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15화
90화
한서준.
디아볼로스 한국 지부 개설 계획 을 수포로 만들고 다져 놓았던 일 본 지부의 기반을 몽땅 날려 먹게 만든 존재.
사실, 엘레오노르, 피의 여왕 입 장에는 그 정도는 업적이라 부를 만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 동방의 섬과 반도 국가 하 나일 뿐.’
엘레오노르는 남미 대륙 하나를, 그것도 대도시 상파울루를 혈혈단 신으로 가 피바다로 만들고 유유히 빠져나온, 재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고작 일개 각성자 하나 에 신경 쓸 이유도 없었고 여태 관 심 밖이었다.
하지만 켄이치의 몸에 감시자의 각인, 통칭 눈이라 불린 스킬 내에 저장된 영상을 본 순간, 그간의 생 각이 180도 바뀌게 되었다.
모든 것, 만물(M物)을 아래로 내 려다보는 근본, 격에 새겨진 오만 함.
그 솟아오른 자존심을 부수고 절 망에 빠뜨릴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홍분되고 짜릿 했다.
몇 해 만에 느끼는 감정에 몸이 달아오르고 저절로 그 계획을 빠르 게 세우기 시작했다.
계획을 짜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디아볼로스 정보 부서에서 보고 받은바, 한서준은 정말 강한 힘을 갈망하고 성장을 위해 갖은 노력과 귀찮은 일들을 마다하지 않는 자라 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세계 각성자 협 회가 각성자 콘퍼런스의 개최를 준 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B등급 이상 의 아티팩트를 지급받아 힘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는 모임에 한서준이 참여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엘레오노르는 그에 맞 춰 계획을 세우고 행동을 했다.
물론, 세계 각성자 협회를 비롯 한 각종 국제기구의 수배가 내려져 있는 만큼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갖가지 난관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엘레오노르의 광기와 집 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뛰어난 육체 능력과 디아볼로스가 가진 권력들을 이용해 가며 끝내는 한서준이 있는 뉴욕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홀러가고, 이제는 그 노력에 대한 달콤한 과 실을 따 먹을 차례였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상 황이 펼쳐졌다.
“한서준이 없잖아?”
분명 방금 전, 초저녁까지 한서준은 호텔방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
고를 받았었다.
하지만 아직 부의장, 나타샤 그 리코바노프로부터 결계를 펼칠 수 있는 결계석을 받지 못하였기에 억 지로 흥분을 억누르며, 시간을 보 내고 있었다.
그런 오랜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 을 견디어 결계석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하였고, 부리나케 한서준을 만 나러 달려왔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한서준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 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노기 어린 엘레오노르의 목소리 에 엘레오노르에게 배치된 부하의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간다.
“죄, 죄송합니다! 한서준의 기감 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접근 자체 가 어려워 제대로 된 감시가 힘들 어 행적을 놓쳐 버렸습니다.”
엘레오노르의 얼굴이 와락- 일그 러진다.
그리고 그것이 부하가 생에 본 마지막 풍경이었다.
피 분수가 솟구치며, 부하의 목 이 바닥을 나뒹군다.
“짜증나네.”
의도했던 계획이 어그러졌다.
잘못을 저지른 부하를 죽였지만, 기대했던 순간이 미뤄진 만큼 솟구 치는 짜증이 가시질 않았다.
엘레오노르가 애꿎은 엄지손톱을 입에 물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오만한 얼굴 을 절망에 빠뜨리고 싶었는데……
그러나 앉아서 짜증만 내고 있어 서는 변하는 것이 없었다.
엘레오노르는 기운을 퍼뜨려 주 변의 강자들을 감지한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주변
에는 초월자에 달한 강자, 한서준 은 존재치 않았다.
짜증을 넘어서 초조함이 밀려왔 다.
불안감에 손톱을 깨물고 있던 이 빨이, 마침내 살에 닿는 순간이었다.
“저 인간은……?”
호텔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 거 구의 중년 남자는 틀림없는 한국 각성자 협회장, 강석호였다.
원하던 한서준은 아니었지만, 그 위치를 알 만한 인물이었다.
이날을 위해 나타샤에게 부탁하
여 제작한 결계석 두 개 중 하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한서준을 찾아낼 특별한 방도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 지 않았다.
엘레오노르가 땅을 박차고 날아 오르자, 삽시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지근거리에 다다른 순간, 강석호 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헛바람을 삼킨다.
“흐읍-?!”
그러나 제대로 된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이미 붉은빛의 결계가 펼쳐져 엘
레오노르와 강석호의 신형을 집어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눈부신 빛과 함께 화려했 던 뉴욕의 야경은 온데간데없이 사 라지고, 오직 암울한 공간만이 펼 쳐졌다.
그 어둠의 중심에 선, 엘레오노 르가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 리며 입을 열었다.
“안녕.”
“ 네놈은……
말끝을 흐린 강석호는 황급히 자 세를 다잡고 경계를 시작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엘레오노르는 디아볼로스의 부의 장이자 세상에 단 넷밖에 존재하지 않는, 재앙급으로 분류된 빌런.
각성자 협회에 소속된 강석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견원지간(犬 債之間)이라고 봐도 되는 사이였 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편하게 있어 편하게.”
눈앞의 엘레오노르가 활짝- 웃으 며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강석호 의 긴장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뉴
욕은 현재 엘레오노르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세계 각성자 협회의 강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엘레오노르가 이를 모를 리 만무 했고, 그럼에도 이렇게 대놓고 모 즙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타샤…… 분명 그 결계사 놈 의 결계를 준비해 왔겠지.’
과거, 나타샤를 잡기 위해 추격 대를 꾸려 추적해 본 경험이 있는 강석호였기에 그가 만들어 낸 결계 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다른 능력들도 뛰어났지만, 특히 나 은닉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지금처럼 대도시 뉴욕 한복판에 대놓고 펼쳐도 알아낼 수 있는 이 가 극히 드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사, 알아낸다고 할지라 도 그 위치를 정확하게 추적하고 결계를 파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견원지간의 사이라 고 봐도 되는 재앙급 빌런, 엘레오 노르와 단둘이 결계 내부에서 시간 을 보내야 하는데, 긴장이 되지 않
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굳어 있을 거 없다니까, 내가 설마 너 같은 조무래기를 잡 자고 이곳에 왔을 리는 없잖아? 안 그래?”
불행 중 다행히도 내뱉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엘레오노르의 몸에서는 살기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는 곧 대화의 여지가 아직 열 려 있다는 말이었기에, 강석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잠시
데려온 거야. 대답만 잘하면 돌려 보내 줄게. 혹시 너랑 함께 온 한서준이라는 남자 어디 있는지 알 아?”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죽이려고. 아니, 아니 죽이면 안 되지. 사지를 자르고 갈라내어 놈 의 그 오만한 표정이 절망에 빠지 는 걸 보려고.”
엘레오노르의 입가에 광기가 넘 치는 미소가 흐른다.
“너도 상상만 해도 흥분되고 짜 릿하지 않아? 그런 오만한 눈을 가 진 이가 바닥에 처박힐 때의 모습
을 상상해 봐……. 홋, 너무 좋아.”
말을 내뱉고 있는 엘레오노르의 두 눈동자에 광기가 넘실거린다.
당연하지만, 강석호가 광인(狂人) 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엘레오노르에게 서준의 위치를 말해 줄 리가 만무했다.
“미안하지만, 그런 목적이라면 절대 말해 줄 수 없네.”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다는 거네?”
피식 미소를 흘린, 엘레오노르가 손을 내뻗는다.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 고 있는 바보 같은 행동을 보여서 는 안 되었다.
“이모탈 플레이트!”
강석호의 푸른빛 마나가 점멸하 며, 두를 수 있는 최고의 방어를 펼쳐 냈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에 불 과했다.
“크읍-!”
“여기서 옆으로 일 센티미터 정 도만 가면 심장이 있는 곳이야. 무 슨 뜻인지 알지?”
엘레오노르의 손에서 뻗어져 나 온 붉은 실, 그것이 강석호의 가호
를 뚫고 육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한서준 어디 있어?”
강석호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엘레오노르는 개의치 않는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엘레오노르의 손이 움직였고 그 를 따라 실도 움직인다.
뼈와 살이 갈라지는 고통에 강석 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든다.
“끄으읍-!”
그러나 굳게 닫힌 입을 열 수는 없었다.
특히 엘레오노르가 떧어 낸 이 ‘실’ 때문에라도 절대 말할 수가 없 었다.
‘이 괴물은 레벨 자체가 다르다.’
공포에 어림짐작하는 것이 아니 었다.
엘레오노르는 단순한 경험의 차 이가 아닌, 말 그대로 레벨 자체가 다른 존재였다.
방금 강석호가 펼친 이모탈 플레 이트는 SSS등급의 방어 스킬.
강석호를 협회장이라는 높은 위 치까지 올려 준 스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천외천이라 불리는 크라 운즈 나이트들의 공격마저 막아 냈 던 스킬이었다.
그런 이모탈 플레이트가 허무하 리만큼 손쉽게 뚫렸다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엘레오노르는 분명 특성을 개화 했다.’
현재 세계 제일이라는 카일 크리 스토퍼와 크라운즈 나이트의 제일 관(一冠), 칼리번 하이드리히가 세 계 각성자 협회, 그중에서도 지부 장급에게만 공개해 준 정보가 존재 했다.
초월자의 벽을 넘어서면 발산하 는 마나가 더 이상 아지랑이가 피 어난다든지, 홑날리든지 하는 작용 이 없어지고, 그런 마나를 가진 이 를 만나게 된다면 절대 싸우지 말 고 자신들에게 알리라는 엄포가 바 로 그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배경 지식 따 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의 엘레 오노르가 뿜어내는 마나가 카일과 칼리번이 말했던 것과 완벽히 일치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엘레오노르는 분명 초월자 내의
벽을 넘어섰다.’
그리고 오늘 점심에 있었던 구존 과의 결투에서 뿜어낸 마나의 상태 를 보아서는 한서준은 그 벽을 넘 어서지 못한 채였다.
그렇기에 지금 엘레오노르가 한서준 각성자와 마주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내가 희생되는 것이 옳 다.’
한서준 각성자는 힘겹게 얻은 미 래, 기회였다.
지금 당장이야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라지만, 한서준 각성자라
면 머지않아 넘어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국의 미래라 볼 수 있는 그에 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린 강석호가 엘레오노 르의 두 눈을 마주한 채로 입을 열 었다.
“차라리 죽여라.”
“생긴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닌데, 성격이 상당히 마음에 드네.”
제아무리 성격 올곧고 정의감이 넘치는 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죽 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강석호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눈동자에 한 치의 흔들림이 존재 치 않았다.
엘레오노르의 입이 귀에 찢어지 듯 걸린다.
“난 이런 눈빛이 절망에 빠질 때 가 엄청나게 좋더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기대되네.”
엘레오노르의 손이 분주히 움직 이기 시작했고, 피와 살이 갈라지 고 찢기는 고통에 강석호의 비명만 이 결계에 울려 퍼졌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