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권 19화
19화
두 사람은 서대문구 게이트, 아 니마 차원을 빠져나와 근처의 프랜 차이즈 카페로 향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테이블을 사이로 마주 앉은 서준과 경호 사 이에서 어색한 기류가 흐를 때, 경 호가 음료 대신 침을 먼저 삼키고 는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랑……
“안 돼.”
“예?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 데요?”
“서류.”
그렇게 말하고는 서준은 경호의 양옆에 수북한 서류를 가리켰다.
분명, 서류를 이렇게 많이 대동 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보증을 서 달라거나, 아니면 계 약을 해 달라거나.
그것은 만국 공통이었기에서둘 러 거절한 것이었다.
“보, 보수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
습니다! 제발 제 이야기를 한 번 만!”
예상치 못했던 ‘보수’란 이야기에서준의 고개가 갸우뚱- 젖혀졌다.
“ 보수?”
“예, 간단합니다. 저를 B급의 각 성자로 만들어 주신다면 삼십억, 삼십억을 드리겠습니다!”
서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삼십 억?”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이 필요한서준의 입장에서는 삼십억이란 액 수는 귀가 솔깃할 만한 수였다.
한순간일지라도 서준의 눈동자가 혼들릴 수밖에 없었다.
서준의 눈에 어린 감정, 흔들림 을 감지한 경호가 입을 열었다.
“예, 도급인 저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B급 정도의 수준까지만 성 장시켜 주신다면 그 자리에서 현금 으로 삼십억을 드리겠습니다!”
“ 흐음......
서준은 턱에 손을 괴고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서연과의 약속이 있는 만큼 지금 서준의 최우선 과제는 바로 성장이 었다.
각성자들에게 주어진 포스 시스 템의 경험치 획득 방식은 게임과 똑같았다.
파티를 맺고 사냥을 하면 경험치 를 나눠 먹는 것도 말이다.
당연하지만 레벨 업을 하기에는 파티 플레이보다 혼자가 좋았다.
솔로 플레이가 가능한서준이 경 호와 파티를 해서 사냥을 하는 것 은 효율이 좋을 리가 없었다.
돈과 성장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 는 서준의 모습에 경호가 더욱더 강력하게 어필했다.
“뿐만 아니라 게이트 공략에 관
한 지출은 모두 저의 사비로 부담 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 조건이면 굳이 나한테 받아야 할 이유가 있나?”
세상이 변하면 자연스럽게 그에 맞는 소비 문화가 만들어지는 법이 었다.
때문에 속칭 ‘버스’라고 불리는, 각성자들의 성장 도우미 일을 전문 적으로 도맡아하는 길드들도 있었다.
그리고 전문 업체에서 F급의 하 급 각성자들을 B급의 스텟까지 성
장시켜 주는 데 요구하는 금액도 지금 경호가 제시하는 비용인 삼십 억이었다.
경호는 거기에 더불어 공략에 관 한 비용들까지 본인이 부담하겠다 는 말을 했다.
심지어 방금 전 보았던 경호의 재능을 생각하면 B급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전문 업체에서 케어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추가적인 조건과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 뭔데?”
경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어깨를 내밀어 가까이 다가와서 작 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저는 한성 그룹, 회장의 사 남매 중 막내아들입니다.”
서준의 동공이 커졌다.
“한성 그룹?”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성 그룹이라면 대한민국은 물론 세 계에서도 알아주는 우량 기업이었다.
제조, 유통, 나아가 가전 사업까 지 통달한 기업이 바로 한성.
하나둘씩 맞춰져 가는 퍼즐에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형님이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 다. 그 한성 그룹의 후계자 싸움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TV 속 드라마나, 소설에서 흔히 들어봤던 이야기였다.
회장의 자리를 두고 후계자들이 벌이는 재벌가의 피 튀기는 잔인한 싸움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가진 기반이 없다고는 하지만 저도 아버지의 핏줄인 만큼 본격적 인 후계 싸움이 시작된다면 형님과
누님들이 저를 가만히 두려 하지 않겠죠.”
경호가 혼자서 오크를 사냥하려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후계 싸움 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권모술수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도 백 퍼센트 안전하다 고는 할 수 없지 않아?”
서준의 물음에 경호가 고개를 내 저으며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형님의 신원은 미상인 상태입니다. 실종됐다 돌아 온 지 겨우 수일밖에 안 되신 상 태이죠, 즉 저희 형과 누나들도 접
촉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 다.”
무엇보다도 형과 누나들에게 고 용된 상태였다면 그때 그 오크를 죽이고 도움을 줄 이유도 없었다.
‘그냥 지켜보다가 사고사로 처리 했겠지.’
하지만 서준은 오크를 처치하고 목숨을 구해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경호는 서준을 신 뢰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중간에 네 형이나 누나한 테 매수당해 변심하면 어쩌려고 그 래?”
정곡을 찌르는 서준의 말에 경호 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부분은 일종의 도박입니다, 하지만 무섭다 고 계속 현실에 안주해 있다가는 어차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 겠죠. 그러느니 지금 찾아온 이 작 은 확률에라도 제 모든 것을 걸어 보는 겁니다.”
한성 그룹의 회장, 김병수는 갑 자기 악화된 지병으로 병원에서 눈 을 뜨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근래에는 병원에서도 마음의 준 비를 하라는 말을 했던 만큼, 사
남매로 이루어진 김병수 자식들의 실권을 쥐기 위한 후계 싸움은 이 제 초읽기의 상황이었다.
‘본격적인 후계 싸움이 시작되면 삽시간에 낙오야.’
경호는 아직 한참이나 어린 이십 대 초반의 청년에 불과했다.
기반은커녕 경력이나 커리어를 쌓을 시간조차 부족했었다.
그에 비해서 형과 누나들은 이 미 삼십 대 중후반의 나이로 많은 경력과 커리어, 그리고 자신을 지 지할 무수한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심심찮게 들리는 재벌가의 경영 권을 두고 벌어진 선례를 보았을 때 후계자 싸움에서 낙오란 죽음을 뜻했다.
경호의 두 눈에서 삶을 향한 불 꽃이 타올랐다.
“형님, 저는 시간이 없습니다. 업 체의 속도는 너무 느려요. 당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강해져야만 합 니다.”
“나한테 정확히 뭘 원하는 건 데?”
서준의 물음에 경호가 고개를 기 역 자로 꺾으며 말했다.
“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저와 단둘이서만 게이트를 공략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아무 각성자나 데리고 둘이서 공략을 진 행하기에는 게이트는 너무나도 위 험한 공간이었다.
‘형이나 누나들한테 당하기 전에 몬스터들 밥이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서준은 최고의 멘 토였다.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현재 서준 의 등급은 최소 C, 어쩌면 B급 이 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게이트 내에서 목숨을 구 원받은 적도 있는 만큼 아직까지는 형이나 누나에게 매수당했을 여지 도 없었다.
‘형님이라면 믿고 등을 맡길 수 있어.’
견고한 신뢰와 확실한 실력까지, 서준은 그야말로 최고의 아군이었다.
어떻게든 서준만 포섭에 성공해 낸다면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준을 포섭해 냈을 때의 이야기였다.
‘요구하는 조건에 비해서 금액이 터무니없이 적어.’
본래 게이트 공략할 때는 D급이 라 할지라도 삼 인에서 사 인이 기 본이었다.
아무리 서준이 경외스러운 실력 을 지니고 있다지만 단둘이서 게이 트를 공략하자는 의견을 들으면 아 무래도 거절할 가능성이 컸다.
그에 비해서 계약금은 5〜6인의 파티로 진행하는 업체에 제시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서준의 입장에서는 메리트가 없 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후계 싸움의 시작이 초읽기에 들 어간 만큼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 볼 수 있었다.
가진 장점을 모두 어필해서라도 승낙을 받아야만 했다.
“포션과 같은 물품들도 최대한 넉넉하게 구비해 둘 테니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뿐만 아니라 성장 을 위한 D, C, B급의 게이트들을 전부 대금을 치러 낙찰을 받아 놓 은 상태이니 추가적인 지출에 관해 서도 조금도 신경 쓰실 게 없으실 겁니다.”
경호의 PR이 끝난 뒤, 짧은 침묵 이 흘렀다.
서준이 입을 다물고 있는 찰나와 도 같은 시간이 경호에게는 영겁처 럼 느껴졌다.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대답을 기 다렸다.
대답이 들려올 법한 시간이 흘렀 음에도 소식이 없었다.
“형님?”
의아함을 느낀 경호가 고개를 들 어 서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궁금증을 해결할 수는 없 었다.
오히려 더한 의문이 생길 뿐이었다.
서준의 입가에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둘이서만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대금까지 치러서 낙찰까지 받아 둔 상태라고?”
앞서 보았듯 아니마 같은 고등급 의 게이트의 경우 넓고 광활한 세 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몬스터를 찾아내기 위
한 이동과 수색에만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었다.
하지만 일정 등급 이하의 게이트 는 좁고, 작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를 찾기 위해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곧, 단시간에 빠르게 성장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가좌역 앞에 나타났던 D급 게이트에서는 단시간에 엄청 난 성장을 이뤄내기도 했다.
‘문제는 게이트의 공략 허가권이 었지.’
적게 드는 시간, 고효율의 성장 에 수호자들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마정석까지.
누가 들어도 좋은 조건으로 이 루어져 있는 만큼 내로라하는 4대 길드부터 작은 길드까지, 파괴가 가능한 하급 게이트들의 공략 권 한을 따내려고 혈안이 되는 것이 었다.
그 때문에 파괴가 가능한 게이트 를 낙찰받는 것이 어려웠다.
낙찰을 받기 위해서는 못해도 일 주일, 길게는 수개월은 노력을 해 야 했다.
근데 경호는 이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을 이미 처리해 놨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삼십억이라는 후한 보수 까지 준다니.’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다수의 사람들과 경험치를 나눠 먹을 필요가 없는 만큼 서연과의 약속을 지키기가 한결 더 쉬워졌 다.
더불어 사냥할 공간, 게이트의 전권은 자신들에게 있었다.
그야말로 폭업을 할 수 있는 조 건이 갖춰지는 것이었다.
서준은 냉큼 경호의 손을 잡았다.
“ 계약하자.”
“네?”
“빨리 계약하자고.”
경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쉽게요?”
“왜, 싫어?”
경호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그럼 내일부터 바로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 거야?”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하는 서준의 모습을 보며 경호가 조심스 레 입을 열었다.
“그 부분 때문에 형님에게 부탁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 젖히는 서준의 모 습에 경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뒷 말을 이어 갔다.
“경매로 나오는 게이트들은 마력 측정으로 등급만 매겨져 있을 뿐이 지 내부 조사, 정찰이 되지 않은 곳인 만큼 일정 인원수 이상의 공 대만 공략을 진행할 수 있게 법이 제정되어 있습니다.”
각성자들, 파티의 안전을 위해서 협회가 제정한 법이었다.
일반적인 공대의 경우 D급 3명, C급 5명, B급 10명이라는 최소한 의 인원수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라 면 공략 허가 자체를 내주지 않았다.
협회에서 인정해 주는 특수 공략 권한을 취득한 각성자의 경우에는 공대 인원수의 제한이 요구되지 않 았다.
“특수 공략 권한은 특혜 중의 특 혜입니다. 그만큼 난도는 타의 추 종을 불허합니다만……. 염치없지만
제 실력으로는 취득할 수가 없어서 형님께서 취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준은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 로 말했다.
“맡겨만 둬, 지금 당장 따올 테 니까.”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