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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그러나 라이너는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원래 힘없는 약자의 나라는 거 절이라는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거야. 이 멍청한 원숭이야.”
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아 쥐고 있는 주먹에 힘이 꽈악- 들어 간다.
“그걸 누가 정한 건데?”
“나처럼 힘 있는 자.”
“따르기 싫다면?”
날카로워진 서연의 눈매에, 라이 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상관없어, 이제 곧 따르게 될 거니까.”
애초에 이것은 권유도 선택도 아 닌 강요였다.
이들에게는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다는 말이었다.
순간, 라이너의 신형이 그림자처 럼 꺼지는 모습에, 서연의 눈이 휘 둥그레진다.
‘빨라!’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없었다.
입이 험하고 예의라고는 눈곱만 큼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라이너 가 가진 실력과 힘은 진짜였다.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두리번 거리며 라이너의 움직임을 좇고 있 던 찰나, 등 뒤에서 오싹한 목소리 가 들려온다.
“원승아,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잔뜩 벼린 날과 같은 라이너의 살기에 공포가 밀려온다.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완전히 뒤를 잡혔기에 막
을 방도가 없었다.
결국, 서연은 어금니를 깨물며 곧이어 찾아올 고통에 대비를 했다.
그러나 서연이 느낀 것은 극심한 고통도, 살이 베이는 느낌도 아닌 라이너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였다.
“이건 또 뭐야?”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는 동시에 둘도 없는 기회였기에서연 은 황급히 틈을 타 몸을 돌려 자세 를 다잡았다.
그러나, 기회에는 대가가, 희생이 따르는 법이었다.
경호가 왼쪽 어깻죽지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억눌렀다.
“크읍......
“동료애? 아니지, 하찮은 자존심 인가?”
신음을 흘리는 경호의 모습에 라 이너가 코웃음을 친다.
“눈물겨운 희생이지만 결과는 변 하지 않을 거야.”
오만이나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저 김경호라는 원숭이에게 공격 을 읽힌 것이 다소 의외이고 놀랍 긴 했지만, 방금 전 공격으로 놈은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저런 몸 상태로 본래의 능력을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숱한 전투, 전장을 거쳐 온 각성 자가 아닌 평범한 시민이라 할지라 도 알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경호는 한 발자국도 물러 서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남은 한 팔을 들어 올려 라이너의 앞길을 막아선다.
“날 죽이기 전까지는 서연이 털 끝 하나 못 건드려.”
“그 상태로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형님이 랑 약속한 거라 반드시 지켜야 하 거든.”
눈앞의 김경호라는 원숭이는 거 대 자본을 휘두르는 한성 그룹의 총수인 만큼 가능하다면 죽이고 싶 지 않았고, 그렇기에 방금 전 공격 에도 손속에 자비를 두었다.
하지만 지금의 놈은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김경호, 그의 눈동자에 피어나고 있는 강한 열의는 추후 반드시 발 목을 잡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결단을 내린, 라이너의 표정이 다시 한번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렇게까지 죽길 원한다면 그렇 게 해 주도록 하지.”
타닥-!
라이너의 두 다리가 땅을 박차며 경호를 향해 달려간다.
내뻗고 있는 팔에는 마나를 응집 시킨다.
그러나 일련의 준비들이 무안하게도 팔을 앞으로 내뻗지는 못했다.
쉬익-!
갑작스럽게 날아온 단도에 몸을
빼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누가……!”
라이너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 리며, 단도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 개를 돌린다.
그곳에 있는 것은 숨을 거세게 내쉬고 있는 하인표였다.
“허억…… 허억……. 너무 늦게 도착해서 죄송합니다! 제 뒤로 오 십쇼.”
“상황을 보아하니 나를 도와주러 온 것 같지는 않고……
살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살 기를 내뿜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리
고 있는 라이너의 모습을 보면서도 하인표는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말 을 내뱉는다.
“어이 미국 코쟁이, 우리 대한민 국은 네놈 같은 쓰레기가 마음대로 날뛰어도 될 곳이 아니다.”
아주 작은 트러블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런 변수들은 때로는 의 도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하나같이 짜증나는 짓거리를 하 는군.”
결단코 좋다고 볼 수 없는 상황 에 라이너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
러진다.
“한국 원숭이들이 중국이나 일본 과 달리 정이 넘친다던데, 정말 그 런 것 같네. 죽을 자리인 걸 알면서 도 이렇게 감싸는 걸 보면 말이야.”
“죽는 건 네놈이다. 극악무도한 범죄자 같으니라고.”
기세등등한 말을 내뱉는 하인표 의 등 뒤로 최준성을 비롯한 백두 산 길드원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 낸다.
수십에 달하는 각성자들이 등장 한 것이지만 라이너의 표정에 당황 은 존재치 않는다.
오히려 라이너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이거 믿고 자신만만해했던 거 야? 설마 고작 이 정도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고?”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 지.”
“대 볼 필요 없을걸.”
라이너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흩 어진다.
“은신 스킬! 인 투 섀도어다!”
“공격하면 위치를 드러내야 하는 거니까! 사방을 경계해라!”
라이너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풀어져 있었기에 하인표, 길드 백 두산은 삽시간에 라이너를 향한 최 선의 방어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략 방법을 안다고 해서 모두 그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 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체급, 힘의 차 이가 압도적이라면 더더욱 실현하 는 것이 어려웠다.
“끄아악-!”
라이너의 단도가 허공을 가를 때 마다, 백두산 길드원들이 우후죽순 으로 쓰러져 나간다.
괜히 올라운더라고 불리는 게 아 니었다.
라이너의 속도는 구태여 말할 필 요도 없을 정도로 빨랐을뿐더러 힘, 파괴력도 궤를 달리하는 강력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심지어 스킬 또한 무궁무진했다.
그가 딛고 있던 땅이 갑자기 갈 라진다든지, 늪지대가 만들어진다든 지 하는 요상한 스킬들까지 부려 가며 백두산 길드원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 괴물..
당황하고 있는 백두산 길드원들
의 모습에 라이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이제야 수준 차이를 좀 알았나 보군.”
얼이 빠진 표정과 공포에 후들거
리는 뒷다리, 원숭이들에게 딱 어
울리는 모습이었고, 이제야 제 주
제를 안 것 같았다.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면, 이 정
도만으로도 용서해 줄 수 있었지만, 오늘은 작은 트러블이 일어나며 만 에 하나의 확률이라지만 계획해 놓 은 일이 망가질 뻔했다.
즉, 기분이 상당히 나쁜 날이었
고, 저들에게 적당한 자비를 보여 줄 수가 없었다.
라이너의 손바닥 위에서 마력이 응집되며, 위협적인 불꽃이 일어난 다.
백두산 길드원들의 눈이 휘둥그 레진다.
“헬…… 헬 플레임!”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라이너가 팔을 앞으로 내뻗는다.
“잘 죽어.”
하인표의 두 눈에 죽음의 그림자 가 차오른다.
하이 리치가 다루는 헬 버스터를 모티브로 따내어 만든 것으로 상당 히 파괴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는 SS급 스킬이었다.
저런 파괴력이 높은 공격이 터진 다면 근방에 스러져 있는 백두산 길드원들의 말로는 볼 것도 없었다.
비단 백두산 길드원들만의 문제 가 아니었다.
이곳은 서울 한복판, 엄청난 인 명 피해가 생길 것이다.
‘내가 벌인 일,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다행히도 적합한 S급 스킬, 육망
궤압진(大苦植壓陳)이라는 스킬을 보유 중이었다.
일정 지역에 결계를 치고 외, 내 부의 접촉을 차단하는 스킬.
단점이라면 시전하는 자가 결계 내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부에 있는 자신, 하인표 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라이너와 관련된 일 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다졌던 만큼, 하인표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피해를 입긴 하겠지만 적어도 외 부로 새지는 않을 것이었다.
헬 플레임의 앞으로 몸을 내던진 하인표가 육망궤압진을 펼친다.
하인표가 펼친 푸른빛 장막이 라 이너가 발산해 낸 불꽃을 가두어 낸다.
콰쾅-!
그리고 귀가 멀 것 같은 폭음이 터져 나오고, 푸른빛의 육망궤압진 이 무너진다.
“길드장님!!”
바닥에 쓰러진 백두산 길드원의 절박한 소리에, 라이너가 코웃음을 치며 하인표를 깎아내렸다.
“정말 무의미한 희생이네.”
자신은 이런 스킬을 얼마든지 더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귀찮게 한 번 더 손 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일을 망치려 했던 원숭이 들 정리는 모두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이너의 차가운 시선이 서연에 게로 향한다.
“이래도 한서준에 대한 정보를 내놓지 않을 건가?”
물음으로 던진 것이지만 이미 답
을 알고 있었다.
‘모두들 겁에 질려서 정보를 순 순히 불었지.’
라이너는 속으로 저 원숭이도 별 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서연은 라이너의 예상 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싫어. 절대 안 가르쳐 줄 거야.”
수십의 각성자들을 삽시간에 쓸 어버릴 압도적인 힘에, 자비를 두 지 않는 라이너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공포심이 차오르며 두 다리가 후들
거린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가르쳐 줄 수 없었다.
저런 괴물이 부모님과 오빠에게 가서 부릴 행패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말했을 텐데 엄청 멍청하군. 뭐 그러니까 험한 꼴을 보는 거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인 라이너의 신형이 다시 한번 꺼진다.
극심한 고통을 주어 입을 좀 가 볍게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연의 근처로
오지도 못하고 튕겨 나간다.
퍽-!
별안간 부딪친 막강한 힘, 존재 에 가로막혀 의도가 망가졌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라이너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한서준.”
그토록 찾던 이가 눈앞에 있었다.
“반갑군, 일단 나는 이런 사람이 라고 하네.”
라이너가 웃는 얼굴로 명함을 날 렸지만, 한서준은 손을 내뻗지 않
는다.
허공을 노닐다가 바닥으로 떨어 지는 명함의 모습에 라이너의 입가 에 피식 웃음이 흐른다.
“성격이 조금 쌀쌀맞은 것 같은 데, 뭐 좋아. 원래 원숭이와 인간이 그리 살가울 필요는 없지.”
대답조차 없는 서준의 모습에 라 이너가 표정을 싹 굳히며 입을 열 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딱 한 번만 말하 지. 한서준, AAO의 요원이 되어라.”
한서준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
다.
아니, 본신이 아닌 분신체였기에 못한다는 게 맞았지만, 라이너가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지금 AAO를 무시하는 거냐?”
여전히 무응답인 서준의 모습에 미국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 른다.
조금 유능하다지만 한서준이라는 놈도 결국 동양인에 불과했다.
‘어차피 열등 유전자에 불과한 놈들이라 우리의 AAO의 기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할 텐데.’
그렇기에 미국인은 이번 명령 자
체가 이해가 안 갔고 불쾌했다.
그런데 때마침 한서준이 저렇게 예의 없고 무성의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니 너무 고마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녀석을 때 려눕힐 만한 명분도 생긴 것이었다.
“우리 AAO에는 다른 건 몰라도 딱 하나의 규칙이 존재한다.”
라이너가 자세를 다잡고, 체내의 마나를 끌어 올리며 뒷말을 이어 간다.
“바로 AAO의 명예와 긍지를 무 시하는 놈들에게는 그에 굴복할 만 한 힘을 보여 주고 손수 체벌하는
것으로 증명해 내는 거다……. 바 로 지금 네놈같이 건방진 행동을 보이는 놈들에게 말이야!”
고함을 내지른 라이너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진다.
서준의 가늘어진 눈동자가 그 움 직임을 읽어 내고, 몸이 반응한다.
쿵-!
팔과 다리가 교차하고 내공, 마 나가 허공에서 연달아 맞부딪친다.
충돌로 일어난 빛의 파문들로 인 하여 주변의 지형이 이지러지고 파 괴된다.
일방적인 싸움이 아닌, 서로 비등
비등하게 보이는 전투의 양상에 라 이너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 과연 하이 리치를 잡았 다더니만 헛소문은 아니었나 보구 나!”
확실히 열등 유전자를 가진 동양 인치고 제법 준수한 편에 속했다.
그러나 딱 준수한 편에 불과했다.
‘무투 계열로서 나와 동급이라면 절대 나를 뛰어넘을 수 없다.’
올라운더, 모든 스킬들을 익힌 자이자 모든 계열, 계통의 장, 단점 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근접전, 속공을 위주로
펼치는 무투 계열의 경우 강한 한 방, SS급의 스킬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전과 같은 헬 플레임을 한 방 먹 여 준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본래라면 몰아치는 무투 계열과 의 싸움에서는 캐스팅에 필요한 시 간을 벌 수 없었지만, 모든 스킬, 계통을 익히고 있는 라이너의 경우 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공방을 주고받으며 캐스팅을 하 면 그만이지.’
실제로 어느덧, SS급 스킬인 헬
플레임의 캐스팅이 모두 끝나 가고 있었다.
“고생했다, 원숭아.”
라이너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손을 앞으로 내뻗는다.
그 손바닥에는 마력의 응집체, 헬 플레임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죽어라.”
자신만만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쏘아진 불꽃은 한서준에게 닿지 않 았다.
‘이걸 피해 냈다고?’
아니, 피한 것이 아니었다.
피한 것이라면 폭음이 터져 나오 며 주변이 쑥대밭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냥 구체가 완전히 소멸된 것이 었다.
‘왜? 누가……?’
갖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피 어나던 그 순간, 복부에 아찔한 고 통이 느껴짐과 함께 몸이 허공을 노닐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라이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다행히도 몸이 완전히 하늘 높게 떠오르는 순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서준?”
방금 전 공방을 겨룬 한서준이 아닌, 또 다른 한서준이 존재하고 있었다.
머리가 분주히 회전하며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 나가며 답을 도출해 나간다.
‘분신이었다고?’
일본의 국보급 아티팩트였던 카
구야의 거울이 한국, 한서준의 소 유가 되었다는 소식을 사전에 접하 고 있었다.
그러나 카구야의 거울의 효과는 30퍼센트의 힘을 발휘하는 분신을 만들어 내는 것.
고작 30퍼센트의 힘을 가진 분신 이 AAO 소속, 올라운더라고 칭해 지는 자신과 동수를 이뤄 낼 수 있 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돼……
넋이 나간 듯한 말을 흘리던 순 간, 라이너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 는 것을 느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