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권 21화
기화
“거기, 너.”
서준의 시선에 닿은 요자쿠라 길 드원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아까 쇼가 말했던 좋은 결과가 아닐 거라는 게 뭐지?”
요자쿠라 길드원의 눈빛에 깊은 갈등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충성이 깊은 것인지, 아 니면 각인된 공포가 입조차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쉽게 운을 떼
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다. 다음은 없어. 쇼가 내뱉었던 말의 진의가 무엇이지?”
두 번이나 기회를 줬음에도, 돌 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이곳에 널려 있는 게 요자쿠라 길드원이었다.
구태여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 었다.
말을 끝맺은 서준의 신형이 흩어
졌다.
“어……?”
요자쿠라 길드원이 얼이 빠진 말 을 홀리는 사이, 어느새 지척에 도 달한서준이 분주하게 손가락을 쭉 뻗고 있었다.
“분근착골이라고 좀 아플 거야.”
서준의 손가락들이 혈을 짚는 순 간, 멍하니 서 있던 요자쿠라 길드 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꾜아아악-!”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 던, 아득한 고통이 밀려왔다.
근육이 마디마디 잘게 찢어지며, 뼈가 갈라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 다.
“끄아악!”
요자쿠라 길드원이 절규에 가까 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 었다.
“아, 아는 것들은 모두 내뱉겠습 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인생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기회를 줬을 때 말을 했어야지. 안 그래?”
비릿한 미소를 홀리는 서준의 모 습에 요자쿠라 길드원의 얼굴에 진
한 그늘이 드리운다.
하지만 서준은 선택이라는 자비 를 베풀 이유도, 번복할 기회를 내 어 줄 이유도 없었다.
이윽고 요자쿠라 길드원 중 하나 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완전히 거 두고, 다음 대상을 향해 눈독을 들 인다.
“다음은……
아직 시선이 닿기도 전에, 요자 쿠라 길드원들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전, 전부 말하겠습니다! 케, 켄 이치 님이 한국을 침공해 멸망시킬
작전을 펼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꼬가 트이자 물이 넘치는 건 한순간이 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너도나도 앞다퉈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이다.
“저, 저는 더 자세히 알고 있습 니다! 북한의 몬스터 군단을 이용 해서 한국을 침공하려고 하는 겁니 다! 더, 더 궁금하신 게 있다면 최 대한 말할 테니 제발 넓은 아량으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당연하지.”
흔쾌히 고개를 주억이는 서준의
모습에, 오자쿠라 길드원의 눈동자 에 희망이 차오른다.
“감사합니다!”
요자쿠라 길드원들이 허리를 연 신 기역 자로 꺾어 가며 감사를 표 했다.
“감사할 것까지야.”
애초에서준은 여기 있는 그 누 구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감당할 수 있다고는 하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 명분을 넘겨주는 것 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비를 베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맨정신으로는 안 돼. 물 론 각성자로서도 살아가지 못할 거 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요자쿠라 길드원들이 억울하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서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처사였다.
‘굳이 후환을 남겨 둘 필요는 없 지.’
마치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이들 중 누군가가 돌연 피나는 수련을 통해 강해져 나타난다거나 초월적 인 존재와 부당한 계약을 맺어 복 수를 도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명백한 현실인 이곳에서는 만에 하나, 아니 천만분의 일의 확률이 라 해도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이 벌 어질 가능성을 남겨 둘 필요는 없 었다.
“그러게, 애초에 덤벼들지를 말 았어야지.”
한 손에는 회색빛 기운, 입가에 는 비릿한 미소를 띠고 있는 서준 의 모습에 요자쿠라 길드원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운다.
“악, 악마……
“도망쳐!”
요자쿠라 길드원들이 마침내 혼
비백산했다.
기회라 생각했는지, 뒤를 이어 구룡문의 문파원들도 잽싸게 도주 하려 했다.
그러나 서준의 속도를 따돌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구룡문의 문파원들과 요자쿠라 길드원들은 얼마 가지 못하여 절규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정신을 모두 잃었다.
화려한 용 장식과 반짝이는 보석 들이 박혀 있는 황금 의자 위, 붉 은색 도포를 걸친 채로 눈앞에 놓 인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보던 거구 의 남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심하군.”
스크린 너머에 구룡문의 문파원 들이 전부 넝마가 되어 추한 모습 을 보이고 있다고는 하나, 저들은 구룡문 내에서도 발군인 이들로 구 성된 파티였다.
특히나 구옹은 정점이라 불리는
S급 각성자였다.
함부로 홀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언행은 거침없었다.
“쯧, 생각했던 것보다 더 덜떨어 진 놈들이었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 자는 중국 최고의 각성자이자 구룡 문의 문주인 용왕, 구존(九尊)이었 기 때문이었다.
구옹을 폄하한다고 해서 누구도 뭐라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들 구존의 눈치
를 보기 바빴다.
일렬로 서 있던 흑룡, 구회(九灰) 와 황룡, 구인(九W)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어차피 구옹은 불같은 성격에 비해서 부족 한 실력을 가진 놈 아니었습니까.”
“애당초 패배를 예상하고 보내신 것이지 않습니까?”
회유라는 목적은 구옹을 파견하 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이었다.
진짜 목적은 한서준 각성자와 마 찰을 만들어 그의 진짜 실력을 보 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불같은 성격을 가진 구옹 을 그 접견자로 보낸 것도 그 이유 에서 였다.
구회가 내뱉는 말이 틀리지는 않 았지만, 구존의 미간은 여전히 찌 푸려져 있었다.
“그래, 너희들 말대로지. 구옹이 패배할 것은 상정에 있던 일이 지……
그렇기에 구옹을 혼자 보내지 않 고, 구룡문의 직속 문파원, A급에 달하는 각성자 열 명을 함께 보내 었다.
높은 등급과 많은 인원을 보낸
만큼, 한서준의 전투 방식, 본래 실 력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상을 했 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잔혹했 다.
실력을 제대로 보기는커녕, 일격 에 나가떨어지는 허무하고도 치욕 적인 패배를 겪었다.
자연스레 구존의 얼굴에 진한 그 늘이 드리웠다.
“대체 어찌 저리 강할 수 있는 것이지? 한서준이라는 놈이 정녕 현경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아닌 이상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나만
이리 생각하는 것이냐? 구룡들이 여, 너희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말 해 보아라.”
중국은 오랫동안 무(武)를 숭상 해 왔고, 단련해 왔다.
과거 무공, 무인들의 기반이 남 아 있었고 그를 나누는 명칭, 경지 또한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구존의 말에 구인이 손 사래를 치며 말할 수 있었다.
“현경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 기입니다. 그건 문주님께서도 도달 하시지 못한 경지 아닙니까?”
“그래…… 구인의 말마따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한서준이라는 한국인이 각성자로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수개월이 었다.
길다 하면 길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현경이라는 무공의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둔재, 범인들은 구태여 말할 필 요도 없었다.
세간의 찬사를 받은 천재인 구존 도 대격변이 일어나고부터 지금까 지 3년의 시간 동안 조화경의 경지 에 도달했고 현재 머물고 있는 것
이 다였다.
그런데 현경은 그것보다 더 높 고, 난해한 경지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 진 구존과 같은 이들도 오랜 시간 피나는 수련을 해야 도달할 수 있 을까 말까 한 경지가 바로 현경이 란 말이었다.
그 현경의 경지를 고작 각성자가 된 지, 수개월밖에 안 된 이가 도 달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놈이 대격변이 시작된 이후, 3년 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긴 했었다 고 듣긴 했다만.’
제법 길다고 볼 수 있는 시간이 었지만, 여전히 높디높은 현경의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만약 놈이 정녕 벌써 현경의 경 지에 도달해 있다면 역사상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이루었다고 봐야 겠지.’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구존은 고개를 내저었다.
거듭 말하지만, 정말 말이 안 되 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도 한서준이 진정 현경 의 경지에 도달한 강자였다면, 단
순히 강기를 내뻗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아직까지는 조화경의 경지 에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구존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한서준이 흘로 각종 세계기록을 경신하고 있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사실, 구존은 그 소식에 한국의 얄팍한 수작이 섞여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현재 세계의 권력자라 불 리는 이들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 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었다. 한서준이란 각 성자는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 은 초신성.
S급 각성자에 도달한 것도 모자 라, 히로아키의 스피드 런의 기록 을 압도적으로 갈아 치웠다.
교묘한 눈속임을 펼쳤고, 그럴싸 하게 이야기 속에 분명히 속임수를 섞어 뒀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럴싸한 성과들이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이상의 재능을 가
진 천재임은 부정할 수 없었기에, 백룡이라 불리는 구옹을 보내어 진짜 실력을 확인해 보려 했다.
구옹은 백(白), 흑(黑), 황(黃)이 라고 불리는 세 마리의 용 중 가장 약하다는 백룡이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간에 s급 각성자, 아니 강 기를 다룰 수 있는 조화경의 경지 에 오른 강자였다.
뿐만 아니라 A급에 달하는 각성 자인 직계 문파원들도 열 명을 추 가로 붙여 주었다.
그럼에도 패배, 아니 일방적인 굴욕을 맛보았다.
‘한서준은 재능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조화경급에서도 중수 이상의 반열에 오른 고수란 거겠 지.’
긴장감에 마른침이 꿀꺽- 목울대 를 타고 넘어갔다.
‘만약 한서준이 지금처럼 계속 더 성장해 나간다면 훗날에는 얼마 나 대단한 자가 된다는 거지?’
개월이 아닌, 연 단위의 시간이 지난다면?
지금까지 지켜보고, 겪어 본 한서준의 재능을 생각하면 분명, 현 경의 경지에 도달해 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머지않아 한국이 라는 나라, 한서준이라는 각성자를 감당할 방도가 없었다.
세계 서열, 패권이 크게 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지금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패자(©者) 중 한 명인 구존의 입장에서는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귀찮지만 직접 손을 써 둬야겠 군.’
결단을 내린 구존이 의자에서 몸 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한국으로 향할 테니
비행기를 준비시켜라.”
갑작스러운 구존의 명령에 수하 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지금 말이십니까?”
구존은 권위에 있어서 가장 드높 다는 문주였다.
당연히 명령을 거부하는 것을 몹 시 싫어했다.
이미 수년간 함께해 온 문파원들 이 이를 모를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문을 한 데 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구존의 고개가 젖혀진다.
“문제가 있나?”
구회, 구인이 구존의 눈치를 봐 가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디아볼로스, 의회에서 나선다 했습니다.”
“이번에 노획한 라이프 베슬을 켄이치 놈에게 넘겨서, 북한에 하 이 리치를 되살려 한국을 멸망시킨 다 했습니다.”
구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일본에서 한 방 크게 먹어서 그 런가, 의회 놈들이 아주 작정을 했 나 보군.”
하이 리치, 그것은 미국 서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재앙급으로 분 류된 몬스터 중 한 마리였다.
부르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다시 피 하이 리치는 강력한 수준을 넘 어서 재앙에 가까운 존재, 몬스터 였다.
“혹여나 문주님께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 반기를 든 것을 용 서하여 주십시오.”
확실히 귀찮아질 만한 일이었다.
죽지는 않겠지만, 여러모로 크고작은 싸움에 얽히거나 괜한 말들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쯧, 재능이 출중한 무인인 만큼 그래도 기왕이면 회유를 하고 싶었 다만……
디아볼로스와는 어디까지나 동등 한 파트너 관계, 명령을 내릴 만한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회유하실 생각이셨다면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닌지요?”
“잘됐다고?”
“만약 재앙급인 하이 리치를 사 냥하고 살아남는다면 손을 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래 들어서 의회, 디아볼로스 쪽에서 선을 넘는 행위를 계속해서 벌여 왔다.
당장 지금만 해도 동아시아에 재 앙급 몬스터인 하이 리치를 풀어놓 으면서 아무런 보고, 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룡 문, 구존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 는 것은 의회와 정면에서 맞붙기에 는 힘이 살짝 모자란 탓이었다.
그러나 재앙급 몬스터인 하이 리
치를 잡아낸 각성자와 손을 잡으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었다.
‘의회 놈들도 더 이상 우리를 얕 잡아 볼 수 없겠지.’
설사 한서준이 잡아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성장세가 상식을 초월할 정도인 만큼 어차피 회유에 실패하게 되면 한서준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다소 아쉽긴 했지만, 손안 대고 코를 풀게 되었다는 말 이었다.
그에 비해서 구존이 얻을 것은
상당했다.
켄이치, 디아볼로스가 북한에 하 이 리치를 풀어놓았다는 것은 세계 적으로 크게 회자될 사건이었다.
치명적인 약점을 쥐게 되었다는 말이다.
뭐든 문주의 입장에서는 좋은 카 드가 한 장 생기는 셈이었다.
물론, 긴장을 완전히 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말에 따라 앞의 계획은 무르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한서준에 대한 경계를 늦추 지 말고 항시 정보를 수집해 두도
록 하여라.”
“받들겠나이다.”
구존의 명령에 구룡문의 일원들 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