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仙界), 백옥루(白玉樓).
흐드러지게 핀 왕벚나무의 꽃잎이 쉴새 없이 흩날리는 거대한 집 채 사이로 한 흑발, 흑안 그리고 더 검게 물들어 있는 도포를 걸친 사내가 비장하게 서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한서준.
이름보다 천마(天魔)라는 별호로 알려진 존재.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 있겠네.”
한서준은 한시라도 빨리 이 싸움 을 끝내고 싶은지 곧장 오른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가 뻗은 팔을 일(一)자로 휘두 르자 공간이 시꺼멓게 갈라지더니 눈앞의 백옥루(白玉樓)의 문이 갈라졌다.
백옥루의 내부에는 과연 수많은 선인이 끝도 없이 도열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한서준의 앞길을 막아서 지는 못했다.
오랜 세월 한서준과 싸워 온 만큼 그의 힘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저, 두려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싸울 필요도, 아니 가치도 없는 나약한 이들의 모습에 한서준의 입가에 피식- 비웃음이 피어났다.
“비켜.”
항거할 수 없는 공포에 선인(仙 人)들이 뒷걸음질 치며 길이 열렸다.
터벅- 터벅-
훤히 열린 길을 걸어가던 한서준 이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고는, 황좌(皇座)에 앉은 옥황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되니 진짜 반갑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감정이었다.
정말로 반가움 그 자체였다.
천 년 전 처음 선계에서 등선하여 싸움을 시작할 때부터 항상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던 존재인 만큼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서준을 마주한 옥황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정말 고작 천 년 만에 내 앞에 설 줄이야…….]
무서울 정도의 재능이었다.
필멸자(必滅者)에게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지만 영생을 누려 온 선계의 존재들에게는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근데 눈앞의 천마, 한서준은 고작 그 천 년밖에 되지 않는 시간 만에 선계의 모든 것들을 뒤집어 놓았다.
“내가 한다면 하는 남자거든.”
한서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진하게 피어날수록 옥황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고작 한순간의 방심이 이런 사달을 낼 줄이야.’
천마, 한서준.
개개인 혹은 문파의 신념, 협의를 이루며 대립하고 투쟁을 벌이던 정, 사, 마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모두 자신의 발아래 둔 최초의 천마.
중원(中原)에서 활동할 때부터 역대급의 활약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선계에서도 이따 금씩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필멸자에 불과한 존재였던 만큼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그것이 옥황 최대의 오판이었다.
‘설마 수련을 멈추지 않고, 등선 까지 해낼 줄이야.’
그것도 고작 1년.
대부분 평생 도달하지 못하거나, 아무리 빨라도 수십 년에서 늦으면 수백 년까지 수련을 쌓고서야 도달 할 수 있다는 경지인 신화경에 고작 1년 만에 도달해 내며 선계에까 지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후 한서준의 행보는 더욱더 파격적이었다.
‘갓 등선을 한 존재가 홀로 선계의 선인들을 꺾어 냈지.’
절대적인 마(魔)라고 불리는 천마의 등선.
선계의 선인들이 그를 용납할리 없었다.
천마신교라는 마, 천마라는 마선 (魔仙)을 몰아낼 준비를 했다.
이제 갓 등선에 성공한 천마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오랜 시간을 선계에서 수련을 해 온 선인들의 싸움.
과거의 옥황도 당연히 한서준이 무참히 패배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고 봐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한서준의 행보는 평범한 선인들을 꺾어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선계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팔선들 까지 모두 꺾어 내었다.
그것도 고작 천 년 만에 말이다.
물론,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된 팔선들과의 결전에서 한서준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한서준은 살아남았고, 팔선들을 모두 그 앞에 무릎 꿇릴 수 있었다.
‘놈이 두각을 드러냈을 때부터 곧장 처리했어야 했다.’
안일했던 스스로의 판단이 너무 나도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지난날을 떠올리며 후회 하느니 지금이라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궁리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나 옥황이 있는 한 이 세상이 마(魔)의 지배 아래 들어갈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우레와 같은 옥황의 목소리에 한서준의 고개가 갸우뚱- 젖혀졌다.
“무슨 개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라. 내가 네놈, 천마신교의 교리를 모를 것 같으냐?]
옥황이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한서준은 어 깨를 으쓱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그 교리 내가 폐한 지가 언제인 데, 그리고 이런 재미없는 세상 누 구의 지배하에 들어가든지 나는 관심 없어.”
애초에 한서준은 천마가 되고 싶 어서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끊임없는 싸 움, 투쟁(關爭)을 이어 가다 보니 천마라는 자리에 앉게 되었을 뿐이 었다.
한서준의 목소리에 한 치의 거짓 도 없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옥황의 미간에 천이I) 자 가 자리 잡아 갔다.
[그럼 네놈의 목적은 대체 무엇 이냐?]
“나야말로 묻고 싶다. 대체 왜 계속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데?”
[네놈이 선계의 질서를 어지럽히 고 선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지 않았 냐.]
“너희들이 날 먼저 죽이려 했잖 아!”
옥황의 물음표가 피어나려던 찰 나, 한서준의 간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냥 난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 인 건데,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건데!!”
[무어라?!]
홀로 선계를 무너뜨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에 게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힘들 정 도로, 황당무계한 대답.
그러나 한서준은 생각하는 것만 으로도 오열에 가까운 목소리를 쥐 어짜 내고 있었다.
“나는 그냥 내 행복…… 우리 집, 가족들이 있는 지구로 돌아가 고 싶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지구라는 곳으로 돌아 가는 것이 목적이었단 말이냐?]
“처음부터 내가 바랐던 것은 그 것뿐이었어.”
목소리나 표정에 거짓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한서준은 천마(天 魔).
그것도 역대 천마 중에서 가장 악랄하면서도 잔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고작 말 한마디로 그를 신용하기 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중원의 사람들을 그렇게나 많이 죽인 거냐?]
“내가 죽이려고 죽였어? 봤으면 알잖아. 주변에서 나를 계속 죽여 버린다고 공격해 오잖아, 안 죽이 면 내가 죽게 생겼는데 너 같으면 가만히 있을 수 있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다고.”
한서준이라는 역대 고금제일이 라는 천마의 등장이었던 만큼 주 변의 정파의 일원들이 한서준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십대고수라고 불리는 인물 중 두 명, 무림연맹의 맹주 유중록과 남 궁세가의 남궁척이 한서준을 죽이 기 위해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천마, 한서준의 힘은 생 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두 명의 십대고수를 아주 손쉽게 처치해 내었다.
중원을 뒤집을 정도로 중대한 일 인 만큼 자연스레 사방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고, 천마를 두려워하는 문파들끼리 뭉쳐 연합을 창설하며 천마신교를 멸문시키기 위해 진격 을 해 왔다.
한서준은 스스로가 말했듯이 정 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을 죽인 것뿐이었다.
[선계에서 난동을 피운 것은?]
“그냥 집에 가는 방법을 알고 있 는지 물어보기 위해서 등선을 했는 데 너희들이 다짜고짜 마선(魔仙) 이니 뭐니 하면서 먼저 공격해 왔잖아.”
기억을 더듬어 보자 한서준의 말 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한서준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먼저 공격을 하며 적의를 표출 한 것은 선계의 신선들이었다.
[하아…….]
터무니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 옥황이 두통이 밀려오는지 손바닥 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해 서 과거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듭 말했지만 현실적, 미래지향적인 일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네놈이 있었다는 지구라는 곳 이…… 이곳이 맞느냐?]
옥황이 손에 쥔 붓으로 원을 그 리자 그 안에 흐릿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고향 별, 지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구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푸른 바다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뿌연 먼지들을 확인한 한서준은 미 친 듯이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을 표했다.
“혹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는 거야?”
[뭐 다소 무리를 해야 하긴 하지 만... 이 몸이 한 100년쯤 정양한다 면 방법이 없지는 않다.]
한서준의 얼굴에 희열이 차오르 는가 싶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부정을 표 하고 있었다.
“아니지, 아무리 간절히 바라 왔 다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수작 을 믿으려 하다니……
옥황은 자그마치 천 년을 싸워 온 선인들의 수장이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신용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말도 안 되는 것에 속았다는 스 스로에 대한 모멸감과 자신의 마음 을 가지고 논 옥황에 대한 감정들 이 뒤섞이며 가슴속에서 짙은 분노 가 피어났다.
“치사하게 남의 오랜 염원을 가 지고 장난질을 치려 해?”
노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고 있는 한서준의 흑발이 하얗게 물들어 갔 고,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한서준 의 살기 서린 의지들이 백옥루의 내부를 잠식해 갔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인들은 자연스레 무기를 치켜들며 한서준을 겨냥했다.
백옥루 내부가 언제 싸움이 터져 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 으로 치닫고 있던 찰나였다.
그 순간, 화근이라고 부를 수 있 는 옥황이 손을 치켜들며 말을 내 뱉었다.
[백옥경(白玉京)을 걸고 말하지. 앞으로도 너와 나누는 언행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을 것이라는 걸 말 이야.]
백옥경은 선계의 중심이자 뿌리 를 품고 있는 근원이었다.
제아무리 옥황이라 할지라도 혼 자도 아니고, 선계 전체의 근원을 걸고 약속을 한 상황에서 거짓을 내뱉을 수는 없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옥황은 목 숨을 벗어나 본인이 그토록 아끼고 가꿔 온 모든 것을 걸었다고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정말 고작 그런 방법으로 지구로 돌아가는 게……말을 끝내지 못하는 한서준의 눈 빛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게, 그런 게 진짜로 가능하다 고? 그럼 여태껏 내가 한 개고생은 뭔데?’
한서준의 눈빛을 읽은 옥황상제 가 다소 허탈한 표정을 지은 채 말 을 이어 나갔다.
[말하지 않았나, 가능하다고 말이 야. 사정을 몰라 이렇게 돌아오게 된 것은 안타깝게 됐다만…….]
그건 옥황상제의 입장에서도 크 게 다르지 않았다.
따지자면 별것도 아닌 일로 괜한 피를 본 셈이니 말이다.
“돌려보내 줘! 정말로 지구로 돌 아갈 수 있다면 지난날의 원한은 없던 걸로 해 줄게.”
옥황도 마음 같아서는 선뜻 제안 을 받아들이며 눈앞의 괴물과의 끔 찍한 인연을 얼른 끊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백옥경을 걸고 맹세한 이 상 한서준을 상대로 거짓말 혹은 사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부턴 옥황과 선계의 자존심 문제였다.
[말을 끝까지 들어라, 지금 네놈 이 원하는 것은 그냥 지구로 돌아 가는 것이 아니지 않냐?]
옥황의 물음에 한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
중원에서의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선계에서만 자그마치 천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왔다.
지금 시간대의 지구로 돌아가 봤 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행복했던 삶, 가족들이 존재치 않아.’
한서준이 옥황을 바라보며 떨리 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건 불가능한 거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만, 단순히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닌 시간
까지 역행해야 하는 만큼 예기치 못한 리스크가 있을 수도 있다.]
“돌아가다가 죽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네놈이 가지고 있는 격(格)이 있 는 만큼 그 정도의 일까지는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관없어.”
한서준은 간절한 표정을 지은 채 로 말을 내뱉었다.
“집으로 돌아갈래.”
[네가 직접 선택한 것이니 나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도 집, 지 구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원망은커녕, 거짓말 좀 보태자면 감사의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확고한 한서준의 목소리에 옥황 이 고개를 주억이더니 붓을 쥔 손 을 움직였다.
기이한 문자들이 허공을 수놓았고, 이윽고 하나의 진(陳)이 한서준 의 발아래에 그려졌다.
우우웅-!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펼쳐진 진에서 살의나 살기 같은 공격성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만큼 그를 거부감 없이 받아 들였다.
옥황의 전신에서 홀러나온 막대 한 양의 기가 진의 내부로 흘러들 어 갔다.
붓으로 그려진 기이한 문자들과 옥황의 기운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 으켰다.
쩌억-!
이윽고,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며 푸른 별, 지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돌아가거라!]
괴팍한 옥황의 외침과 함께 기묘 한 감각이 한서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 아오지 마라!]
옥황의 외침에 한서준은 치켜든 중지 그리고 환한 웃음으로 화답을 해 주었다.
“걱정 마, 이쪽 방향으로는 오줌 도 안 눌 거니까.”
쉬익-!
강력한 흡입력이 몸을 끌어당겼 다.
한서준은 그 흡입력에 몸을 온전 히 맡기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절대적인 권력과 힘, 마르지 않 는 재화와 같은 부귀영화(富貴榮 華)를 포기하면서까지 지구로 돌아 가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잃고 나서야 알 수 있듯이 한서준은 갑작스레 중원에 떨어진 뒤로 부터 가족의 소중함을 깨치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동생 서연이. 다들 무사하겠지?’
무엇을 하든 항상 내 편에서서
응원을 해 주던 부모님과 여동생 한서연은 한서준에게 있어서는 어 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짹…… 째액.
귓가를 때리는 참새 소리, 푸른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아침 햇볕 에 굳게 닫혀 있던 한서준의 눈꺼 풀이 조금씩 들렸다.
“여기는?”
정신을 차린 한서준의 표정에 어 두운 그늘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 야에 들어온 것은 생각했던 빌딩들
이 줄지어 서 있는 도시의 풍경이 아닌 푸른 나무들로 가득한 울창한 숲이었다.
곧장 하늘로 날아올라 주변의 상 황을 살피려 했지만, 몸이 생각처 럼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 뭐야?”
무거웠다.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육중한 중압감과 피로감이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몸 상태가 왜 이래?’
무공을 배운 뒤, 아니, 정확히 말 하자면 천하제일인이라는 별호를
얻은 뒤부터는 무력감, 피곤함이라 는 감각을 일절 느끼지 못했기에 이 감각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 가던 와 중, 불현듯 옥황과의 대화가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
“차원 이동과 시간 역행에 따른 예기치 못한 리스크……
원인을 찾아낸 만큼 당황스러움 은 줄어들었지만 그를 대신하여 거 대한 충격이 찾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정도 의 격(格)과 경지가 한 번에 무너 졌다고?”
팔선들을 무릎 꿇릴 만큼 강했 고, 옥황과 싸워도 질 것 같지는 않을 정도로 높은 격과 경지를 가 지고 있었다.
그런 막강한 격과 경지가 순식간 에 사라진 것이었다.
짜증과 분노가 치솟으려 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감정적으로 행동 해 봤자 좋은 결과를 낼 수는 없었다.
한서준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생 각을 정리해 나갔다.
‘침착하자, 어차피 힘은 다시 복구해 낼 수 있어.’
한번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것 이 불가능할 리가 만무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지 도달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선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몸을 회복해 두자.’
다행히도 무겁고 피로할 뿐이지 움직이는 건 가능했다.
그리고 한서준은 이렇게 사지 멀 쩡한 육체만 있다면 몸을 회복할 방도가 존재했다.
머릿속에 천 년이 넘는 세월 동 안 중원과 선계에서 쌓아 온 ‘무공’
에 관한 지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기도 제법 많이 흐르고 있네.’
정확히 말하자면 상당한 양의 기 의 흐름이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과거, 중 원보다 더 많은 것도 같았다.
‘이 정도 양이라면 곧장 천마신 공을 운용할 수 있겠어.’
본래라면 아무리 기가 많다 할지 라도 불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천마신공을 받아들이기에는 지금 가진 그릇이 너무나도 나약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천마에 도달했었 던 자신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천마신공에 관한 것이라면 방대 한 지식과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대성에 이르는 것을 넘어 서, 한 단계 진보까지 시켰었을 정 도니 천마신공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육체에 제대로 된 그릇이 없 다 할지라도 쌓아 낼 자신이 있었다.
무거운 몸을 움직여 가부좌 자세 를 취한 한서준은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대기 중에 떠다니는 기운들이 입 과 코로 빨려 들어왔다.
그러자 패도적인 기운이 몸속으로 침범해 오며 폐를 시작으로 전 신으로 퍼져 나갔다.
모든 것을 마(魔)로 물들였다는 천마(天魔)의 힘.
나약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분 에 넘치는 힘들이 신체를 벗어나려 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입, 목, 폐부에서부터 시작된 고 통은 삽시간에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전신을 찢어 버릴 듯이 난폭하면 서도 폭발적인 기운에 마치 흡사 온몸을 난도질당하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한서준은 작은 신음조 차 내뱉지 않았다.
‘견뎌 내야 한다.’
모든 것을 발아래 두었던 천마가 창안해 낸 무공.
창안한 자의 성정을 닮아서인지, 천마신공은 사용자, 주인마저 군림 하고 복종시키려는 패도적인 성질 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기운에 억눌려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 간, 이 패도적인 기(氣)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할 것이었다.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호흡을 멈 춘다면 죽음을 맞이하거나 미치광 이가 될 것이었다.
영겁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흘렀 다.
그 시간 속에서 한서준의 육체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배꼽 아래쪽에 크기는 작지만 명 확한 그릇이 만들어졌고, 뭉쳐 있 던 근육들이 풀려났으며 꽉 막혀 있던 혈관의 길이 열리며 납덩이처
럼 무거웠던 육체가 서서히 가벼워 져 갔다.
“후우.”
어느덧 거칠고 고통스러웠던 숨 소리가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대기 중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단 전에 축적해 내는 내공심법의 첫 단추를 채운 것이었다.
“일단 이 정도면 급한 불은 껐 네.”
본격적으로 주변을 탐색하기 위 해서 몸을 일으키려던 한서준의 움 직임이 멈추었다.
귓전을 때리는 화려한 팡파르 소
리와 더불어 눈앞에 반투명한 메시 지 창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빠라빠라빰빠〜 빠라빠라! 빰! 빰〜띵-!
[포스 시스템의 접속에 성공해 내었습니다!]
[새로운 각성자님을 환영합니다!]
[S급 스킬, 천마신공을 획득하셨 습니다.]
[사용자의 편의에 맞춰서 시스템
창의 용어 변경 작업에 들어갑니 다.]
[작업 진행률 0…… 27…… 7
6…….]
“이건 뭐야?”
난생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고개 가 갸우뚱 젖혀지려던 찰나.
[용어 변경 작업이 완료되었습니 다!]
띵-!
[사용자 ‘한서준’의 스테이터스 창 정보를 불러옵니다.]
[스테이터스]
이름 : 한서준
나이 : 26?(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하여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합니 다.)
특성 : 무인(武人)
레벨 : 1
칭호 : 없음
보유 내공 : 15
힘 : 9, 민첩 : 8, 체력 : 9
보유 활성화 스킬
E급, 천마신공 1성 - 삼라만상의 위에 군림하고, 만휘군상을 아래에 두는 천마(天魔)의 극(極)과 오(與) 를 다루는 신공입니다.
게임에서나 보았던 초록빛 홀로 그램 스테이터스 창이 눈앞에 떠올 라 있었다.
꿈인가 싶어서 볼을 꼬집어 보았 지만, 알싸한 고통이 피부에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한서준은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동요를 가라앉혔다.
“ 후우......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여기서 당황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침착하게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 해 나가야 했다.
현재의 위치, 난생처음 마주하는 홀로그램 창.
이 외로도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 에 꼬리를 물며 생겨나고 있었다.
가족들과의 재회,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가장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안전과 건강인 만큼 몸 상태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극히 적은 내공의 양과 변변치 못한 몸.’
잘 쳐줘 봐야 이류무인밖에 안 될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시민보다는 강하지만 무인 중에서는 하위권.
곰, 멧돼지, 늑대 무리와 같은 위 협적인 야생동물과의 싸움에서도 순간의 잘못된 판단 한 번으로 절명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숲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만약의 상황에 대비 하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수 단이 필요했다.
‘일단은 지금 몸 상태로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무공을 생각해 보자.’
기를 유형화시킬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육체의 감각을 끌어 올 리고 초식에 내공을 실어 내거나 강화시킬 수는 있었다.
수많은 초식들이 머릿속에 떠올 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효율적이 고 강력한 것을 고르고 솎아 내었다.
마침내 한서준은 오른팔을 앞으로 내뻗으며 기다란 손가락들을 눈 앞의 나무에 갖다 대었다.
그 상태로 두 눈을 감으며 체내 의 기(氣)와 모든 힘을 오른손으로 집중시켰다.
이윽고 무게의 중심을 앞으로 쏟 아 내며 펴고 있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마치 곰이 팔을 휘갈기는 것과도 같은 육중하고도 민첩한 힘이 담긴 주먹이 쏘아졌다.
파앙-!
주먹과 나무가 부딪치며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우렁찼던 소리와 달리 나 무의 외관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엄청 적응 안 되네.”
사용하는 무공의 위력도 그렇지 만 급격한 내공 소모 때문에 피로 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미미한 양의 내공을 사용한 것치고는 성과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노렸던 타격점 자체가 외부가 아닌 내부였고, 방금 주먹으로 가격한 위치를 중심으로 크레 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쓸 만은 하겠 지.”
눈앞에 놓인 성과를 확인하고 있 을 때 귓전으로 전에 들었던 알림 음이 들려왔다.
띵-!
[B급 스킬, 마권경(魔奉勤) 3성 을 습득하였습니다.]
B급, 마권경 3성(최소 소모 내공 10)
근육과 내력의 조율, 재주의 조 화가 절묘한 권장법입니다, 단순하 지만 순수한 힘의 묘리가 담겨 있 어, 작은 움직임으로 기암괴석마저 두 동강 냅니다.
한서준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홀로그램 창을 바라보았다.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네.’
이 상태 창이라는 것은 진짜였 다.
현재 몸 상태부터 무공에 소모되 는 내공의 양과 사용하는 무공의 이름까지 아주 객관적으로 보여 주 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불안했다.
마치 게임과 같은 초록빛 홀로그 램의 상태 창의 등장, 주변의 풍경 은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눈곱만큼 도 찾아볼 수 없는 울창한 숲.
모든 것들이 이곳이 자신이 알고 있던 지구라고 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생각을 이어 가던 한서준의 눈동 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함정에 빠진 건가?’
나름 타당한 생각이었다.
전면전에서 승산이 없다 느낀 옥 황이 동귀어진의 수를 낸 것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문들 들었다.
한서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 다.
“이 개X……
거친 욕설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마음속에서 복수라는 감정이 피어 나려던 찰나, 익숙하면서도 아주 그리웠던 언어가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고개가 자연스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한국어?”
생각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곧장 발을 놀리며 소리가 들려왔 던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 던지 금세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 다.
다리를 다친 것인지 붉은 피가 흐르고 있는 다리를 꽈악- 부여잡 고서 나무에 몸을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을 도와주고 함께 구조받 는 것으로 문명이 존재하는 도심지 로 돌아갈 생각에 가슴이 벅차을랐다.
그러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질 수록 이상한 것이 하나 끼어 있음 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건 뭐야?”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는 녹 (綠)빛의 피부, 돼지의 코를 연상케 하는 못생긴 코, 웬만한 성인 남성 의 2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 와 그에 걸맞은 우락부락한 근육까 지.
영화나 만화책에서 보았던 ‘오크’ 의 모습을 빼다 박아 놓은 것 같은 녹색의 생명체가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한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건 뭐야?’
절망을 동반한 수많은 의문이 피 어났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 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거대한 녹색 생명체가 흉흉한 살 기를 내뿜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사 내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복잡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 돼!!”
주의를 돌릴 방법이 마땅히 떠오 르지 않아, 일단 무작정 소리를 내 지른 것이었지만 다행히도 효과가 상당히 훌륭했다.
녹색 생명체는 갑작스레 난입한 불청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거 센 콧김을 내뿜으며 몸을 돌리더니 육중한 몸을 무기 삼아서 내달려 왔다.
쿵! 쿵!
녹색 생명체는 육중해 보이는 몸 과 달리 발놀림은 상당히 재빨랐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한서준은 쇄도해 오는 녹색 생명 체를 바라보며 조용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내력에 근 육과 뼈가 질겨지고, 탄탄해지면서 힘이 용솟음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천마신공이 가진 힘 이었다.
‘정면 승부는 승산이 없어.’
숱한 싸움을 겪어 온 만큼 굳이 맞붙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천마신공의 능력이 뛰어 나다 할지라도 가진 내공의 양이 너무 미미했다.
체급은 곧 힘, 이는 일정 경지에 까지 오르기 전에는 절대적인 법칙 으로 작용했다.
그에 비해서 녹색 생명체는 얼핏 잡아도 1.5배가량 더 거대한 덩치 와 보기만 해도 흉흉한 근육을 가 지고 있었다.
힘 싸움, 아니 싸움 자체가 성립 될 수 없다고 봐도 되었다.
하지만 한서준은 승산이 없는 싸 움을 걸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녹 색 생명체가 허리를 뒤틀며 거대한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한서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빠르네.’
그러나 빠르기만 할 뿐이었다, 놈의 공격은 눈에 훤히 보일 정도 로 직선적이었다.
이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무식한 공격은 아무리 힘이 좋고 빠르다 할지라도 서준을 위협 할 수는 없었다.
왼발을 가볍게 반 보 옆으로 움 직이는 것만으로 쇄도해 오는 주먹 을 피할 수 있었다.
쾅
녹색 생명체는 실패로 돌아간 지 금의 공격을 무마하기 위해서 두 번째 일격을 이어 가려 했지만 그 마저도 순탄치가 않았다.
나무에 박혀 버린 주먹 때문에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있었다.
무식할 정도로 넘치는 힘이 스스 로의 발'목을 잡게 된 셈이었다.
‘지금이다.’
오른발을 반보 내뻗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녹색 생명체의 등을 점해 내었다.
한서준은 나무에 박힌 팔을 빼기 위해 발버둥 치는 녹색 생명체의 등, 그중에서도 생명체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왼쪽 상체, 심장을 향 하여 팔을 내뻗었다.
내뻗어지고 있는 손가락에는 마 권경의 묘리가 담긴다.
‘신장(申掌)
손가락이 녹색 생명체의 몸에 닿 는 순간, 마권경의 묘리에 담긴 내 력이 매서운 파도가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서준의 주먹이 맞닿아 있는 녹색 생명체의 피부에 실금들이 거미줄 처럼 펼쳐졌다.
파앙-!
뒤이어 짧은 폭음과 함께, 녹색 생명체의 입에서는 거품이 솟아올 랐고, 눈동자에는 흰자위가 드리우 고 있었다.
마권경의 신장은 발경을 통하여 겉이 아닌 속, 내부를 파괴하는 무공.
심장이 으깨진 녹색 생명체는 제 대로 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띠링!
[E등급 몬스터 오크를 성공적으로 처치해 내셨습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필요 경험치를 충족함에 따라 레벨이 5로 상승하 였습니다.]
[성장 재능이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모든 스테이터스 +15]
‘레벨 업? 스테이터스 상승?’
혹시나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아 까 전 보았던 스텟 창을 확인해 보 자는 생각을 하자마자 일전에 들었 던 경쾌한 소리와 함께 초록빛 홀 로그램의 창이 떠올랐다.
—띵!
[스테이터스]
이름 : 한서준
나이 : 26?(알 수 없는 오류로인하여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합니 다.)
특성 : 무인(武人)
레벨 : 5
칭호 : 없음
보유 내공 : 30
힘 : 24, 민첩 : 23, 체력 : 24
보유 활성화 스킬
F급, 천마신공 1성
B급, 마권경 3성
혹시나 환각을 보는 건가 싶어서 손으로 눈을 비벼 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진짜로 올랐잖아?’
심지어 단순히 숫자만 오른 것이 아니었다.
스텟이 상승하자 내공의 양도 많 아졌을뿐더러 무뎠던 뼈대와 근육 도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이 강해졌다는 것이 실시간으로 확연하게 체감됐다.
한서준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방법으로도 강해질 수 있 다고?’
강해지는 것이 너무나도 쉬웠다.
본래 강해지는 방법은 인고의 시 간을 거쳐 무공을 익히거나, 매일 매일 피나는 수련을 반복하는 것뿐 이었다.
근데 이 시스템이란 것은 레벨, 스텟의 상승이라는 것을 통해서 강 함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자연스레 성장의 유일한 문제점 이라고 볼 수 있었던 속도, 시간이 해결되었다.
그릇만 보자면 형편없어졌으나 영혼은 그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릇만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잃어버린 격과 경지는 언제든지 쌓아 올릴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의 방식과 같은 무공을 익히 고 수련을 거듭해 가는 생활 속에, 이 시스템이라는 것이 더해진다면.
‘이전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거잖아.’
전성기라 부를 수 있는 마선, 천마라 불리었던 시절보다 2배, 아니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강해 질 수도 있었다.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도 있다 니……
기본적으로 한서준은 무인, 그중 에서도 천마라 불리었던 존재였다.
강함을 동경, 숭배했고 강해지는 것에 기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쿵! 쿵!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귓전에까지 들려왔고, 자연스레 입 꼬리가 치솟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감정,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아쉽게 도 지금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이 지구가 맞는지 부터 확인해야 해.’
애초에 한서준이 바라던 1순위의 목표는 행복했던 삶의 터전이었던 곳, 가족들이 있는 지구로의 귀환.
아무리 강해질 수 있다 할지라도 이곳이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지구가 아니었다면 큰 의미가 없었다.
잡념을 털어 낸 한서준은 고개를 돌리어 나무에 몸을 기댄 채로 앉 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질문들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상태가 상태인 만큼 무작 정 질문을 쏟아 내는 것은 순서가 아니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말을 내뱉은 한서준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역력했다.
단순히 이곳이 지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무엇보 다도 걱정되는 것은 의사소통이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한국어를 계속 간간이 사용해 오긴 했지만 실전에서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정확하게 발음하고 있는지, 사내 의 말을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몰려오는 긴장감에 입안이 바짝 말라 갔지만, 다행히 앞선 걱정들 이 무안해질 정도로 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오크를 홀로 상대하는 건 처음 이라 너무 긴장을 해서 다리에 힘 이 풀려서 넘어진 것뿐이에요, 상 처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크지 않아 요.”
사내는 팔을 내뻗어 바지를 걷어 올리며 종아리의 상처를 보여 주었다.
다행히도 사내가 내뱉은 말처럼 다리에 난 상처는 미미한 찰과상에 불과했다.
“상처가 크지 않다니 다행이네 요.”
“도와주신 덕분이죠, 구해 주셔 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김 경호라고 합니다.”
사내의 상처를 두 눈으로 확인한 한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좋았어.’
지금 경호의 몸 상태는 서준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 앞의 경호는 머릿속에 있는 의문들, 가족들과의 재회에 결정적인 답들
을 내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 다.
경호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면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저 정도 상처라면 충분 히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겠어.’
그렇다고 해서 갑작스레 질문들을 쏟아 내며 다가갔다가는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서준은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주저앉아 있는 경호에게로 향했다.
“한서준이라고 합니다, 상처가 깊지는 않지만 제대로 처치해 두지 않으면 상처가 덧나거나 곪을 수도 있습니다.”
서준은 걸치고 있던 도포의 소매 부분을 찢어 경호의 다리에 묶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응급처치를 해 주는 서준의 모습에, 경호의 눈 에서려 있던 호의가 더욱더 진해 졌다.
수상하면서도 몸을 꽁꽁 싸맨 어 두운 복장 때문에 음지의 세계에서 일하는 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조금이지만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서준의 언행들을 보고 있 자니 경계심이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적어도 위험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오히려 근래 보기 드문 좋은 사 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각성자의 세계는 잔혹, 냉혹 그 자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아군 이라 불렸던, 불리는 존재를 아무 렇지 않게 배신하는 곳,
몬스터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사 람을 도와주는 이들은 흔치 않았다.
모든 각성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 었지만, 도와주기는커녕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몬스터를 돕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한서준처럼 비명 소리를 듣고 도와줄 정도로 선한 이들은 상당히 드물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그의 선한 마음을 오해 했던 것에 대해서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때마침 서준이 과거의 오해에 대한 업보를 청산할 수 있는 건더기 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뭣 좀 여쭤 봐도 될까요?”
한층 표정이 밝아진 경호가 말했 다.
“제가 아는 선에서는 다 말씀드 릴 테니 편하게 질문하셔도 돼요.”
완벽히 긴장을 푼 경호의 모습을 확인한서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밀 려 있던 질문들을 쏟아 내었다.
1시간에 달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경호와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그간의 의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이곳은 틀림없는 지구다.’
바라고 바라던 지구로의 귀환에 성공해 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 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아니, 이곳이 지구이기에 더 당 황스러웠다.
서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정말 내가 아는 지구가 그렇게 변했다고요?”
“저보다 2살 형님이시던데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본래 친근하게 다가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런 사소한 것으로 말 싸움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곧장 경호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방금 전 했던 질문을 다시 내뱉었다.
“정말 지구가 그렇게까지 변했다 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재차 질 문을 던졌지만, 애석하게도 경호는 고개를 힘차게 주억이며 대답을 했 다.
“ 네.”
경호의 당당한 대답에서준의 얼굴 표정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 어 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과 거, 서준이 중원으로 끌려간 날인 2027년 5월을 기점으로 지구는 그 야말로 대격변을 맞이했다 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시스템을 통하여 상식 외의 힘을 얻게 된 각성자들이 등장했을 뿐더 러 지구에서 다른 차원을 오갈 수 있는 게이트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는 만화, 영 화 혹은 소설 속에서나 보았던 몬 스터, 이종족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마법과 같은 스킬, 각종 원료들을 대체할 수 있는 자원까지 나타 났다.
그로 인하여 지구에는 기득권 계 충의 변화를 비롯한 크고작은 변 화들이 무수히 많이 일어났다.
갑자기 변화한 지구의 상황만으로 머리가 아파 왔지만 이외로도 문제점들은 무수히 많았다.
‘시간이 너무 어긋났어.’
현재, 오늘의 날짜는 2030년 6월 26 일.
2027년에 중원으로 끌려갔던 점 을 생각한다면 자그마치 3년가량의 오차가 생긴 것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짧다고 볼 수 없었다.
하물며 몬스터와 다른 차원의 종 족들이 모습을 드러낸 대격변의 날 까지 있었으니 가족들에게 어떤 식 으로 영향을 끼쳤을지 알 수가 없 었다.
서준은 밀려오는 초조함을 견디 지 못하겠는지 엄지손톱을 잘근잘 근- 깨물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3년간의 기억이 전 혀 없으시다가, 오늘 갑자기 눈을 떴는데 각성자가 되신 게 맞으세 요?”
자그마치 1시간여 동안 성심성의 껏 답변을 해 준 경호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지금 당장 진실을 밝히 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겁쟁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지만 평범했던 20대가 칼이 난무하고 피와 살점이 낭자하는 고대 중국같은 세상인, 중원에 떨어지는 경 험을 겪고 난다면 조심성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서준은 고개를 돌려 경호의 얼굴 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맞아, 왜?”
딱히 변명거리를 댈 것이 없다 보니 기억이 없다는 말로 둘러대고 있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인 만큼 경호의 두 눈이 서서히 가늘어져 가더니, 침묵이 짧게 이어졌다.
‘거짓말하고 계시는 거겠지.’
백 퍼센트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3년간의 기억이 사라졌음에도 불 구하고 당황스러운 기색이 전혀 보 이지 않을뿐더러 오크를 일격에 쓰 러뜨릴 정도로 강자였다.
심지어 단순히 강한 스킬로 오크 를 쓰러뜨린 것이 아니었다.
사나운 오크가 눈앞에서 달려들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력과 침 착함을 놓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 물이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 까지.
‘홉사,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러 본 랭커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 어.’
전투 능력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내뿜어지는 존재감은 무겁고 깊다 못해 절로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아마, 조금이라도 위험한 악인이 라고 판단되었다면 곧장 협회에 신 고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켜본 서준의 언행들을 생각해 본다면 악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으신 거겠지.’
호기심이 일었지만 말하기 힘든 사연을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까지 는 없었다.
생각을 마친 경호가 고개를 주억 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형님의 말이니 믿 겠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억지로 믿음을 주 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경호의 모 습에서준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로 물었다.
“역시 많이 이상하지?”
“처음 몬스터를 마주하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협회의 라이선스 시험을 합격한 저도 오크의 살기를 못 견디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 무것도 못하고 당할 뻔한 거를 보 셨잖아요.”
경호의 말에서준은 담담히 고개 를 주억였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겠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었다.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지.’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할지라도 첫 전투에서는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천마라고 불리며 옥황마 저 위협했었던 자신도 과거 중원에서 첫 실전을 치를 때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3년 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실종자가 갑작스레 각성자가 되어 서 돌아오더니 혼자서 몬스터, 오 크를 사냥하기까지 했다?
세상 누가 보더라도 의심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내가 오크 잡은 건 비밀로 해 줄 수 있을까?”
서준의 말에 경호가 턱을 쓰다듬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밝히지 않는 게 좋긴 하 겠네요.”
자신도 서준의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 생각을 했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라면 이를 이상하지 않게 생각할 리 만무했다.
‘아마…… 불법 미등록 각성자, 범죄자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서 움 직이겠지.’
협회의 조사가 시작된다면 서준 에게 갖가지 번거로운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 었다.
‘형님에게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애초에서준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해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오크한테 당할 위기에 빠 지지 않았더라면 형님께서 모습을 드러낼 일도 없었을 거야.’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경호는 검지와 엄지를 입술 끝에 갖다 대더니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해 가며 말했다.
“입단속 철저히 하겠습니다.”
서준은 경호의 모습을 보면서 흡 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부탁할게.”
“제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이 정 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죠. 혹시 더 부탁하실 거 없으세요?”
거절할 이유도 없고, 마침 해결 해야 할 문제도 있는 만큼 곧장 부 탁을 내뱉었다.
“여기서 나가는 길 좀 가르쳐 주 라.”
“저도 부상 때문에 오늘 사냥은 힘들 것 같아서 나가려 했던 참이 라 저랑 같이 나가시면 될 것 같아 요. 그런 쉬운 일 말고 다른 부탁 은 없으세요?”
부탁을 받고 있는 입장임에도 불 구하고 경호의 눈동자에는 간절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경호를 바라보는 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목적이 뭐야?”
짧지 않은 세월을 산 덕에 많은 것을 익히고 겪어 왔다.
그리고 그중에서 아직까지도 가 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지.’
호의는 삼겹살까지라는 말이 괜 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타인이 무언가를 베풀려 할 때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라고 보 면 되었다.
“그……
서준의 눈치를 살피던 경호가 조 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부 디 절 제자로 받아 주십쇼!!”
“ 제자?”
서서히 좁혀지고 있는 서준의 미 간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경호는 한 층 더 간절함을 담아서 소리쳤다.
“염치없게 무료로 가르쳐 달라고
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대 가든 치를 테니 부디 방금 전 오크 를 사냥했던 스킬을 전수받고 싶습 니다!”
스킬은 시스템이 요구하는 동작 과 마나 혹은 기의 운용을 처음부 터 끝까지 완벽하게 소화할 경우 익힐 수 있었다.
경험치를 얻어야만 올릴 수 있는 레벨과 달리 스킬은 사람과 사람끼 리 전수해 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스킬은 각성자의 재산이자 생명이라고 볼 수 있었기에 타인에게 전수해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 었다.
초면인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고 있는 만큼 경호도 거 절당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생각했던 것과 전 혀 달랐다.
“그래, 가르쳐 줄게.”
경호가 얼빠진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서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권경은 그리 귀한 무공이 아니 었다.
이류무인 정도만 되어도 천마신 교에 입단한다면 흔쾌히 가르쳐 주 는 무공이었다.
심지어 마냥 호의로 전수를 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기브 앤 테이크지.’
경호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고, 추후에 괜한 말들이 나오지 않 기 위해서는 한 번 더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귀한 무공이 아닌 만큼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거래가 성사될 수 있었는데 추후에 따로 대가를 치러 준다 하고 있으니 가르쳐 주지 못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싫어?”
서준의 물음에 경호가 황급히 고 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그럴 리가요! 스승님으로 모시 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호칭은 됐고 철저한 입단 속이랑 대가 치른다는 약속 잊지 마.”
“알겠습니다!”
거저먹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래 조건에서준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피어났다.
경호의 안내를 받으며 움직인 덕 분에 30여 분 정도 만에 게이트 바 깥,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전에 출입했던 기록이 없었던 만큼 입구의 검문소에서 발목이 잡 힐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집으로 돌아
가고 싶었지만 가족들과의 재회를 범죄자의 꼬리표를 단 채로 이루고 싶지는 않았다.
‘천 년을 견뎠는데 고작 몇 시간 을 못 기다릴까.’
수학여행을 앞둔 학생 때처럼 마 음 한편에서는 설렘이 가득 차오르 며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려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고된 여정도 서서히 끝이 보이고 있었다.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협회 안 전 관리 본부 소속 안채형이라고 합니다. 먼저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3년이라는 긴 시 간을 두고도요.”
취조실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로 좁은 방의 문이 열리더니 한국 각성자 협회를 상징하는 사괘(四 卦)가 새겨진 제복을 입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서고는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 왔다.
“감사합니다, 한서준이라고 합니 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형의 말에 대답하는 서준과 달리 경호의 표정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안전 관리 본부의 안채형이라 고?’
미등록 혹은 통칭 빌런이라 불리 는 불법 각성자들을 비롯한 범법 행위부터 게이트, 몬스터의 관리까 지 총괄하는 부서인 안전 관리 본 부
시민, 각성자들의 안전을 책임지 는 업무를 맡고 있는 만큼 그렇지 않아도 깐깐하기로 소문난 안전 관 리 본부에서도 채형은 독사라는 별 명을 갖고 있었다.
그를 부르는 호칭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상당히 깐깐하면서도 끈 질기게 물어뜯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채형은 검거율이 9할에 달할 정도로 뛰어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평범한 각성자였다면 든든한 민 중의 지팡이라 볼 수 있었지만 지 금처럼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결단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필 안채형이라니……
재수가 없었다.
어쩌면 서준과의 약속을 지키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밀려오는 불안감에 경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
서준은 목숨을 구해 준 것도 모 자라 스킬까지 흔쾌히 전수해 준다 고 말해 준 사람이었다.
절대로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
질려 가던 경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눈이 번쩍 뜨였다.
“안녕하세요, F급 각성자 김경호 라고 합니다.”
무사히 인사를 마친 것처럼 보였 지만, 경호를 바라보는 안채형의 눈동자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 수의 그것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조사는 모두 끝난 상태고 저는 그냥 형식적인 절차상 잠시 들른 것이니 긴장하시지 말고 편하게 말 씀하시면 됩니다.”
내뱉고 있는 말과 달리 쉴 새 없 이 움직이며 관찰을 거듭하고 있는 채형의 눈동자에서준은 속으로 감 탄을 삼켰다.
‘과연, 경호가 말한 대로 제법이 네.’
게이트를 빠져나오기 전, 경호는 한국 협회는 세계 각국의 협회 중 에서도 그 힘과 능력으로 상위권에 등재되어 있는 능력 있는 권력기관
이라며 거듭 조심하라는 말을 했었다.
확실히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채 형의 눈동자에는 산전수전을 겪어 온 베테랑의 관찰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산전수전은 물론, 공중전 이라 볼 수 있는 선계까지 다녀온 서준의 눈높이로 보자면 귀여운 수 준이었다.
서준의 내심으로 미소가 흘렀다.
“보자, 보자……
채형은 삐걱거리는 철제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손에 쥐고 있던 서 류철을 펼치며 말을 이어 갔다.
“옆에 앉아 계신 도등급 각성자 김경호 씨가 게이트 내부의 오크 서식지에서 이 한서준 씨라는 실종 자분을 구하신 거군요?”
이미 사전에 입을 맞추고 왔던 만큼, 경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 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교육과정을 수료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으셨는데, 혼자서 E급 몬스터인 오크를 처치하고 시민을 구해 오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채형의 말에 박혀 있는 가시들에 경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 번의 연습과, 앞선 굳은 다짐이 있었던 만큼 덮어쓰고 있는 가면이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 았다.
“각성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경호의 어색한 웃음에 채형의 눈 가가 더욱더 진하게 휘어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채형의 얼굴은 본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오 더니, 고개를 돌리어 서준의 얼굴 을 응시했다.
“한서준 씨는 지난 3년간의 기억이 없으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 을 떠 보니 게이트 내부에 있던 거 고요?”
“ 예.”
덤덤한서준의 대답에 미세하지 만 채형의 미간이 좁혀져 갔다.
‘모르겠어.’
독사라고 불릴 정도의 실력을 가 지고 있는 만큼 김경호라는 사내의 행동과 표정, 눈동자는 거짓을 말 하고 있음을 손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아니, 김경호뿐만 아니라 제법 날고뛴다는 각성자들의 거짓말은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한서준이라는 사내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흡사 세계에 몇 존재하지 않는 S 등급 각성자인 한국 각성자 협회장 님을, 아니 그보다 더한 존재를 마 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채형의 미간이 완전히 구겨졌다.
‘마치 심연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한서준이라는 사내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경외심 이 들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서준이라는 사내에 대해서 더 조사해 보고 싶었지만, 채형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 느낌이 맞는다면 한서준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 다.’
오랜 경력, 베테랑의 감이 말하 고 있었다.
한서준을 여기에 잡아 둔 채로 꿰뚫고, 파 보려 해 봤자 부질없는 짓에 불과할 것이라고.
아니, 애초에 한서준을 이곳에 잡아 둘 명분도 없었다.
“흐음……. 우선은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신 다면 이곳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채형의 모습에 경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끝인가요?”
안전 관리 본부, 하물며 그곳에서도 독사라고 불리는 채형이 불과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조사를 끝마친 것이었다.
채형은 서준의 얼굴을 바라보더 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뜬 서준이 검지를 이용해 스스로의 몸을 가리켰다.
“저요?”
“네, 서대문구 지역 관할의 협회 사람, 아니 각성자들 중에서도 한서준 씨를 모르는 분이 더 적을 겁 니다.”
서준은 채형의 말에 담긴 의도를 파악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보가 없는 지금 저런 수 싸움에 말려들어서는 안 되었기 에 차마, 떠나는 채형의 발걸음을 잡을 수는 없었다.
“두분다 협조 감사했습니다.”
무사히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채 형이 남기고 간 말 때문에 찝찝한 감정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유명해?”
“그랬다면 제가 단박에 형님을 알아보지 않았을까요?”
두 사내가 해답을 찾지 못하여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끽-
좁은 문틈 사이로 미치도록 그리 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빠?”
서준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 갔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흰 티와 청 바지를 입고 캔버스화를 신은, 허 리까지 닿는 긴 생머리를 한 여자 가 서 있었다.
다급히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내 뱉고 있는 그녀는 서준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서연,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자 서준이 그토록 지구 로의 귀환을 바랐던 이유였다.
“진짜 오빠야?”
시야를 가득 메우는 모습, 귓전 을 맴도는 목소리.
가슴속에서 따스한 온기가 벅차 오르며,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 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재회의 순간을 바라며 천 년이라 는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연습을 해 왔지만 신기하게도 떠오르는 말 이 없었다.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연습하고 준비해 뒀던 인사 는 모두 까먹고 평소와 같이 피식-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서준의 입가에 활짝 피어난 미소 에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른 사람 속 모르고 해맑게 웃 는 거 보면 오빠 맞네.”
“밝게 사는 게 내 모토였잖아.”
“하……. 됐어, 몸 상태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서준은 주먹을 말아 쥐며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말했다.
“보이는 그대로.”
서준이 일부러 과장된 행동을 하 며 건강함을 어필했지만, 서연의 눈동자는 분주히 움직이며 머리부 터 발끝까지 상태를 홅어보고 있었다.
서연의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눈을 통하여 모든 확인을 마 친 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네.”
“알잖아, 살면서 깁스도 한 번 안 해 봤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인 거.”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로 농담을 내뱉고 있는 서준의 근처로 서연이 다가온다.
서준이 걸어오고 있는 서연을 바 라보며 두 팔을 넓게 벌리는 순간 이었다.
퍽퍽!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감 각과 함께 서연의 목소리가 방 안 을 울렸다.
“그렇게 나가서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라 고!”
아팠다.
당연히 서연의 여린 주먹이 가격 하고 있는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고 통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 심장이 쓰라 렸다.
“ 미안해.”
“얼마나 걱정했는데!”
갑작스러운 가족의 실종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대격변이라는 이변까 지.
3년이라는 세월간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미안.”
쉴 새 없이 서준의 가슴팍을 때 리던 서연의 손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본래 느껴지던 둔탁했던 감각을 대신하여 자리 잡은 것은 따뜻한 액체의 느낌이었다.
서준의 입술이 위아래로 달싹이 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 는 말은 없었다.
서연은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서 항상 씩씩한 모습을 보였고, 지는 것이 싫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 을 하며 항상 이겨 냈던 동생이었다.
그런 서연이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서준은 흐느끼는 서연의 등을 천 천히 다독이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 다.
그렇게 서연이 흐느끼는 소리가 3분, 5분을 넘어가며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그녀는 방금전 보인 모습이 민망한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보여 주기 싫은 것을 굳이 들춰 내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
“너도 이제 20살살이겠네, 대학교 는 다닐 만해?”
3년 전, 서준의 기억 속 서연은 고등학교 1학년, 17살이었다.
이제는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할 나이였다.
서연의 수준이라면, 명문대, 그중 에서도 최상위권을 다투는 성적이 필요한 의대에 입학했을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동생이어서 좋게 보는 것 이 아니었다.
서연의 머리는 제법 비상했고, 본인도 상당히 노력을 하는 편이었다.
실제로도 학교 성적은 두말하면 입 아팠고, 모의고사에서도 늘 상 위권을 유지했었다.
그러나 서연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안 가 봐서 몰라.”
“올해로 20살 아니야?”
서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했 다.
“맞긴 한데, 그냥 다니기 싫어서 안 갔어.”
제법 표정 관리가 훌륭했지만 가 족인 서준을 속일 수는 없었다.
과거 중원으로 끌려가기 전, 아 니 이제는 희미할 정도로 흐려진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도 서연은 아 픈 사람을 돕고 싶다며 의사를 꿈 꿔 왔었다.
서연은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 해서 밤낮없이 공부를 하는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그런 아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싫어서 안 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 민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 런 어리숙한 거짓말을 믿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거짓말이네.’
무엇보다도 서연은 거짓말을 할 때 검지로 머리카락을 꼬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서연의 검지가 머리 카락에 말려 있었다.
서연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민망한 거짓말이었는지 고개를 숙 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첫 재회의 순간에, 하물 며 이런 곳에서 내뱉을 말이 아니 었다.
“……내년에라도 의대에 갔으면 좋겠다.”
“뭐래, 그냥 가기 싫어서 안 간 건데.”
도돌이표를 찍고 있는 대화에서준이 살짝 웃으며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손길로 서연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이런 거 하지 마.”
서연은 내뱉고 있는 말과 달리 서준의 손길을 쳐 내지는 않았다.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내가 알아서 할게.”
“이제 걱정할 거 아무것도 없을 거야.”
서연의 새카만 눈동자가 붉게 충 혈되어 가며,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서준이 웃으며 다시 팔을 벌리는 순간, 돌연 서연의 눈매가 날카로 워졌다.
“한서준 주제에 괜한 폼 잡지 마!”
짧은 재회를 끝낸 이후.
서준은 경호와 짧은 인사를 나눈 후에서연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귀가를 했다.
끼이익-
서연의 손에 활짝 열린 문 안쪽 을 향해, 서준이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나름 마음의 준비 끝에 고르고 고른 인사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 왔어요.”
용기를 짜내어 상체를 현관문 안 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여전히 돌아 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기척조차 느껴 지지 않았다.
뒤편에서 서준의 모습을 구경하 던 서연이 피식-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두 분 다 급한 일 때문에 바로 는 못 오신대. 그래도 반차 신청하 셔서 이따가 2시쯤에나 올 수 있다 시네.”
“그래?”
“천만다행이지.”
“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서준의
행동에서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엄마 아빠가 지금 오빠 꼴 보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서준은 고개를 아래로 떨구어 자 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밤하늘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칠 혹색의 도포라 아까 전 오크와의 전투를 치르며 내려앉은 먼지들이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거기에 더불어 찢어진 소매까지.
스스로는 볼 수 없었지만 오크가 죽기 전, 내뱉었던 혈흔들까지 묻 어 있었다.
“일단 씻고 그 칙칙해 보이는 옷도 좀 갈아입어.”
서연은 한차례 고개를 내젓더니, 걸음을 성큼성큼- 옮기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서 방 안에서 걸 어 나온 서연의 손에는 반팔 티, 바지, 속옷이 쥐어져 있었다.
서연은 쥐고 있던 옷가지들을 서준의 품 안에 안겨 주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상태가 심각했던 만큼 서준은 순순히 고개 를 끄덕였다.
“알았어.”
서준은 발걸음을 화장실로 옮기었다.
샤아아…….
보금자리가 주는 안락함과 샤워 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물에 피로들이 싸악- 씻겨 내려가는 기 분이 들며 입가에서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좋다.’
마음 같아서는 이 따뜻한 물에 몸을 지지며 피로를 녹여 내고 싶 었지만 서연이 식사를 준비하는지 바깥, 주방 쪽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나가서 도와줘야겠네.’
3년 전까지만 해도 서연이 요리 를 한 것을 본 적이 없는 만큼 조 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대한 빠르게 샤워를 끝내며, 수건으로 몸을 말렸다.
마지막으로 방금 전 서연이 넘겨 주었던 옷가지들로 갈아입은 서준 은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 했다.
“내가 뭐 도와줄까?”
“맨날 오빠만 요리하느라 고생했 었잖아, 이번에는 쉬고 있어.”
서연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 갔다.
“이번에는 내가 만들어 줄게.”
자존심이 강한 아이인 만큼 근거 없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 이었다.
실제로도 서연의 눈빛에는 수많 은 연습을 거치며 난관을 헤쳐 온 기세가 비치고 있었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서준은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알아보고 싶은 것들도 있 었으니까.’
대격변, 각성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등장과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 낸 몬스터, 이종족까지.
앞서 경호에게 대략적으로 듣긴 했지만 단편적인 이야기뿐이었다.
중원으로 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서준은 발걸음을 돌리어 거실에 놓여 있는 컴퓨터 앞 의자에 걸터 앉았다.
‘확실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어.’
서준은 엄지발가락을 이용해 컴 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얼마 가지 않아서 익숙한 화면이 시야에 들어왔고, 서준은 바탕화면에 있는 인터넷 창을 열어 3년 전 대격변의 시작을 기점으로 기사들을 읽어 갔다.
[‘몬스터’와 맞서 싸우는 ‘초인’의 등장…… 스스로를 각성자라 칭하 는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동화 속 존재’들의 등장…… 엘 프, 드워프, 수인족은 가상이 아니 었다!]
[이종(異種)들의 제안에 세계가 일치했다…… 각국 대표의 만장일 치로 지구도 차원 연맹 ‘트리니티’ 에 가입]
[도달해 버린 ‘특이점’…… 이종 족의 지식과 기술로 신세대를 개척 하라!]
모니터를 웅시하던 서준의 동공 이 커져 갔다.
“들었던 것 이상이네.”
지구에 단순히 몬스터, 이종족이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차원 연합, ‘트리니티’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지구는 이종족들과 정보의 공유부터, 교육까지 아주 긴밀한 교류를 이어 가고 있었다.
지금 당장 틀어 놓은 모니터 속 의 영상만 해도 샨이라는 이름을 지닌 호랑이 수인족이 제법 괜찮은 전투법을 지구인, 각성자들에게 전 수해 주고 있었다.
활발한 이종족과의 교류만으로도 놀라웠지만 이것은 변화의 한 축에 불과했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나오는 마정 석, 화석연료와 전기의 대체 원료 로 ‘각광’]
[마침내 ‘자원 혁신’이 나타나다! 마정석, 저소비 고효율의 양상으로 연일 치솟는 몸값…….]
[각성자, 최고소득을 낼 수 있는 직업으로 밝혀져…… 비결은 바로 ‘마정석’]
[21 세기 인류의 최대 발견…… 환경문제를 해결할 ‘혁신’으로 마정 석 채택]
기사를 살피던 서준의 동공이 보 름달처럼 동그래졌다.
‘ 엄청나네.’
전문용어들이 많아서 자세한 것 들은 모르겠지만 모든 국가가 자원 의 원료를 마정석으로 바꾼 것을 생각한다면 그 효율은 두말하면 입 아플 것이었다.
이외로도 몬스터로부터 마정석을 채취하는 각성자들의 엄청난 수입, 폐쇄된 북한의 멸망을 비롯한 크고작은 세계의 변화들이 있었다.
기사들에 담겨 있는 엄청난 정보 의 양에 머리가 지끈- 아파 올 정 도였다.
“차근차근 정리해 가야겠네.”
곧 있을 부모님의 귀가가 있는 만큼, 우선은 생각을 일단락 지었다.
“오빠 바빠?”
돌아봤더니 서연이 등 뒤에서 있었다.
“왜? 뭐 도와줘?”
“아니, 음식은 다 해 뒀어.”
“그럼 왜?”
“다른 게 아니라……
서연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조 심스레 입을 열었다.
“곧 엄마 아빠 들어올 건데, 괜 히 자존심 세우려 하지 말고 일단 은 화해했으면 해서……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서연의 모습에서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 렸다.
“화해하는 게 아니라 사과드려야 지.”
서준의 대답에서연이 토끼 눈이 되었다.
“웬일이야? 정말 우리 오빠 맞 아?”
“내가 뭘?”
서준이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서 연은 가볍게 받아쳤다.
“평소 오빠였으면 내가 이런 말 했으면 툴툴대면서 대답 안 했을 거잖아.”
이어지는 서연의 말에 과거의 기 억들이 떠오르며 쉽사리 말을 내뱉 을 수 없었다.
확실히 걱정할 만했다.
과거 서준은 나쁜 아들이었다.
취업, 장래에 관련된 문제로 인 하여 아버지, 한석훈과 크고작은 말다툼을 매일매일 벌였었다.
물론, 대부분의 다툼의 시작점은 서준에게 있었다.
아버지가 걱정과 노파심 때문에 단순히 질문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 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면서 짜증 섞 인 말투로 받아쳤다.
당연하지만 ‘스트레스’는 핑계에 불과했다.
무능한 자신, 냉혹한 현실을 마 주하기 싫었던 것뿐이었다.
치사하고 비겁하며 용기 없던 과 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서준의 모습을 지켜보던 서연이 조심스레 말을 이어 갔다.
“오빠가 실종된 이후로 아빠 여 러모로 엄청나게 고생 많이 하셨 어……
서연의 말에 불현듯 방금 전 보 았던 기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며 서준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
‘마정석.’
고효율의 대체 자원.
아버지, 한석훈은 주유소, 기름의 판매를 업으로 삼고 있었다.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자원이 나오게 된다면 사업에 타격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기사에서 보았던 대로라 면 효율이 기존의 원료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기까지 했다.
‘사업 기반 자체가 무너졌을 수 도 있어.’
불길한 예상은 적중했다.
“잘 풀리던 사업이 갑자기 무너
진 것만으로도 많이 힘드셨을 텐 데…… 오빠가 자기 때문에 실종된 거라는 죄책감에 휩싸이셔서 매일 매일 오빠 실종된 공원 근처로 가 서 전단지 돌리기까지 하셨어.”
서연의 이야기에서준의 눈이 번 쩍 뜨였다.
‘협회 직원이 했던 말의 의미가 이거였구나……
내막을 알게 되자 스스로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거듭 말하지만 서준은 나쁜 아들 이었다.
3년 전, 그러니까 중원으로 강제
이동되던 날에도 서준은 석훈과 말 다툼을 하던 과정에서 잔뜩 짜증을 내며 집을 뛰쳐나왔었다.
정말,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입 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는 서준 의 모습에서연이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일이 다 있네, 오빠가 이런 말 을 하다니.’
서준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투른 평범한 대한민국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서준의 모습은 스스 로의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고 표출 할 줄 알면서도, 아주 넓은 마음을 가진 완연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비해서 서준의 어깨, 등 이 엄청나게 넓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 은 느낌이 들었다.
서연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실종되었던 서준의 모습으로 행 동해서 취할 이득도 없을뿐더러 처 음 마주했을 때의 언행들과 생김새 는 틀림없이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의 오빠, 한서준이었다.
‘요새는 3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데.’
사람 마음, 모습이 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긍정적인 변화 라면 적극 수용할 수 있었다.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고, 아 빠한테나 잘해 드려.”
서준은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
다.
“걱정 마, 잘할 거야.”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 현재는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예리해진 서준의 눈빛에서연이 침을 꿀꺽- 삼켰다.
“ 뭘?”
“집에 빚이 얼마나 있는 거야?”
최대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생 활환경이 눈에 띌 정도로 많은 변 화가 있었다.
서준의 가족은 엄청나게 가난하 거나, 유복하지는 않은 중산층에 속하는 가정으로 30평대의 아파트 에서 생활을 해 왔었다.
그런데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은 거실에 TV 하나 놓기도 힘들 정도 로 좁은 10평대 남짓한 크기에 불 과한 빌라였다.
이를 제외하고도 집 우편함에 고 지서들도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서연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까지는 잘 몰라.”
항시 가족의 옆에 있으며 변화를 피부로 체감했던 서연이 집안 사정
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물며 서연은 어린 나이에 비해 서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에 속했 다.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서준의 시선이 서연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서연의 검지는 분 주하게 움직이며 머리카락을 배배 꼬고 있었다.
“아빠 성격 알잖아.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시고 말씀을 안 해 주시다 보니 나도 눈으로 보이는 거 말고 자세한 거는 몰라.”
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재차 물었다.
“정말?”
이어지는 서준의 추궁에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확한 액수는 나도 정말 몰라. 확실한 거는 전에 살던 아파트를 팔고도 한참 부족하다니 엄청나게 큰돈일 거란 거야.”
바삐 움직이던 서연의 검지가 움 직임을 멈추었다.
서준은 무겁게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일단 알겠어.”
서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서연 이 걱정 섞인 음성을 흘렸다.
“집안에 보탬이 되겠다고 무리해 서 일하지 마. 일단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한동안은 푹 쉬 어.”
“노력해 볼게.”
기계적인 서준의 대답에 결국 서 연의 입술이 달싹이려 했지만, 이 내 침묵을 지켰다.
서준은 예전부터 자존심과 고집
이 센 편이었다.
지금 말해 봤자 들을 리가 만무 했다.
서연의 생각대로 서준의 머릿속 은 분주하게 생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여유 부릴 시간이 없겠네.’
하루아침에 무너진 사업, 갑작스 러운 자식, 가장의 부재.
3년간 여러모로 고생했을 아버 지,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마 음이 아려 왔다.
‘아버지, 어머니, 서연이까지 모 두 힘들었겠지……
이제는 그 고생에 대한 보답을 받으며 진짜 행복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목표가 명확해졌다.
‘우선은 돈을 벌자.’
돈이 행복의 전체를 책임질 수는 없었지만, 그를 위한 필수 요소임 은 틀림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을 이루 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바 로 돈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가족 복은 많다고 과감 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즉, 가족의 채무, 돈만 해결해 낸 다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남은 건 이제 방법인데.’
다행히도 지금 지구에는 명쾌한 방법이 존재했다.
서준의 시선이 인터넷 창에 띄워 놓은 ‘각성자’라는 직업으로 향하였 다.
서연과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안 된 후였다.
장년의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집 내부로 들어왔다.
감격에 찬, 또 다급한 표정의 두 사람을 본 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아버지, 어머니.’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목 끝 에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아들!”
현관문부터 황급히 달려온 양정
화, 어머니가 서준의 손을 꼭 잡는 다.
‘어머니.’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에서준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3년간의 고생을 대변하기라도 하 듯이 부드러웠던 어머니의 손이 푸 석푸석하고 까칠해져 있었다.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왔을까.
비단 어머니의 손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의 얼굴과 체형이 3년 전에 비해서 눈에 띌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가슴이 아려 오며 코끝이 찡하게 울리려던 찰나, 서연이 불쑥- 끼어 들며 말했다.
“감격스러운 가족의 상봉도 좋지 만 오빠 오늘 한 끼도 안 먹어서 배고플 테니까. 일단 밥 먹으면서 애기해요.”
“그럼 안 되지, 일단 얼른 밥부 터 먹자.”
양정화가 서준의 손을 꽈악- 쥔 채로 식탁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뒤이어 서연과 조심스레 식탁으로 걸어온 석훈까지, 가족 모두 식 탁의 앞에 앉았다.
“많이 배고플 텐데, 얼른 먹자.”
석훈의 말에 가족들의 식사가 시 작되 었다.
딸그락- 딸그락-
밥그릇이 비워지며 어느 정도 식 사가 끝나 갈 때쯤, 양정화가 조심 스레 입을 열었다.
“3년간 대체 어디에 있다가 온 거니?”
양정화의 질문에서준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중원, 선계의 이야기를 다 털어 놓을 수는 없었다.
믿어 주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 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부 믿어 줄 거라는 걸 알기에 두려웠다.
‘엄청 슬퍼하시겠지.’
오랜 기간 고생했던 이야기를 듣 게 되면 분명 가슴 아파 하며 눈물 을 홀리실 것이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3년간 갖은 고생 을 다 해 오셨을 텐데 괜한 짐을 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놓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찰나, 다행히도 서연이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협회 직원들 말로는 오빠가 단 기 기억상실증? 같은 게 와서 3년 간의 기억이 없어진 상황이래, 그 냥 눈떠 보니 게이트 안에 있었다
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 못한 대.”
서연의 말을 듣던 양정화의 눈이 커졌다.
“게이트?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완전 멀쩡해요.”
당당하게 말했지만 양정화의 눈 동자가 서준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 보았다.
서연 때와 마찬가지로 걱정과 온
기가 가득한 눈빛.
이윽고, 양정화가 안도하는 기색 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양정화가 서준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고마워, 우리 아들. 이렇게 건강 하게 돌아와 줬다는 것만으로 이 엄마는 너무, 너무 행복하고 기분 좋단다.”
“저도 이렇게 다시 뵐 수 있어 서, 너무 행복해요.”
진심 어린 말이었다.
중원에 이어 선계의 천 년까지 매일 가족과의 재회를 바라며 버텨 왔었다.
그리워했던, 꿈과 같던 이 순간 이 현실이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뻤 기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가 서준의 입가에서 피어났다.
그 미소를 흡족하게 바라보던 양 정화가 고개를 돌리더니 한석훈을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당신도 서준이한테 할 말 있지 않아요?”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석훈에
게로 향했다.
쏟아지는 눈길에 한석훈이 눈치 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빠가 미안했다.”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서준은 그 사과의 의미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오랜만의 상봉에서도 방 금 전까지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던 아버지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3년 전 그날, 중원 대륙으로 끌 려가 실종되었던 날, 집을 나오며 한석훈에게 차갑게 뱉었던 말이 떠 올랐기 때문이었다.
-내 동기들은 졸업하고 나면 부 모님 회사에 취업한다던데 아빠는 그런 거 하나 못해 주면서 내 인생 에 왜 이렇게 참견하려 하는 건데!
과거 자신에 대한 욕설이 흘러나 왔다.
부모 된 마음으로 생각 같아서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해 주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저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서, 현실이란 벽에 부딪혀 이루어 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한데 자신은 못난 스스로를 마주 하는 게 싫어서 아버지 탓으로 돌 리며 욕을 했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가슴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감정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로 이어 지며, 이내 미안함이라는 감정으로 변해 갔다.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텐데 아 빠가 너무 네 감정을 헤아리지 못 했었다, 정말 미안하다.”
많이 생각하고 연습해 왔을뿐더 러 방금 전에도 사과를 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던 만큼 온정 느껴
지는 눈빛을 바라보며 대답을 하려 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툭하면 짜증 내서 죄송해요.’
그러나 생각했던 말들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내뱉고 나면 차오르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행복한 자리를 울음바다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입술을 깨물며 준비해 두었던 말을 목구멍 으로 삼켰다.
결국, 서준은 준비해 놓은 진심
어린 사과 대신 다른 말을 흘렸다.
“뭐 지난일로 그런 말 하고 그래 요.”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나니까 너무 후회됐었거든. 그래서 이렇게 눈앞에 있을 때 꼭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3년 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초췌 해진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한석훈 의 모습에서준의 가슴이 더욱 아 려 왔다.
아버지의 두 눈동자를 마주하자 애써 억눌러 둔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두 부자의 해후 를 흡족한 미소로 지켜보던 서연이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로 끼어들었다.
“그게 끝이에요? 다른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큼큼…… 서준이가 전부 지난 일이라고 하잖아요.”
헛기침을 하는 한석훈의 모습에서연이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다.
“우리 아빠가 이런 데 쑥스러움 이 많단 말이야.”
“아빠를 놀리면 안 되지.”
양정화가 짐짓 엄한 것처럼 목소 리를 흘린다.
하지만 서연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요, 서연이가 틀린 말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맞아요, 아빠가 감정 표현이 서 투른 건 사실이잖아요.”
서준까지 합세한 두 남매의 공세 에 부모님의 얼굴이 얼이 빠진 표 정이 되어서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지. 너희들 말이 맞다.”
“생각해 보면 너희 아빠가 감정 표현이 서투르시긴 하지.”
“당신은 내 편 아니었어?”
양정화가 미소를 띤 채로 말했 다.
“시국이 변했잖아요.”
예기치 못한 연합의 결성에 한석 훈이 헛웃음을 홀리며 말했다.
“그래, 다 내 잘못이지……. 얘들 아 이 아비의 죄가 너무 크단다.”
한석훈의 농담에, 가족들의 입가 에서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
“호호!”
화기애애한 웃음소리, 행복이 넘 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준은 확신 할 수 있었다.
‘돌아오기를 잘했어.’
한번 잃어 봤기에, 소중함이 더 절실히 와닿고 있었다.
서준에게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역시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앞에 있는 가족, 행복을 지켜 낼 것이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