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권 25화
75 화
하이 리치의 군세와 토벌대는 서 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만큼 빠 르게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렇게 서로의 진형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리가 좁혀 지는 순간, 켄이치가 우렁찬 소리 를 내질렀다.
“시작해라!”
이에, 요자쿠라 길드원들은 기다 렸다는 듯이 반응을 했다.
“죽여라!”
“죽어!”
요자쿠라 길드원들은 흉흉한 기 세를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는 몬스 터, 하이 리치의 군세가 아닌 바로 옆의 한국의 각성자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러나 한국 각성자들도 이미 앞 서 강석호에게 언질을 들어 이번 토벌의 적은 눈앞의 하이 리치뿐만 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막아라.”
“연습해 왔던 대로 진형을 갖 춰!”
일반 각성자들은 재빠르게 원형 의 고리를 만들어 내는 방어 진형 을 취한다.
그리고 스칼렛, 여현진, 강석호와 같은 강자들은 요자쿠라 길드원들 의 S급 각성자들을 향해 나아가며 압도적인 힘에 의한 진형의 붕괴를 사전에 방지한다.
삽시간에 외부의 침입과 공격을 방어해 낼 수 있는 견고한 진형을 구축했다.
신속하면서도 일체의 당황 없이 대응하는 한국 각성자들의 모습에 켄이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역시 알고 있었나 보군.”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강석호가 코웃음을 쳤다.
“너희 일본 놈들 하는 짓이야 이 한국 손바닥 안이지 않겠나.”
“그래, 마음껏 발버둥 쳐 봐라.”
계획대로 기습 공격으로 큰 피해 를 입히지 못했지만, 당황할 거 없 었다.
계획이 들통났다는 것은 이미 상 정했던 사항이었다.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 니까 말이야.”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는 켄이치 의 모습에, 강석호의 입가에 피식 조소가 흐른다.
“자신감이 너무 과하네만, 아마 3년 전에도 그러다가 나한테 두들 겨 맞지 않았나?”
대격변이 일어나고 한창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엔 한마음이 되어 도 의적인 취지로 인접국끼리, 각성자 끼리 도움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 취지는 참으로 좋았으나, 갑 작스럽게 주체 못할 힘을 얻고, 그 탓에 자신감이 수용을 넘어 넘치게 된 각성자들이 발생해 크고작은
싸움이 자주 벌어졌었다.
강석호와 켄이치, 그들도 그 싸 움의 주역 중 하나였고 결과는 강 석호가 말했듯, 그의 압승이었다.
잊고 있었던, 잊으려 했던 과거 의 치부에 켄이치의 얼굴이 와락-일그러진다.
“몇 년 전의 이야기를 아직까지 도 우려먹다니 한심하군.”
“그래, 좀 오래됐지. 그래서 오늘 하나 더 만들려고 하네.”
조소를 띠고 있던 강석호가 땅을 박찬다.
타닥-!
강석호는 S급 각성자, 한국 제일 이라 불렸던 강자인 만큼 삽시간에 거리를 좁혀 왔지만, 켄이치는 조 금도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거 다.”
당연하지만 켄이치가 허세를 부 리는 것은 아니었다.
켄이치에게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 은총이라 불리는 스킬인 ‘연옥의 과실’이 존재했다.
조소를 머금은 켄이치는 곧장 의 회에서 하사해 준 연옥의 과실을
망설임 없이 사용한다.
[‘연옥의 과실’ 사용으로 계약자 와의 힘을 일부 빌려 옵니다.]
[모든 스테이터스가 1.5배 증가 합니다.]
하급 간부들이 주로 쓰는 ‘복제 품’인 SS급 연옥의 과실과는 달리, 제한 시간과 탈진이라는 부작용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 다른 은총이었다.
전신에 붉은 아우라가 피어오른 켄이치가 지근거리에 다다른 강석
호를 향해 팔을 내뻗는다.
“백귀야행 (百鬼夜行).”
쫘악- 펼치고 있는 켄이치의 손 바닥에서부터 영혼들이 활개 치며 뿜어져 나온다.
“허업.…”!”
강석호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지만, 켄이치 가 불러낸 영혼은 집요하고 억척스 러웠다.
계속해서 달라붙고 물어뜯으며 강석호를 추적한다.
영혼을 떼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강석호의 모습에, 켄이
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거기만 신경을 쓰면 안 되지.”
켄이치의 손바닥 위에는 어느새, 붉은빛으로 이루어진 화살들이 가 득했다.
쌔액-!
몰아치는 영혼과 빗발치는 화살 에 강석호의 완고해 보였던 방어가 서서히 무너지며 빈틈이 드러난다.
그리고 S급 각성자인 켄이치가 그 틈을 놓칠 리가 만무했다.
붉은빛의 화살이 독사처럼 강석 호의 어깨를 향해 파고든다.
“크읍!”
강석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통 에 찬 신음에 켄이치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나를 두들겨 패 주겠다던 아까 의 자신감은 어디 간 거지?”
어깻죽지를 타고 흐르는 붉은 혈 흔을 오른손으로 억누르고 있는 강 석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 네놈……
단순히 힘의 차이에서 밀렸다는 것에 불쾌함과 분노를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사용하 는 거냐?”
힘을 일순간에 증폭시키는 붉은 빛의 아우라, 저것은 틀림없이 범 죄자, 빌런 집단인 디아볼로스의 일원들이 사용하는 힘이었다.
일본 부동의 1위라는 요자쿠라의 길드장이 세계의 공적으로 지정된 빌런 집단의 힘을 빌리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나 켄이치는 한 치의 부끄럼 이나 수치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오만함이 가득 밴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며, 강석호를 내
려다본다.
“잘 알지. 너희들이 빌런, 악마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욕심에 완전히 눈이 먼 것 이냐?”
“그럴 리가. 나는 항상 냉정하고 합리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 고 움직인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벌일 때부 터 예상은 했다만, 못 본 사이에 생각보다 더 많이 타락했군.”
강석호의 노골적인 비난이 쏟아 졌지만, 켄이치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미소를 흘린다.
“타락이라니, 이게 현실이고 세 계의 흐름이다.”
대격변을 맞이한 현재의 세계는 힘이 곧 법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힘이 세계의 결정권을 좌지우지 하고 있었으며 강자가 모든 것을 쥐고, 누리고 있었다.
“테러 집단인 빌런의 힘이 세계 의 흐름이라니 큰일 날 소리를 하 는군.”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안쓰러울 지경이야. 머지않아 이 세상은 디아볼로스의 말이 곧 정의
고 법이 될 것이다. 보잘것없는 놈 들이 만든 법과 질서는 곧 압도적 인 힘을 가진 그분의 앞에 무너지 고 무릎 꿇게 될 것이다.”
말을 내뱉던 켄이치가 다시 한번 팔을 내뻗는다.
강석호가 몸을 움찔하며 방어 자 세를 취했지만, 날아오는 공격은 없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의 켄이치는 스킬을 펼친 것 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의 너와 나의 상황처 럼 말이다.”
조소를 머금은 켄이치의 등 뒤로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채로 인간과 홉사한 실루엣을 가진 존재가 날아 온다.
그러나 바람결에 휘날리는 망토 내부는 인간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앙상하게 마른 뼈와 공포에 몸이 떨릴 정도로 섬뜩하게 비어 있는 동공과 사방으로 뿜어내는 불길한 마력까지.
강석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이 리치!”
강력해진 힘에 켄이치의 본래 능
력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 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켄이치의 이명은 죽은 자들의 왕.
사체를 부리고, 마음대로 조종하 는 흔히들 말하는 소환사와 흡사한 스킬들을 익히고 있었다.
일반적인 각성자들처럼 단순히 스텟, 육체 능력이 아닌 부리는 소 환물, 사역마의 힘으로 강함을 증 명하는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즉, 재앙급 몬스터인 하이 리치 를 부리고 있는 켄이치는 재앙급에
달하는 각성자, 빌런이라는 것이었다.
당황이 극에 달했는지, 항시 침 착함을 보였던 강석호가 말을 더듬 고 있었다.
“어, 어떻게……
라이프 베슬을 통하여 단순히 소 환에 성공했다고만 짐작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 다.
S급 각성자라곤 하나 그리 출중 하다고는 볼 수 없었던 켄이치가 감히 재앙급 몬스터로 분류된 하이
리치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켄이치는 보란 듯이 하이 리치를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혼들리는 강석호의 동공을 확인한 켄이치가 자신감이 한껏 넘치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디아볼로스, 그분의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라는 말을 이제야 이 해한 것 같군.”
사색이 되어 가는 강석호의 얼굴 빛에 켄이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
가 흐른다.
“강석호, 네놈 정도면 제법 유능 한 녀석이니 내가 특별히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지금이라도 과거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엎드려 빈다면 특별히 우리 의회의 일원이 되는 영광을 누리는 기회를 줄 수도 있 다.”
당연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디아볼로스에서 내려온 지상 명령은 한국을 몰락시키는 것 이었다.
인재, 사람을 모으는 일은 애초
에 이번 계획, 명령에 존재하지 않 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자신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 를 만든 강석호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인 질 나쁜 농담에 불 과했다.
‘그래, 그렇게 현실과 자존심에서 갈등을 겪어 가며 추락해라!’
매사에 올곧음만을 보이던 강석 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 럼 흔들리는 모습에 희열이 차오른 다.
광기에 가까운 미소를 머금은 켄 이치가 입을 연다.
“어떠냐? 함께 그분의 은총을 받 겠느냐?!”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마침내 강석호가 결단을 내린 듯, 고개를 주억 인다.
“알겠습니다.”
“그래, 천하의 강석호도 별다른 수가 없었겠지! 크하하!”
앞으로 벌어질 일, 강석호의 절 망에 켄이치가 폭소를 터뜨리고 있 던 찰나, 갑작스레 강석호의 입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흘러 나왔다.
“그럼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 다.”
“뭐라고?”
뚱딴지같은 강석호의 말에 켄이 치의 고개가 젖혀진다.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오래갈 수가 없었다.
‘ 이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기운이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켄이치가 황급 히 팔을 내뻗는다.
“진혼망(鎭魂I포).”
미사일도 폭격도 가뿐히 막아 낼 수 있는 SS급의 스킬이 켄이치의 손에서 펼쳐졌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사내의 말투에는 한 치의 당황도 존재치 않았다.
“감은 제법 좋은 술사(術師) 같 은데, 무의미한 발악이야.”
쨍그랑-!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결계가 유리 조각처럼 흩어지더니 오른뺨 에서 아찔한 고통이 느껴졌다.
“크헙......!”
이빨이 부서지고, 입안에서 피 분수가 터져 나오며 호흡을 곤란케 하였지만 그를 신경 쓰고 있을 겨 를이 없었다.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적을 파 악하며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두 눈으로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니 더 당황스러웠다.
“한서준?”
분명 후발대에 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어떻게?”
켄이치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의문을 표했지만, 한서준은 그에 답을 해 주기는커녕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연기 좋으시던데요.”
“과찬이십니다.”
“영상은 말씀하셨던 대로 전송까 지 완료해 뒀으니 나중에 일본의 콧대를 확실하게 눌러 주세요.”
“감사합니다. 소중히 사용토록 하겠습니다.”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강석 호와 한서준의 모습에 켄이치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 차오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방금 전과는 달리 일방적인 무시를 당하 지 않았다는 거였다.
“무슨 상황이긴……
고개를 돌리어 켄이치를 응시하 고 있는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 소가 흐른다.
“켄이치 쇼 한 거지.”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