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권 22화
22화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폭풍은 두 번 치는 법.’
하지만 이제 각성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D급 각성자를 상대 로 패배한 이유를 둘러댄다?
그것이 더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받아들이기 힘 든,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 실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의 타격으로 인한
진한 두통과 함께, 머리에서 느껴 지는 서준의 검지의 감촉과 온도가 이것이 꿈이 아님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를 부정할 정도로 우진혁은 어 리석고 둔하지는 않았다.
“스카우트를 하고 싶다면 우선 정확한 조사, 그리고 그 격에 맞는 보수가 충분히 준비되어야지요. 다 음에는 이런 실수가 없었으면 합니 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우진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확실히 4대 길드라는 명성을 믿 고 너무 오만하게 행동했던 것 같
습니다. 오늘 주신 가르침을 가슴 에 새기겠습니다.”
고개를 주억이는 우진혁의 모습 을 확인한서준은 내뻗은 주먹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 보았던 기이한 움직임이 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스킬들을 얻 은 거지?’
변화무쌍하고 파괴적이며 기묘했 다.
지금 서준의 움직임은 마치 중국 에서 보았던 무림맹이라는 길드에서 전수되는 스킬들을 보는 것 같
았다.
아니, 그들보다 스킬의 활용 방 법이 더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아, 그리고. 오늘은 처음이라 그 냥 넘어간 거지만,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오신다면 이렇게 넘 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를 한 서준은 등을 돌린 후, 발걸음을 옮겼 다.
그 뒷모습을 향해, 우진혁이 소 리쳤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서준 씨에게 걸맞은 보수를 지불할 수
있을 때 다시요!”
서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 었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너무 거저먹으려 했어.’
제대로 된 준비를 갖추지도 않고 접근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하지만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의 만남으로 다른 길드보다 한발 앞서 있는 상황이 되었다.
‘괴물……. 한서준의 진정한 면모 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단순히 알파벳 따위로 규격화된
등급만을 보는 다른 길드들은 아직 한서준이 D급밖에 되지 않은 탓에 관심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고 있을 것이었다.
그 말은 즉, 한서준이라는 새 시 대의 총운아가 본격적으로 알을 깨 고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시간이 있 다는 말이었다.
‘그 전까지만 준비를 끝내고 자 리를 마련하면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은 대한민국 을 대표하는 4대 길드, ‘불새’ 길드
의 수장이었으니 말이다.
우진혁의 입가에 홍미 가득한 미 소가 피어났다.
“오랜만에 발 벗고 뛰어 보겠 군.”
우진혁과의 전투를 끝마친 서준 은 곧장 귀가했다.
그렇게 가족들과의 행복한 저녁 식사를 마친 서준은 하루를 마무리 하기 위해 자연스레 샤워실로 향했 다.
쏴아아아…….
“아이고 삭신이야.”
온수로 맞춰 둔 물에 온몸을 적 시며 어깨를 이따금 두드렸다.
식사 자리에서는 억지로 고통을 억누르며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였 다.
하지만 사실 서준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제법 실력이 있는 강자인 만큼 전투 후 어느 정도 후유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정도가 생각 이상이었다.
근육들이 뒤틀려 비명을 내지르 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괜히 우진혁과의 대결에서 곧장 펼치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 조금만 더 무리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지며 가족들과 의 식사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했을 뿐더러, 부모님에게 각성자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 뻔했다.
‘역시 마지막은 조금 무리였어.’
천마신공으로 빚어낸 밀도 높은 기, 서준의 뛰어난 내공 운용 능력 둘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분명히 정신을 잃었을 것이었다.
파천수라장은 천마신교, 그 안에서도 정점에 선 존재인 천마에게만 내려온 절기였다.
이를 펼치기 위한 첫째 조건은 바로 상단전을 여는 것이었다.
서준은 방금 전, 수련을 통하여 조건을 이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진 혁과의 대결에서 곧장 펼치지 않았
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 내공이 한참이나 부족해.’
거듭 말했듯이 무공은 심, 기, 체 삼박자가 조화를 이뤄야지만 온전 히 펼칠 수 있었다.
기는 마선으로서 이루었던 경지 가 있던 만큼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체와 심, 이 두 가지는 이야 기가 달랐다.
첫 번째로 심, 내공은 5성의 경 지를 이룩하고, 상단전을 열어 내 공을 쌓아 가고 있다지만, 불과 몇 시간 전부터의 일이었다.
단전이 하, 중, 상의 3개로 나누
어져 기가 빨리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미래성이 열려 있을 뿐이었다.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본래 파천수라장을 펼쳐 내는 데 필요한 내공량을 생각한다면 여전히 턱없 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냉철하게 판단하면 지금 내 내 공량은 일류 꼭대기 수준.’
두 번째로 체, 육체도 처음 지구 로 귀환했을 때처럼 완전 무방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파천수라장을 펼 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였다.
한데 그 상황에서 갑자기 우진혁
과 만나게 됐고, 그가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한참 어린 후배를 가르치려는 어 투와 행동을 보이는 우진혁의 모습 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준, 격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그 대가로 몸이 갈라지는 듯한 근육통이 혼을 내고 있었지만, 후 회는 없었다.
콧대만 높아 훈계하려던 놈이 예 상치 못했던 패배를 겪고 나서 경 악하는 민망한 꼴을 봤으니 말이다.
“정말, 나만 보기 아까울 정도로 얼빠진 표정이었는데.”
서준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흘 렀다.
‘운이 좋긴 했어.’
우진혁이 괜히 a등급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싸웠다면, 분명히 졌을 것이다.
직접 주먹을 맞대며 싸워 본 결 과, 우진혁은 무인으로 치자면 절 정에 달하는 고수였다.
그에 비해서 자신은 일류에 불과 했다.
그것을 고작 한 단계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 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쉽게 말해서, 한 단계 차이로 인 한 격차는 그 내공의 양도,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육체의 완성도마 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본래 무공, 경지란 그런 것이다.
벽을 넘어서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를 넘어설 때는 합당한 큰 보상 이 쥐어졌다.
서준도 천 년에 달하는 경험과 지식이 없었다면 한 단계 높은 경 지에 있는 우진혁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없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우진혁, 그놈은 방심까 지 하고 있었으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4대 길드의 리더.
높은 직위에서 이름을 날린 지 오래된 만큼, 콧대가 상당히 높아 져 있었다.
그렇기에 우진혁은 전투 중 자신 감이 넘치다 못해 과했다.
우진혁의 오만은 서준에게 여유 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천 년에 달하는 세월 동 안 경험을 쌓아 온 서준이 그를 놓 칠 리가 없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고 더 넓 게 벌려 냈다.
덕분에 우진혁이 제대로 된 반응 을 하기도 전에 놈을 단숨에 살해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아마 상당한 충격이 됐겠지.’
방금 전, 우진혁이 지었던 표정 을 떠올리자 입가에 피어난 미소가 진해졌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해서인지 몸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회복이 되 고 있었다.
한껏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서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재개했다.
‘이제부터 시작이겠네.’
이로써 소식을 접할 길드들이 활 발히 움직이게 될 것이었다.
A등급 각성자가 이제 막 각성자 가 된 D급의 애송이에게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하물며 평범한 A급도 아닌 자그 마치 불새 길드의 사장, 우진혁이 말이다.
그 소문은 날개 돋친 것처럼 순 식간에 퍼질 것이다.
‘성장에 박차를 가해야겠어.’
소식을 접한 이들이 득달같이 달 려드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좋은 의도로 접근해 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좋지 못한 의도로 접근을 해 오는 이가 더 많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협이라도 가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미 리 준비해 놔야지.’
샤워를 마치고 몸의 물기를 대충 털어 내는 순간, 때마침 스마트폰 에 경호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우웅-!
-형님! 게이트의 공략 승인 요청 수락이 지금 막 떨어졌습니다! 공 략 진행은 내일 당장부터 가능하다 고 하니 형님께서 편한 시간대에 연락 주세요!
무대는 만들어졌다.
어기적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일정이 상당히 빠듯해지겠네.”
서준은 메시지 창을 열어 곧장 내일부터 게이트들의 공략을 진행 하겠다는 말과 함께 약속 시간을 경호에게 전송했다.
시대를 바꿀 날갯짓이 시작된 것 이었다.
다음 날 아침.
탁
택시의 문이 닫혔다.
택시에서 내린 서준이 주변을 두 리번거리자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 경호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일찍 왔네?”
현재 시간은 9시 40분, 그에 비 해서 본래 약속 시간은 오전 10시.
자신이야 옛날부터 본래 약속 시 간보다 일찍 움직이는 경향을 가지 고 있다지만 경호까지 이른 시간에 도착을 했을 줄은 몰랐다.
“형님이 불편하시지 않도록 사전 에 준비들을 전부 끝내 뒀습니다.”
위험한 곳인 만큼 본래 게이트에 입장하기 전 사전에 준비하거나 검 토받아야 할 사항들이 존재했다.
형식적인 사항들이었지만 시간은 30분 정도로 제법 소모되는 편이었다.
그 작업들을 경호가 사전에 모두 처리해 준 것이었다.
‘제법 똘똘하네.’
서준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 를 흘린 후, 게이트로 발걸음을 내 디디려 했다.
그 순간, 경호가 팔을 뻗더니 어 릴 때 자주 먹곤 했던 요플레 스틱
같은 것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서준은 곧게 뻗어 있는 스틱을 보며 물었다.
경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몸에 좋은 홍삼 스틱입니다. 저 희 한성 그룹의 계열사인 한성 식 품에서 만든 건데 적자를 보면서 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은 제 품이니 효능은 제가 보장하겠습니 다.”
“설마…… 준비해 놨다는 게 이 거였어?”
“형님도, 그럴 리가요. 게이트 입
장 준비도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게이트 공략을 서두르는 것도 좋지 만 컨디션이 저조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러니까 미리미리 그 전에 건강 좀 챙겨 둬야죠.”
경호의 말에 홀린 듯이 설득된 서준은 손을 내뻗어 홍삼 스틱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잘 먹을게.”
생각해 보면 이렇게 준비해 놓은 거를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나름 성의인데 거절하거나, 버릴 수는 없지.’
홍삼 스틱이라면 먹어 둬서 나쁠 것은 없기에 과감히 포장을 뜯어 입으로 갖다 대었다.
꿀꺽-
서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쓰네.”
“원래 몸에 좋은 건 입에 쓰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몸에 좋을수록 맛이 없고 거부감 이 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홍삼 스틱은 상 당히 몸에 좋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만 이렇게 몸에 좋은 걸 받을 수는 없지.”
사람 된 도리로서 오는 게 있으 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살려 달라고 빌 정도로 빠르게 진행할 거니까, 정신 꽉 잡고 따라 와.”
오늘, 경호의 게이트 공략도 몸 에 좋은 홍삼처럼 쓰디쓸 것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