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8화
83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라이너 가 계속해서 주변을 홅는다.
‘정말 분신이었다고?’
분명 두 눈으로 보고 있고, 머리 로 인지를 하고 있음에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받아들이고 싶 지 않았다.
‘올라운더라고 칭송받는 내가 고작 삼 할의 전력밖에 내지 못하는
분신과 동수를 이뤘다고?’
허울뿐인 크라운즈 나이트들은 두말하면 입 아팠고, AAO 팀 내 최고의 전력이라는 팀장도 고작 30%의 힘으로는 자신과 동수를 이 뤄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 부정하는 것만으로 는 한서준이 둘인 것을 달리 설명 할 방법이 없었다.
분주히 회전해 가며, 계산을 이 어 가던 머리가 끝내 현실을 받아 들이고 답을 도출해 낸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혼들림이 없 던, 라이너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서준은 나보다 강하다.’
굳이 맞붙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삼 할 전력의 분신과 동수를 이 뤘다면, 전력 백 퍼센트인 본체와 는 어떠하단 말인가.
‘절대 못 이긴다.’
지금껏 열등 유전자라 깔봤던 동 양인에게 패배한다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부정당할 만큼 아주 치욕적 이었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한서준은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도저히 승산을 생각할 수 없는 존
재였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한서준 이 이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 고 오직 한서연에게 몰두하고 있었 다는 점이었다.
“ 괜찮아?”
서준의 물음에서연이 떨리는 목 소리를 애써 가다듬는다.
“나, 나는 괜찮은데…… 경호 오 빠랑 다른 각성자분들이.”
나름 침착하게 말을 내뱉으려 하 고 있었지만 방금 보았던 장면들이 꽤 충격이 컸는지 서연의 눈동자에 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였다.
서준은 놀란 아이를 달래듯 천천 히 서연의 등을 두드려 준다.
“괜찮아,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비록 말 한마디였지만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힘겹게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밀려온다.
유오 오빠이"*.w
서준은 아무 말 없이 울고 있는 서연을 달래면서 기감을 확장시키 고는 상황을 확인한다.
다행히도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 모두 숨이 붙어 있는 채였다.
‘이 상태라면 내가 전부 살려 낼 수 있어.’
다행히도 육도혈환술(7느道穴換術), 숨이 붙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살 릴 수 있다는 암주의 오의 (M義)라 불리는 무공을 익힌 상태였다.
물론, 그 기술의 효력이 매우 이 례적인 탓에 익히고 있다고는 하나, 고도의 내공 운용 능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내공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현경의 경지에 이르러야 했지만, 다행히도 서준에게는 그
어떤 조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서준은 조심스레 서연을 떼어 놓 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사람들을 구해야지. 잠깐 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쉽게 진정될 수 없는 일이었기에서연의 몸은 아직도 미약하게 떨고 있었지만,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았어.”
서준은 쓰러져 있는 이들 중 가 장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하인표의 앞으로 가장 먼저 다가가 육도혈환 술을 펼친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내력들이 썩 고 죽은 세포 자체를 원상태로 돌 리고, 타 버린 피부와 장기들을 다 시 재생시킨다.
세포 자체를 회복시키는 것은 역 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화상을 크게 입어 거의 벗겨지다 시피 한 하인표의 피부가 살색을 되찾아 가고, 꺼져 가던 호홉도 빠 르게 안정을 되찾아 간다.
그렇게 하인표를 시작으로 주변 에 넝마가 되어 버린 사람들을 차 례차례 치료해 가는 서준의 모습에 라이너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정면 승부는 승산이 없겠지 만……
저렇게 등을 훤히 드러낸 채로, 그것도 회복 스킬에 전념을 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준의 눈치를 살피던 라이너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 간이었다.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치료를 끝내고 나면 알아서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어 줄 테니까, 얌전히 기 다리고 있어.”
머릿속으로 세워 두었던 기존의 계획이 무색할 정도로 발걸음이 저
절로 멈춰 선다.
‘이, 이게 겨우 말 한마디에서 나 올 수 있는 위압이란 말인가?’
한서준의 입에서 홀러나온 말에 는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배어 있었다.
근본적인 공포가 몸을 짓누른다.
두 다리, 아니 몸 전체가 통제를 벗어나고서 사시나무처럼 떨려 온 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놈은 나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어.’
이미 공방을 주고받은 시점에서 싸움이 시작되었고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그리고 어차피 정면 승부에서 승 산이 없다면, 지레 겁을 먹고 지금 이 소중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 었다.
결단을 내린 라이너는 조심스레 마나를 끌어 올리며 스킬을 발현시 킨다.
혹여나 한서준이 눈치챌까, 숨조 차 죽여 가며 조심스레 움직인다.
여태껏 한 번도 길다고 느낀 적 없었던 스킬의 캐스팅 시간이 영겁
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영겁과 같은 찰나의 시간 이 흐른 순간, 라이너의 입가에 비 릿한 미소가 흐른다.
‘끝났어.’
가장 파괴적이며 강력한 힘을 보 이는 스킬, 헬 플레임이 완성되었다.
아무리 괴물 같은 놈이라 할지라 도 지금처럼 등을 보인 채로 방심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쉽사리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확신을 가진 라이너가 헬 플레임 이 발현된 팔을 앞으로 내뻗으며
소리친다.
“죽어라!”
위협적인 불꽃이 등 뒤에서 매서 운 속도로 쇄도해 오고 있었지만, 서준은 알아차렸음에도 단 한 치의 당황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코웃음을 치며 비웃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명을 재촉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기(氣)의 운용과 활용 등 에 능통한서준이 라이너가 운용하 는 기(氣)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의 치료가 우선이었고, 라 이너가 운용하는 기는 너무나도 하 찮은 것이었기에 그저 방치했을 뿐 이었다.
내공, 특히 라이너가 펼치고 있 는 기공 계통의 공격은 아주 섬세 한 무공이라 저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써서는 안 되었다.
‘기공이라고도 볼 수 없는 조잡 한공격.’
구태여 복잡한 무공으로 받아칠 필요도 없었다.
헬 플레임이 괜히 헬 버스터의 열화판이 아니었다.
헬 버스터는 응집의 묘리로 기운 을 한자리에 모아 내는 것이었지만, 헬 플레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마구잡이로 뭉친 것에 불과했다.
저렇게 조잡하게 뭉쳐진 것은 아 주 작은 자극만 가해져도 본래 형 태를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내공을 실어 낸 손가락을 갖다 대는 것으로 말이다.
화륵-
서준의 손끝이 구체에 닿는 순 간, 멸염의 기세를 내뿜던 헬 플레 임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고는 삽시간에 헬 플레임을
완전히 소멸시킨 서준의 신형이 흩 어진다.
라이너가 분주히 동공을 움직이 며, 서준의 움직임을 좇으려 했지 만, 잔상조차 볼 수 없었다.
“어디?”
당황하고 있는 라이너의 앞으로 차가운 눈매를 한서준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 무슨.”
평소 자랑스럽게 여기던 수많은 스킬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서준의 손에 모가지가 잡혀 하늘에 매달리듯이 떠오른다.
좁아지는 숨구멍에 라이너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흡.”
서준은 그대로 라이너를 바닥에 내려찍어 버렸다.
쾅-!
인간을 바닥에 내리찍는 것으로 는 생길 수 없는 소음이 들려오며 일대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긴다.
이런 충격 속에서 라이너의 육신 이 온전할 리가 만무했다.
콰직-!
온몸의 뼈들이 으스러지는 감각 이 들며, 아득한 고통이 밀려온다.
“끄읍-!”
라이너가 고통을 호소하며 입에서 피 분수를 쏟아 내며 바닥을 나 뒹군다.
그러나 이 고통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쓰러져 있는 라이너를 향하여, 서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 했다.
“이제부터는 죽여 달라고 빌게 될 거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서준의 말은 허세 따위가 아니 라는 것을 말이다.
방금 전의 공격도 끔찍이 아팠지 만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여태 지켜본 한서준은 그럴 만한 힘과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확실케 했다.
그렇기에 라이너는 서준의 손이 움직이기 전 잽싸게 소리를 내질렀 다.
“저, 저는 AAO 소속의 요원! 저 를 죽인다면 책임을 물어야 할 것
입니다!”
AAO는 미국, 아니 세계 최고의 각성자 팀이었다.
아무리 이 괴물 같은 한서준이라 해도 그 위신을 업신여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실제로 계속해서 움직이던 한서준의 손과 발이 일시적이라지만 움 직임을 멈추기도 했으니 말이다.
활로, 한 줌의 희망을 느낀 라이 너가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저도 폐를 끼쳤으니 우리 서로 비긴 걸로 합시다. 저를 놔주면 오
늘의 일은 없던 걸로 해 드리도록 할 테니 여기서 끝내는 걸로 하시 죠.”
그러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희망 이 아니었다.
어느 것보다 큰 절망이자 죽음이 었다.
입 꼬리가 비틀린 한서준의 모습 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파괴할 존재, 흡사 지옥의 야차(夜义)와도 같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지 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서준의 눈동자에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오른다.
“디아볼로스 말고 부숴야 할 게 하나 늘었네.”
서준이 싫어하는 것을 몇 가지 꼽아 그중 가장 비위를 건드리는 일을 말하자면 바로 내 편, 내 사 람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라이너는 경호와 그 를 도우려 했던 각성자들을 공격했 다.
이것만으로도 감히 용서를 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라이너는 단순히 싫어하
는 것의 수준이 아닌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어선 상태였다.
‘미국 각성자 협회 소속의 AAO? 세계 최고의 각성자 팀?’
세계 전체도 적으로 돌릴 각오를 했었는데 고작 나라 하나, AAO라 는 팀이 무서울 리가 없었다.
전부 X 까라 해라.
‘감히 내 가족을 건드려?’
방금 전, 울먹이고 공포에 질려 있던 서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것은 절대로 용서해 줄 수 없 는 일이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서준이 손 을 놀리며 라이너의 혈도를 짚어 가 며, 분근착골(分筋錯骨)을 펼친다.
이윽고, 라이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으읍……. 끄아악!”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고통 들이 전신을 휘감았다.
근육이 마디마디 갈라지고, 뼈가 갈라진 틈 사이로 불을 지지는 것 같은 아득한 고통이 밀려온다.
그 고통은 결코 한순간에 끝나는 일 없이 영겁처럼 계속됐다.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다.
“꾜아아악-!”
자존심, 자신감 같은 자잘한 감 정들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이 고통은 인간이 감내할 수 있 는 영역이 아니었다.
라이너는 엄청난 고통에 흐느껴 가며, 서준의 발을 붙잡고 애원했다.
“살, 살려 주십시오!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그 모습에서준이 코웃음을 친다.
“무슨 소리야, 난 너를 안 죽여.”
말을 내뱉고 있는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선 사할 방법들을 수십, 수백 가지를 알고 있는데 편한 안식을 선사해 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죽는 것이 편하다 느낄 정도로 고통을 주다가, 끝에는 여태껏 쌓 아 온 모든 내공과 각성자,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 을 뿐이지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한겨울의 한파보다도 더 오싹한서준의 목소리에 라이너의 얼굴빛 이 사색이 된다.
‘끝났다.’
한서준이 그리 선택했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면 이 지옥을 벗어날 방도 가 없었다.
그저 한서준이 조금이라도 빨리 죽음이라는 은총을 내려 주기를 기 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고, 비명을 내지 르는 것, 이것이 올라운더라고 칭 송을 받던 로브 라이너가 맑은 정 신으로 느낄 수 있었던 마지막 모 습, 감각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