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권 23화
73화
계획이 모두 세워진 것 같았지만, 아직 서준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요.”
“무엇이든 말씀하시지요.”
“저를 사냥 팀의 후발대로 빼 주 셨으면 합니다.”
이미 서준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 던 넷이었지만, 다소 엉뚱한 부탁 에 강석호의 고개가 젖혀졌다.
“후발 주자로 말입니까?”
그러나 이미 예상했던 반응인지,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르 고 있었다.
“중거를 챙기려고요. 확실한 게 좋잖아요.”
힘을 가진 각성자가 세계의 결정 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지만, 이 번 싸움의 규모가 큰 탓에 단순한 싸움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여론전, 진흙탕 싸움이 될 확률 이 농후했다.
아니, 일본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무언가 간계를 꾸밀 것이었
다.
그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본 에서의 스칼렛처럼 충분한 증거를 확보해 두는 것이 좋았다.
압도적인 힘에, 확실한 증거만 있다면 귀찮은 일들을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었고 넉넉한 보상까지 받 아 낼 수 있었다.
“이 기회에 아예 싹을 잘라야지 요. 제가 숨어서 일본의 만행을 동 영상으로 남기고 있을 테니, 적당 히 연기해 주시면 좋겠어요.”
교육자로서의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일본이 이와 같은 일을 두 번 다 시 꾸밀 수 없도록 철저한 교훈을 뼈에 새겨 줄 것이었다.
서준의 저의를 파악한 강석호의 입가에도 씨익 미소가 피어난다.
“예, 혼신의 연기로 돕겠습니다.”
서준의 방 안.
침대 위에 걸터앉은 서준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요자쿠라 길드, 하이 리치와의 싸움.’
계산은 모두 마쳤고 승리는 자신 의 것이라고 확신한서준이었다.
조화경의 상급에 도달한 만큼 무 공의 선택 폭도 넓어졌으며, 그 위 력도 강력해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구옹에게 펼친 천마원 (天魔源)만 해도 SSS+라는 높은 스 킬 랭크가 매겨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 서준은 만족 을 할 수 없었다.
‘너무 약했어.’
본래 천마원의 위력을 생각한다 면 그것은 한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물론, 그 위력이 부족한 이유도 명백히 알고 있었다.
‘부족한 심(心)과 체(體).’
내공이 제법 탄탄해지고, 육체가 강인해졌다고는 하나 과거에 비한 다면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본래라면 시스템, 레벨 업을 통 하여 쉽사리 성장할 수 있는 점 때 문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을 만 한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요자쿠라 길드 원, 하이 리치와의 싸움에서 승률이 백 퍼센트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
만에 하나, 십만 분의 하나의 확 률이 발목을 잡을 수 있었다.
아무리 고양이 발길질 수준이더 라도 그것이 군세가 되고 대군이 되면 어떤 변수가 되어 곤란하게 만들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극히 낮은 확률이었지만, 이번 싸움에는 그야말로 사 활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가족, 지금의 행복을 잃을 수는 없어.’
천 년이라는 시간의 노고로 이루 어 낸 염원이었다.
어렵게 쟁취해 낸 이 행복을 무 슨 일이 있다 할지라도 지켜 낼 것 이었다.
‘하이 리치로 한국을 멸망시킬 거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애국심이라는 말이 서준에겐 크게 와닿지 않았다.
오직 한국이라는 국가에 속한, 가족이라는 말로 정의된 소중한 사
람들, 그 작은 행복이 깨지는 것이 끔찍할 뿐이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해.’
어렵게 쟁취해 낸 행복인 만큼 매우 희박한 확률마저 배제하고 싶 었다.
다행히도 방법은 존재했다.
‘천마신공의 성장.’
현재 칠성(七星)인 천마신공을 구성(九星), 흔히 일컬어 극성이자 진정한 천마(天魔)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지로 이끄는 것.
당연하지만 일반적인 무인, 천마 였다면 지금 서준과 같은 수준의
심과 체로는 감히 노려 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그렇듯 뒤로 갈수록 성장하기란 힘들었고, 극성에 이르 는 벽은 두껍고 아득했다.
하지만 서준에게는 그를 메꿀 수 있는 천 년의 기억, 경험이 있었다.
‘충분히 가능해.’
물론, 서준이 지금까지 극성의 경지를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데에 는 이유가 있었다.
극성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소의 무리를 동반해야 하기 때문 에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통이 따르
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쉽게 갈 수 있 는 경지를 굳이 아픔을 느끼면서 갈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느 정도의 고통, 불편을 감수해 낼 필 요가 있었다.
결단을 내린 서준은 자세를 다잡 으며, 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후우……
서준은 깊은숨을 몰아 내쉬며 천 천히 천마신공을 운용했다.
평소와 같은 운용이 아니었다.
일전, 흑성(黑星)을 펼쳤을 때처 럼 조화경에 이른 막대한 양의 내 공을 응집시킨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와 달리 외 부, 주먹이 아닌 체내, 아랫배의 단 전에 응집을 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천마신공은 모여드는 내공들을 홉수해 가며 덩치와 힘을 키워 간 다.
내부에 응집된 강력한 힘에, 예 상했던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끄읍......
억누르는 비명에 신음 소리가 새 어 나왔지만, 다행히도 그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오래갈 수가 없었다.
서준의 의식은 내면 깊은 속으로 소요(道 潘) 한다.
육체는 오롯이 남아 있고 떠나는 것은 오직 의식뿐이었다.
그 이질적인 과정에서 몸이 붕-뜨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지며 육 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 같았지만,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이것이 올바른 과정.’
그리고 설사, 의식이 아무리 내 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되돌아올 길을 찾을 자신 이 있었다.
때문에, 서준은 과감하게 의식을 내면 깊은 곳으로 보낼 수 있었다.
사고, 의식이 내부를 향해 간다.
그 안에는 앞을 가로막은 ‘한계’ 라는 거대한 벽이 서 있었다.
제대로 된 준비를 마치지 못하고 섣부르게 마주친 거대한 벽은 그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견고한 벽을 마주하고 있 는 서준은 두려움, 불가능을 느끼
지 않는다.
‘이미 넘어섰던, 부숴 냈던 벽이 다.’
서준은 등을 돌리어 뒤를 바라본 다.
중원 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 던 날부터 시작해, 스승이라 불렀 던 자에게 무공을 배웠었던 삶과 천마라는 위치에 올라 쌓아 온 경 험과 기억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간다.
삶(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워 왔 던 일생으로서 앞을 가로막는 적을 모조리 무찔렀다.
그 투쟁으로 가득 찬 삶을 회상 하던 서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 었다.
칠성의 경지, 구성의 끝자락을 마주하고 있는 천마, 한서준의 모 습이 보인다.
중원 대륙, 천하제일(天下第一) 이라는 칭호를 눈앞에 두고 있는 만큼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미소를 홀리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우물 속 개 구리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우스웠 다.
그러나 지금은 저 당시 경험과 기억의 도움이 필요했다.
‘부숴.’
과거의 서준이 이죽거리는 미소 를 흘리더니, 거대한 벽을 향하여 천천히 팔을 내뻗는다.
쿵!
요란한 충돌음이 터져 나오고는 금이 몇 개 갔으나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기억 속의 서준이 다소 곤혹스러 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것이 당연한 것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 자신이 될 수 없었다.
균열을 만들어 주는 것, 이 정도 의 도움이면 족했다.
‘고생했어.’
서준은 과거의 자신을 향해 감사 의 인사를 건네며 등을 돌렸다.
다시 거대한 벽이 서준을 반겨 주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견고하지는 않 다.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다소 위 축되어 있었다.
서준은 그 벽을 바라보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자신과 같은 동작 을 취한다.
오른손의 주먹을 말아 쥐며, 팔 을 등 뒤쪽으로 당긴다.
상태가 전보다 위축되었어도 벽 은 쉽사리 부서지지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벽은 그렇기에 한계라고 불린다.
그렇다고 이 벽을 부수지 못했던 가?
아니, 이보다 단단하고 더 높은 벽도 부숴 내었다.
서준이 눈앞의 벽을 향하여 전력 을 다하여 주먹을 내뻗는다.
쾅!
균열이 조금 더 번져 가긴 했지 만, 한 번으로는 부서지지 않는다.
당황할 거 없다.
애초에 한 번에 부서질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부서질 때까지!’
계속해서 주먹을 내뻗는다.
영혼체로 이루어진 그릇의 팔에서 저릿한 고통이 느껴지고 숨이 벅차오르지만, 그러나 서준의 눈동
자는 한 번도 흔들림을 보이지 않 는다.
부숴 내야 한다, 부숴 낼 수 있 다.
쾅-!
아니, 부숴 낸다!
부순다는 의지, 일념(一念)을 담 아내어 팔을 내뻗는다.
콰광-!
주먹이 닿은 벽이, 요란한 소리 를 내며 무너진다.
새로운 세계를 마주함에 따라, 의식 세계가 부풀고 확장된다.
띠링-!
[SSS급 스킬, 천마신공의 경지가 9성으로 상승합니다!]
[SSS급 무공 천마신공이 진화합 니다.]
[축하합니다! 천마신공이 SSS+급 무공으로 등급 향상되었습니다!]
[의식 세계 속에서, 종족의 최대 치로 설정된 한계의 벽을 부숴 내 었습니다!]
[위대한 업적입니다!]
[칭호, 초월자(超越者)를 획득합
니다.]
[보유 중인 칭호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만큼 습득한 ‘초월자’ 칭호가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초월자]
모든 스테이터스가 +30씩 상승 합니다.
감겨 있던 두 눈을 들어 올린 서준의 두 눈동자에는 눈이 부실 정 도의 이채가 어려 있었다.
늦은 밤, 인천국제공항.
켄이치를 비롯한 요자쿠라 길드 원들이 전용 비행기 안에서 차례차 례 내리고 있었다.
계획을 해 뒀던 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요자쿠라 길드 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선 발대로 출발을 했던 니지토라 쇼를
비롯한 요자쿠라 길드원들과의 연 락이 완전히 끊겼기 때문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한서준, 한국 쪽에서 무언가 손을 썼고 계획을 간파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당당하게 한국으로의 입 국을 허락해 주었다.
요자쿠라 창단 이래 지금까지 쭉 함께 지내올 정도로 켄이치를 매우 신뢰하는 후타로 역시 불안함을 느 끼는 것이 당연했다.
“켄이치 님, 정말 괜찮을까요?”
길드장인 켄이치, 부길드장인 사 츠키와 지로, 마지막으로 본인, 후
타로까지 S급 각성자 셋과 요자쿠 라 길드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출 전을 하였고, 더불어 하이 리치라 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만큼 국 가와의 싸움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피해가 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칫하면 요자쿠라는 부동의 1위 라는 자리를 내어 줘야 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후타로도 그 부분을 염두 에 두고 물었던 것이었다.
타당한 근심이었지만 켄이치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후타로, 내가 손해 보는 싸움을 했던 적이 있던가?”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죠.”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는 만 큼, 후타로는 묵묵히 고개를 주억 인다.
요자쿠라 길드가 단순히 디아볼 로스의 지원만으로 부동의 1위 자 리를 지켜 낼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켄이치는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전투는 애초에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금이라도 피해가 있을 것 같으면
싸움을 피하는 사내였다.
다소 비겁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달리 보자면, 지극히 현명한 자이 기도 했다.
이런 켄이치가 뻔히 보이는 한국 의 함정을 알면서도 그것에 응한 데에는 응당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전력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 친다.’
S급 각성자가 포함된 요자쿠라 핵심 길드원들, 북한에 있는 몬스 터들의 사체를 이용하여 불사의 군 단을 거느리고 있는 하이 리치.
마지막으로 한계를 돌파시켜 주
는 힘, 스킬 연옥의 과실까지 존재 했다.
때문에, 켄이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한국, 한서준이 근래 초월자(超 越者)에 도달한 강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 서는 내면의 성장, 깨달음을 필요 로 했다.
방식이 난해하고 난도가 높은 만 큼 크라운즈 나이트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 도달한 영역이었다.
‘한서준이 도달했을 리가 없다.’
켄이치도 수년간 초월자의 영역 에 도전을 하고 있기에 그 난도가 얼마나 높은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시스템의 보조를 받으며 자동으로 상승하는 레벨, 스텟과는 차원 이 다르다.’
완전히 처음 마주하는 성장의 과 제.
각성자로서 한서준의 성장세는 어마 무시했고, 시련의 산에서 엄 청난 보상을 얻긴 했겠지만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깨
달음을 얻고 초월자라는 영역에 도 달해 냈을 리가 없었다.
켄이치의 자신감이 넘쳐 나는 표 정에, 후타로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가신다.
“역시 켄이치 님! 모두 계획이 있으셨군요.”
“그러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말고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행동해라.”
“예, 알겠습니다.”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켄이치와 후타로의 입가에는 이미 승리를 확 신한 듯한, 승자의 미소가 피어나 고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