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권 2화
152화
혈풍대의 본거지를 휩쓸고 혈풍 단장 혁운을 쓰러뜨려 무명신의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서준의 표정은 그리 밝을 수가 없 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어.’
얼마나 오래, 또 얼마나 갖은 고 문을 당한 것인지 전신에 피를 뒤 집어쓰고는 넝마와 다를 바가 없는 몸이 되어 넋이 나가 동공이 풀린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혁운과 전 투를 치른 곳에서 무명신의가 사로 잡혀있는 감옥의 거리는 멀지 않았 다는 점쯤이었다.
‘부디 조금만 더 버텨 주길……
발걸음을 재촉한 덕분인지 금세 혁운의 기억에서 보았던 감옥의 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서준이 황급히 문고리를 당기며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휘잉…….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이 어려 있는 주먹을 내 미는 사내가 서준의 앞으로 다가왔
다.
계속된 고문으로 초췌해진 몸을 이끌고도 눈빛만은 함께 천마신교 를 부흥시켰을 때와 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암주.”
서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 앞의 사내의 잔상이 흐릿해지며 서준의 볼을 스쳐 지나간다.
정확하게 말해서 목표는 머리.
하지만 서준이 발을 뒤로 물리는 것으로 주먹이 목적을 이루지 못했 을 뿐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연격으로 무명신
의가 서준의 심장을 노릴 때였다.
쌔액-
바람과 함께 자취를 감친 서준의 신형이 무명신의의 옆에 섰다.
“……이제 됐다. 그만해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극강기가 둘린 주먹이 계 속해서 서준을 노린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뻗어지고 있는 무명신의의 주먹과 서준이 내 민 손바닥이 맞부딪힌다.
쾅-!
강기의 끝이라 불리는 극강기가 모래처럼 흩어진다.
경악한 눈을 한 무명신의를 응시 하고 있던 서준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암주, 이 미련한 것아, 이만하면 알아차려. 네가 알고 있던 천마 한서준이 바로 나라고.”
다시 한번 발을 놀린 무명신의의 주먹이 서준의 복부를 노린다.
그러나 처음 공격을 해올 때처럼 재빠르지는 못했다.
식은땀 가득한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며 힘겹게 공격을 이어가고 있
고문으로 망가진 몸이 한계에 다 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 제발 그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서준이 천마신공을 이용하여 호신강기를 둘렀다.
이윽고, 무명신의가 눈을 부릅뜨 고는 움직임을 멈춘다.
“정말......
서준을 웅시하고 있는 무명신의 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 처럼 거세게 혼들린다.
“그래. 이놈아, 내가 천마, 한서준이다.”
따뜻한 미소를 지은 서준이 천천 히 걸음을 옮겨 무명신의의 앞으로 다가선다.
거리를 좁혀오는 서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무명신의의 미간이 좁혀졌다 펴졌다를 반복한다.
“정말…… 교주님이십니까?”
“그래. 너의 교주, 천마신교의 주 인인 내가 돌아왔다. 암주야.”
서준의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를 확인한 무명신의가 격정을 토해낸 다.
“아아아……
뒤이어, 무명신의가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신, 무명신의 암주! 천마신교 만 세, 만만세! 위대한 천마님을 뵙사 옵니다!”
애간장이 타들어 갈 듯한 염원이 담겨있는 암주의 목소리에서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흐른다.
‘이것 참, 너무 미안해지네.’
중원 대륙에서 선계로 등선했었 고, 천 년에 달하는 시간이 지나서 야 지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과정 중에 시간축이 꼬여 중원 대륙의 시간이 크게 흐르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그 짧 은 시간에도 천마신교는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주도면밀한 혈교의 간계와 맞서 싸우느라 사지가 마비될 만큼 힘든 싸움을 해왔다.
하루에도 몇 번을 천마, 한서준 이라는 존재를 그리워했을지, 혹은 증오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서준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띤 채로 무명신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어나. 몸도 말이 아닌 사람이
무리하지 말고.”
서준의 말에 무명신의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과거 천마 시절에도 서준 은 크게 격식을 차리지 않았었다.
그저 서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 는 위압감을 경외한 천마신교의 일 원들이 자처해 예의를 차렸을 뿐이 었다.
오히려 이렇게 격식을 차리는 것 은 서준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무명신의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뵐 수 있게 되어 너무나도 영광입니다.”
“인사는 일단 나중에 하고 우선 은 몸부터 치료하자.”
무명신의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수년에 달하는 고문들로 이미 무 너지고 한계에 다다른 육신이었기 에 치료술로도 복구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천마의 귀환으로 다시 한번 천마 신교의 부흥을 이끌 기회가 찾아왔 는데 따를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무명신의의 얼굴이 곧 일그러졌 고, 눈빛에는 심란함이 가득 차오
른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전 의원으로서 사람의 몸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저 때문에 괜히 고생하지 가시옵소서.”
평소였다면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입씨름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무명신의의 창백한 혈색과 거친 숨소리는 얼핏 보더라도 치료가 급 한 상태였다.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 할 테니까, 우선 치료부터 받아.”
오랜 시간 보필한 천마, 한서준
은 고집이 센, 아니 우직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신 그만큼이나 큰 책임 감을 가지고 있었다.
허황된 말올 내뱉을 사람이 아니 었다.
서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확 인한 무명신의는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연다.
“따르겠습니다.”
무명신의가 조용히 가부좌 자세 를 취했다.
조심스레 기운을 흘리며 무명신 의의 내부를 관조하는 서준의 미간
이 찌푸려진다.
‘대체 어떻게 이만한 고통을……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도 현경에 오른 고수이자 육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의원이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무명신의의 몸은 기본적인 체계 자체가 무너져 있었다.
혈도에는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 능할 정도로 많은 독이 배어 있었 고, 단전에 걸려 있는 각종 금제와 마공이 생명을 갉아 먹고 있었다.
직접 몸을 확인하고 나자, 무명 신의가 부정적인 말을 내뱉은 이유
를 알 수 있었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인 몸 상태.
중원 대륙의 회복술로는 도저히 살려낼 수 없는 몸이란 말이었다.
물론, 서준은 절망하지 않았다.
‘나라면 살려낼 수 있다.’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선계에서 셀 수도 없는 전투를 치른 만큼 무명신의에게서 배운 회 복술을 수없이 사용해왔다.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많은 싸움 중에는 무명신의에게 배운 회복술 로도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언제 죽음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 은 큰 부상을 당한 날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서준은 끝끝내 살아남고 옥황의 앞까지 당도해내었다.
서준이 가진 무력이 훌륭한 것도 있었지만, 무명신의에게 배운 것들을 연구하고 진보시켜낸 것도 컸다.
쉽게 말하자면, 서준의 회복술은 중원 대륙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 다는 것이었고 지금의 무명신의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서준은 단순히 치료만 할 생각이 없었다.
‘천마신교를 배신하지 않고 나를 끝까지 믿어준 것에 대한 보답 또 한 해줘야지.’
서준이 강력한 의지를 발현하자, 체내의 내공들이 무명신의의 혈도 를 빠르게 타고 이동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패도의 움직임이었다.
단전에 가해진 금제와 마공을 부 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콰지직-!
천마신공의 힘에 잡아먹히고 부 서진 금제와 마공들이 자취를 감춘 다.
큰 과제를 끝냈지만, 전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직후, 이어진 내력의 움직임은 극도로 섬세했다.
차분하고도 조심스럽게 무명신의 의 육신 전체를, 아주 작은 세포부 터, 장기와 근육, 뼈까지 전부 감싸 낸다.
이미 중독되어 육체에 절여져 버 린 독들을 모두 치료해내서는 안 되었다.
오랜 시간 중독되어 있었던 만큼 갑작스레 뽑아낼 경우 몸에 어떠한 반발이 오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
‘뽑아내지 않고 전부 포용시켜낸 다.’
포용해내는 과정에서 육신을 갉 아먹기 위한 독들이 계속해서 반발 하려 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바였 다.
체내의 독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옮기고, 조율하고 뭉쳐낸다.
몸 곳곳에 내공, 독이 조화롭게 섞인 보금자리, 단전이 만들어진다.
계속해서 육신을 죽여 왔던 독이 내공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자연스 럽게 육신에 녹아든다.
자연스레 썩어 문드러져 있던 무 명신의의 육체가 빠른 속도로 활기 를 되찾아가고 서준에 입가에 미소 가 흐르기 시작한다.
‘해냈다.’
이윽고, 무명신의의 눈동자에서 탁한 기가 완전히 가시는 순간, 등 에 대고 있던 서준의 손도 들어 올 려졌다.
“이걸로 끝. 몸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을걸.”
“이게 대체……
무명신의는 놀람을 감추지 못한 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 인들을 치료해온 의원으로서 기와 육체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육체는 기 존에 알고 있던 상식, 일반적인 육 신이 아니었다.
‘단전의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아랫배에만 자리 잡고 있던 단전 이 전신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덕분에, 전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그릇이 거대해졌다.
그로 인한 내공의 활용법이 무궁 무진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장이었지만, 거대해진 그릇 같은 것은 빙산 의 일각에 불과했다.
“이 두 개면, 10년간 보여준 너 의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충분하겠 지?”
무인에게 평생 과업이라 하는 것 은 벽을 넘어서는 것과 가진 무공 을 진보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서준이 펼친 치료술 의 근간이 된 기술은 본래 무명신 의의 것이었던 육도혈환술이었다.
딱 한 번 펼친 것이었지만, 오랜 시간 활용해온 만큼 무명신의는 치
료술에 대한 기의 운용 방식과 활 용법에 대해서 눈치를 채고, 깨달 음을 얻어갔을 것이다.
실제로 무명신의의 눈동자에 진 한 이채가 어려 있었다.
“아......
황홀감에 젖어있는 무명신의를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입가에도 환 한 미소가 흐른다.
“축하한다, 반신의 영역에 들어 선 것을.”
“성은이 망극합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어가던 목숨을 구해준 것만으
로도 큰 은혜를 입은 것인데, 평생 의 과업을 대신 해결해주기까지 했 다.
“오늘날의 은혜는 평생을 바쳐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감사는 그간 보여주었던 충성만으로도 충분해.”
“하오나……
“나는 뱉은 말을 물리지 않는 것 을 알잖아.”
얼마나 고집이 강한 사람인지 알 고 있었다.
정한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큰 은혜를 입고도 아무런 일 없던 것마냥,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평생 아니, 다음 생에도 반드시 교주님을 보필해가며 이 은혜를 갚 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이 어려 있는 충성 어린 말 에서준은 피식- 미소를 흘린 후, 가볍게 손을 들어 무명신의의 어깨 를 두드린다.
천마신교의 부활을 향한 대장정 의 서막이 지금 열린 것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