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권 22화
72화
구룡문과 요자쿠라 길드원들의 신병을 인도한서준은 곧장 여의도 각성자 협회, 그중에서도 최상충에 위치한 각성자 협회장실로 향했다.
비서가 열어젖혀 준 협회장실의 문을 통과하고 들어선 서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뭡니까?”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 석호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한 협회
장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 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불새의 우진혁, 환성의 여현진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서준은 반갑다는 듯이 맞아 주는 이들을 향해 짧게 고개를 까닥인 후에 강석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수선한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 니다. 연락을 주시기 전부터 한국 국방에 대한 중대한 사항이 있어 피치 못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터라.”
강석호가 한국 각성자 협회의 협 회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탓 에, 우진혁과 여현진 이 두 명이 협회장실에 존재하는 것까지는 충 분히 이해가 됐다.
한국 각성자에 관한 이야기라면 납득도 갔으며, 애초에 그리 놀라 지도 않았을 것이다.
“안녕.”
검은 머리가 아닌 눈이 부실 정 도로 찬란한 금발, 갈색이다 못해 붉은빛을 띠는 눈동자, 날렵한 이 목구비를 가진 스칼렛이 쾌활한 목
소리로 인사를 건네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칼렛이랑요?”
고개를 젖히며 의문을 표하는 서준의 모습에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나도 한국인이 될 거거든.”
“한국인?”
“웅, 안채형이랑 내기를 한 것도 있고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 역시 귀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 국으로 귀화할 생각이야.”
“그래?”
순간, 그 의중이 궁금했지만, 개
인의 사정을 캐물을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각성자 협회장, 강석호를 만나러 온 것은 스칼렛의 귀화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다.
서준의 시선이 강석호에게로 향 한다.
“협회장님, 혹시 북한 영토에서 근래 들어 특이한 동태에 대한 보 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돌발 질문이었지만, 강석호의 눈 은 다른 의미로 휘둥그레졌다.
“예에……. 바로 지금 저희가 나 누고 있던 이야기가 그겁니다. 극
비 사항으로 분류된 것인데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이따가 설명드릴 테니, 일 단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 주세 요.”
어차피 서준에게 도움 및 자문을 요청할 생각이었던 만큼 강석호는 망설임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사진 들을 정리해서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하이 리 치…… 그것이 결국 평양에 출몰했 다 하더군요.”
“그것도 아무런 마력 반응을 가
지지 않은 형태로 말이지. 이미 하 이 리치는 자기 군세를 엄청 구축 해 놓은 상태야.”
스칼렛이 명랑하게 말했지만,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 이 리치를 상대하기 위한 가장 쉬 운 방법이 언데드 군단을 만들기 전에 잡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마력 반응 없이 나타나 버린 탓에 하이 리치를 사 냥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를 이미 놓친 셈이었다.
정말 단순한 우연 혹은 마도구의 고장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서준 은 쇼와 요자쿠라 길드원들의 이야 기로 하여금 그 범인이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100퍼센트라고는 할 수 없겠지 만…… 아마 99퍼센트 정도는 일본 의 작품일 겁니다.”
“일본?”
협회장실 내부에 모여 있던 이들 의 고개가 갸우뚱 젖혀지는 모습에, 서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이곳에 오기 전에……
서준은 앞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
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와 조금이라도 더 쉬운 이해를 주기 위해 구룡문, 구옹과의 만남부터 쇼의 발언과 요자쿠라 길드원들의 이야기까지 전부, 면밀히 말이다.
이야기를 경청하던 여현진과 스 칼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룡문요?”
“구옹을 쓰러뜨렸다고?!”
정점이라 불리는 이들인 만큼 S 급 각성자들은 가진 힘과 파괴력이 남달랐다.
그렇기에 보통 S급 각성자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면 큰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전투가 서울에서 일어 나게 되면 각성자 협회장인 강석호 에게 필히 그 소식이 전해질 수밖 에 없었다.
굳이 이야기를 전해 듣지 않더라 도 하다못해 계속되는 스킬 사용으로 인한 마나의 파장을 느끼는 것 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방 안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그런 보고를 받거나, 파 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은 단 하나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눌러 소란 조차 없었던 것.
이미 서준은 S급 각성자들과의 전투를 통해 그 능력을 증명하긴 했지만, 구웅은 S급 중에서도 차원 이 다른 존재였다.
구룡문이 무(武) 그 자체를 갈고 닦는 문파이고, 때문에 구옹 또한 무인(武人)이라 불리는 족속으로 대인전에 특화된 스킬을 가진 각성 자였으니 말이다.
그런 구옹을 어떤 잡음도 없이 쓰러뜨린 것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A급 각성자 쇼를 비롯한 구룡문파 원들, 요자쿠라 길드원까지 깔끔히 정리해 냈다고 서준이 말하고 있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놀람은 오래가지 않 았다.
“바보가 하나 늘었네. 지금 이야 기의 핵심은 그게 아니잖아.”
우진혁의 지적에 여현진과 스칼 렛이 동의했다.
“미안. 근데 너무 놀라서 말이야. 솔직히 너도 놀랐잖아.”
우진혁도 스칼렛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크흠. 그렇긴 합니다만……
방금 전, 한서준 각성자의 이야 기를 들었을 때는 겉으로 내색하지 는 못했지만 자신도 속으로는 까무 러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한서준 각성자가 말 하고자 했던 것, 중요한 것은 바로 일본, 요자쿠라 길드의 계획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요자쿠라가 그 정도의 일을 벌인다고 말을 했 단 말입니까?”
화자가 한서준 각성자인 만큼 웬 만해서는 되묻는 행위는 없을 것이
었다.
아니, 지금 이야기를 했던 이가 한서준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콧방귀 부터 뀌었을 것이다.
국가와 국가 간의 싸움이 될 수 있는 사건인 만큼 믿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거의 99퍼센트는 확실해요.”
그러나 서준의 눈동자에는 한 치 의 흔들림도 존재치 않았다.
애초에서준이 이러한 이야기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허……
거대한 충격을 받은 듯한 우진혁 이 탄식을 흘리는 사이, 묵묵히 이 야기를 듣기만 하던 강석호가 조심 스레 입을 열었다.
“요 근래 들어서 설마 하고 있었 는데, 이로써 일본 정부와 각성자 협회가 아예 디아볼로스 쪽과 긴밀 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됐군요.”
강석호의 이야기에서준의 눈매 가 날카로워졌다.
“뭔가 짚이는 점이 있으십니까.”
“디아볼로스가 세계 각성자 협회 에서 봉인해 두었던 하이 리치의
라이프 베슬을 노획한 사건이 발생 했었습니다.”
하이 리치가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했을 때부터 의아 함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퍼즐들을 맞춰 보니 명백한 전조가 있었다.
디아볼로스가 훔쳐 낸 하이 리치 의 라이프 베슬을 일본이 받았고, 방법은 자세히 모르지만 일본이 하 이 리치를 소환해 낸 것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여현진이 거친 말을 내뱉고는 당 장이라도 책임을 물리고 찢어 죽이
고 싶어 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당장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하이 리치가 거느리고 있는 언데 드 군단의 이동 속도를 보아서는 사홀 안에는 한국 땅에 당도할 것 이었다.
찢어 죽이기 전에 요자쿠라 길드 의 간계에 당할 판이었다.
“자네 마음을 나도 깊이 공감하 네만, 일단 자중하고 하이 리치의 군세부터 처리할 방법을 세우는 것 이 어떻겠나.”
강석호는 머리를 분주히 굴려 계 획과 생각들을 다시 한번 정립해
나갔다.
처음 하이 리치가 재앙급 몬스터 로 분류된 사건이 발생한 미국 서 부에서 거느리고 있던 군세보다, 지금의 군세가 강대했다.
‘그때 당시에도 하이 리치를 상 대하기 위해서 s급 각성자 여섯이 나섰으니.’
본래라면 한국 S급 각성자도 여 섯은 되어야 했지만, 과거에서준 과 결투를 벌였던 차현성, 백승관 은 일반인, 아니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다.
그 일이 한서준 각성자와 연관되
어 있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짐작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먼저 선을 넘는 행 위를 벌였던 만큼 한서준 각성자를 탓할 수 없었고, 탓할 생각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이 리치를 상대할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디아볼로스와 일본의 입김 때문 인지, 아니면 정말 피치 못할 이유 때문인지 정확한 사정은 현재로서 는 알 수 없지만,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지원을 꺼리고 있는 상황
입니다.”
그 외의 나라들은 파티를 구성하 고 한국 땅까지 오려면 시간이 상 당히 필요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요자쿠라 길 드에서 지원의 의사를 보여서 그 부분에 대해 여기 있는 S급 각성자 들과 회의를 진행 중이었던 겁니 다.”
하지만 서준의 이야기 덕에 절대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하이 리치를 소환한 일본, 요자 쿠라 길드의 지원을 받으면 오히려 적을 늘리는 꼴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오래 머리를 맞대 구상하고 있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탓에 회의실 에 먼저 와 있던 S급 각성자 셋의 표정에 암운이 드리웠다.
그러나 서준은 전혀 주눅이 든 기세가 없었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고 있었다.
“뭐 문제 있어요? 그냥 요자쿠라 길드원들 한국으로 불러들이죠.”
“하, 하지만, 말씀만 들으면 이것 은 함정이 아닙니까?”
강석호가 고개를 젖히며 의문을 표했지만,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르자는 겁니다.”
본디 피에는 핏값이 따르는 법이 었다.
나름 일본 땅에서 뼈아픈 교훈을 새겨 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 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것 을 보면 아직 교육이 부족했나 보 다.
교육자로서 다소 안타까운 성과 였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뼛속에 각인되도록 강렬하게 새
겨 주면 그만이지.’
여유로운 서준과 달리 스칼렛은 긴장을 풀지 못했는지,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을 까?”
요자쿠라 길드와의 싸움이라면 한국이라는 국가, 한서준이 승리를 확정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데드 군단을 거느리고 있는 하이 리치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었다.
“ 흐음......
조심스러워서 나쁠 것은 없기에,
서준도 잠시 손을 턱에 괸 채로 고 민에 빠져들었다.
‘하이 리치의 군대와, 요자쿠라 길드원과 나의 싸움.’
부족했던 천마의 무공이라면 모 를까, 지금은 온전한 천마, 마선의 무공을 펼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던 서준은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개를 주억 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혀 문제 될 거 없으니까요.”
요자쿠라 길드원들이 변심할 것 을 몰랐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알고 있 다면 전혀 위협이 될 것이 없었다.
서준이 여태 보였던 자신감을 표 하는 모습에 이들의 얼굴에 드리웠 던 그늘이 가시며, 입가에 피식 미 소가 흐른다.
다른 이였다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겠지만, 여태껏 한서준이라는 인물은 항상 기적을 보여 왔었다.
‘상식을 초월한 천재.’
‘한국의 찬란한 미래를 이끌 인 재.’
‘세상의 흐름을 뒤바꿀 존재.’
각자 서준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 랐지만 서준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같았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두가 세차 게 고개를 주억였고, 그를 대표하여 강석호가 입을 열었다.
“한서준 각성자님의 말씀대로 진 행하겠습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