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혹 마의 뇌리에 정확하게 전달된다.
아니, 양강관에 있던 모두의 머 리에서준의 목소리가 박혔다.
의지를 실어낸 기운이 일대로 퍼 져나가 일종의 선고(宣告)가 되었 으니 말이다.
서준의 놀라운 경지에 흑마의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지금 당장 내려와서 무릎을 꿇 고 고개를 조아리고 용서를 구한다 면, 옛정을 생각하여 특별히 목숨 만은 살려주도록 하겠다.”
이어진 서준의 말에 흑마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다.
“천마, 한서준! 당신의 시대는 저 물었다! 대체 언제까지 당신 흘로 중원을 지배하고 군림하려 하는가! 악독한 자여!”
“재미 있네……
짧은 감상을 토한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날 마주하고도 겁을 먹지 않고,
계속 입을 열 수 있다니 용기는 가 상한걸.”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된 서준이 발끝에 검은 기운, 천마신공의 힘 을 응축시킨다.
이내, 서준은 발을 높게 들어 올 린 후 지면으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쾅-!
거대한 파동이 퍼져나가 성벽을 덮쳐 뒤흔들었다.
쿠구궁…….
자연스레 성벽 위에서 있던 병 사들과 무인들의 입에서 경악 섞인 비명이 터져 나온다.
“으아아니”
“괴, 괴물!!”
서준의 위용에 혀를 내두르고 있 었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 과한 힘이었다.
동시에서준이 앞으로 길게 내뻗 은 주먹에서는 파지직- 전류가 일 어난다.
콰광-!
하늘에서 의념강기로 이루어진 백색의 섬광, 전격(電擊)이 혹마가 서 있는 성문의 앞에 내리친다.
간발도 되지 않는 차이.
바로 눈앞에 떨어진 벼락에 관문 위에서 있던 이들의 입이 쩌억-하고 벌어진다.
놀람을 금치 못하는 것은 비단, 관문 위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서준과 함께해 온 광무혈마와 무 명신의도 보름달처럼 눈이 휘둥그 레진다.
“이게 무슨……
“교주님……
무릇,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의념기로 빚어낸 강기를 완벽하
게 조작, 통제하는 서준의 모습에 반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무명신 의는 아예 벌린 입을 다물지를 못 하고 있었다.
‘사실, 흑마 정도의 무인을 상대 할 때 사용하기에는 효율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만……
어찌 되었든, 의념강기를 사용하 는 만큼 1갑자 이상의 적지 않은 내공을 쏟아내야 한다.
굳이 치자면 일 점에 파괴를 담 아내는 권법들이 더 효율이 좋은 방법이었으나, 무릇 눈에 보이고 직접 와 닿는 것이 더 무서운 법 아니겠는가?
실제로도 효과는 발군이었다.
“벼락을 불러내다니……
“천마지존이……. 마선, 마선이 되어 돌아왔다!”
놀람을 넘어 혼란과 공포가 관내 를 뒤덮었다.
흑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가 고 있었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하하! 크하하하!”
갑작스레 광소를 터뜨린 흑마는 곧장 바닥으로 떨어지둣 내려오고 는,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이후, 서준을 직시한 후 고개를 조아린다.
“천마지존이시여, 부디 살려주십 시오!”
말했듯, 흑마는 계산이 빠른 자 였다.
“저 흑마가 잘못했습니다. 은혜 를 저버리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 다는 것은 알지만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천마지존이시 여 !”
서준의 입가로 헛웃음이 흐른다.
“이건 또 무슨……
태세 전환이 이토록 빠를 수 있
단 말인가?
“분명, 방금까지는 나한테 악독 한 놈이니 뭐니 소리쳤잖아?”
힘의 격차를 피부로 느끼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아무리 서준이라도 어이가 없 었다.
그것이 설령 나쁘지 않은 판단이 었고, 실로 흑마다운 선택이었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혹마, 나이를 먹더니 내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에서
준의 입가로 비릿한 웃음이 흐른다.
“지금 당장, 내려와서 용서를 구 하라고 했잖아.”
앞선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흑마 는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의 기회 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한 번의 자비를 베풀려 했던 것 도 과거의 정과 함께 고생했던 것 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배신한 것도 모자라, 제 손으로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차 놓고 하는 말이 뭐?”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활화산처 럼 터져 나온다.
처음 혈교의 무리와 함께 서 있 는 흑마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응어리였다.
“잘못한 건 알지만, 목숨만은 살 려 달라고?”
서준이 걸음을 옮기며 혹마의 앞 으로 다가선다.
거리를 좁혀오는 서준의 모습에 혹마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간다.
“넌 나와의 추억들뿐만 아니라, 내가 베풀었던 선의마저 제 손으로 걷어찬 것이다.”
“천, 천마지존이시여.”
“계산이 빠른 네 머리로 직접 생 각을 해봐라. 흑마, 지금의 내가 널 어떻게 할 것 같아?”
흑마의 눈이 이윽고 빙글빙글 돌 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혹마의 눈에는 절망, 죽음의 공포가 차오른다.
“선,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처형을……
“정답이야.”
쾅-!
서준이 말을 끝맺는 순간, 하늘 에서 섬광이 내리쳐 흑마의 육신을
집어삼킨다.
“ 끄으읍……
회색빛, 생기가 사라져가는 흑마 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서준이 나지 막하게 말을 내뱉는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너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이유야.”
차가운 시선을 거둔 서준은 고개 를 돌리어 광무혈마와 무명신의를 바라본다.
“관문에 남은 잔당들은 알아서 처리해라, 단 지휘관급들은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처형하도록”
“저, 저 혼자서 말입니까?”
서준은 대답 대신 차가운 눈으로 광무혈마를 응시한다.
한번 터진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계속 억누르고 참아왔던 만큼, 화산처럼 폭발할 것이다.
만나자마자 곧장 용서를 구하여 목숨을 건졌다지만, 광무혈마도 한 번 배신을 저질렀던 만큼 지금의 서준의 앞에서는 어설픈 모습을 보 이는 것조차 위험하다.
“받들겠습니다-!!”
바짝 기합이 든 광무혈마가, 곧 장 목청껏 소리를 내지른다.
“무명신의와 나는 먼저 감옥으로 가 있을 테니, 확실히 정리하고 오 도록 해라.”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광무혈 마에게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허공 을 날아 양강관의 성벽을 넘어섰다.
홀로 남은 광무혈마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버러지들아! 당장 무기 버리고 무릎 꿇어!”
양강관의 성벽 위에 남은 병력의 수는 얼추 천이 넘는 수준.
하나 광무혈마는 두려움을 느끼 지 않는다.
서준의 일행 사이에서는 가장 약 자였지만, 광무혈마 또한 현경에 오른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나, 광무혈마의 말이 우스운 거 냐?! 빨리빨리 행동하지 못하겠 냐?!”
콰광-!
광무혈마가 거칠게 검을 휘둘렀 고, 쏘아진 검격이 높이 솟아있던 양강관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 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