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권 9화
34화
서준이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 준 만큼 확실하게 그 위에서 날뛰어 주는 것이 도리였다.
“오늘 저녁 대법관들과 식사 약 속을 잡아 주게나. 박준영 그 능구 렁이 같은 놈이 빠져나가지 못하도 록 아예 쐐기를 박아 버려야겠네.”
강석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 며 채비를 하려 했지만, 안채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만류했다.
“굳이 협회장님께서 직접 움직이 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야, 자네가 처리하기에는 건수가 너무 커.”
안채형이 고개를 내젓더니, 조심 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한성 그룹 쪽 에서도 재빠르게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강석호의 고개가 갸우뚱- 젖혀졌 다.
“한성 그룹?”
“네, 아직까지는 저의 예상이지
만 한서준 각성자가 한성 그룹과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치를 보며 기 싸움만을 하고 있던 한성 그룹이 한서준 각성자가 빌런들의 신병을 넘겨주자마자 곧 장 박준영이 연관된 범죄들을 추적 및 대중에 적나라하게 공개해 나가 고 있었다.
“한서준 각성자가 한성 그룹과 손을 잡고 있다고?”
“수평적인 협조 관계인지 아니면 상하 관계인지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한성 그룹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안채형의 대답에 강석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성 그룹이 어떤 곳이란 말인 가?
전도유망, 유수의 기업을 상대로 내부 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굳 건히 최상위를 지키는 국내외 최고 기업이었다.
안채형은 서준이 그런 한성 그룹 과 연을 맺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혀를 내두를 서준의 수완에 강석 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한서준 각성자는 언제나
나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리 는군.”
하나를 기대하면 둘, 아니 셋을 보여 주며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정말, 최고의 파트너였다.
강석호의 입가에서 기분 좋은 미 소가 흘렀다.
“한성 그룹이 도와준다면 박준영 은 걱정할 거 없겠군.”
본격적으로 한성이 개입했다면 박준영이 도망칠 수 있는 방도는 없을 것이다.
한성은 함부로 움직이는 그룹이
아니었다.
그들이 움직일 때는 자신과 근거 가 있을 때뿐이었다.
“멍청한 영감탱이. 그러게, 상대 를 보고 덤볐어야지.”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로 강석호 의 기분이 한껏 좋아진 것을 확인 한 안채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울러 이번 일로 인하여…… 한성 그룹에서 협회장님에게 한 가 지 첨언이 있었습니다.”
강석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한성이 나에게?”
공무가 아닌 이상 정, 재계에 관 련된 어떠한 일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 협회장의 신념이었다.
어느 한쪽의 부탁을 들어줬다간 어디서든 그편에 섰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위치인 탓에 언행을 바르 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석호는 정, 재계의 인 사들이 부탁을 해 올 때마다 그냥 거절하는 것도 아닌 두 번 다시 그 런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으며 위협을 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만무했 는데도 한성이 부탁을 해 온 것이
었다.
“이번 일에 연루되었던 빌런 집 단, 디아볼로스가 해외에서 밀회를 갖는다는 정보를 얻었다며 그곳을 토벌하기 위해 협회장님이 힘을 빌 려주실 수 있는지 여쭙더군요.”
강석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김병수가 쓰러져서 한성 그룹이 어느 날 갑자기 기울어 버릴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였군.’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름 귀여운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이 부탁을 수락하면 강석호가 한
성 그룹의 편의를 봐준다는 말들이 반드시 나올 것이었다.
한 번의 부탁이지만 목석같던 강 석호라는 인물을 움직였다는 것만 으로도 상당한 힘이 실리는 법이었다.
애초에 한성이 노린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었다.
평소라면 단칼에 거절하며 말도 되지 않는 수작 부리지 말라며 윽 박질렀을 터.
그러나 디아볼로스에 관한 건은 한서준 각성자의 신변과 직결되어 있는 일인 만큼 거절을 할 수도 없
었다.
‘어차피 한서준 각성자님도 한성 그룹과 인연을 쌓고 있으시니……
특별히 이번 한 번은 양보해 줄 수 있었다.
결단을 내린 강석호가 고개를 주 억인 후 말했다.
“알겠네. 한성에 가서 전해 주게. 토벌대를 지원하겠다고 말이야.”
한성 그룹 일가가 운영권을 쥐고 있는 호텔, 오리엔탈 라이즈 최상 층.
그리고 그 전망 좋은 곳에 위치 한 별 세 개짜리 음식점의 직원들 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이 곳, VIP 룸에서는 한성 그룹 일가 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더 케이 그룹과 박준영 그 늙은 구렁이를 이렇게 한 방 먹일 줄이 야, 막내가 아주 큰일을 해냈더구
나.”
장남, 김경훈이 김경호를 보며 칭찬하자 차남 김경찬과 장녀 김효 선도 순서대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덕분에 눈엣가시였던 더 케이 그룹에 큰 타격도 주고 그 무겁다 는 강석호의 엉덩이마저 들썩이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어제까지 기고 만장하던 더 케이가 오늘 갑자기 우리 눈치 보는 거 경호, 너도 보 지 않았니.”
“아버지도 이 소식을 들으시게 된다면 경호 너를 크게 치하하실 거다.”
“한성 그룹의 일원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었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어리숙한 경호의 모습에 연신 입을 열던 형제들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피어났다.
“아니, 이렇게 말로만 할 게 아 니지. 경호도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 보는 게 어때?”
“그래, 그게 좋겠네.”
“경호도 나이가 있는데 언제까지 막내 취급할 수 없지 않겠어?”
“막내야, 혹시 뭐 해 보고 싶다, 아니면 눈여겨보고 있다, 그런 사
업 없어? 말만 해! 빠른 시일 내에 주주총회 소집해서 지분을 만들어 줄 테니까. 하하!”
허울 좋은 말에 경호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겉으로는 정말 허물없이 대하며 사랑과 관심을 주고 있는 것 같았 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눈치 보며 어디 붙을지 간 보는 중립파들이 거슬리는 거겠지.’
경우에 따라 누가 조금 앞선 우 세일 때는 있었으나, 누군가 압도 적으로 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셋의 세력은 거의 동등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근데 파벌 싸움 없이 사업 경영 에만 신경 써 왔던 중립파들이 이 번 일로 회사에 막대한 이득을 가 져다준 경호에게 상당한 관심을 주 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지.’
힘의 균형을 망가뜨릴 수 있는 중립파, 경호를 자신의 쪽으로 끌 어들인다면 이야기의 국면은 달라 질 것이었다.
그리고 영악하기로는 한국 제일 이라고 볼 수 있는 경훈, 경찬, 효 선. 자신의 형들과 누나는 불안전
한 변수를 절대로 방치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확실하게 라인을 정하거 나 평소처럼 쥐 죽은 듯이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으라는 경고하고 있 는 거겠지.’
실제로도 내뱉는 말과 달리 형제 들의 눈빛은 지금도 상당히 잘 벼 린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순전히 호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예전이었으면 저 눈빛에 지레 겁 을 먹고 해맑은 웃음과 함께 ‘아무
것도 필요 없다.’라는 멍청한 말을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예전만큼 두 형과 누나의 눈빛이 무섭지 않았다.
경호의 얼굴에 전과는 사뭇 다른 자신감이 비쳤다.
“당치도 않죠. 형님들과 누님이 잘 이끌어 가고 있는 계열에 제가 굴러 들어가 초를 치고 싶지는 않 습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당찼지만. 평소와 같은 답변이었기에 형제들 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목소리를
이었다.
“경호 네 의견이 그렇다면 어 쩔……
평소와 마찬가지로 미리 준비된 소리를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한성 그룹의 각성자, 길드 사업을 제가 이끌고 싶습니 다.”
경호의 선언에 좌중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길드 사업?”
그룹은 돈을 목적으로 움직이며 큰돈이 움직일수록 거대한 영향력 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21세기에 가장 큰 돈이 되는 것은 마정석, 각성자와 길드 였다.
때문에 형제들도 가장 먼저 눈독 을 들였던 것이지만 한성 그룹과 제휴를 맺고 있는 길드들이 능력 없는 이들을 모실 수 없다며 각성 자들이 여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평범한 계열사라면 억지로라도 밀어붙였겠으나 초인이라 불리는 각성자들인 만큼 함부로 건들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길드 사업은 지금까지
도 유일하게 완벽한 중립으로 존재 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각성자 놈들은 말이야, 힘만 가 진 멍청한 사냥개들이라 말이 안 통해서 힘들 거다.”
“그래, 욕심부리지 말고 누나 밑 에서 일단 사업부터 배우는 게 어 떻겠니?”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 형제들의 모습에 경호가 입가에 피 식- 웃음을 홀렸다.
“왜요, 아까우세요? 막상 무서워 건들지 못한 자리를 제가 가져간다 는 것이?”
노골적인 경호의 비웃음 때문인 지, 아니면 정곡을 찔려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형제들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인석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혹시 경호 네가 애먼 일에 말려들 까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겠니.”
“그래, 네 누나 말대로 걱정돼서 그런 건데 말을 섭섭하게 하네?”
“그 부분은 걱정하실 거 없습니 다.”
경호는 테이블 위에 말아 쥔 주 먹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줬다.
콰직-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거미줄처럼 가는 금이 일어나더니, 끝내는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힘이라면, 저도 지지 않을 자신 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멍 청이들이라면, 힘의 우위로 말을 듣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까……
이것은 더 이상 부탁이 아닌 통 보였다.
경호의 몸에서 투사의 기세가 흘 러나왔다.
“곧 있을 주주총회에서 공식 선
언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길드 사업을 이끌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준과 다난 했던 전투를 거쳐 온 만큼 그 기세 를 일반인이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두 형 과 누나에게 마지막 통첩을 마친 경호가 당당하게 문을 박차고 나왔 다.
경호는 음식점을 빠져나와 엘리 베이터에 탑승하자마자 쓰러지듯이 벽면에 몸을 기댔다.
“ 후우......
순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올 라 오버한 감이 있긴 했지만 오랜 시간 몸에 각인된 공포는 어쩔 수 없었던 탓이었다.
손과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 다.
비록, 몸은 아직 완전히 적응하 지 못한 듯했지만, 경호의 입가에 는 후련한 듯한 미소가 피어났다.
‘설마 내가 형들과 누나 앞에서 그런 용기 있는 발언을 할 수 있을 줄이야.’
과거의 경호를 알았다면 누구도
상상도 못 할 언행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용기로 상당 한 이득을 취해 냈다.
후계자의 자리에 가까워지는 가 장 빠른 길인 길드 사업을 가지겠 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음에도 형 제들 중 아무도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겪어 보는 승리에 경호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레벨 업으로 다져진 육체 능력 덕분인가?’
경호는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 덕도 조금 있긴 하겠지만, 온 전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법 쓸 만한 상태가 되긴 했지 만, 두 형과 누나가 쥐고 있는 권 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요인은 하나뿐이 었다.
‘형님.’
경호에게는 정말로 기적과 같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얼굴을 떠올린 것만으로 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 랐다.
경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흐르던 순간,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우웅.
산통을 깨는 스마트폰의 진동음 에 경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경호가 신경질적으로 안주머니의 스마트폰을 잡아채듯 꺼내 들었다.
‘ 누구야?’
원래는 통화 거절 버튼을 눌러 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액정에 비친 이름이 ‘한서준 형 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찌푸려져 있던 경호의 얼굴은 언 제 그랬냐는 듯 환해지더니 잽싸게 수신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예, 형님.”
수화기 너머로 서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떨리던 손과 발이 안정을 되찾아 갔다.
“내일 바로 C급 게이트를 공략하 신다고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알 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어느새 경호의 입가에는 환한 미 소가 번지고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