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권 5화
55 화
펜트하우스는 시작에 불과했다.
천 년에 달하는 시간을 방황하고 헤매 온 만큼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더 많은 것을 누릴 생각이었다.
“이제는 어머니 아버지 건강도 제가 다 챙길 테니까요. 이제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거예요.”
자신감 넘치는 서준의 말에 부모 님의 얼굴에도 뿌둣함과 안도가 어 린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걱정이 피어 오르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 뭐야, 환단인가 뭔가 하는 거, 필요 없다. 우린 아들 삶이 우 선이고 그게 최고의 선물이란다. 너무 무리할 거 없단다.”
무릇,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귀한 것을 누리려거든 그만한 대 가는 무조건 따르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S급 각성자들도 탐 낸다는 보물인 영약을 얻는 길이 쉬울 리 만무했다.
“네 엄마랑 아빠는 무공인가 뭔 가 하는 그런 거 익혀서 더 오래
사는 것보다는 네 행복이 더 우선 이란다.”
“그러니까, 억지로 할 필요 없단 다.”
서준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참, 억지로 하 는 게 아닌걸요.”
단순히 환단 때문에 시련의 산에 등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무인(武人)으로서 무를 갈고닦고, 육체를 단련해 가는 쾌감이 좋은 만큼 시련의 산이 주는 과제, 보상 이 탐나기도 했다.
“그리고 저, S등급 각성자예요.
그것도 제법 강한 각성자요. 그러 니까 저한테는 힘들 게 없어요. 제 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고 하셨 죠? 제 행복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서연이와 함께 건강하게 살아 가는 데서 나오는걸요.”
온연한 진실이기에서준의 눈동 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눈동자를 통하여 굳은 마음이 한석훈, 양정화 두 사람에게 전해 진다.
평생 챙겨 줘야 할 거 같았던,
아이 같던 아들이 이제는 듬직한 한 명의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 다.
벅찬 뿌듯함과 행복감이 밀려왔 다.
“정말 고맙구나.”
“혹시나 힘이 들거든 언제든지 말해도 된단다, 아들. 아빠랑 엄마 가 이해 못 할 사람 아니잖니. 알 지?”
언제나 자식들을 걱정해 주는 따 뜻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예, 정말 힘들면요. 지치면 말씀 드릴게요.”
서준이 당차게 대답했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
진심 어린 응원과 격려에 몸속에서 힘이 불끈- 솟아나고 있었다.
이런 상태면 불가능한 일 따위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어떠한 시련이라 할지라도 서준을 꺾을 수 없었다.
오만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한번 만물을 자기 무릎 아래에 뒀던 최강의 마선이었다.
그 앞길을 막는 자 모두 부서지
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
진정으로 바란다면 이루지 못할 것은 서준에게 존재치 않았다.
그런 서준의 눈동자가 시련의 산 이라는 목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천 국제공항.
차현성을 쓰러뜨린 이후 인기가 수직 상승하고 있는 만큼 서준은 일본으로 출국하는 과정에서 상당 히 애를 먹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상당히 수 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석호 협회장 과 경호가 수월하게 만들어 준 것 이었다.
“한성 그룹 전용기니까요. 필요 한 거나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바 로바로 말씀만 하세요.”
“복잡한 절차에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협회의 이름으로 모든 심사 를 프리 패스할 수 있도록 조치했 습니다.”
정부 기관에 버금가는 힘과 막대 한 자본. 둘의 합작으로 출국 시 겪게 되는 불편함 하나 없이 출국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출국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의 편리한 일 처리를 위 해 안채형이라는 고급 인력까지 붙 여 줬다.
안채형은 비록 각성자는 아니었지만, 협회 내에서 실무 능력을 극 대로 보여 준 자였다.
전문 인솔자가 될 자격은 차고 넘쳤고, 본인도 기꺼이 지원했다.
물론, 서준의 입장에서는 과거 서대문구 검문소에서의 일화 탓에 처음에는 조금 껄끄럽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해 보면 불 편한 감정을 굳이 느껴 볼 필요는 없었다.
‘이제 뭐, 둘러댈 일도 없으니까.’
안채형 쪽도 그날의 일에 대해서 트집 잡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허리를 기역 자로 꺾은 인사를 건네 오는 정중한 대
우를 보이고 있었다.
“일본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오는 게 고우면 가는 것도 고운 법이었다.
극진한 안채형의 태도에서준도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배려 덕에 몸은 편했지만, 마음 까지 완전히 놓을 순 없었다.
서준은 강석호 협회장과 경호의 얼굴을 번갈아 본 후 조심스레 입 을 열었다.
“그럼, 아까 말했던 것들 잘 좀 부탁드릴게요.”
차현성과의 대결로 가지고 있는 힘과 위엄을 세간의 뇌리에 각인시 켰지만, 상식을 벗어난 이들은 세 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잃을 것 없는 자들이 흉계를 품 고 가족에게 해코지할 수 있는 만 큼 강석호 협회장과 경호에게 보호 요청을 해 둔 것이었다.
“협회의 정예들로 꾸려 뒀으니 가족 건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 다.”
“여동생분은 제가 항시 옆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형님은 그저 마음 편히 다녀오십시오.”
강석호 협회장, 한성 그룹의 후 계 후보자 김경호, 두 사람 다 제 법 뛰어난 능력, 권력을 가진 사람 들이었다.
특히나 그 본거지인 한국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든든한 대답에 불안한 마음이 조 금이나마 해갈되었다.
“두 사람만 믿을게요.”
강석호와 김경호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할 테니 까요!”
마침내 서준의 얼굴의 그늘이 사 라지는 순간, 때마침 안채형이 입 을 열었다.
“관제탑에서 오케이 사인 떨어졌 다고 하니까, 바로 들어가셔도 됩 니다.”
고개를 주억인 서준은 캐리어를 손에 쥐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이윽고, 서준은 시련의 산이 존재하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
입국도 출국과 마찬가지로 일사 천리였다.
세계 각국의 S급 각성자들이 집 결되는 만큼 일본에서도 신경을 써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무런 차질 없이 손쉽게 입국 심사를 치를 수 있었다.
마지막 관문인, 공항 게이트를 마침내 빠져나오자 안채형이 자그 마한 이어폰을 건네며 말했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준비해 왔 습니다. 마정석으로 제작한 통역기 입니다.”
마정석은 아티팩트 제작, 대체 자원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실생활 에서도 다용도로 이용되고 있었다.
물론, 가격이 비싸고 쉬이 구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였지만 대신 그 성능 하나만은 확실한 제 품이었다.
일본어를 익히지 않은 서준의 입
장에서는 참으로 필요한 물건이었 기에 사양 않고 건네받았다.
“잘 쓰겠습니다.”
이어폰을 착용하고 입국 심사장 으로 걷자 검은 정장을 입은 이들 이 곧장 달려들 듯 다가왔다.
그중에서 우락부락한 사내가 인 사를 먼저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한서준 각성자님. 이번에 안내를 맡게 된 미치오라고 합니다.”
정중한 인사와는 달리 미치오의 눈매는 빠르게 서준을 위아래로 훑 고 있었다.
마치 사람을 가늠하고 품평하는 듯한 눈빛을 받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 시선을 읽은 안채형이 미치오 의 시야를 가로막고는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미치오 씨. 그런데 저희 한서준 각성자님이 비행을 막 마치신 상태라 피곤하셔서 휴식이 먼저일 거 같네요. 호텔로 이동할 차량으로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만.”
안채형의 난입에서준을 훑어보 던 미치오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삽시간에, 굳은 표정으로 돌아온 미치오가 고개를 주억였다.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지금 바 로 안내해 드리죠.”
미치오가 눈짓을 보내자 뒤편에서 있던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일 자로 길을 터 줬다.
그 길을 따라서 공항을 빠져나오 자, 집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영화 에서나 볼 법한 길고 고급진 리무 진의 뒷문을 열어 주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편하고 안전하게 모 시겠습니다.”
차량 내에 사람들이 무사히 안착
한 것을 확인한 기사가 운전대를 쥐며 말했다.
“출발하겠습니다.”
S급 각성자들의 편의를 위해 대 기해 놓은 고급 리무진이라 그런지 시동을 걸고 출발했음에도 흔들림 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부의 소파부터도 차원이 달랐다. 과장 좀 보태면 앉 자마자 잠이 솔솔 올 정도였다.
여러모로 상당히 편한 차량이었지만 몸과 달리, 마음은 그리 편치 는 않았다.
백미러를 통해 감시하고 있는 미
치오의 눈빛 때문이었다.
서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정말로 나를 가늠하려 하고 있 네.’
아까 전 미치오의 시야에 불쾌감 을 느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치오의 눈에서린 기운이 체내 로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저런 기운이 체내로 침범하게 되 면 벌어질 일은 굳이 안 겪어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공의 양과 육체의 상태와 관련 된 정보들을 빼 갈 것이었다.
아예 일면식도 없는 이, 하물며 외국인에게 품평을 받고 싶지는 않 았다.
서준은 몸 주변에 호신강기를 둘 러 미치오의 기운을 전부 쳐 냈다.
백미러에 비치는 미치오의 미간 이 가늘어졌다.
“근처에 몬스터나 적이 있는 것 도 아닌데 너무 경계하실 거 없이 편히 계셔도 됩니다.”
속 보이는 미치오의 말에서준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흘렀다.
“아, 몬스터는 없는 거 같군요. 대신에 눈으로 무는 모기 한 마리
가 영 거슬리네요. 위이이잉 하고.” 서준은 말을 내뱉으며 의도적으
로 미치오의 눈동자를 응시한다.
정곡을 찔렸는지 미치오는 입을 꾹- 닫았다.
엔진 소리를 제외하고서는 차량 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멈춰!”
다급한서준의 외침에 운전기사 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에 리무진이 마치 겨울철 빙판을 밟은 듯 미끄 러졌다.
운전기사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준을 바라보았지 만, 이내 정면에 펼쳐지는 상황을 본 뒤로는 그 외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대한 육신을 가진 B급 몬스터 늪지대 트롤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협회에서 괜히 지성이 없는 몬스 터들이 즐비한 게이트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게이트로 갈 수 있듯이 몬스터들도 게이트를 통하여 지구 로 언제든 올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쿵!
거대한 늪지대 트롤 무리들이 백 주 대낮의 도로 위로 돌진해 왔다.
안채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최악이군요.”
늪지대 트롤은 소리에 가장 민감 했다.
도로 위 차량의 엔진 소리가 기 폭제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엔진 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트롤 정도의 고등급 몬스터를 처 음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꺄아악-! 도와주세요!”
“으악, 아아악! 괴, 괴물이야!”
소리를 들은 트롤들이 더욱 흥분 해 날뛰었다.
쿵! 쿵!
거대한 육신의 트롤들이 발을 내 디딜 때마다 지면이 울렸다.
트롤들이 내뿜어 내는 위압감은
순식간에 거리를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차량들은 서로 얽히면서 사고를 만들어 내고, 그로 인해 생긴 장애 물로 대피로가 차단돼 그야말로 지 옥도가 펼쳐졌다.
“아악!”
“살, 살려 주세요.”
도로 위가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 득 차기 시작할 때쯤, 근처에 설치 된 가로등에서 뒤늦은 대피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피하십시오, 대피하십시오.
나리타 공항 근처에서 발생한 B급
게이트에서 늪지대 트롤의 등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신 속히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 시 한번…….
안내 방송을 들은 미치오는 곧장 허리를 숙여 서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 왔다.
“죄송합니다. 즉시 우회할 수 있 는 길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 보이는 시민들, 아비규환의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 우리 아이 좀 구해 주세 요, 제발……!”
“ 엄마아-!”
혼란 속에서 엄마가 아이의 손을 놓쳤지만, 인파로 인해서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뭐 해, 빨리 차량 돌리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모자의 모습에 운 전기사가 머뭇거렸지만, 이내 마지 못해 핸들을 꺾으려던 참이었다.
서준은 황급히 손을 뻗어 운전기 사의 행동을 제지하고는 미치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사람들은?”
“운명 아닐까요? 아니면 한서준
각성자님께서 저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주시렵니까?”
말을 내뱉는 미치오의 입가에 비 릿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힘을 숨기지는 못하겠지.’
괜히 미치오가 S급 각성자들의 안내인으로 배정된 것이 아니었다.
SS급 스킬, 써드 아이 (3rd eye)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의 각성자 협회의 알력 때문 에 어쩔 수 없이 시련의 산에 초청 권을 각국으로 보내야 하는 신세였 지만, 자국의 것을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추가 시험을 내걸었고, 그때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국의 각 성자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각성자 한서준은 곧장 그 를 눈치채고 방어막을 쳐 그것을 사전에 차단해 버린 것이다.
들었던 대로 마나의 조율에 상당 히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에서는 결국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인간의 성품은 변하지 않는 법이 었다.
각성자 한서준은 자국 내에서 영 웅이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선한 존재.
가진 능력이 간파당할 것을 알면 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미치오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백미러를 통해 서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되 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서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어이 선을 넘네.”
“ 네?”
“어금니 꽉 깨물어.”
서준의 말에 미치오가 황급히 팔 을 올리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파악-!
망치로 가격당한 듯한 거대한 충 격과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