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권 13화
38화
원래도 공성엽은 일반적인 각성 자들과 다르게 콧대를 높이는 이는 아니었지만, 서준과 경호의 활약 이후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겸손해졌다.
“그, 그럼, 저기 계신 한서준 님 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다섯 번째 S 급 각성자의 잠재 능력을 지닌 분 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냥 S급이 아니고 한국, 아니, 세계 제일에 우뚝 서실 분이죠.”
허무맹랑하게 들릴 법한 경호의 말도 공성엽은 진중한 태도를 취하 고 있었다.
“영광입니다. 나중에 헤어지기 전에 사인 한 장 부탁드려야겠습니 다.”
길을 걷고 있는 서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거참, 낯부끄럽게……
천마 시절에도 그랬지만 바로 앞 에서 저런 칭찬들을 듣는 것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두 사람의 대화를 중 단시킬까 진지한 고민이 들 정도였
다.
다행히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졌다.
땡, 땡, 땡-!
귓전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들어왔네.’
한창 중원 대륙을 정벌해 갈 때, 제갈세가에서 펼친 주술과 진법들 에 발목이 잡힌 적이 있었다.
‘그때 너무 화가 나서 상당히 많 은 공부와 수련을 했었지.’
하지만 그 열의가 무색하게 주술
쪽에는 큰 재능이 없는 탓인지 무 공만큼 쉽사리 익히지를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시간은 배신하지 않아 기초 주술 정도는 배울 수 있었다.
지금 머릿속에 울린 종소리도 그 중 하나였다.
기초적인 주술인 만큼 임의로 정 해 놓은 경계선을 넘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술사에게 알림을 주는 기능 이 전부였다.
비록 세세한 정보들은 알 수 없 었지만, 지금, 이 게이트에 쳐들어 올 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암살자, 빌런.’
서준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흘 렀다.
이 순간을 위해 걸어온 길에 펼 쳐 놓은 주술이 한 가지 더 있었다.
‘ 영범귀곡술(領犯鬼哭術).’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사람 이 경계선을 넘어오면 아주 큰 소 리가 나게 하는 주술이었다.
이 게이트에서 이만한 큰 소리가 난다면 귀가 좋은 트롤들은 전부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실력에 비해서 워낙 큰 소리를 형편없이 욱여넣은 만큼 완성도가 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초밖에 터득하지 못한 형편없 는 실력이었기에 영범귀곡술을 펼 쳐 놓은 지점은 기(氣)의 흐름을 뒤틀고 있어 조금만 집중해도 그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 았다.
게이트 내부는 원래도 기의 흐름 이 요동치는 곳이었다.
숨으려거든 인파 속으로 가라는 말이 있듯, 원래 기가 요동치는 곳
에서 술법으로 기를 요동시킨다고 한들 이질감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 이다.
‘꼼짝없이 걸려들겠지.’
지금과 같은 컨디션이라면 정면 승부에서도 무난하게 승리를 쟁취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함정에 빠져서 체력이 고 갈된 상황이라면 구태여 말할 필요 도 없었다.
어느새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 소가 흐르고 있었다.
*
앞을 향해 나아가던 서강석이 조 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뒤를 따르던 빌런들이 발걸음을 일제히 멈춰 서고는 주변을 경계했 다.
주변에 위협이 없음을 확인한 서 강석이 마침내 들고 있던 손을 내 렸다.
그러자 뒤편에 있던 B급 빌런, 임세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 이렇게까지 조심스럽 게 가야 할까요?”
서강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 했다.
“방심하지 마라. 데니아 리의 파 티를 깨부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는 놈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물론, 자그마치 A급 빌런인 서강 석이 단순히 한서준의 전력이 불확 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조심스레 행 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 이상해.’
처음 게이트에 입장했을 때 마나
의 흐름이 기묘하게 뒤틀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워낙 미세한 만큼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콕- 집어낼 수 는 없었다.
‘근데 이 앞은 기이할 정도로 마 나의 흐름이 뒤틀려 있다.’
본능, 날카로운 감각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오고 있는 만큼 최대한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거리가 너무 벌어지면 수호자를 상대할 때 개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서강석은 말없이 손에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4 흐음......
임세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실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한서준을 상대하는 것은 변수를 최 대한 줄이기 위해서라도 게이트 공 략 중 가장 힘들다는 수호자 사냥 때 이루어져야 했다.
‘단순한 기우에 그 절호의 기회 를 놓칠 수는 없지.’
생각해 보면 마나의 흐름이 꼬이 는 것은 게이트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결단을 내린 서강석이 고개를 주
억였다.
“지금부터 속도를 올려서 추격한 다.”
서강석의 명령에 빌런들이 과감 히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크아앙-!
귓전이 아릴 정도로 거대한 포효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서강석을 포함한 빌런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 젠장.”
단순히 귀가 아파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늪지대의 트롤은 소리를 듣고 모 이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큰 소리가 울려 퍼진 이 후의 상황은 굳이 상상해 볼 것도 없었다.
쿠워!!
트롤들이 흉포한 소리를 내지르 며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임세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 다.
“전방의 트롤 두 마리가 우리를 인지한 것 같습니다.”
뛰어난 파티인 만큼 당장은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수 준이다.
계속해서 전투 소리가 퍼지면 일 대의 트롤들이 전부 이곳으로 몰려 올 것이다.
화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 도 달려오는 트롤들을 계속해서 상 대하다 보면 지치게 될 수밖에 없 었다.
전투가 길어진 후에도 트롤을 일 격에 쓰러뜨릴 화력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상대해야 할 적은 트롤뿐
만이 아니었다.
함정을 파 놓은 한서준까지 생각 해야 했다.
‘달려오는 트롤들을 일격에 몰살 시켜 힘을 비축해 둬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였지만, 현실적인 장애가 있었다.
트롤들이 전부 몰려올 때까지 버 틸 수 있는 탱커의 부재였다.
그늘진 임세찬의 얼굴과는 달리 서강석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흐르 고 있었다.
“같지도 않은 수작을 부려 뒀 군.”
제법 머리를 굴리긴 했지만 수준 이 너무 낮았다.
‘고작 트롤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적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혹은 사 살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함정이 었다.
당연히 본인이 생각하기에 빠져 나오기 힘들거나 치명적인 함정을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렇기에 준비해 놓은 수준으로 적의 실력과 능력도 알 수 있는 법 이었다.
결과로, 예상을 밑도는 한서준의
능력에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끽해야 트롤을 상대로 고전하는 전형적인 B급 수준에 불과하겠군.’
서강석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당황할 거 없다. 내가 시선을 끌면서 한곳에 모을 테니, 그사이 에 한 번에 끝낼 화력을 준비해 둬 라.”
불괴암(不壞巖)이라는 별칭이 괜 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서강석은 SS급 스킬, 지강개갑 (至剛鏡甲)이라는 뛰어난 방어 스 킬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이런 트롤들의 공격으로는 서강석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와라-!!”
일대를 혼드는 함성에 쇄도하던 트롤들이 서강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육중한 주먹들이 쏟아 졌지만, 서강석은 작은 자상조차 입지 않았다.
“간지럽구나!”
서강석은 계속 분주히 발을 놀리 더니, 끝내 근방에서 몰려오던 트 롤을 전부 몰아냈다.
“준비는 끝났겠지?”
서강석의 물음에 뒤에 있던 빌런 들이 답했다.
“네! 이쪽입니다!”
고개를 돌리자 넓은 공터를 둘러 싼 채로 화력을 퍼부을 준비를 하 고 있는 부하들이 보였다.
이번에 구성한 파티는 디아볼로 스 한국 지부 내에서도 오랫동안 합을 맞춰 왔던 빌런들인 만큼 화 력이나 팀워크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
서강석은 곧장 땅을 박차며 달렸 다.
타닥-!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를 눈으로 확인하며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셌다.
‘9…… 7…… 6.’
어느덧 부하들이 있는 공터 주변 에 도착했다.
서강석이 등을 돌리어 맹렬한 기 세로 트롤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마 지막 카운트를 헤아렸다.
‘4…… 2, 1!’
이윽고, 서강석의 입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지금.....♦!”
그 순간, 귓전에 처음 듣는 목소 리가 울렸다.
“수고 많았어.”
그것에서강석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서강석이 황급히 소리가 난 방 향,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하늘에서 부유하고 있 는 검은 신형이 있었다.
“천굉지뢰.”
떠오른 검은 신형이 지상에 당도 하는 순간, 미사일이 터진 듯한 폭
음이 터져 나왔다.
콰과광
그리고 그 검은 기운이 트롤들과 주변의 모든 생명체들을 전부 집어 삼켰다.
갑작스레 눈앞에 펼쳐진 살육에서강석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무슨……
그사이, 검은 연기의 중심에서 한 명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서강석과 눈을 마주한서준은 씨 익- 웃더니 크게 트림했다.
“꺼어억!”
띵-!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레벨이 가파르게 상숭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필요 경험치를 충족함에 따라 레벨이 59로 상승하 였습니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메시지 창 에서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흘 렀다.
‘개꿀이네.’
애초에서준도 습격자들의 파티
에 A급 수준의 실력자가 포함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만큼 이들 이 트롤에 허덕댈 것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예상외긴 하네.’
놈들이 트롤에게 허우적대는 동 안 체력을 조금이라도 소모하길 바 랐으나, 리더로 보이는 저 근육질 의 사내가 혼자서 다 일을 그르치 게 해 버린 것이다.
예상과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전혀 문제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당한 수확을 할 수 있었다.
‘단번에 레벨 업을 네 번이나 했 다.’
50레벨을 넘은 이후 성장이 더뎌 쳤었지만, 이곳은 B급 게이트로 앞 선 D와 C에 비해서 월등히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서강석이 트롤을 한자리 에 모아 준 덕분에 파천수라권 한 번으로 게이트 내부의 트롤들을 혼 자서 독식했으니 레벨이 가파르게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에 처리한다고, 내공 소모 가 좀 많긴 했다만.’
레벨 업으로 늘어난 스텟과, 천
마신공의 탁월한 회복력이 금세 빈 자리를 메꿨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성장, 레벨 업뿐이었다.
서준은 서강석을 향해 엄지를 치 켜세우며 입을 열었다.
“덕분에 잘 먹었다.”
그 뒤를 이어 수풀 속에서 경호 도 걸어 나오며 의견을 보태었다.
“이야 형님, 여기 아주 맛집입니 다. 별점 열 개 꽉꽉 채워 찍어 드 려야겠죠?”
두 사람의 등장으로 상황을 완벽 하게 이해한 서강석이 헛웃음을 흘
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천마라는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수많은 악인을 상대해 온 서준에겐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방식이었다.
오히려 이보다 더 잔인하고 비열 한 방법들도 많이 보고 겪어 왔다.
지금 서강석이 하는 행동은 기초 중의 기초에 불과한 것이었다.
“너희들 하는 짓이 뻔한 거지.”
“그렇다면 다음 벌어질 일도 알 겠군.”
서강석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위기 를 자아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마의 자리에까지 올랐 었던 서준의 입장에서 저런 위협은 재롱을 피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서준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럼, 당연히 알고 있지.”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