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권 24화
124화
“멍청한 짐승 같으니라고, 스스 로 구원받을 길을 버리다니 어리석 기 그지없군.”
미카엘라의 표정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구원의 길을 버린 자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심판뿐이다.”
미카엘라의 눈빛, 주변의 분위기 가 변한다.
수인족의 날카로운 감각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온몸의 털이 바짝 선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여태는 어쩌면 단순한 유희, 혹 은 판단을 향한 보류였다면, 이제 부터는 오직 심판을 위한 검이 내 리치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이다.
앞서 나눈 공방으로도 힘의 차를 명확히 느낀 만큼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싸움이었고 절망적인 상황이 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왕으로서의 책임, 그리고 한서준
이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 다.
‘한서준 님이 성장을 마치실 때 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버텨내겠 어.’
지금 그것만이 백성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요, 수인족이 살 아남을 유일한 활로였다.
그렇기에 자칼은 무너지려는 두 다리, 육신을 억지로 부여잡아내며 자세를 다잡았다.
[스테이터스]
이름 : 한서준.
특성 : 선지자
레벨 : 135
보유 내공 : 2351
힘 : 1385, 민첩 : 1384, 체력 :
1385
눈앞에 떠오른 초록빛 홀로그램
창을 바라보는 서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요즘 확인을 안 해서 그런가? 상승 폭이 크게 느껴지네.’
데메이아를 처치하고 나서 얻은 선지자, 그리고 케리케이온의 특수 옵션, 패황의 탑에서의 성장, 그래 서 얻은 화신의 칭호가 더해지자 그야말로 황홀경과도 같은 상승이 었다.
눈에 띄게 상승한 스테이터스만 으로도 실로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이번 성장으로 이루어 낸 것은 단순히 표기된 숫자만이 전부 가 아니었다.
“이로써, 신의 경지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당연하지만, 헛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시스템이 그를 인정해 화신(化神)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지 않았는가?
경외할 만한 성장 속도에서준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웃음꽃이 핀다.
‘시스템을 알고 난 지 고작 수개 월 만에 반신을, 그리고 그 벽마저 넘어서다니.’
반신 내의 벽을 넘어선 것은 천 하제일(天下第一)의 천마라고 불리
었던 시절에도 수년의 세월 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힘겹게 도달해냈 던 경지였다.
그런데 불과 반년도 되지 않는 빠른 기간 내에, 심지어 고된 수련 들을 거치지 않고 반신 내의 벽을 넘어서는 데 성공해낸 것이다.
아무리 과거의 경험, 기억을 가 진 영혼이 나아갈 길을 기억하고 있다 해도 정말 혀를 내두를 속도, 방식이었다.
서준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흘러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미친
능력이야.”
단순히 속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강, 최악의 마선이라 평가받던 그 시절에도 느꼈었던 미지의 벽.
당시에는 넘어서기는커녕 제대로 마주할 수도 없었지만, 이 포스 시 스템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그 미지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지 몰라.’
처음 포스 시스템을 접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만, 사실 그 때는 다소 꿈만 같았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반신 내의 벽을 부숴내고 신의 영역을 넘보는 경지에 이르자 그것이 마냥 꿈처럼만 느껴지지 않 게 되었다.
‘정말로 그 벽을 부숴내게 된다 면……
옥황은 물론, 우주의 그 어떠한 존재라도 무릎을 꿇릴 수 있을 것 이었다.
쿵! 쿵!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세차게 날 뛰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벽 을 부숴내며 강해지는 것은 무인으
로서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리고 서준의 근간은 어쩔 수 없는 무인(武人)이었다.
어찌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있겠 는가?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훙분과 고양감에 취해서 일을 그르 쳐선 안 됐다.
오히려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하여 더 냉철하게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과거의 경지를 뛰어넘으려면 앞 으로 벌어질 천사와 악마와의 싸움 에서 계속 살아남아야 한다는 거
다.’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눈앞의 현 실, 스스로의 강함을 명확히 파악 해둘 필요가 있었다.
서준은 손바닥을 활짝 펴 보이더 니, 그 위에 기운을 응집시킨다.
평범해 보이는 기, 그러나 내부 에 실린 힘, 의지는 명확히 달랐다.
‘드디어 의념기를 펼칠 수 있게 됐어.’
그 전까지도 강하다고 표현할 수 있었지만, 결국 물리적인 공격, 평 범한 강기에 지나지 않는 공격뿐이 었다.
지금 손바닥 위에 모인 강력한 의지가 실린 힘, 내공은 강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준이 처음 하늘을 가르며 등선 의 길을 열어낼 때 펼쳐냈던 무공 의 근간, 내공이 바로 이 의념기였 다.
그야말로 궤를 달리하는 힘이자, 마선(魔仙), 한서준이 탄생하게 된 역사의 시작점에 도착했다는 말이 었다.
실로 엄청난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서준은 감히 확신했다.
‘지금이라면 수인족의 그 누구도 불만을 품지 못하겠지.’
강한 무(武)를 숭배하는 종족이 이 의념기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 뒤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이다.
서준의 시선이 자연스레 허공 위 에 놓인 칠혹색 파편으로 향했다.
“곧 찾으러 돌아올 테니까.”
파편이 인사를 알아들었는지 돌 연 눈앞에 문이 생겼다.
“그럼 이따 보자.”
곧, 서준이 파편이 만들어 준 문 을 열고 탑의 바깥세상, 듀로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휘오오.....
오랜만에 맡는 상쾌한 바깥 공기 에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피어났 다.
하지만 서준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건......?”
처음 느껴보는 기(氣)의 성질이 었지만,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쉽 게 예측할 수 있었다.
밝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의 기 를 가진 종족은 하나뿐이기 때문이 었다.
‘ 천사.’
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천사들이 지금 이곳에 올 이유는 몇 가지 존재하지 않았고, 어떻게 든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진한 혈향(血香)이 코 끝을 통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근방에서 상당히 많은 피가 흐 르고 있어.’
이렇게 추리를 하거나 생각에 잠
겨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서준은 곧장 기감을 넓게 펼치 고,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낸다.
‘성문.’
다행히도 비행조를 타고 날아올 때 봤던 곳이었다.
곧장 공간 이동을 펼칠 수 있다 는 말이었다.
서준이 황급히 팔목에 끼고 있는 케리케이온 암슬릿에 손을 얹었다.
천사족은 최상위의 종족이자 순 결하고 깨끗한 종족으로 항시 고귀 하고,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법 도가 있었다.
미카엘라는 그런 의미에서 그 어 떤 천사보다도 법도를 잘 지키는 존재로서, 항시 모범의 모습을 보 였다.
그런 미카엘라의 미간이 오늘은 계속해서 일그러지고 있었다.
‘짜증이 솟는군.’
분명, 눈앞의 자칼은 몸 곳곳에 상처가 나서 넝마나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쓰러지지를 않는다.
아니, 오히려 눈빛은 처음 마주 했을 그 순간부터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눈빛, 경망 하도다! 모독죄를 추가로 집행할 것이다!”
미카엘라가 흉흉한 기세를 내뿜 으며 위협을 가하였지만, 자칼의 입은 오히려 호선을 그린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
탑을 휘감고 있던 거대한 기운, 힘이 한곳에 스며들었다.
한서준 각성자가 성장을 끝마쳤 다는 말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듀로타의 상황 도 알았을 것이다.
희망이 이곳으로 당도하고 있다 는 말이었다.
‘한서준 님이라면……. 가능해.
우리 수인족을 구원해 주시겠지.’ 막연한 기대에서 나오는 희망이
아니었다.
비록 짧은 대화, 만남을 나눈 것 이었지만 오랜 세월 왕으로서 보고 길러진 안목이 있었다.
한서준은 진정한 왕의 자질을 타 고난 자였다.
그런 그릇을 가진 자는 함부로 말을 내뱉지 않는다.
‘분명 약속을 지켜주실 테지.’
천사들을 물리치고 듀로타, 수인
족들을 구원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이 우주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낼
것이다.
새로운 시대, 역사가 여기서 시 작되는 것이다.
천사와 악마 놈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 광경이 하도 궁금하고 기대돼 미소가 돌연 피어났다.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정말 아쉽군.’
자신의 몸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 가 잘 아는 법이었다.
진작 한계에 다다른 몸이었다.
미카엘라의 신경을 끌고 시간을 벌기 위해 억지로 버티고 버텨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마저도 한계점 에 달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몸 곳곳에 누적된 상처와 피로에 두 다리가 통제를 벗어났다.
더 이상 미카엘라의 공격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눈빛, 내 반드시 네놈을 처형한 후에는 눈알을 파버려서 들개들에게 던져 주도록 하마.”
말을 내뱉은 미카엘라가 손을 들 어 올리며 자세를 다잡는다.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나는 내 역할을 완수했다.’
듀로타의 백성, 수인족을 구원해 줄 희망이 만들어질 시간을 벌어냈 다.
‘선대 왕께서도 분명……. 웃으며 반겨 주실 테지……
자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 며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미카엘라의 검격이 날아 오지 않았다.
피어난 의문에 살짝 눈을 치켜뜨 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을 휘둥 그레 뜬 미카엘라의 모습이었다.
“이, 이 기운은 대체......
새하얗게 질린 미카엘라의 얼굴 빛에 자칼의 고개가 갸웃 젖혀진다.
다행히도 자칼의 의문은 오래가 지 않았다.
쿠궁-!
형용할 수 없는 공포, 절대적인 마를 가진 마왕(魔王), 아니 전설로 만 전해지던 마신(魔神)이라는 존재가 강림한 것 같은 위압감이 주 변을 장악한다.
이윽고, 아무것도 존재치 않던 허공에 절대적인 마(魔)가 모습을 드러낸다.
“네, 네놈은 누구냐?”
공포에 잠식된 미카엘라의 목소 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칼은 미카엘라처럼 공 포를 느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진한 안도가 밀려 오고 있었다.
“한, 한서준 님……
자칼의 부름에서준이 고개를 돌 리며 인심 좋은 미소를 홀린다.
“고생 많았다.”
상황을 보지는 않았으나 주변의 처참한 광경, 넝마가 된 자칼의 몸
상태에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천사들이 갑작스레 침공을 해왔 고 자칼은 내가 성장을 하는 동안 시간을 끌어 준 거네.’
탑 내부에서의 전투, 성장에 집 중하느라 바깥의 상황을 전혀 몰랐 던 만큼, 자칫하면 벽을 넘어서던 도중 외부의 간섭을 받아 큰 위기 를 맞이할 뻔했다.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자칼이 그런 위험으로부터 자 신을 지켜준 것은 확실했다.
이제는 그에 따른 보답이자, 내
뱉었던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킬 때 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그리고 수인족을 비호하겠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믿음직한 말 이 있었던가?
자칼의 입에서 한없는 감사의 말 이 터져 나온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밀려오는 안도감 때문인지 기적 적으로 버텨내고 있던 자칼의 두 다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준은 고마움을 느낌 과 동시에 천사에 대한 분노가 치
솟는다.
“저 비둘기 놈들은 내가 처리하 도록 할 테니. 너는 뒤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거라.”
육도혈환술로 직접 치료를 해주 고 싶었지만, 등 뒤에서부터 쏟아 지는 불쾌한 시선들이 너무나도 많 았다.
“인, 인간이 대체 어떻게 이런 힘을……
비단, 미카엘라만 놀란 것이 아 니었다.
근방에 있던 천사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준을 바라보고 있
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천사들의 시 선에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주제를 모르는군.”
마선, 한서준은 모두가 경외하고 고개를 조아리던 존재.
고개를 조아린 채로 죄목들을 읊 조려가며 용서를 빌어도 부족할 텐 데 감히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쳐 다보고 있었다.
불쾌감에 미간을 찌푸린 서준이 이윽고 선고했다.
“꿇어라.”
쿵-!
서준이 명령과 함께 다리를 바닥 에 내리찍는 순간 땅을 짧게 울리 는 소리와 함께 기운이 퍼져 나간 다.
천마, 아니 등선을 이뤄냈던 마 선, 한서준의 군림이 시작된 것이 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