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권 4화
104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건 강석호 뿐만이 아니었다.
“바보 같은 자들이……
여현진과 우진혁이 씨익 미소를 흘린다.
“협회장님만 하겠습니까.”
“그러게 외국에서 자기네 좋은 자리들 내어 준다고 제의가 왔을 때 가셨으면 이런 꼴 안 보셔도 되 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함부로 할 말이 아니지. 내가 영국에서 귀화해서 고생하는 꼴을 보면 말이야. 인생사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이번 악마군 토벌의 주축인 S급 각성자들이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 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일제히 결의에 찬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 였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회 의장을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쿵-!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들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 이 되어 소리를 흘린다.
“어..?”
그곳에는 금발과 은발의 사내 둘 이, 서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시선들 에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금발의 남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피식 미소를 홀리고 있었다.
“모두 안녕.”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 오는 금발 사내의 모습에 강석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카일 크리스토퍼?!”
세계 제일이라는 타이틀을 거머 쥔 각성자.
행방이 신출귀몰하여 원하지 않 는 곳에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카일뿐만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은발을 휘날리는 남자 도 카일 크리스토퍼와 비교해도 손 색이 없다는 거물.
“반갑습니다. 크라운즈 나이트의 일관(一冠), 칼리번 하이드리히입니 다.”
“자네들이 왜 이곳에……?”
대답 대신 안으로 들어선 칼리번 은 강석호와 그의 뒤를 따르고 있 는 한국의 각성자들을 바라보며 굳 은 표정을 한 채로 물어 온다.
“대답이야 해 드릴 수는 있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 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디아볼로스와 악마 군단은 계속해서 남하 중이었다.
이 상태라면 민간인 피해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앞으로 몇 시간 이내에 분명 저 잔혹한 악마 군단 이 틈새도 없이 진을 펼친 채로 수
도인 서울로 몰려 들어올 것이다.
상상만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터.
“디아볼로스, 악마 군단을 처리 하는 데 우리의 힘을 보태 드리겠 습니다.”
비록 한서준 각성자만큼은 아니 었지만 카일과 칼리번은 분명, 든 든한 힘이 되어 줄 만한 전력들이 었다.
그러나 강석호는 흔쾌히 대답을 내줄 수 없었다.
카일과 칼리번이 어떤 자란 말인 가?
현재 세계에서 제일(第一)을 다 투고 있는 각성자들이었다.
그런 몸값 비싼 이들이 요구하는 대가가 적을 리가 만무했다.
실제로도 두 사람을 움직이기 위 해서는 최소, 수천억 달러의 보수 가 필요하다는 소문도 있었으니 말 이다.
그렇지 않아도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한 한국에서 이 보수를 지불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이 손을 잡지 않으면 한 국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강석호의 표정에 드리우는 갈등 과 고민을 바라본 카일 크리스토퍼 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습 니다만 한국에서 지불할 대가는 없 습니다.”
어떤 수를 부린 건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악마 군단을 거느리게 된 디아볼로스의 힘은 상상 이상이 었다.
그것은 카일과 칼리번이 여태 유 지하려고 애쓰고 있던 평화, 힘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의미했다.
두 사람의 입장에서도 지금 한국
의 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며, 서 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굳이 요청을 하나 드리 자면…… 나중에 한서준 각성자님 에게 저희 이야기 좀 잘 포장해 주 시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두 사람의 의도를 모른다 면 너무나도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기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석호의 눈매는 가늘어져 가 고 있었다.
“……정말 그게 끝입니까?”
강석호의 물음에 카일은 단 일말
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을 해 온다.
“맹세하죠. 이 자리를 걸고.”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지금 카일의 대 답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할지라도 멸망보다는 나았기에 카 일과 칼리번에게 할 수만 있다면 도움을 요청했을 석호였다.
그런데 하물며 공짜로 도움의 손 길을 내밀고 있는 이 상황을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강석호는 고개를 숙이며 팔을 앞
으로 내뻗는다.
“부디, 한국을 도와주십시오.”
뒤이어, 카일도 팔을 내뻗으며 강석호의 손을 맞잡았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지금, 한국과 카일, 칼리번 동맹이 비로 소 탄생했다.
이제는 스스로 각자가 내린 결단 대로, 전장으로 향할 때였다.
*
악마 군단이 처음 막 습격을 했 을 때, 한국 역시 멍하니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근방의 군대와 각성자들이 합심 해 악마 군단에 대적했었으니 말이 다.
그 수가 많긴 했지만, 현대식 화 력과 각성자들이 힘을 합쳐 내면 적어도 악마의 진군은 늦출 수 있 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이자 헛된 희망이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빌 런, 디아볼로스의 일원들이 각성자 들을 암살, 주요 시설들을 타격하 는 것으로 삽시간에 한국의 전력들을 무력화시켰다.
불과 수 시간이 지나지 않고 중 요 전력들이 사살, 파괴당한 상황 에서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후퇴 뿐이었다.
빠른 판단 덕분에 지금까지는 민 간인 인명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 을 수 있었다.
하나 이제는 그마저도 끝이 보이 는 수준이었다.
갑작스러운 대피 명령으로 인해 도로를 가득 메운 채로 차량들이 서로가 서로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비켜!”
“깜빡이는 켜고 들어와야 할 거 아니야?!”
지방 도시에 있던 주요 인물들이 암살당한 만큼 통제는 물론, 기본 적인 지휘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상 황.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좋은 결과 를 맞이할 수 있올 리가 만무했다.
혼란들은 서로를 좀먹어 가며 끝 내는 파멸을 불러오고 있었다.
멀리서는 악마들의 모습이 육안 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끼엑-!
기괴하고도 흉측한 소리에 차량 내에 몸을 웅크린 채로 숨을 죽이 고 있는 소년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 엄마……
“괜찮아. 군인 아저씨들이 막아 줄 거야……. 아직은 괜찮단다.”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긍정 적인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이러 한 희망이 꺼지는 데는 불과 10초
도 걸리지 않았다.
쾅-!
하늘을 날아온 악마 군단의 무리 들이 차량을 짓이기고 파괴하며 절 단한다.
“끄아악!”
“살려 줘-!!”
사람들의 비명을 들었는지 주변 으로 악마 군단의 떼거리가 몰려들 기 시작한다.
키이이익-!
악마 군단이라는 말치고는 그 무 리가 작고 힘이 약하였지만, 몬스
터가 내뿜는 거친 흉포함에 사람들 은 도망갈 생각조차 못 했다.
그들이 내뿜는 포식자의 위압에 본능적인 공포가 피어나며 몸이 굳 어 가고 있던 순간이었다.
파바밧-!
연녹빛 색상의 마나가 일어나며, 푸른 나뭇가지들이 출렁거린다.
동시에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 던 악마 군단의 몸이 둘로 갈라지 고 사체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
차량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의 입
에서 감탄이 흘러나온다.
어린 소년들이 그렇듯 영웅을 선 망하고 꿈꿨기에 누구보다도 많은 각성자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 나무를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소년이 알기에 지구에 는 단 한 명밖에 존재치 않았다.
“카일 크리스토퍼 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카일이 얼굴을 들이밀며 피식 미소를 홀린 다.
“미안하지만, 사인은 나중에.”
환한 미소가 소년의 마음을 안정 시키고 있던 찰나였다.
카일의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온다.
그 모습에 소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전과 같은 자그마한 악마가 아니었다.
족히 2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날개, 그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발 톱을 가진 몬스터가 카일을 노려보 고 있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하강한다.
거대한 육체와 어울리지 않을 정 도로 소리 없이, 은밀하게 날아오 른다.
날카로운 발톱이 카일의 육신을 찢어발기려고 무섭게 쏘아진다.
“아......
소년이 카일에게 위기를 알리려 고 하는 순간이었다.
파앗-!
검은 갑주, 은발의 남자가 다가 오며 몬스터의 팔과 다리를 산 채 로 찢어발긴다.
“칼리번 님?”
놀라는 소년을 향해, 다시 고개 를 돌린 칼리번이 환한 미소를 보 였다.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허나 더 이상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 다.”
고개를 돌리어 악마 군단을 바라 보고 있는 칼리번의 눈빛에는 강한 투지가 어린다.
“이제 이곳은 저희 각성자들이 맡도록 할 테니 침착하게 대피를 해 주십시오.”
이 칼리번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뒤이어 가지각색의 공 격들이 날아오며 악마 군단을 포격 하기 시작했다.
카일, 칼리번 그리고 강석호를 비롯한 S급 각성자들이 최전방에 선 모습에 한국의 각성자 무리는 기세가 크게 올랐다.
든든한 아군이 있는 만큼 비록 적이 악마 군단이라 할지라도 무서 울 게 없었다.
실제로도 극강기를 다루는 칼리 번과 자연계 능력을 사용하는 카일
이 보이는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악마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 갔고, 그 모습에 한국에도 희망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오래가지 못 하였다.
디아볼로스의 최고 전력, 데메이 아가 직접 나서자마자 전투의 양상 이 크게 뒤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지잉-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붉은빛 눈동자를 이용한 스킬의 발현을 사 용하는 데메이아와 카일, 칼리번의
격전이 그렇게 10여 분가량 이어졌 다.
그사이 카일과 칼리번은 갖가지 스킬들과 힘을 쏟아 내며 맹공을 퍼부었지만 데메이아에게 작은 자 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데메이아 이놈, 원래 이렇게 강 했냐?”
“그랬으면, 우리가 디아볼로스를 상대하면서 세계의 균형을 지키지 못했겠지.”
믿을 수 없지만 디아볼로스 의회 장, 데메이아는 벽을 넘어섰을 확 률이 높았다.
실제로도 카일과 1:1 대결조차 부담스러워했던 전과 달리 쏟아지 는 합공에도 데메이아의 입가에는 항시 여유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 으니 말이다.
“하찮군, 너무 하찮아.”
반신의 경지에 오름으로써 얻은 힘들을 제대로 시험해 보고 싶었는 데, 세계 제일이라는 두 사람마저 도 너무나도 나약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눈앞의 두 사람을 더 이상 살려 둘 가치가 없었다.
“그냥 죽어라.”
그 소름 돋는 발언에 카일과 칼 리번이 서로를 바라본다.
“이렇게 죽기에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잖아, 그렇지?”
“준비됐나?”
카일과 칼리번이 발악하듯 힘을 쥐어짜 냈다.
가진 전력을 전부 퍼부어 내어 데메이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 기어 후퇴를 유도한다.
그것만이 이 최악의 상황을 잠시 나마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었다.
틈을 노리고 있는 둘의 눈이 날 카롭게 찢어지고 있던 찰나였다.
쉬익-!
데메이아의 신형이 흩어진다.
“조심해!”
카일이 황급히 소리를 내질렀지 만, 반신의 영역에 이른 데메이아 의 움직임을 쫓을 수 있을 리가 만 무했다.
“어……?”
칼리번이 얼빠진 소리를 흘리던 순간 데메이아의 신형이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죽어라.”
데메이아의 팔이 칼리번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밀려오는 고통에 칼리번의 얼굴 이 크게 일그러진다.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피로가 누 적되어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는 사 실을 잊었다.
때문에, 찰나의 방심으로 틈을 내주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끄으읍-!”
데메이아는 쥐고 있던 칼리번을 걸레짝처럼 바닥에 내팽개친다.
넝마가 되어 바닥을 나뒹구는 그 의 모습에 각성자들의 표정에 그늘 이 드리운다.
“말도 안 돼……
본래 승산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근데 세계 최강을 논하는 자들이 이리도 허무하게 패배할 것이라고 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름 명예를 지고 나섰지만, 압 도적인 힘의 차이에 공포가 몸을 짓누른다.
그러나 이 절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데메이아!”
심한 상처를 입은 칼리번의 모습 에 카일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든 다.
“조급해할 거 없다, 네놈도 곧 친구가 있는 곳으로 보내 주도록 할 테니.”
데메이아의 말은 과연 허세가 아 니었다.
콰과과광-!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는 것 같
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사실 승자 는 누구라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데메이아의 손짓에 카일이 자랑 하는 자연계 스킬들이 마치 종이가 구겨지듯 짓이겨진다.
근접전에서도 힘의 차이는 역력 했다.
쾅-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데메이아 와 달리 힘을 받아 내지 못한 카일 의 신형이 허공에 붕- 떠오른다.
“재롱 잔치는 여기까지다.”
데메이아가 선고를 하는 순간 다
시 한번 신형이 흩어졌다.
어느새, 카일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데메이아가 팔을 앞으로 내 뻗는다.
“이것으로 끝이다.”
꽈득-
“끄으읍-!”
칼리번처럼 데메이아의 팔에 육 체가 관통당한 카일이 신음 소리를 흘리며 바닥을 나뒹군다.
“크하하! 이게 바로 벨리드 님의 힘이다. 알겠냐, 피라미들아!!”
광기에 찬 데메이아가 폭소를 터
뜨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카일 과 칼리번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말도 안 돼……
“두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 하다니.”
한국의 각성자들에게 믿고 싶지 않은 절망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거기까지.”
등 뒤에서부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쐐에에엑-!
이후, 마치 대기를 찢는 듯한 소 리와 함께 허공에 나타난 한 사내
가 데메이아의 앞에서 움직임을 멈 추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데메이아가 황 급히 자세를 다잡으려 하였지만, 사내의 움직임을 쫓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퍼억-!
충격을 견디지 못한 데메이아가 바닥을 나뒹군다.
“크읍-!”
반신의 경지에 오르고 처음 느껴 보는 고통이라는 감각에 데메이아 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대체 누가……?!’
단순히 고통이라는 감각이 문제 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을 거머쥔 반신의 경 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 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었다.
‘이런 인간이 지구에 존재했단 말인가?’
머릿속을 분주히 회전하였지만 터무니없는 사내의 힘은 정체를 짐 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불행 중 다행히도 데메이아의 이 러한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 를 든 데메이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 태껏 상대해 왔던 허울뿐이었던 애 송이, 피식자들이 아닌 먹이사슬의 정점. 포식자의 위업을 내뿜는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황급히 날아온 서준이 마침내 데 메이아의 앞에 도착해 낸 것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