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권 11화
61 화
과감하다 못해 도를 넘어선 히로 아키의 제안에 시게미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 십니까?”
일본 내에서 타국 S급 각성자의 사망은 선수, 시험의 종목 교체와 같은 자잘한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들키게 된다면 말 그대로 끝, 설
사 들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간 힘들게 쌓아 놓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의 이미지, 타국과의 신뢰 관 계가 단박에 무너지며 모든 외교에서 고립이 될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세계 각성자 협회의 표적이 되며 전 세계를 적으로 돌 려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로아키는 이미 결단을 내렸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 였다.
“어차피 우리 일본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입 니다.”
지금까지는 일본과 한국의 국력 이 엇비슷해서 주변의 다른 국가들 이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 고 있었다.
“하지만 한서준이 성장하여 세계 제일을 논하게 된다면 언제 그랬냐 는 듯 모두 한국 쪽에 붙으려 할 것입니다.”
히로아키의 말에 시게미치도 입 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히로아키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쐐기를 박아 넣었다.
“사태를 방관하고 책임을 미뤄 가며 천천히 목을 조여 오며 다가 오는 죽음을 맞이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위험하지만 우리의 목을 조 여 오는 한서준을 제거해서 조금이 라도 활로를 찾아가시겠습니까? 선 택을 하시지요.”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를 고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시게미치는 대답을 내뱉 을 수 없었다.
“크흠......
불과 며칠 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 결과는 그야말로 대 실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참 동안 고민을 하던 시게미치 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한서준을 확실하게 제거할 만한 방법은 있습니까?”
이번 스피드 런에서 모두가 경외 할 만한 기록을 세워 냈으며, 동시 에 대인전에서 같은 S급 각성자인 차현성을 단 두 번의 공격으로 제 압해 내기까지 한 실력자였다.
과거 크라운즈 나이트에 올랐던 히로아키라 할지라도 한서준을 혼 자서 감당해 낼 수는 없었다.
히로아키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피어났다.
“지금과 같이 만약의 상황을 대 비하여 일본 각성자 협회에서 암부 (暗部)들을 비밀리에 육성해 두었 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히로아키의 대답 에 순간, 시게미치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실패의 쓴맛 을 본 만큼 선뜻 제안을 수락할 수 는 없었다.
‘자고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하는 법이지.’
시게미치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 으로 물었다.
“세계기록 경신으로 한창 세간의 시선이 쏠려 있는 상황인데 정말로 아무런 잡음 없이 확실하게 처리하 실 수 있겠습니까?”
시게미치는 의심이 많은 사내인 만큼 단순한 대답으로는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히로아키는 시게미치를 설 득할 방법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이 런 제안을 건넨 것이 아니었다.
“일전에 해외에서 구매하였던 SS 급 스킬, 퍼펙트 큐브의 사용법을
암부들에게 습득시켜 두었습니다.”
“과연 자신감을 표출할 만하시군 요.”
퍼펙트 큐브는 마나를 능수능란 하게 다루는 S급 각성자가 개발해 낸 결계형 스킬이었다.
효과는 결계를 두른 지점을 완전 히 다른 공간으로 가두어 외부에서 그 마나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 게 하는 것이었다.
전투의 여파로 인한 소란이 생기 지 않을뿐더러, 번거로이 시체를 처리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무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결단올 내린 시게미치가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밤, 9시부터 10시까지 외 무부의 사람들을 움직여 한서준을 제외한 S급 각성자들과의 식사 자 리를 마련토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호텔 내부의 경비들도 최대한 으로 줄여 놓아 보도록 하겠습니 다.”
마침내 시게미치의 허락과 지원 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한 히로아키 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저와 암부들이 반드시 한서준의
수급을 베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밤, 서준의 호텔방.
푹신한 소파 위에 몸을 기댄 채 로 명상에 잠겨 있던 서준이 두 눈 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드디어 왔네.’
어둠 속에 숨어서 은밀히 접근해
오고 있는 기척을 확인한서준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흐르기 시작 했다.
누구인지 생각을 해 볼 필요도 없었다.
호텔에 묵고 있던 자신을 제외한 S급 각성자들이 오늘 밤, 갑작스럽 게 식사 일정이 생겼다면서 방을 비운 상태였다.
이것이 단순한 실수 혹은 우연일 리가 없었다.
‘일본 정부와 협회 쪽에서 손을 썼겠지.’
서준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난 후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은밀히 다가오고 있는 정체불명 의 이들이 평범한 대화를 위해서 찾아왔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바깥에서 느껴지는 기척 이 하나둘 늘어 가더니, 어느덧 스 물에 달하는 인원들이 도둑고양이 처럼 살금살금 기척을 죽이며 다가 오고 있었다.
나름대로 애써 기척을 숨긴다고 숨기고 있었지만 서준의 입장에서 는 우스운 수준이었다.
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
다.
“괜한 헛수고 하지 말고 그냥 들 어와.”
예상치 못했는지, 일순간 적들의 움직임이 멈췄지만 얼마 가지 않아 서 신속하게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 내부로 진입을 해 오 는 이들은 없었고, 주변을 에워싸 며 기운, 내공을 흩뿌리고 있을 뿐 이었다.
기감을 퍼뜨려 적들의 동태를 살 피던 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 결계?’
제대로 사용할 줄은 몰랐지만 제
갈세가에게 호되게 당해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적들이 설치하고 있는 결계 는 환각, 환청과 같은 혼란에 중점 을 준 거보다는, 공간을 분리하는 데 중점을 둔 결계였다.
세간의 눈, 소란을 방지하기 위 해서 이런 번거로운 작업을 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막을 방도가 있었지만 굳이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서준의 입가에는 환한 미 소가 흐르고 있었다.
‘알아서 수고를 덜어 주겠다는데
굳이 초를 칠 이유가 없지.’
서준은 싸움을 걸어온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하지만 전투의 여파로 괜한 소란 이 일어나서 시선이 쏠리게 되면 의도치 않은 자비를 베풀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사전에 방지해 준다 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 이었다.
여유로이 팔짱을 낀 채로 서 있 자, 얼마 가지 않아서 방이 들썩거 리며, 일대의 기(氣)가 요란스럽게 움직인다.
이내, 눈부신 빛과 함께 방금 전 까지 눈에 보였던 화려한 스위트룸 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라비 틀어진 황무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익숙한 얼굴 의 사내, 히로아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리석군. 우리의 기척을 느꼈 을 때 방 안에서 말뿐인 허세로 위 협을 가할 게 아니라 바로 도망을 쳤어야지.”
히로아키가 무언가 큰 착각을 하 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귀찮게 설명해 줄 이유나 생각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사과 나 대화를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 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히로 아키의 입가에 흐르는 비릿한 미소 는 대답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서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다.
“이번 선택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겠어?”
“후회할 일이었다면 시작조차 하 지 않았겠지.”
칼 같은 히로아키의 대답에서준 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오
른팔을 들어 올리며 검지를 길게 내뻗는다.
“착각하지 말고. 너 말고 뒤에 있는 애들한테 물어보는 거야.”
서준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 는다.
“모든 선택, 일에는 대가가 따르 는 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 싸우고 싶지 않은데 히로아키한테 억지로 끌려온 거면 뭐라 안 할 테니 지금 이라도 빠져. 나도 애꿎은 피해자 는 만들고 싶지 않거든.”
일본 정부와 협회 사람들을 좋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싫어하는 것 은 아니었다.
‘상사의 명령 혹은 피치 못한 사 정으로 끌려온 이들이 있을 수도 있어.’
적어도 그들에게 직접 선택을 내 릴 권한을 내어 줄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서준 이 베풀고 있는 자비를 위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미X놈, 주변에서 잘났다고 떠받 들어 주니 완전히 현실감각이 사라 졌나 보군.”
“자신감이 과하군. 혼자서 우리 전부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는 건가?”
오히려 조롱 섞인 말들을 토해 내며 서준을 욕하고 있었다.
“다들 자진해서 온 거라 이거 네.”
서준의 눈동자가 겨울날의 얼음 장보다 차가워진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거대한 살의 에 히로아키를 비롯한 검은 복면인 들이 잽싸게 자세를 다잡는다.
“포위해!”
“훈련해 왔던 대로 천천히 조여 들어가라!”
검은 복면인들은 그간 제법 고된 훈련을 해 왔는지, 황급히 자세를 다잡으며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펼쳐진 포위망도 상당히 촘촘하 면서도 단단했다.
물론, 서준의 기준점에서 보자면 한참이나 미숙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럼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됐다는 거네.”
말을 끝맺은 서준이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한 발, 세 발, 이
윽고 다섯 번째 발걸음이 땅에 닿 는다. 방금 전까지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던 신형이 자취를 감춘다.
콰직-!
갑작스레 육중한 소리가 터져 나 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히로아 키가 자랑했던 암부의 신형이 허공 을 노닐고 있었다.
“일단 하나.”
분명, 목소리는 들려왔지만 고개 를 돌린 곳에서준의 신형은 보이 지 않았다.
“이게 무슨……
쫓아가기는커녕, 눈으로도 좇을
수 없는 어마 무시한서준의 몸놀 림에 암부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며, 당황을 숨기 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로아키는 오랫동안 일 본 각성자 협회장, 리더이자 구심 점이라 볼 수 있는 직책에서 활동 해 온 경험이 있는 만큼 빠르게 지 시를 내렸다.
“당황하지 말고 등을 맞대고 방 어 진형을 갖춰라!”
지금 히로아키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도 현명한 지시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까지나 상식 안에 존재하는 이들에
게만 먹힐 만한 것이었다.
“너무 늦었어.”
바로 옆, 귓전을 파고들며 들려 오는 스산한 목소리에 팔뚝에 닭살 이 돋아난다. 암부의 일원 중 한 명이 황급히 발을 놀리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이런 느릿한 발걸음 으로 서준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느려.”
허겁지겁 도망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활짝 열려 있는 암부의 옆구리를 향해 꽈악- 말아 쥔 주먹 을 내질렀다.
콰광-!
육중한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지 는 순간, 히로아키의 신형이 바닥 에 처박히며 입에서는 막대한 양의 피가 쏟아진다.
“끄어 억!”
앞서 펼쳐진 광경을 지켜보고 있 던 히로아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 웠다.
애써 키워 낸 부하들이 우후죽순 쓰러져 나가고 있는데 서준의 움직 임조차 읽지 못하고 있었다.
생애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던 무력감과 거대한 공포라는 감정이 전신을 옭아매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