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12화
87 화
‘이게 무슨……
조화경의 경지에 올라 몸에 호신 강기를 두른 이후로, 처음 느껴 보 는 아득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통 따위, 감내하 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금 한서준이 보여 준 움직임을 고작 그림 자를 좇는 것이 전부였다는 것이었다.
‘눈으로 좇지도 못했다고?!’
그야말로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 한다는 말이었다.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구존의 몸이 움츠러들고 있던 찰나, 서준 이 피식 미소를 흘리며 물어 온다.
“이걸 굳이 더 해 봐야 알려나?”
서준의 노골적인 항복 요구가 담 긴 말에 구존이 이를 악물었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고작 한 번의 공방으로 아득한 격(格)의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했
다.
‘한서준은 나보다 강하다.’
하지만, 이 상태로 포기하고 만 다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 었다.
아니, 그 전에 자존심이 허락하 지 않았다.
자신은 긍지 높은 구룡문의 문 주, 희대의 천재 구존이었다.
이렇게 치욕적인 패배를 겪을 사 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아직 제대 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
구존의 몸에서 기운이 폭발하듯 이 솟아난다.
이윽고, 눈이 붉게 물들고 몸에서는 검은 아우라가 요란하게 피어 오른다.
구존의 자신감은 과연, 허장성세 가 아니었다.
구룡문, 그증에서도 문주에게만 내려오는 필살오의(與義)이자, 대난 적(大難敵), 혹은 동급의 고수와 만 났을 때 사용하리라 마음먹으며 감 추어 두었던 구존의 비장의 한 수 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필살, 구룡오의, 용왕강림(龍王
降臨)!”
구존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검은 강기들이 일대를 뒤덮으며, 위대한 용왕(龍王)의 형상을 취해 간다.
언제나 드높은 곳에서 굽어살피 던 용왕이 지상에 강림하기 시작한 다.
쿠궁…… 쾅!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용왕 의 신형이 지상, 한서준에게 쏟아 진다.
피할 곳은 존재치 않았다.
용왕의 몸은 일대 전체를 뒤덮고 도 남을 만큼 거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대를 오직 부수겠다는 목적 일념인 용왕을 마 주하고 있는 서준의 입가에는 여유 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제법이네.”
강기의 증폭과 압축의 묘리를 담 아낸 용왕강림, 이 정도의 무공이 라면 중원 대륙에서도 신공절학이 라고 불릴 만큼 홀륭한 수준이었다.
물론, 중원 대륙이 아닌 선계까 지 재패했던 서준의 입장에서는 한 없이 부족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말 이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서준이 천
마신공을 이끌어 내며, 두 손바닥 을 맞부딪친다.
“ 천마신장(天魔仲掌)
외부에 흩뿌려 놓은 기(氣)가 없 었기에 분신, 도플갱어와 싸울 때 와 비교하여 위력이 현저히 줄어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구존이 펼친 용왕강림을 집어삼키기에는 충분했다.
콰직-!
일대를 뒤덮던 용왕의 육신이 요 란한 소리와 함께 천마의 손바닥에 뭉개진다.
세상을 뒤덮은 것만 같던 용왕의
육신이 부서진 유리 조각의 파편처 럼 흩날리고 부서진다.
필살오의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 도로 용왕의 육신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구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 어떻게 용왕강림을!”
세상 그 누구, 아니 디아볼로스 의 의회장이라는 그 남자도 용왕강 림을 이렇게 손쉽게 막아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한서준은 보란 듯이 아주 가볍게, 용왕강림을 파훼해 냈다.
“말도 안 돼……
너무나도 잔인한 현실에 넋이 나 간 듯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구존의 앞에 검은 그림자, 서준이 접근해 온다.
“제법 괜찮은 무공이긴 했다 만……
어느새 지근거리에 선 서준의 입 가에는 조소가 흐르고 있었다.
“용왕(龍王)이란 명칭을 붙이기 엔 한참 멀었어.”
퍽-!
육중한 주먹이 복부를 가격하며, 구존의 허리가 기역 자로 꺾인다.
“크홉......
서준은 허리를 숙인 채로 새빨갛 게 붉은 피를 토해 내고 있는 구존 의 머리채를 낚아채 자세를 다잡게 한 후, 구존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도 더 해봐야 알 것 같아?”
구존은 항상 수장으로 있었고, 높은 자리에만 있었고, 압도적인 힘으로 모두가 우러러보고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어 왔다.
지금과 같은 상황, 압도적인 격 차, 벽이 주는 공포를 한 번도 느 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고,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처음 느껴 보는 고통, 그리고 처 음으로 겪어 보는 감정에 마음이 잠식된 구존은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서준이 구존의 상황을 배 려해 줄 이유가 없었다.
퍽-!
다시 한번, 서준의 손이 움직인 다.
“꾜읍......
서준의 손에 머리가 잡혀 있는
탓에 전처럼 허리가 꺾이지는 않았 지만, 극렬한 고통에 구존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아직도 더 해봐야 알 것 같아?”
서준의 서슬 퍼런 경고에 생존 본능이 소리를 울려 댄다.
구존은 황급히 정신을 다잡고는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그래, 이제는 좀 알겠지?”
몸으로 겪어 본 만큼 모를 수가 없었다.
‘한서준 각성자님은 새로운 시대 다.’
완전히 잘못 판단을 하고 있었다.
친우, 동료로 옆에 나란히 선다 는 것 자체가 헛된 망상, 천하에 둘도 없을 오만이었다.
한서준 각성자는 가능성을 가지 고 있는 수준이 아닌 이미 현경, 초월자에 도달한 존재. 머지않아서 이 세계를 발아래 둘 강자가 나타 났다는 것이었다.
‘기어이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 결을 밀어냈구나.’
바라지 않던 상황이었지만, 구시 대의 낙오자인 구존이 손을 쓸 방 도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지?”
“죄, 죄송합니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화, 확실히 알았습니다! 감히 한서준 각성자님의 실력을 의심하고 테스트하려 했던 점 정말 죄송합니 다!”
확답과 사과를 받아 낸 서준은, 홉족한 웃음을 지으며 쥐고 있던 구존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서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 구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살았다……
구존이 마음을 놓으며 바닥에 널 브러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준은 이번 대련으로 지금까지 쌓아 온 업보 (業報), 벌여 놓은 일들을 모두 용 서해 줄 생각이 없었다.
“이건 그동안 벌였던 네놈의 죗 값이야.”
서준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구 존에게로 다가가 검지 끝을 들어
올려 혈도를 짚어 갔다.
이윽고, 서준의 손이 멈추는 순 간이었다.
“끄아아악-!”
분근착골에 온몸이 뒤틀린 구존 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른다.
“확실히 기억해 둬, 오늘날의 고 통과 힘의 격차와 네놈의 주제를 말이야.”
널브러진 구존에게 엄중한 경고 를 내린 서준은 등을 돌려 대련장 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AAO 팀장, 애쉬. 그녀를 부르는 이명은 퀸 아이시클(Queen Icicle), 빙결여제 (氷結女帝) 였다.
애쉬가 보유한 스킬들이 빙결계 에 치중되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지극히 차가운 성격이 빙결여제 라는 별명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리 좋은 별명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애쉬도 그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의도했던 바였다.
애초에 세계 최고의 각성자 팀을 휘하에 두고 있었기에 세계의 패권 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한 번의 선택에 수백, 수천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 기에, 냉철한 판단력이 필수 불가 결이었기 때문에 항시 냉정하게 행 동을 하려 했던 것이었다.
실제로도 1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애쉬와 함께 일을 해 온 AAO 팀
들도 그녀의 미소를 본 적이 없다 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책상에 앉아 있는, 애쉬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흐르 고 있었다.
“팀장님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 요?”
부팀장, 레브라의 질문에 애쉬가 다급히 표정을 다잡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을 담을 수는 없는 법이 었다.
애쉬가 눈을 흘기며 레브라를 바 라보며 물었다.
“티가 많이 났나?”
“팀장님이랑 같이 일을 한 3년 동안, 제가 본 미소 중 가장 환했 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실제 로 근 3년 중에 가장 기분 좋은 날 이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서준 각성자 가 구존과 대련을 벌일 때만 해도, 이처럼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하지 는 못했었다.
아니, 구룡문주, 구존은 시스템 이상의 강함을 보유하고 있는 상당 히 특이한 케이스인 만큼 한서준
각성자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 을 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것이 곧 기회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브 라이너의 실수로 발생한 사 건 때문에 현재 AAO, 애쉬는 그것 을 만회하고 한서준 각성자와의 관 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갖은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서준 각성자가 위기에 빠지는 순간, 그를 구해 주어 큰 호감을 얻으려 했는데.’
그러나 경기의 결과는 앞선 생각 들이 무색할 정도로 한서준 각성자
의 압도적 승리였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 었지.’
구존의 공격들은 한서준 각성자 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고, 말 그 대로 아득한 차이로 구존이 패배했 다.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던 무공이라 는 스킬들로 고배를 마셔, 구존의 자존심마저 뭉개졌다.
항상 콧대 높고, 자존심이 강했 던 구존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망신 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절로 입가에 피어
남과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는 안도 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직접 찾아뵙고 사과를 드리길 정말 잘했어.’
지금 한서준 각성자의 가치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우선은 구룡문, 중국의 고유 능 력이라 생각했던 무공이란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것만도 그랬다.
물론, 단순히 뛰어난 무력과 무 공을 다룬다는 이유, 스킬이 탐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구존은 디아볼로스와의 연이 있 는 인물.’
점심에 보았던 구존을 바라보던 한서준 각성자의 시선, 그리고 대 련에서준 망신살과 고통을 생각해 본다면 두 사람은 절대 같은 팀일 수가 없었다.
한서준 각성자는 AAO와 한배를 탈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순간, 애쉬의 눈빛이 반짝였다.
‘한서준…… 각성자를 우리 편으로 만든다.’
미국, AAO의 소속일 필요는 없 다.
동료로서 옆에서 주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렇게 된다면 기울어 버린 추 를 역전시킬 수 있겠지.’
알게 모르게 세계 각지에선 디아 볼로스와 AAO의 힘 싸움이 빈번 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AAO가 밀리고 있는 추세라는 것을 애쉬로 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중립에서 있어 주는 크라운즈 나이트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세계 는 디아볼로스의 손에 떨어졌을 정 도로 말이다.
하지만 한서준 각성자와 동료의 관계가 된다면 싸움의 구도가 180
도 변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만 하고 있을 게 아 니지.’
생각을 정리해 가던 애쉬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레브라, 내가 점심에 말했던 것 들은 모두 준비해 놨겠지?”
“당연하죠.”
레브라가 갑작스레 벌어진 대련 으로 인하여 한서준 각성자에게 넘 겨주지 못했던 파편과 스킬의 정보 가 담긴 문서 더미를 건네 왔다.
그를 낚아챈 애쉬는 곧장 겉옷을
걸치며 입을 열었다.
“나 잠시 다녀올게.”
“어디 가시나요?”
“곧 세계를 뒤집고 이끌어 갈 존재한테 미리미리 점수 좀 쌓아 놓 으려고.”
말을 내뱉은 애쉬는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