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13화
88화
갑작스레 성사된 구룡문주와 서준의 대결.
크라운즈 나이트, 그것도 오관(五 冠)의 자리에 있는 구존과 올해 초 신성처럼 나타나 세계에서 가장 큰 각광을 받고 있는 서준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관심이 쏠릴 주제였지만, 결과마저 충격적 이었다.
크라운즈 나이트에 속한 구존이 서준의 옷깃조차 건들지 못하는 일 방적인 패배를 겪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뜨겁게 달아오를 사건에 기름을 들이부은 꼴이 된 것이었다.
때문에, 순식간에 수많은 기사가 연신 쏟아져 나와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서준은 크 게 개의치 않아 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어느 정도 의도했 던 부분도 있었다.
예정에 없던 멤버, 급조된 초대 였기에 시선이 고울 것이라고는 생
각지 않았고, 그 때문에 날파리가 분명 꼬일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
그런 날파리들을 떼어 내는 데는 역시 무력, 힘만 한 것이 없었다.
적당히 표본이 돼 줄 상대를 찾 던 사이, 구존이 제 주제를 모르고 덤볐고, 개인적인 궁금증도 있었기 에 그것을 해결함과 더불어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준 것이었다.
실제로도 구존과의 대결 이후로 자격을 의심한다거나 시비를 걸어 오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존재치 않 았다.
덕분에서준은 호텔방 안에서 비
치된 침대에 몸을 뉜 채로 여유로 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 편안하다.”
적당하게 데워진 푹신한 침대, 입안에서 녹아 없어지는 달콤한 과 자가 오랜 비행으로 받은 피로와 어딜 가나 계속해서 쏟아지는 시선 들이 주었던 스트레스를 사르르 녹 인다.
자연스레 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만개했다.
“이런 게 행복이지.”
서준이 침대에 널브러진 채로 소 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고 있
던 찰나였다.
똑똑-!
문 너머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거대한 덩치와 달리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가벼운 발걸음.
그러면서도 패도의 길을 걸어온 자만이 낼 수 있는 묵직한 분위기 와 암울하진 않지만 어두운 기운의 성질을 가진 존재.
지금 방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 은, 점심에 날파리들을 떼어 내기 위하여 본보기로 사용했던 구존이 틀림없었다.
“왜? 아직도 힘의 차이가 실감이 안 나?”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문 너머 에서 구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 다! 주제를 모르고 건방지게 행동 해 정말 죄송했습니다!”
극도의 긴장, 각인된 공포로 인 하여 떨려 대는 목소리가 구존의 심정을 단번에 알게 해 주었다.
그렇기에 한 가지의 의문이 피어 났다.
“그러면 무슨 일로 찾아온 거
야‘?”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서 찾아뵈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문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 니까?”
특별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고, 설사 보인다고 할지라도 상관이 없 었기에서준은 흔쾌히 문을 열어 주었다.
“말해 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데?”
마주한 구존과 서준 사이로 잠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나름대로 마음을 굳게 먹고 왔지
만, 자존심 때문인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그게?”
그러나 서준의 눈동자를 마주하 고 나니 애써 세우고 있던 잡념, 자존심들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몇 번 이고 연습했었던 만큼 얼마 가지 않아서 용기 있게 화두를 던질 수 있었다.
“저, 구존과 구룡문을 한서준 각 성자님의 휘하로 받아 주실 수 있 으시겠습니까?”
허리를 기역 자로 꺾은 구존의 모습에서준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입에서는 반문이 홀러나왔다.
“뭐라고?”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 룡문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문 파였고 특히나 중국은 그 자존심이 아주 센 국가였다.
타국, 그것도 바로 옆에 붙어 있 는 작은 땅을 가진 한국에는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던 나 라였다.
그런데 그 중국을 대표하는 구룡 문의 문주인 구존이 허리를 숙인
채로, 심복으로서 받아 달라고 애 걸복걸하고 있었다.
“한서준 각성자, 아니 주군의 무 력에 신(臣), 구존은 큰 감명 받았 습니다! 부디 저와 구룡문의 문파 원들을 받아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제안처럼 느껴질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구존은 방 안에서 오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내가 패배를 겪은 이상 구룡문 은 더 이상 결속할 수 없다.’
애초에 구룡문은 결속력이 좋은 문파가 아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모래알 같은 결속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구룡문은 그저, 보다 강한 무(武) 를 숭상하고 그 무력에 매혹되어 모인 집단이라고 봐도 되었다.
그런데 그 수장인 자신, 구존이 치욕적인 패배를 겪은 것이다.
강한 무를 숭상하는 구룡문의 문 파원들이 회의감을 느끼기에 충분 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다수의 문파원들이 구 룡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구룡문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
제.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황이었고, 여태 구존이 꿈꾸던 패권을 쥔 패왕(B王), 1인자의 자 리를 노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었다.
그래서 노선을 바꾼 것이었다.
‘세계 제일, 지존을 모시는 오른 팔로서, 최강의 2인자가 된다.’
직접 겪어 본 만큼 한서준 각성 자라면 분명히 지존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직접 찾아뵈었고, 이렇 게 정중히 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준의 미간 이 점점 찌푸려져 가고 있는 상태 로, 반응이 그리 썩 좋지는 못했다.
“분근착골이 주는 고통에 머리가 이상해진 거야?”
“아닙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맑 고 올바른 정신으로 말씀드리는 겁 니다! 비록 직접 세계, 천하제일인 이 될 수는 없지만, 그 옆자리를 보필하는 최강의 2인자가 되도록 해 볼 테니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허허……
전혀 예기치 못한, 너무나도 어 이없는 상황에서준의 입에서 헛웃
음이 흘러나오고 있던 찰나였다.
“저희보다 먼저 온 손님, 아니 불청객이 있었군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자연 스레 서준과 구존의 고개가 돌아갔 다.
그곳에는 AAO 팀장인 애쉬와 올백 머리를 한 백발의 한 중년 남 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구존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네놈은?!”
AAO 팀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거슬리는 인물,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거슬리는 이가 애쉬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오고 있 는 중년 남자였다.
혼들리는 구존의 동공을 본 애쉬 가 피식 미소를 흘린다.
“실권을 쥐고 있지도 않으면서 혼자서 한서준 각성자님을 찾아뵈 러 오다니 당신은 여전히 준비성이 부족하군요.”
한서준이라는 인물이 가진 그릇 은 세계 최강, 제일을 논할 정도로 거대했다.
고작 AAO 정도의 그릇으로 품 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비장의 한 수, 인물을 동 원해 왔다.
애쉬의 옆에서 있던 중년의 남 자는 서준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 더니,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뻗는 다.
“죄송합니다. 일이 바쁘다는 핑 계로 한서준 각성자님을 찾아뵙지 못하고 너무 늦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의 부통령이 자 상원 의장인 레건 클라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서준이라고 합니 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 를 나누고 있는 레건과 서준의 모 습에 구존의 표정이 구겨졌다.
부통령이라는 미국 전체를 아우 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정계 거물급의 인사와 AAO의 팀장인 애쉬가 이곳에 올 이유는 하나뿐이 었다.
‘주군께서 동료가 될 수는 없는 아득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 휘하로 들어갈 생각이겠지.’
미국, AAO는 눈치가 상당히 빠 른 편이었다.
점심에 대련 결과로써 이미 모든
계산을 마쳤을 것이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지만, 무릇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 었다.
“미리 말하지만, 주군의 오른팔 은 나의 자리다.”
“방금 전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 직 한서준 각성자님이 그 제의를 받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권한으로 그런 발언을 하는 거지?”
정곡을 찔린 구존의 목소리가 높 아진다.
“네놈-!”
구존이 언성을 높이며 위협을 가
하지만, 함부로 손을 쓸 수는 없었다.
레건은 혼자 온 것이 아니고 애 쉬와 동행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애쉬와 싸우게 된다면, 백 퍼센 트로 승리를 점할 수가 있는 상대 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곳은 AAO의 홈그라운 드인 뉴욕, 미국의 땅이었다.
싸움을 벌이게 되면 불리해질 쪽 이 누군지는 뻔했다.
레건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 기에, 구존이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저렇게 마음만 앞서는 무식한 구룡문보다는 현명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저희 미국, AAO가 더 도 움이 될 것입니다.”
“크하하! 이미 천하제일, 아니 고 금제일이신 주군께 도움을 주겠다 고?! 허언이 심하구나!”
구존이 폭소를 터뜨려 가며 비아 냥거리고 있었지만 레건은 개의치 않아 한다.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애쉬를 향해 턱짓했다.
“한서준 각성자님께서 점심에 챙
겨 가지 못하셨던 그 파편과 SSS급 스킬, 퍼펙트 배리어의 습득 및 사 용법입니다.”
구존과의 대련을 끝마쳤을 당시, 서준은 주변이 소란스러워질 것을 예상해 황급히 대련실을 빠져나왔 었다.
그래서 대련실에 들렀던 목적인 정복왕의 파편 그리고 이동하던 차 량 내에서 심사숙고해 고른 사과의 보상, 스킬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두 가지 다 소중한 물건들, 특히 나 파편의 경우 각성자 콘퍼런스에 참여한 이유였던 만큼 내일 점심쯤 에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으나 애쉬
와 로건이 직접 찾아와 준 것이었다.
이동의 수고를 덜어 준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서준의 감사 인사를 들은 레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저희 미국은 지금과 같은 방식 으로 계속 한서준 각성자님을 지원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괜찮 으시다면 저희와 손을 잡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당연하지만 한서준 각성자님의 옆에서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말끝을 흐린 레건은 큰 결단을 내린 듯,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 었다.
“한서준 각성자님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밑에 있는 것도 좋습니다. 부디 저희 미국의 손을 잡아 주셨 으면 합니다.”
레건의 폭탄 발언에 구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주군! 이 코쟁이 놈들의 말을 믿으셔서는 안 됩니다.”
“믿지 말라니? 구존, 우리 미국 이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건 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느 냐! 코쟁이 네놈들이 고개를 숙인 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 지 않느냐!”
미국이 어떠한 나라란 말인가?
항시 최강, 최고라는 자리를 지 켜 왔던 세계 최강국이었다.
그런 미국이 함께 옆에서서 나 아가자는 것도 아닌, 밑에서기를 자청하고 있었다.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 던, 유례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서약
서, 아니 한서준 각성자님께서 원 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조건을 수락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부디 한 번만 저희 미국에 기회를 주셨 으면 합니다!”
철저하면서도 막힘없는 레건의 말에 구존이 황급히 소리를 내질렀 다.
“주군! 저들은 능구렁이 같은 자 들로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놈들입 니다. 지금 당장은 준비가 부족하 였으나 저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부디 이 충신 구존을 바라봐 주십 시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입니다.
구존은 이미 한서준 각성자님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가했던 자. 저런 주제도 모르는 인간을 상종하시면 안 됩니다.”
“네놈들이야말로 로브 라이너인 가 뭔가 하는 그 버러지가 주군의 가족을 위협했던 것을 잊은 거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중히 사 과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구존, 당 신은 한서준 각성자님께 사과한 사 실조차 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 당연히 그 사건에 대해서도 지금 바로 주군께 사죄를 올리려 했다!”
점점 더 유치해져 가는 두 사람, 국가 간의 대화에 머리가 아파 왔 다.
차라리 둘이 덤벼드는 거라면 힘 으로 제압해 버렸겠지만, 서로의 충성심을 보여 주기 위하여 목소리 를 높이는 꼴이 영 볼 것이 못 됐 다.
그래도 다행히 천마 시절에도 이 런 일을 겪어 봤기에, 이들을 다룰 방법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 일단 진정하고……. 두 쪽의 의견, 잘 알겠습니다만, 양측 모두
저에게 위협을 가했던 집단이고 저 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을 휘하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서준의 말에 구존과 레건, 애쉬 세 사람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주군! 저의 충심이 보이지 않으 시는 겁니까?!”
“저희 미국은 정말 전력을 다하여 한서준 각성자님을 도울 생각입 니다! 부디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 다!”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는 분 위기, 세 사람의 모습에서준의 입 가에 미소가 흐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중국과 미국이 앞으로 보일 언행에 따라 저의 판 단이 바뀔 수도 있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서준의 말에 과도한 충성심을 표 출해 가며 경쟁을 벌이던, 세 사람 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충! 신, 구존 주군의 마음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반드시 한서준 각성자님이 만족하 실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보여 드 리도록 하겠습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