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권 6화
156화
바닥에 길게 깔려 있는 피처럼 붉은 비단, 그리고 끝을 황금으로 만든 장식으로 수놓은 넓은 제단.
총대주교를 상징하는 권좌이자 제단의 중심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심장을 바라 보는 혈교의 총대주교인 일월대마 의 입가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광 소(狂笑)가 피었다.
“드디어!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찢어져라 울어 대는 목소리가 제 단에 울리는 순간이었다.
일대에 고개를 조아린 채로 있던 수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하 나둘 열었다.
“일월대마시여, 감축드리나이다.”
“마침내 대업을 이룰 수 있게 되 었나이다!”
쏟아지는 축하의 말들에 일월대 마도 기분 좋다는 듯 웃음꽃이 만 개한다.
“그래, 대업(大業)! 곧 중원 대륙 이, 세상 만물이 내 발, 우리 혈교 의 아래 무릎 꿇게 되어 진정한 지
존으로서 우릴 받들게 될 것이다.”
중원 대륙에서 지존(至尊)의 자 리를 차지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뿐.
그 시대의 패권을 쥔 존재뿐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천마지존이라 불리는 자 가 돌아왔다.
10년이란 시간은 지존을 논하는 데 있어 오랜 시간이었기에 과거의 망령이라고 치부하고자 하는 이들 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의 생각 은 크게 달랐다.
전설의 무인이자 통솔자이자 지
배자였으며, 마침내 등선을 해내고 만 그의 이름은 일종의 신앙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중원 대륙의 주인은 엄연 히 본좌거늘……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듯 이, 지존의 자리 역시 단 하나뿐이 었다.
그것이 중원 대륙의 불변 법칙이 었다.
그러나 천마지존, 한서준이 등장 한 뒤로 그 법칙마저 뒤틀렸다.
지금 중원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혈교와 일월대마의 입장에서
는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일도 얼마 남 지 않았다.
“이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고금제일이, 아니 이 중원 대륙의 신이 되어 증명해주도록 할 것이 다.”
헛된 꿈도, 허황된 말도 아니었다.
홍운제(紅雲祭)가 괜히 혈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 된 것이 아니 었다.
기존의 한계를 넘어선 힘을 얻게 해주는 의식으로, 지금의 혈교의
위치를 만들어 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공양제였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반신에 머 물러 있는 일월대마의 육신을 완전 한 신의 경지까지 올려줄 수 있다 는 말이었다.
“아직도 준비가 덜 되었느냐?”
다급함에 저도 모르게 재촉을 하 였지만, 말은 어느 때보다도 점잖 았다.
지배자로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 게 된다는 것은 극히 치욕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주교는 단순한 일등공신, 책사
따위가 아니었다.
홍운제를 총괄해 지금 일월대마 에게 힘을 내려주는 위대한 존재들 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이었다.
지금 혈교 체제의 핵심이자 대업 의 마지막 열쇠인 대주교를 쳐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주교 또한 이를 알고 있었기에 일월대마의 고압적인 말에도 한 번 도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제단 위에 오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에, 일월대 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하늘 로 치솟았다.
피처럼 붉은 비단, 아니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로 흥건하게 적셔진 길을 일월대마가 서슴없이 걸어 올 라가 제단 위로 마침내 올라섰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신하들의 입에서 굉음이 터져 나온다.
“혈교 천세! 천천세!”
“일월대마 만세! 만만세!”
마침내 일월대마가 제단 위에서 손을 들어 제지하는 순간, 언제 그 랬냐는 듯 우렁찬 소리가 끊기고는
작게 숨을 내쉬는 소리조차 울려 퍼지지 않는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제단 대 전(大殿)에서 대주교가 입을 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대주교는 이 순간마저도 무릎을 꿇기는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웃으며 올려다본 채로 서 있었다.
끝을 모르는 오만한 태도, 차가 운 시선과 말투에 일월대마의 미간 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이제 저딴 태도를 보이 는 것도 오늘이 끝일 거다.’
이번 의식을 통하여 완연한 신의
영역에 오른다면 대주교의 능력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오만함을 보이는 대주교의 사지 를 갈라내고 진정한 지존으로서 모 든 것을 발아래 무릎 꿇리고, 지배 할 것이었다.
큰 야망만큼이나 기대감이 함께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바닥에 놓여 있는 심장들에서 돌 연 붉은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더 니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전신에 차는 아득할 정도의 힘이 주는 황홀경을 만끽하려던 찰나였
다.
돌연 평소와 다른 아찔한 고통이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시선을 한 채로 고개를 돌리자, 대교주의 입 가로 차가운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대교주.…”?!”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 다, 원하시던 대로 그 보잘것없는 육신으로 신위에 오르실 수 있게 되시겠지만, 그 육신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당신이 아닐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일월대마 의 눈에 당혹이 서린다.
“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냐!”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교주는 이제 그만하실 때가 됐습니다. 용 포를 벗고 이만 권좌에서 물러나 공양의 제물이 되는 게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이노옴-!!”
무례를 넘어 반역에 가까운 발언 에 일월대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온다.
마치 벼락과도 같은 굉음이었지만, 대교주의 표정에는 일절 두려 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대주교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모,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
이미 육신은 제어를 잃고 널브러 진 심장과 다를 바 없는 꼭두각시 가 되어 흥운제의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는 것을, 죽음이 천천히 목을 옥죄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대, 대교주……
결국, 체면조차 버리고 대교주를 향해 간절하게 내뱉었다.
그러나 대주교의 눈동자는 여전 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제, 제발 살려만 주시게.”
마지막 자존심마저 버렸지만, 결 과는 변하지 않았다.
피처럼 붉은 진(陳)에서 거친 기 운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더니 아 득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아 일월대 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머리를 조 아리고 있던 수하들의 얼굴이 당혹 으로 차오르던 순간이었다.
“위대한 종족이자, 새로운 중원 의 주인이시여 이 세상에 부디 모 습을 드러내 주십시오-!”
대주교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지는 순간, 검붉은빛의 기운이 일대를 휘감는다.
동시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압박감이 일대를 짓누른다.
“이, 이게 무슨……!”
“신이시여.”
갑작스런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수하들이 나지막한 신음 을 홀리는 사이.
높게 솟은 붉은 기둥 속에서 커 다란 한 쌍의 뿔을 가지고 커다란 칠흑의 날개를 가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 보는 이형의 모습과 위압감 에, 당황에 잠겨 대전 안에 있던 자들은 숨을 죽였고, 이윽고 눈동 자에는 미지에 대한 공포가 차오르 기 시작한다.
“미천한 인간이 벨리드 님의 두 번째 사도이자 새로운 중원의 주인, 에노스 님을 알현하게 되어 그 기 쁨이 지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저들은 나를 반 기지 않는 것 같은데?”
에노스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 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일월대마 의 수하들이 넋이 나간 채로 서 있
자연스레 대교주의 미간이 찌푸 려진다.
“감히 누구 앞에서 고개를 빳빳 이 들고 있는 게냐! 목숨이 아깝지 도 않은 것이냐!”
대교주의 말에 화들짝- 놀란 부 하들이 재빨리 악마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섬겨야 할 존재가 돌연 변하였지 만, 애초부터 이들은 주인이 누구 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중원의 패자인 혈교에 입단 해 일월대마라는 존재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려 했던 승냥이 떼들이 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한 존재를 섬길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좋 은 일이라 볼 수 있었다.
“혈교의 새로운 주인을 뵙습니 다!”
“중원 대륙의 새로운 패자시여!”
곳곳에서 쏟아지는 찬사에 에노 스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난 다.
고개를 조아린 채로 찬양을 해오 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듯 여유롭게 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혈교의 권좌이자 제단의 앞에 당도했음에도 큰 감흥은 존재 치 않는 듯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 던 에노스는 권좌 위에 엉덩이를 붙인다.
“ 흐음.
홉사 하품과 같이 늘어지는 신음 을 흘린 에노스는 마치 감정이 없 는 것처럼 덤덤하게 바닥에 고개를 조아린 채로 떨고 있는 부하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래, 이제야 조금 벌레들에 어 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군.”
노골적인 비난이었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고개를 조아린 자들의 모습이 마음에 든 탓일까?
웃음을 흘린 에노스가 고개를 끄 덕이며 입을 연다.
“지금부터 혈교, 아니 중원 대륙 의 주인이 될 자로서 너희에게 몇 가지 명을 하달하마.”
“말씀하십시오.”
“첫째, 지금부터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벨리드 님을 섬기게 한 다.”
“에노스 님이 아니고, 말입니
까?”
“그래, 모셔야 할 것은 오직 벨 리드 님뿐이다. 머리가 있다면 생 각을 하도록. 벌레.”
에노스의 차가운 눈이 대교주를 향한다.
“……모든 것은 중원 대륙의 주 인이자, 위대한 에노스 님의 뜻대 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곧장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이는 대교주의 모습에 에노스의 입가에 홉족스러운 미소가 흐른다.
“마지막으로 둘째, 감히 위대하 신 벨리드 님께 반기를 들었던 한
서준의 목을 내 앞으로 가져오도록 한다.”
에노스의 서슬 퍼렇고, 오만한 명령이 대전에 울려 퍼졌다.
새로운 혈교의 우두머리로 에노 스가 즉위하고 천명을 내리는 순간, 서준의 눈앞에 초록빛 홀로그램 창 이 떠올랐다.
[차원 ‘중원’에 현현한 벨리드의 두 번째 사도이자 중급 광기의 신 에노스가 사용자, 한서준을 대륙의 적으로 명시했습니다.]
어느덧, 감옥 근처인 운남성 외 곽의 객점에 도착하여 식사하고 있 던 서준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헛웃음을 흘렸다.
‘벨리드 이놈 봐라?’
설마 중원 대륙에 파고들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기분이 나 쁜 일이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사 이가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혈 교 본거지에 똬리를 튼 채로 도발 해오고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악마종의 둥장과 누구라도 화가 날 법한 도발이 더 해졌지만, 서준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혈교는 정리하려 했던 곳이야.’
그리고 벨리드, 악마들도 처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서준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진다.
“차라리 잘됐네.”
오히려 간단하게 일망타진할 수 있게 되었다.
처리해야만 했던 악마, 그리고 천마신교를 위협한 혈교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피식- 미소를 흘린 서준이 젓가 락을 내려놓고는 일행들을 바라보 며 입을 연다.
“지금 바로 가려고 하는데, 준비 는 됐지?”
때마침, 식사를 끝마친 일행의 눈이 서준을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강한 투지가 어려 있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바로 출전 준비를 하도록 하겠 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은 무명 신의와 광무혈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