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11화
86화
구룡문(九龍門)의 문주, 구존(九 尊)은 대단한 강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구존은 무(武)를 숭상하고 연마해 온 구룡문에서도 천재(天才)라 불릴 정도로 아주 뛰 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구존은 물론, 시스템이라 일컫는 것이 나타나기 전부터도 뛰어난 오 감과 재능으로도 이미 초인(超人) 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인간이었다.
그런 와중, 대격변이 일어나고 통칭 ‘시스템’의 존재가 나타나 ‘각 성자’라 불리는 존재를 배출한 것 은 구존에게 말 그대로 날개를 달 아 준 꼴이었다.
이미 무를 갈고닦았던 구존은 손 쉽게 시스템의 인정을 받고 각성자 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의 도움 을 받아 이미 초인에 달했던 육체 와 정신력은 더욱더 강인해졌고, 고대의 유산이라고 생각만 했던 무 공들을 실제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고작 3년 만에 조화경(造 化境)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된 것 이다.
그렇기에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 는 S급 각성자들의 대결에 구존은 하품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지 못 했다.
“하아암……. 지루하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결은 콘퍼 런스에 초청된 S급 각성자들의 친 선 대결.
나름 날고뛰는 이들의 싸움이지 만, 구존의 입장에서는 그저 하품 이 나오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이다.
아니, 사실 이것도 후하게 내려 준 평가였다.
“정말, 보잘것없는 수준들이군.”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s 급 각성자기에, 몇몇은 꽤 쓸 만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딱 ‘쓸 만한 수준’에 불과 했다.
잘 쳐줘 봤자 구룡문의 서열 3위 인 백룡, 구옹의 수준에 지나지 않 았다.
그 윗선에 있는 황룡과 흑룡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대다수가 시스템, 스킬에만 의존 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무를 익힌 이가 존재 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두가 형편없는 것들은 아니었다.
‘AAO 놈들은 언제 봐도 위협적 이군.’
맞붙어 본 적이 없는 만큼 AAO 요원들의 정확한 전력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잘 벼
린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기세만 보더라도 상당한 강자에 속함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AAO는 기 존에도 존재했던 팀, 위협이라는 점이었다.
‘딱히 경계할 만한 이들이 추가 되지는 않겠군.’
이를 끝으로 현재 세계 각성자들 의 레벨, 역량에 대한 파악을 마쳤 다.
구존은 현재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만큼, 각성자들의 힘, 권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올해 각성자들의 수준은 마음의 짐을 한시름 놓을 수 있었 으며, 동시에 각성자 콘퍼런스에 참여한 목적 중 한 가지를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 가 없게 됐다는 말이었다.
이제는 콘퍼런스에 참여한 두 번 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리를 옮길 때였다.
“이곳은 이제 더 볼 것이 없구 나. 이만 가자꾸나.”
구존의 지시를 들은 구회와 구인 이 곧장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차량을 바로 준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동을 위해 칠흑빛 도포를 휘날 려 가며 몸을 일으키고 있던 찰나, 구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
대련장의 바깥, 거대한 기운을 가진 이가 이곳으로 들어서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기운을 가진 이를 구 존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이만한 강자들 중 오늘 이곳, 미
국 각성자 협회의 대련장에 들른다 는 소식을 말했었던 이가 존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존의 시선이 자연스레 대련장 의 입구로 향한다.
‘대체 누가?’
머릿속에 궁금증이 증폭되어 가 던 찰나, 대련장의 입구가 바람 소 리를 내며 열린다.
휘오오…….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하며 대련장 내부로 들어서고 있는 강자의 얼굴 을 확인한, 구존의 입가에 환한 미 소가 흐른다.
‘한서준.’
구존이 각성자 콘퍼런스에 참가 한 두 번째이자, 가장 큰 목적은 하이 리치를 사냥하고 그 위용을 증명해 낸 한서준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목적, 그 자체인 한서준이 제 발 로 찾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이동 시간을 아낄 수 있 겠군.’
입가에 피식 미소를 흘려 낸 구 존은, 발걸음을 옮기어 서준의 앞 으로 향하였다.
앞서 애쉬의 안내와 설명을 받은 서준은 주위를 유심히 둘러본다.
‘이들이 각국에서 제일, 최강이라 고 칭해지는 각성자들.’
S급 각성자들의 참석 이유, 참여 보상이라고 칭해지는 웰컴 선물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방금 전 얻은 새로운 아티팩트의
위력을 시험하고 알아보기 위해서 인지 많은 각성자들이 한창 대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현 세계의 수준, 레벨을 알기 위 하여 되도록 많은 정보를 얻어 가 려 했지만 계속해서 신경을 잡아끄 는 시선이 서준을 방해했다.
‘구존.’
넓은 어깨와 탄탄한 근육질이 부 각되는 거구의 체형과 날카로운 눈 매를 가진 남자, 구존이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주 구멍이 뚫릴 정도로 쳐다
보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 만큼, 구 존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바라 보는 이유를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구옹 때문이겠지.’
구룡문에 소속된 문파원, S급 각 성자가 반폐인이 되었는데 문주인 구존의 입장에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어디까지나 정 당방위였다.
자신이 저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서준은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 매를 한 채로, 구존을 응시했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구존이 서준에게로 걸음을 옮기어 온다.
“요즘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른다 는 한국의 한서준 각성자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구룡 문의 문주, 구존입니다.”
“반갑습니다, 한서준이라고 합니 다.”
날카롭고 시렸던 시선들, 앞서 얽혀 있는 사건과는 달리 두 사람 은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나 눈다.
물론, 이것은 폭풍 전야의 상황. 마치 태풍의 눈과 같은 것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은 구존의 눈매가 일순간,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진다.
“헌데…… 무의 경지가 상당히 높으신 것 같습니다만……. 혹시 괜찮다면 한 수 겨뤄 볼 수 있겠습 니까?”
서준은 잠시 입을 다문 채로, 고 민에 빠져들었다.
사실, 굳이 구존과 겨뤄 볼 필요 는 없었다.
‘제법 수준이 높다만, 결국 조화 경의 수준.’
구태여 붙어 볼 필요도 없었다.
현경에 올라 있는 자신과 비교한 다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서 호기심이 피어나며 궁금증이 동하고 있었다.
‘구옹이 쓴 것은 틀림없는 무공 이었어.’
구룡문의 문파원들은 기존의 각 성자들과 달리 시스템에만 기대고 있지 않았다.
분명, 초식을 기반으로 한 제대
로 된 무공을 펼치고 있었단 말이 다.
무를 즐기는 무인(武人)으로서 현재 지구의 무공, 경지 수준이 어 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이 서준을 망설이게 한 것이다.
그리고 구룡문의 문주인 이 구존 이라는 자와 대련을 해 보면 지금 지구의 무공, 경지 수준이 어느 정 도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 었다.
‘흐음…… 어떻게 할까?’
서준이 생각에 잠긴 채로 고민을 이어 가던 찰나, 구존의 입가에 비
릿한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흔쾌히 수락하실 줄 알 았는데, 생각보다 대답이 오래 걸 리시는 군요. 설마…… 싸움이 두 려우신 겁니까?”
“무례한 언동은 삼가십시오, 한서준 각성자님은 우리 한국 대표로 오신 분입니다.”
강석호가 나서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위협을 가했지만, 구존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나는 너 같은 버러지에게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왜 네가 대답을
하느냐?”
“버러지라고?”
노골적인 구존의 무시에 강석호 의 두 눈동자에 불꽃이 이글거린다.
“혹시 그거 알고 있나? 대개 사 람들은 맞는 말을 하면 더 화를 내 더군, 강석호 지금 자네처럼 말이 야.”
강석호, 구존 두 사람이 벌이는 기세 싸움에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 는다.
“구존, 선을 넘고 계십니다.”
애쉬도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하 고 있었지만, 구존의 입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미국 소속, AAO 팀장인 자네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은 AAO 팀장이 아닌, 한서준 각성자의 안내인입니다.”
“안내인이라…… 그렇군. 그런데 그렇다면 자네야말로 선을 넘는 거 지, 맡은 역할에만 충실하는 게 어 떤가?”
팽팽한 기세 싸움, 언제 싸움이 일어날지 모르는 살얼음판의 분위 기 속에서, 서준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두려워한다고?”
말을 내뱉는 서준의 입가에 실소
가 새어 나온다.
“재미있는 말이네.”
당연하지만 이 미소는 기분이 좋 아서 나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하자면 헛웃음이 홀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궁금증이 동하였기에 그 승부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서 명분을 만 들어 제 묫자리를 깔고 있는데 어 찌 받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준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궁금 하다면 보여 줘야지.”
흔쾌히 승낙을 한서준은 발걸음 을 옮기어 근처의 대련장으로 향하 였고, 구존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당연하지만, 구존이 각성자 콘퍼 런스에서 서준을 만나려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궁금증 때문이
아니었다.
‘본래 한서준을 회유하고 휘하로 두기 위함이었거늘……
그러나 방금 전, 대화를 핑계 삼 아 가며 잠시나마 확인해 본 한서준의 역량, 그릇은 생각을 완전히 바뀌게 만들었다.
‘한서준은 내가 수하로 부릴 수 있는 놈이 아니다.’
하이 리치를 사냥한 것으로 큰 성장을 이뤄 낸 것인지, 구옹과의 전투 영상 이후로 불과 며칠 지나 지 않았는데 엄청나게 강해진 것 같았다.
정말 무서운 속도의 성장이었다.
이런 이를 수하로 두는 것은 불 가능했다.
아니, 너무 위험해서 둘 수가 없 었다.
자고로 무인은 더 강한 힘, 무 (武)를 숭상하는 법이었다.
휘하에 둔 각성자, 무인들이 수 장인 자신보다 강해지게 된다면 어 떤 일을 벌일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내가 가진 문주의 자리를 위협하겠지.’
디아볼로스와 완전히 손을 잡지 않은 것도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던 구존이 한서준을 휘하에 두어 굳이 위험을 만 들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노선을 바꾸었다.
‘우리 중국, 구룡문은 한국, 한서준의 친우, 훌륭한 동료로서 함께 한다.’
디아볼로스, 그 미치광이들은 동 료라는 수평적인 관계가 없었다.
오직 상사와 부하로 이루어진 수 직적인 관계뿐이었다.
그러나 시민을 구하거나 주변 사
람을 도왔던 일화, 기사들이 있는 한서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비록 이것만으로 완벽한 선인(善因)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인간미를 보유한 사 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디아볼로스와는 다르게 대화가 통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가진 가 치를 증명해 낸다면 동료로서 설 수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한서준이 더 성장하기 전에 내 능력을 증명해 두어야 한 다.’
지금 당장만 해도 한서준의 기세 만 봐도 그저 상상으로만 그쳐야 했던 초월자, 현경의 경지에 오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지금 당장 은 현경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조화경 상급자의 경지에서 현경 의 문을 마주해 봤기에 그 벽이 얼 마나 단단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성장이 가팔라도 현경에 벌써 도달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한서준의 성장세를 보자
면 머지않아서 분명히 그 벽을 허 물어 낼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동료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가 될 확률이 높았으 며 구존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그림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다소 무인으로서 자존 심이 상할 말을 내뱉는 무례를 범 하더라도 승부를 벌인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 압박감은……
아직 공방을 나눠 본 것도 아니 었다.
그저 대련장에서 마주하고 있는
한서준이 입가에 피식 흘리고 있는 미소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둥 뒤 로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린다.
무거운 기세가 전신을 짓누른다.
형용할 수 없는 공포, 절대적인 마를 가진 마왕(魔王)과 겹쳐 보이 며,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오 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감이 좋나 보 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홀리는 한서준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다.
천재라고 칭송을 받았고, 무에 대한 탐욕 일심으로 꾸준히 성장을
해 왔다.
고작 반년도 안 된 한서준 각성 자에게 이 정도 압박감을 받는 것 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압도적인 격차가 날 리 가 없다!’
아니, 나서는 안 되었다.
부하가 아닌 동료로서 남기 위해 서는 그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때마침, 대련장에서 있던 심판 이 경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이 구룡문주님을 얕보지 마라!!”
구존은 차오르는 공포를 발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는 것으로 억 지로 떨쳐 내 가며, 땅을 박찬다.
타닥-!
서준의 기세에 겁을 먹고 있었긴 했지만, 구존은 조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날렵한 발놀림으로 삽시간에서준과의 거리를 좁혀 낸다.
구존, 그가 서준을 향하여 내뻗 고 있는 주먹에 검은 불길, 강기가 타오르며 곧, 업화(業火)를 피워 낸 다.
화아악-!
“이것이 나 구존(九尊), 구룡문주
님의 힘이다!”
지척, 공격을 피하기 힘든 거리 였을 뿐더러, 서준은 아직 자세를 다잡지도 않고 있었기에 구존은 자 신 있게 내뻗었다.
하지만 주먹에 느껴지는 감각은 없다.
대신하여 옆구리에서 아찔한 고 통이 찾아온다.
“크읍-!”
옆구리에서 밀려오는 고통과 함께 시야가 핑- 돌며, 구존의 육신 이 허공을 노닐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