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권 2화
27 화
청담동 대저택 내부, 지하 깊은 곳 서고(書庫).
그 어두운 방에 앉아 있는 박연 정의 부친, 서울 지역구 삼선 의원 이자 제1야당의 대표인 박준영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 자네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다고 생각 하나?”
노인은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고
개를 숙인 채로 있는 정장의 사내 앞으로 내던졌다.
스마트폰의 액정 속에는 조롱 섞 인 미소를 짓고 있는 한서준과 의 뢰를 맡겼던 C급 빌런, 차은표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노기 어린 박준영의 목소리에 정 장의 사내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 하고 연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흐음……. 조성준이, 네가 내 밑 에서 비서 일을 한 지 올해로 3년
차 아닌가?”
손을 들어 올려 턱을 쓰다듬던 박준영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과를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닌 것을 알 텐데.”
박준영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한서준이란 사내의 행보가 다소 파격적이기는 하였지만 아주 드물 게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평소였다면 그저 겁 없는 하룻강 아지가 주제를 모르고 짖는다 생각 하고 적당히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허나 지금 박준영은 당 대표의 자리를 도맡아, 차기 대선을 노리 고 있는 주자였다.
딸이 멋모르고 벌였던 자그마한 실수가 세간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 지 않았다.
괜한 이야기가 나와서 여당 놈들 에게 꼬리를 잡혀서 좋을 게 없는 만큼 조용히 해결을 하기 위해 사 람을 보냈는데 이제는 아예 꼬리를 내어 주고 와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가 들끓 었는데, 비서라고 둔 작자는 앵무 새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
다.
“죄송……
순간, 박준영의 눈에 불꽃이 튀 었다.
박준영은 책상 위에 놓였던 재떨 이를 비서의 머리를 향해 거칠게 내던졌다.
퍼억-!
정확하게 머리에 맞은 재떨이에 비서의 몸이 출렁거리더니 머리에서 붉은 혈흔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조성준은 신음조차 홀릴 수 없었다.
박준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비와 인정 따위는 바라는 것조 차 소용없었고, 오직 탐욕에 지배 된 악마와 같은 사내.
여기서 더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가는 사라지는 것은 한서준이 아닌 자신, 조성준이 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 지, 자네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조성준은 황급히 몸을 벌떡 일으 키며 자세를 다잡은 후에 입을 열 었다.
“일주일, 딱 일주일만 주시면 한
서준이라는 놈의 목을 대표님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으음, 그게 아니지. 나는 말을 믿지 않아. 알잖아?”
한층 더 날카로워져 가는 박준영 의 눈빛에 조성준이 황급히 품 안 의 스마트폰을 꺼내어 앞으로 내밀 었다.
“누구지?”
“데니아 리, 한국계 미국인으로 B급 빌런입니다.”
이름인 데니아 리보다는 화염의 광인(狂人)으로 알려진 B급 빌런.
각성자들의 세계에서도 B급은 완
연한 실력자로 분류되듯이, 빌런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그마치 두 단계나 되는 압도적 인 격차. 더불어 데니아 리는 화염 의 광인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명성을 가진 빌런이었다.
오늘 보낸 차은표, C급과 달리 어떠한 변수가 생기더라도 D급의 각성자에게 패배는 하지 않을 것이 란 말이다.
박준영의 입꼬리가 미세하지만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 한국에 있나?”
“아직 소재는 정확하지 않지만,
한국에 들어온 것은 확실합니다.”
“삼 일. 그 이상은 내 인내심이 허락하지 못할 것 같네.”
반이나 줄어 버린 기한이었지만 감히 박준영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기역 자로 접고 있는 조 성준을 바라보는 박준영의 눈동자 에서슬 퍼런 살기가 흘렀다.
“이번이 마지막이네. 이 이상의 실수는 없어야 할 걸세.”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성준의 굳은 다짐을 확인한 박 준영은 등을 돌리어 서재를 빠져나 갔다.
한바탕 짧은 소란이 있었던 순간 부터, 서준은 바삐 움직이며 대책 을 마련해 나갔다.
우선 가장 먼저 해결한 것은 바 로 가족들의 안전이었다.
다행히도 이야기를 들은 강석호 가 곧장 협회의 각성자들을 동원하여 보호 조치를 취해 주었다.
든든한 울타리가 생긴 셈이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건 임시적인 방편에 불과해.’
박연정의 거침없는 행보를 보면 어제 일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어젯밤, 스마트폰을 이 용하여 공식적으로 싸움을 걸었으 니 저쪽에서도 분명 무언가 반응을 보일 것이었다.
‘어떠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 는 힘이 필요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방 법은 사냥,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 이었지만 어제 강행군으로 경호가 준비해 놓은 D급 게이트를 모두 클리어한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 협회에 들러서 강석호 에게 C급 게이트 특별 공대의 권 한을 따낸다 할지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오늘 바로 공략할 수 있는 C급 게이트가 없어.’
미리 대금을 지불해 놓긴 했지만 항시 C급 게이트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협회에서는 게이트의 숫자가 일 정 수가 넘지 않도록 관리, 조절을 하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갑작스럽게 몬스터가 넘어올 수 있는 만큼 항시 그를 감 시하고 있어야 하는 각성자, 인력 이 필요했다.
하지만 협회는 인력난으로 허덕 이는 곳, 그렇기에 관리 능력 이상 의 게이트가 생기지 않도록 조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이 없게도 하필 어제 C급의 게이트를 협회에서 모두 처 리한 상태.
다시 C급 게이트가 어느 정도 생성이 되려면 적어도 삼 일이란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폭풍 전야의 시기에 삼 일은 너무나도 큰 시간이었다.
‘편법을 써서라도 최대한 빠른 길로 가야 해.’
시스템이 공인한 아이템, 아티팩 트라고 불리는 장비, 그렇기 때문 에 각성자에겐 제2의 생명이라고도 불리는 것.
각성자에게 아티팩트의 유무란 큰 차이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능력 중 최고는 템빨이라는 이
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지.’
가좌역 앞 게이트에서 김도현이 빌려줬던 건틀렛만 하더라도 한 단 계 너머의 절정 경지의 무공을 펼 칠 수 있게 해 주는 뛰어난 기능을 보여 줬던 적이 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서준의 과거 지식과 경험들이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아티팩트의 유무 차이가 심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돈이었지.’
어느 정도 불필요함도 있었지만,
그간 서준이 고려하지 않았던 결정 적인 이유도 바로 돈, 자금 때문이 었다.
아티팩트들은 뛰어난 성능과 기 능을 보이는 만큼 그 값어치가 상 당했다.
시스템에서 인정해 주는 장비, 아티팩트는 C급 이하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1억에서 3억 사이를 호 가할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B급 이상, 특별한 능 력이 부여된 아티팩트의 경우에는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없어서 못 구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억 소리가 절로 나오는 가격인 탓에 가난했던 서준이 엄두 를 내지 못하던 것은 당연한 것이 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총알은 제법 넉넉해졌어.’
운이 좋게도 어제 협회에 인도한 C급 빌런, 차은표는 1억 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던 사내였 다.
거기에 더불어 아직 통장에는 경 호가 마정석을 판매해서 들어온 돈, 1억 5천만 원이 남아 있었다.
도합 2억 5천만 원이 있는 것이 었다.
특별한 능력이 부여된 아티팩트 는 몰라도 김도현에게 빌렸었던 C 급의 아티팩트 정도는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상당히 유의미 해.’
머릿속으로 오늘 구매할 아티팩 트의 기준을 정한 순간이었다.
‘용산역’이라는 거대한 표지판과 그 옆에 늘어진 자잘한 소상인들이 머무는 복합 상가.
한때 디지털 거래의 메카와 같았 던 곳이었지만 대격변의 날 이후 큰 변화를 맞이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던 전 자 상가를 비롯한 큰 건물들이 몬 스터에게 무너진 후에 그 자리에 수많은 대장장이들과 도소매업자들 이 들어서서 ‘이차원(異次元)의 거 리’라는 명소를 만들어 냈다.
각성자의 제2의 생명이라 불리는 아티팩트부터, 몬스터로부터 개인의 몸을 호위할 수 있는 다양한 물건 들을 판매하고 있는 만큼 많은 사 람이 방문해서 명성이 자자한 곳이 기도 했다.
덕분에 이차원의 거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서준도 한껏 부푼 기대 와, 두둑한 지갑을 들고 온 것이었다.
‘근데 어째서.’
근처 매대에 놓여 있는 무구를 바라보던 서준의 입에서 깊은 한숨
이 새어 나왔다.
“하아......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벌 써 세 시간이 넘게 거리를 누비고 다니고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 이 하나도 존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눈이 너무 높은가?’
천마라는 아득한 지위에서 좋은 무기를 봐 왔던 탓에 눈이 높아진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하나?’
서준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c급의 아티팩트로 이미 충분히 타협을 한 상태였다.
‘D급 이하로 가면 무기라고 볼 수 없어.’
서준의 기준으로 보자면 철이 너 무 순도가 낮거나, 무게 밸런스가 엉망인 물건들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숙련된 빌런들이나 몬스터의 경우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무기는 없느니만 못하지.’
적과 격돌하는 순간, 무기가 부 서지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거나 최악의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었
다.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 억지로 발 걸음을 내딛고 있었지만 서준도 본 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망했네.’
사전 조사를 하여 나름 기대를 했었던 매장들은 인터넷에서 보았 던 글과 달리 실속이 전혀 없었다.
그 외로도 관리가 잘되어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매장들도 모두 지 나쳐 온 상태였다.
지금 시야에 들어오고 있는 것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허름 한 가게들뿐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마음을 접은 서준이 남은 시간 동안 조금의 성장, 레벨 업이라도 하기 위하여 근처의 게이트로 향하 려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검, 정확히 말 하자면 하나의 가게가 눈에 들어왔 다.
“제법 괜찮은데?”
육안으로만 확인한 것이지만 매 장에 걸린 철검은 순도도 제법 쓸 만했고, 무엇보다도 무게 밸런스가 상당히 정교하게 자리 잡힌 상태였
다.
오늘 이차원의 거리에서 본 것 중 가장 쓸 만한 검이란 말이다.
‘건틀렛도 이 정도로 제작됐다면 충분히 살 가치가 있다.’
설사 저 검만큼 홀륭한 건틀렛이 없다 할지라도 저 작은 가게 하나 더 구경하고 간다고 해서 크게 손 해 볼 것은 없었다.
서준은 곧장 내딛던 발걸음의 방 향을 꺾어 가게 내부로 향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요란한 경첩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계신가요?”
연신 호객 행위를 하며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던 다른 매장들과 는 달리 인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아예 장사를 할 마음 자체가 없 어 보일 만큼 말이다.
바닥에는 먼지 뭉치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고 벽면 곳곳에는 거미줄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가게의 상태가 허름하다는 말로 도 형용하기 힘들었지만. 오히려 서준의 눈에는 이채가 서려 있었다.
‘들러 보길 잘했어.’
벽면을 따라 빼곡히 전시된 무구 들은 하나같이 명품이었다.
중원 대륙에서도 100명 안팎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명장이라 불 리었던 대장장이들이 만든 무구들 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오늘 봐 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예기들을 품고 있었다.
서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흐 르던 순간이었다.
“누구야?”
계산대 안쪽 문에서 귀찮은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가지 않아 문이 열리고 성 인 남성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 우락부락한 근육과 거친 인상을 지닌 드워프가 모습을 드러 냈다.
생애 처음 마주하는 드워프였지 만 라이선스 시험에서도 이종족, 수인을 보았던 만큼 이제는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서준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밖에서 봤는데 무 구들이 좋아 보여서 보러 들어왔습 니다. 혹시 건틀렛도 판매하시나 요?”
“아마 저쪽에 있을걸.”
드워프는 손짓도 귀찮다는 듯, 턱짓으로 구석 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준은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 음을 틀어막았다.
‘어딜 가든 대장장이들은 똑같 네.’
원래 대장장이, 그중에서도 명장 이라 불리는 실력을 지닌 이들은 유독 삐뚤어진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이 없고 자존심만 센 이였다 면 불쾌했을 테지만, 매대에 놓인
무구들만 보아도 저 드워프는 그럴 만한 자격을 가진 대장장이였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주억인 서준이 발걸음을 옮겼다.
서준은 드워프가 턱짓으로 대충 가리킨 선반 앞에 놓인 건틀렛을 매만져 가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안에 있는 물건만 판매하시 는 건가요?”
“커스텀은 안 받아. 원하는 물건 이 없으면 그냥 나가.”
“있긴 있는데 여기에는 없거든 요.”
“뭐?”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접객하고 있던 드워프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 금 서준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 위 치 때문이었다.
“저 안의 물건. 안 파는 건가 해 서요.”
드워프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너, 결계를 꿰뚫어 본 거냐?”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