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17화
92화
한서준, 그 존재가 내뿜는 형용 할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짓누른 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역설적이게도 그 공포에 광기가 진정되고 어지럽 고 혼란했던 머리가 차분히 정리되 었다.
“과연, 내가 욕심냈었던 남자답 네.”
엘레오노르는 최대한 여유롭게
말하고 입가로는 미소를 지어 보이 고 있었지만, 떨리는 마음은 쉽사 리 진정되지 않는다.
‘한서준은 정말 위험하다.’
자신감 넘치고 오만한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디아볼로스의 의회장, 그 남자가 왜 성장할 시간 조차 주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더 이상 장난 감이나 놀이 대상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의 한서준은 전력으로 상대 해야 할 대적자, 포식자다.’
괜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이렇게 까지 성장하기 전, 의회의 지상 명 령이 내려왔던 그날 곧장 처리했어 야 했다.
그날의 어리석음과 도를 넘어선 과욕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지만, 다행히도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 은 아니었다.
‘아직은 만회할 수 있어.’
그 재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아직 그 간극을 완전히 극복하 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초월자 내의 벽을 넘어선 지는 짧으면 하루, 길어 봐야 일주일 남
짓이겠지.’
수개월 전에 벽을 넘어서고 능력 을 활용해 온 자신에 비한다면, 한서준의 경험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한서준의 재능이라면 간극 을 좁히는 일은 시간문제였지만, 중요한 건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간극이 좁혀지기 전에 승부 를 낸다.’
생각을 정리한 엘레오노르가 재 빠르게 마나를 끌어낸다.
불필요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한서준에게 벽을 넘어선 초월자끼 리의 전투 경험을 제공해서는 안 됐다.
‘단 한 번으로 끝낸다.’
엘레오노르의 전신에서 피어난, 새빨갛게 붉은 마나가 마법진을 그 려 낸다.
마법진은 곧 제단을 불러 세웠 고, 그 위로 엘레오노르가 말아 쥔 주먹을 내뻗었다.
꽈아악- 콰직.
주먹에서는 피가 터지고, 곧 마 나로 그려진 제단에 붉은 핏방울이 스며들어 간다.
“차력(借方), 벨레드의 광란.”
막대한 양의 마나로 그려진 제 단, 그 위에 뿌려진 계약자의 피가 뒤섞이며 두 쌍의 뿔을 가진 거대 한 악마의 형상을 취한다.
콰아아-!
고작 형태를 취한 것뿐이었지만, 그 존재가 내뿜는 위엄에 일순 세 계마저 숨을 죽인다.
당연했다.
저 형상이 바로, 상파울루를 피 로 물들였던 스킬이었기 때문이었다.
디아볼로스에서 내려진 은총, 마 기를 받을 때 함께 받아 내었던 SSS+급 스킬이자 엘레오노르의 최 후의 수, 필살기라고 불리는 것을 꺼낸 것이다.
엘레오노르는 이 방법밖에 없다 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옳은 선택 이라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그 상대가 너 무나도 좋지 못했다는 점쯤이었다.
“마공에 절어서 완전히 미쳐 있 는 줄 알았는데, 이성이 남아 있긴 한가 본데……
서준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을 살아온 천마, 마선이었다.
오히려 엘레오노르보다 훨씬 더 극강기를 많이 다뤄 봤을뿐더러 전 투 경험도 풍부하다는 말이다.
“어설퍼.”
마왕(魔王)이라고 불릴 만한 존재의 형상을 투영한 존재가 다가오 며 공포와 파괴를 이끌기 위해 준 비 중이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겁먹을 이유 가 없었다.
이것은 마왕이라고 불러 주기에 는 너무나 어설픈 형상이었다.
사나웠으나 무게가 없었고, 위협
했으나 두렵지 않았다.
그저 겁을 집어먹고 크게 짖는 개에 불과했다.
콰오오-!
어설프고 조잡한 마왕의 형상이 포효를 내지르며 깍지 낀 주먹을 내려찍는다.
이에 맞춰, 서준이 가벼이 팔을 내뻗고는 주먹을 꽉 말아 쥔다.
꽈악-!
방금 전 폭발시키고 흩뿌려 놓았 던 제일식 대암혹성의 잔재, 기운 들이 거세게 격동하며 어둠을 내뿜 어 낸다.
퍼져 나간 어둠은 삽시간에 어설 픈 마왕을 휘감는다.
만물을 집어삼킬 초월자의 마 (魔)가 그 왕(王)을 완전히 구속하 는 순간, 서준이 말아 쥔 주먹을 앞으로 내뻗는다.
쇄도해 오던 마왕이 서준의 주먹 이 닿은 곳, 제 가슴팍을 바라본다.
어둠이 휘감겨 뭉쳐 있는 위치를 바라보던 마왕의 눈이 휘둥그레지 는 순간, 서준이 나지막이 입을 열 었다.
“천마원(天魔源), 극(極), 제이식 (M式), 암흑천폭(暗黑天爆)
뭉쳐 있던 어둠이 격동하며, 이 윽고 숨죽이고 있던 세계가 폭발을 시작한다.
콰광-!!
솟구친 어둠, 파괴가 순식간에 마왕, 너머에 있는 엘레오노르마저 집어삼켜 버린다.
“꺄아악—!”
벽면에 처박힌 엘레오노르의 몸 곳곳에는 크고작은 자상들이 생겨 나 있었고, 항시 자신감 넘치고 기 세등등하던 얼굴에는 거대한 절망 이 드리워 있었다.
‘괴, 괴물……
단 한 번의 공방이었지만 힘의 차이를 완전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몸 상태라면 싸움을 더 지속할 수 있겠지만, 무의미한 발 악에 불과할 것이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있다는 카일 크리스토퍼와 의회장인 그 남 자도 이리 빠르고 완벽하게 극강기 를 제어해 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한서준은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는 시간에 극강기를 완벽하게 제어, 활용해 내고 스킬을 만들 어 내기까지 했다.
이를 괴물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반응을 보아하니, 이미 승자가 정해진 것 같네.”
비릿한 미소를 홀리며 천천히 다 가오고 있는 한서준의 모습에, 엘 레오노르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 린다.
‘도망쳐야 해.’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서준이 결계를 찢고 들어온 탓에 불완전했는데 방 금의 격돌로 결계가 완전히 부서져 버린 것이다.
기(氣)를 느낄 수 있는 이라면
이 소란을 감지해 냈을 것이다.
실제로도 콘퍼런스에 참여한 각 성자 협회의 각성자들과, 미국의 AAO 팀이 속속들이 모여들어 포 위망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한서준을 상대로 도망치는 것만 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런 파 리들까지 꼬이게 되면 결과를 구태 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엘레오노르 가 쉽사리 목숨을 포기할 리는 없 었다.
‘방도, 방도가 있을 거야.’
파리들은 어떻든 좋았다.
한서준, 눈앞에 있는 이 괴물 같 은 사내를 묶어 내기만 하면 다른 충분히 다른 활로(活路)를 확보할 자신이 있었다.
한참 머리를 굴려 가던 엘레오노 르의 시선에 한 사내가 들어온다.
‘강석호!’
지금 한서준이 분노하게 된 이 유.
이를 달리 생각해 보면 지금 한서준의 분노를 멈추게 만들 수 있 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가능성도 충분했다.
여유를 보이는 한서준과 그리 멀 지 않은 강석호와의 거리까지, 포 위망이 구축되고 있는 바깥으로 향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고 볼 수 있는 길이었다.
‘강석호를 인질로 잡아낸다.’
물론, 강석호에게 가기 위해서는 한서준의 옆을 지나야 했기에 완전 히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는 길이 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한서준이 거 리를 좁혀 오고 있었기에 고민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다른 방도가 없었
다.
엘레오노르가 속으로 결단을 끝 마치며 서준의 동태를 살핀다.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던 엘레오 노르가 찰나의 틈을 타, 땅을 박차 며 몸을 날린다.
사삭-!
엘레오노르는 재빠른 발놀림을 선보이며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했 던 부분, 서준의 옆을 지나는 데 성공했다.
남은 것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서 있는 강석호를 인질로 잡 는 것뿐이었다.
“허업-!”
초월자도 되지 못한 자, 그것도 헛바람을 삼키며 놀람을 감추지 못 하고 있는 이런 강석호를 잡아내는 것은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자연스레 엘레오노르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캬하하! 그러게 마지막까지 방 심은 하지 말았어야지!”
엘레오노르가 완연한 승자의 미 소를 홀리며 강석호를 향해 손을 내뻗는다.
그러나 손에 닿은 것은 따뜻한 살결, 인간의 피부가 아니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무형의 장막, 배리어가 앞길을 가 로막아 서고 있었다.
채행-!
둔탁한 충격이 밀려온 탓에 자세 가 무너지고 의도치 않았던 뒷걸음 질을 치게 된다.
‘이게 무슨?’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엘레오노르 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나 당황과 의문은 오래갈 수 없었다.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흘러들어 온다.
“그러니까, 끝까지 방심하지 말 았어야지.”
애초에서준은 엘레오노르의 움 직임을 놓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놓아준 것뿐이었다.
암흑천폭으로 엘레오노르의 스킬 을 파훼함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완전히 제압 해 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민간인들이 거주 하고 있는 도시 한복판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결계가 형 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방금 충
돌로 인하여 결계가 완전히 부서진 상황이다.
서준은 선인(善人)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불행을 뿌리고 악행 을 일삼는 악인(惡人)도 못 된다고 했다.
아무런 죄도 연관도 없는 민간인 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레오노르 정도의 강자 가 발악을 벌인다면 서준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틈을 내어 주고 놈에게 방심을 유도했다.
너무나도 의도적인 틈인 만큼 눈 치챌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공포에 이성을 잃었는지 덥석 물어 주었다.
덕분에 결과가 너무 좋았다.
엘레오노르의 활짝- 열린 등 뒤 를 완전히 점해 내는 데 성공한 것 이다.
“끝이야.”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서준이 회 색빛 기운이 둘러진 손을 들고 엘 레오노르의 아랫배를 향하여 내뻗 는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아 득한 고통이 밀려왔다.
“꺄아아악-!”
엘레오노르의 입에서는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흘러나왔고, 몸은 경련을 일으켰다.
이내, 눈이 새하얗게 뒤집힌 엘 레오노르는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 렸다.
최악, AAO의 팀장인 애쉬의 입 장에서 현재 상황을 표현할 만한 단어는 이것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 파울루에 참극의 현장을 만들고 재 앙급 빌런으로 지정된 피의 여왕, 엘레오노르.가 콘퍼런스 기간인 지 금, 뉴욕에 침입을 해 왔던 것이다.
그것도 도시 한복판에 결계를 펼 치고 절대 가볍지 않은 ‘사고’가 벌 어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직접적인 피해 가 나오지 않았기에 최악이라 치부
하기에 힘들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쉬 가 과감히 최악이라고 칭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강석호 협회장과 한서준 각성자 님과의 연락이 닿지를 않아......
다른 각성자 협회장과 S급 각성 자들은 모두 연락을 취했지만, 이 두 사람만이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무언가 변고가 생겼다고밖에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점심에 보았던 한서준
각성자님의 마나가 부서진 결계 내 부로부터 계속 홀러나오고 있었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 일지 충분히 예측이 갔다.
‘강석호 협회장, 한서준 각성자님 과 엘레오노르가 싸움을 벌이고 있 다.’
일전에 한서준 각성자님이 호텔 내부에서 했던 말, 충고가 있었던 만큼 미국, AAO 팀은 그 능력을 증명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능력을 증명하기는커녕 미국의 심부라 할 수 있는 뉴욕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일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서준 각성자님께서 이를 좋게 봐줄 리 만무한 만큼 그야말로 최 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경쟁자 격인 구룡문보다는 빠르게 AAO 팀들을 모두 소집, 출동할 수 있었 다는 것 정도였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번 작전의 최우선 과제는 엘레오노르 의 사살이 아니라, 강석호 협회장 과 한서준 각성자님의 안전을 확보 하는 것이니 이를 염두에 두고 행 동……
무전기에 대고 명령을 하달하던 애쉬의 입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추 었다.
그러나 그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넋이 나갔기 때문이었다.
“한서준 각성자님?”
부서진 결계 내부로부터 의식을 잃은 엘레오노르를 잡은 강석호와 서준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많이 늦으셨네요.”
애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 금 서준이 내뱉은 말은 단순히 인 사치레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애쉬는 황급히 허리를 기역 자로 꺾으며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초월자, 그 안 에서도 벽을 넘어선 엘레오노르를 정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준이 이 들의 능력을 후하게 평가할 생각은 없었다.
“부디, 제가 했던 말을 잊지 마 시길 바랍니다.”
서준은 마지막 충고를 남기고 떠 나갔고, 강석호가 그 뒤를 따라나 선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애쉬의 얼굴에 헛웃음이 피어난다.
‘준비가 안 된 것은 구존뿐만이 아니었네.’
미국도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했다.
한서준 각성자님은 고작 부통령 이라는 인물과 허울뿐인 말로써 구 슬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능력에 걸맞은 합당한 보상, 아 티팩트를 준비하고, 일국의 대표를
대동하여 찾아가 정중히 부탁하고 무릎을 꿇어도 모자랄 사람이란 말 이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들이 필요한 만큼 야근이 확정 적이었지만, 애쉬의 눈동자에는 열 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한서준 각성자님에게 인 정을 받아 보이겠습니다.’
굳게 마음을 다짐한 애쉬는 곧장 행동을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