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권 1화
26화
그 뒤를 미숙한 미행자가 따라붙 었다.
‘몸놀림이 상당히 가볍네.’
일반인의 수준이 아니었다, 각성 자, 그중에서도 최소 C급은 되어 보이는 실력자였다.
박연정, 그녀의 집안이 제법 유 복하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생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각성자를 이렇게 사적으로 부릴
정도라면 어지간한 재력 혹은 권력 이 아니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확실하게 정리해 둬야겠네.’
옛날부터 서준은 후환을 남겨 두 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걸음을 우뚝- 멈춘 서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나와.”
서준의 목소리가 허공을 맴도는 것 같았지만, 이내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가 기둥 뒤에서 모습 을 드러냈다.
“D급이라고 너무 풀어졌었나. 내
움직임을 감지할 줄이야. 제법이 군.”
사내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감탄 하고 있었지만 서준의 눈매는 가늘 어져 있었다.
“너 빌런이야?”
사내의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의 피 냄새, 눈에 어린 광기는 중원 대륙에서 마주했었던 살인귀들과 똑같은 양상이었다.
서준의 물음에 사내의 입가에 비 릿한 미소가 흘렀다.
“다행히 나, 차은표 님의 정체를 알고 있다니, 그렇다면 이야기는
쉽겠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팔 한쪽을 스스로 잘라 낸다면 어르신 께 선처를 부탁드려 보지.”
여유 만만한 기색으로 말하고 있 는 차은표의 모습을 보고 서준의 눈동자는 죽은 듯이 고요하게 가라 앉았다.
‘내가 분명 선을 넘으면 자비가 없다 했을 텐데.’
그때는 서연의 자초지종을 듣기 전이었던 탓에 박연정에게 말로만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만약 서연의 과거, 아픔을 알고 있었다면 단순한 경고로 끝내지 않
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이 라도 다 뽑아 버렸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 그럴 수는 없었 기에 내심 후회도 했었다.
그런데 아주 고맙게도 박연정이 경고를 무시하고 선을 넘어 주었다.
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 렀다.
“이렇게 고마운 일을 벌였는데, 답례를 안 할 수가 있나. 뭐가 좋 을까.”
갑작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주변 을 두리번거리는 서준의 모습에 차
은표의 고개가 갸우뚱- 젖혀지는 순간이었다.
서준의 차가운 눈동자가 차은표, 정확하게는 그의 목을 향하였다.
“일단은 가볍게 네놈의 목 정도 면 되려나?”
서슬 퍼런 경고에 차은표의 목울 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게 대체……
의뢰를 수락했을 때 받았던 정보 대로라면 한서준은 분명 D급, 먹이 사슬의 하위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이 압박감은 무엇이란 말 인가.
한서준, 그는 마치 먹이사슬의 정점. 포식자의 기세를 뿜고 있었다.
엄습하는 공포에 손이 덜덜 떨리 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등을 보일 순 없 었다.
‘기세만 등등할 뿐이야. 그래 봤 자, 결국 D급에 불과해.’
C급인 자신과 등급 차이도 명확 할뿐더러 한서준은 빌런이 아닌 평 범한 각성자에 불과했다.
빌런은 사람을 상대로 살육을 저 질러 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각성자들은 아 니었다.
게이트, 몬스터만을 상대해 온 만큼 각성자들끼리의 싸움에서 취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도덕과 법이라는 틀에 갇혀 있 는 각성자들은 나와 같은 빌런을 상대하지 못한다.’
차은표는 기어 올라오는 불안감 을 억지로 떨쳐 내고는 최대한 차 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D급밖에 되지 않는 놈이 주제 를 모르는군. 나, 차은표 님은 자그 마치 C급의 빌런이란 말이다!”
은근 등급을 강조하며 협박했지 만, 서준은 한 치의 미동조차 보이 지 않았다.
“직접 겪어 봐, 주제를 모르는 게 누구인지.”
한서준의 발이 움직이며 거리를 좁혀 왔다.
D급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신속한 움직임이었지만 크게 놀랄 수준은 아니었다.
차은표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뱀 의 눈처럼 가늘어졌다.
‘단숨에 결판을 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 감이 점차로 올라오는 탓에 이 싸 움을 오래 끌고 싶지는 않았다.
‘한쪽 팔을 내주고 급소를 취한 다.’
고통을 수반하긴 하겠지만, 치유 스킬을 가진 각성자에게 가기만 한 다면 회복할 수 있었다.
결단을 마친 차은표가 몸을 움직 이기 시작해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러나 거리를 좁히며 달려오고 있는 서준의 눈동자를 직시하자, 그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죽는……다?’
빌런 생활을 이어 주었던 생존 본능,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은표는 황급히 몸을 틀었고, 그 것이 정답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서준의 주 먹이 활짝 펼쳐지며 손가락을 보이 더니, 그것은 곧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차은표의 피부를 찢어발겼다.
“크아악!”
그의 오른쪽 눈에서 극심한 고통 이 밀려오고는 시야가 완전히 차단 되었다.
‘각성자라는 놈이 어떻게……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꺼려 하고 두 려워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사내는 무엇이란 말 인가.
사람을 해치는 것에 한 치의 망 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살육을 위해 움직 인 듯한……
경로를 틀었기에 오른쪽 눈을 주 는 것으로 끝났던 것이지, 그대로 돌진했다면 아마 지금 갈라진 것은 눈이 아닌 머리였을 것이다.
숙련된 살인 기술과 D급이라고
는 생각할 수 없는 신속하고 정교 한 움직임까지.
‘이게 D급이라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동 공이 흔들리고 있는 차은표의 눈동 자를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입가에 는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다행히 생각했던 만큼은 잽싸 네.”
차은표는 서준을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한껏 폼을 잡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저
차가운 눈동자가 원초적인 공포를 일으키며, 몸을 옥죄고 있었다.
‘괴…… 괴물!’
아주 깊은 어둠, 심연을 바라보 는 것처럼 어둡고 무거웠다.
등줄기에는 소름이 돋아났고, 두 다리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 며 살기 위한 몸부림을 부렸다.
“오! 오지 마!”
패닉 상태에 있는 차은표를 향해 서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게, 왜 주제를 몰랐어.”
서준이 뿜어내는 공포에 점철된
차은표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제 발 에 걸려 넘어졌다.
털썩-!
볼썽사납게 바닥에 부딪혔지만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
차은표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벌 벌 떨며 서준을 향해 빌기 시작했 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서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늦었어.”
귓전에 들리는 말을 끝으로 차은 표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차은표의 몸을 의자처럼 활용해 걸터앉아 있던 서준은 생각을 끝마 치며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죽일 수는 없겠네.’
천마의 직위에 앉아 있었다면 아 까 전 말했던 것처럼 차은표의 목
을 잘라 박연정에게 보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중원 대륙이 아닌 법과 이성이 존재하는 지구.
‘그렇다면 협회에 신고를 한 후, 절차를 밟아 법대로 처리를 해야겠 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후환이 될 수 있는 차은표 를 정상적으로 살려 둘 생각은 없 었다.
서준의 입가에 씁쓸함이 흘렀다.
“웬만해서는 쓰지 않으려 했는 데.”
서준이 내공을 운용하자, 내뻗고 있는 오른팔에 회색빛 기운이 어렸 다.
‘흡성대법 (吸星大法).’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시피 다른 사람의 기를 갈취하여 대상의 내공을 모두 흡수하는 무공이었다.
‘비록 전부를 흡수하는 것은 아 니다만.’
사람마다 쌓아 놓은 기운의 성질 이 달랐기에 사용자의 내공으로 갈 취하는 과정에서 손실이 생길 수밖
에 없었다.
그래도 차은표, C급 빌런 정도라 면 일류급 무인 정도의 내공량을 가지고 있는 만큼 지금의 전력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쓰지 않으려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미치광이로 전락하겠지.’
서준이 익히고 있는 홉성대법은 체내의 내공을 갈취하는 과정에서 선천지기를 변질시키는 무서운 무 공이었다.
선천지기가 변질되는 만큼 흡성 대법을 맞은 사람은 모두 미치거나
반폐인이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 리는 셈인 탓에 사용을 자제하려 했었다.
그러나 차은표는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용서할 수 없는 자이자 범 죄를 저지른 빌런이었다.
후환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되었다.
결단을 내린 서준은 벼르고 있던 팔을 차은표의 아랫배를 향해 내뻗 었다.
띵-!
[S급 무공, 홉성대법을 습득하였 습니다.]
[홉성대법이 차은표의 내공을 갈 취해 옵니다.]
굳이 홀로그램이 안내해 주지 않 더라도 오른팔을 타고 흘러들어 오 는 기(氣)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오른팔을 타고 올라오는 차은표 의 내공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서 들어왔다.
날뛰는 내공들은 강물을 거스르 는 연어처럼 대부분 최후를 맞이하
고 있었지만, 모두가 소실된 것은 아니었다.
부단한 노력 끝에서준의 단전에 안착하는 내공들도 존재했다.
띠링-!
[홉성대법을 사용해 차은표의 내 공 스텟을 30만큼 갈취해 왔습니 다!]
30의 내공 스텟, 10개의 레벨 업 을 거쳐야만 획득할 수 있는 분량 이 홉성대법 한 번에 증가한 것이 었다.
평소라면 아주 고양되는 순간이 었지만, 지금은 마냥 기쁘지는 않 았다.
“꼬으윽……
눈동자가 뒤집어져 새하얀 동공 을 보이고 있는 차은표의 입에서 죽어 가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차은표를 연민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준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얼어 있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야.’
여기서 확실하게 해 두지 않으면 자신, 아니면 가족들이 일에 휘말 릴 수도 있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티끌만큼 남아 있던 마지막 감정 마저 털어 낸 서준은 차은표의 몸 을 뒤져 스마트폰을 꺼냈다.
잠금장치로 지문 인식이 필요했 지만, 넝마가 된 차은표의 손가락 을 갖다 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여러 애플리케이션들을 확인하면 서 정보를 빼내려 해 봤지만, 대포 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던 서준 의 손가락이 통화 내역에서 멈췄다.
서연과 박연정이 충돌했었던 그 시간대에 한 개의 통화 내역이 남 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의뢰주, 박연정 혹은 그의 측근 이 사용하고 있는 대포 폰이겠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띤 서준이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본 앱으로 들 어가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찰칵-!
사진이 잘 찍혔는지 확인까지 마 친 서준은 통화 내역에 기록됐던 연락처로 사진 하나를 발송했다.
-선물, 잘 받았다. 조만간 보답 하도록 하지.
발송을 끝낸 서준은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팽개쳤 다.
그를 대신하여 품 안에 넣어 둔 자신의 스마트폰을 손에 쥐며, 통 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르...
그렇게 몇 번의 착신음 이후 전 화가 연결되었다.
“네, 협회장님 저 한서준입니다.”
적에게 선전포고를 끝마쳤다면 이제는 그에 따른 준비를 할 때였 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