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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51화 (651/653)

651화 (외전) 유년기의 끝

여행에서 돌아온 상민은 한동안 칩거했다.

교수 자리도 이제 내려놓았으니 남은 일은 여명항천사와 관련된 일들뿐이었다.

가끔 코아케 우주기지로 갈 때 빼곤 그는 대체로 은둔해 있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존재는 두 여인을 제외하곤 별로 없었다. 심지어 사도들조차 잘 보지 못했다.

칩거한 상민은 천천히 자신의 소유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을 앞에 둔 사람처럼 유산을 계획적으로 분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이(태종)에게 옥새를 줄 때도 이랬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청해로 떠났던 과거와 다른 점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일 터. 이번에야말로 그는 완벽히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할 준비를 했다.

상민은 자신이 가진 부를 쪼개 여러 안배를 해 놓았다.

어마어마한, 실로 통제하기 힘들 정도의 부였다. 거의 나라 단위의 부라고 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좀 잘게, 확실히 쪼개놔야 했다.

상민은 자신의 부 중 대부분을 이용해 여러 공익적 재단들을 만들었다.

재단들의 목적은 과학과 기술, 의학 등 공적인 분야에서 거금이 필요하지만 이득은 딱히 되지 않아 정체되어 있는 학문들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다른 일부는 사회적 후생을 증진시키기 위해 쓰였다. 복지와 기타 여러 가지 기간산업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쓰일 테다.

회계와 감사는 황실과 보안국에 맡겼다.

사적 물건들도 처분했다.

추억의 방 물건들도 몇 개 중요한 것을 제외하곤 황실박물관에 기증했다.

적제도 황제 해호에게 선물했다. 청해 통령 관저도 정리했고, 수많은 별장과 고성들도 정리했다.

항공모함 새벽호 또한 기증했다. 개인을 위해 개장된 함선이라 전술적으론 썩 쓸모 있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민은 여의국도 정리 수순에 들어갔다.

여의국.

이 세계 최고의 첩보 및 권력기관은 자신의 의지를 충실히 따르는 수족이었다.

그 노고에는 항상 감사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상민이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일들 중 태반 이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서 해나갈 수 있는 규모의 일들이 아니었으니.

그렇기에 상민은 그들을 애틋하게 여겼고, 은퇴한 요원들, 전사한 요원들의 유가족들을 항상 잘 챙겨주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충실한 기관이었더라도 언제고 그렇게 선하게 남아있을지는 그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여의국은 너무 강했다.

형식적으로는 정보총국의 4국에 불과했지만, 그 일개 국이 다른 정보총국들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하고 은밀했다.

보안국도, 연방중앙수사국조차 이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 신성한 명을 따르는 만큼 무한의 권리가 존재했다.

그러니 주인이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단체였다. 어쩌면 변절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흑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 상민은 진작부터 여의국을 해산시키는 수순에 돌입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이런 거대한 권력 단체를 해산시키는 일은 권력자라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테다.

오히려 강한 권력을 가질수록 더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무력을 동원하거나 강제성을 띤다면 어쩌면 가장 충실한 수족이 가장 강렬하게 반발할 수 있었다.

그간 충성을 바친 대가가 겨우 이거였느냐며 훨씬 더 분노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권력만큼이나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상민의 입장에선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그냥 더 이상 신입을 뽑지 않으면 되었다. 미리 준비해놓았던 상민은 예전부터 인원을 보충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도와 요원을 포함한 여의국의 구성원들도 이제는 나이가 많았다. 모두가 물러나는 게 자연스러울 시기가 왔다.

덕분에 반발은 없었다. 모두 겸허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아쉬워한 것은 그분께서 자신들에게 더 이상의 충성을 바라지조차 않으신다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부디 평안하소서.”

모두가 모인 마지막 자리에서, 노인이 된 사도와 요원들이 그렇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허나 이것 하나만 기억하소서. 당신이 저희를 부르신다면, 저희에게 다시금 임무를 명하신다면,

저희는 설령 억겁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무덤 속에서 기꺼이 일어나 명을 받들겠나이다.”

조금은 섬뜩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충정 하나는 기특했다.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마.”

그는 첫 번째 사도와는 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가 책임지고 저들을 끝까지 관리해주었으면 좋겠다. 괜한 분란과 혼돈을 일으키지 않게.”

상혁이라면 믿을 만했다. 아들놈은 정의의 상징과 같았다. 개성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버지와의 작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상민은 이번엔 자식이 먼저 떠나는 꼴을 또다시 보지 않음에 감사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내겐 너희들을 다시 볼 기회가 있겠지. 하지만 너에겐….”

상혁도 이미 흰머리가 나 있었다. 상민은 오랜만에 아들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 * *

상민이 칩거하는 건 자주 그랬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교단은 이 이상스러운 조용함에 큰 불안감을 느꼈다.

사실 교단만 조용했다. 여의국은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고, 황금산을 비롯한 재산과 광명회 문제도 차츰차츰 정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직 쿠쿨칸께서는 교단에게만 조용했다.

교단은 쿠쿨칸께서 진노하실 줄 알았다. 당연히 그들을 벌하시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면죄부를 써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까지 벌였었다.

속재파는 빼도 박도 못한 죄인이 당연했지만, 이 사실과 관련이 없었던 충성파들 내에서도 같은 교도들이 죄를 저질렀으니 변명하지 말고 응당 죗값을 치르자는 여론도 존재했다.

하지만 쿠쿨칸께선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그들을 더 불안하게 했다.

하물며 연인 사이조차 분노가 침묵보다 나은 법이다. 침묵은 실망을 의미했다. 관계가 수습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단은 극히 두려워했다. 절망하기까지 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쿠쿨칸의 존재와 은혜가 그들로 인해 더 멀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그들이 저지른 모든 행동이 금기를 건드렸다. 한낱 면죄부로 이런 일들이 용서가 될 리가 만무했다.

이번 일로 아주 약간의 긍정적인 일이 생기기도 했다. 교단의 위세가 약해졌다. 교단에서 나와 개인적 신앙만 가지고 살게 된 사람들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쿠쿨칸교는 같은 대상을 모시는 제국교와 서아시아의 비밀 종교와 협력하고, 더 나아가서 서로 통합해야 할 동기를 얻었다. 존속을 위해서라도.

그래도 상민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곳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두 가지 축구단, 청해축구단이나 혹은 수정궁축구단의 중요한 경기 때는 대체로 와서 직관을 하곤 했다.

극히 중요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이 관람석에서, 상민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상민의 옆에 온 현황, 그리고 태상황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빌어먹을 놈들, 그렇게 돈을 쏟아부었는데!”

황제와 태상황은 그래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선조의 속내와 감정, 노골적인 표현들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지만.

[창양 3 : 1 청해] [후반 32분]

세계 최고의 두 축구단은 맞대결에서는 청해가 근소하게 우위를 점했다. 통산 전적도 살짝 앞섰다.

다만 제국전에서는 창양이 더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청해도 엄청나게 많은 우승 횟수(2번)를 자랑했지만, 창양황립보다 적었다. 상민은 그렇게 많이 돈을 투자했는데, 왜 자꾸 중요할 때마다 고꾸라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상민은 금방 털어냈다.

어차피 이제는 못 볼 경기니 순수하게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해에 있었던 역사상 최고의 선수의 대관식도 보았으니 미련도 없었다.

그래도 아쉬울 것 같았다. 다시 이 축구라는 경기를 실시간으로 즐기기란 힘들 테니까.

사실 축구를 포함한 모든 문명과 작별해야 하니.

상민이 아쉬워하는 기색이 분명하자 황제도 분위기를 틈타 입을 열었다. 주제는 축구가 아니었다.

“말씀해 주소서.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창양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구단의 소유주는 경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평상시라면 일어나 박수를 치거나 그랬을 텐데, 현황 해호는 오히려 굉장히 슬퍼 보였다. 절망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껏 공놀이. 뭣이 중하겠는가. 태묘와 사직이 달려있는데.

황제는 무릎을 꿇고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태조가 떠난다. 자신의 대에 비로소 불길한 예언이 실행되는 것이다. 대체 태묘의 다른 선조들을 무슨 낯으로 뵙겠는가?

고려가, 세상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그랬다.

상민이 승천 준비를 시작한 순간부터 고려의 증시가 하락을 거듭했고, 더 나아가 세계의 주가가 출렁였다.

별다른 악재가 전혀 없었음에도 증시는 하락에 하락을 거듭했다. 온통 푸른빛이었다.

광명회 소속의 기업인들이 자신이 가진 주식을 매도하지도 않았다. 비밀이 드러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용의 승천을 예언하는 듯했다.

계속 하락이 지속되면 어쩌면 대침체가 한 번 더 올지도 몰랐다.

“너희들은 금방 답을 찾을 것이다. 항상 그러했듯.”

그래도 마지막 훈수일까 훈요일까. 상민은 몇 가지를 알려주기로 했다. 태양대폭풍에 관한 건 아니다. 그건 대처를 위해서라도 진작 알려줬었다. 앞으로 고려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원론적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분열을 꾀하지 말고 통합하라.

타인을 포용하고, 받아들여라.

책임을 지고, 방관하지 말라.”

책에 빽빽하게 적어 후대의 공부거리로 남겼던 과거와 달리 이번엔 받아적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황실이, 더 나아가 고려가 해야 할 일들임은 분명했다.

경기가 끝났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격렬한 청백전임에도, 양측의 선수들은 서로 악수하거나 포옹하며 인사했다.

사전에 엄청난 신경전이 있었음에도, 결국 관람객들을 위한 경기였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패자도, 승자도 모두 결과에 승복했다.

국제사회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그래야 했다.

“전쟁을 막아라. 인류의 역량은 지상의 다툼 따위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는 하늘에 있으니 이 작디작은 곤여에 안주하지 말거라.”

상민은 그렇게 말했다. 태양방패라는 선물을 통해, 그들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상민이 이제 해줄 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자식을 보는 대견함으로 상민은 해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년기는 끝났다.”

* * *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알찬 시간이었다. 좋은 기억들을 남겼고 다가올 일들을 준비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예진은 대학을 졸업했다. 그녀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조기졸업 요건을 모두 충족해 일찍 졸업하기까지 했다.

졸업 이후 예진은 여러 준비를 시작했다.

예진은 여명항천사에 입사했다. 그녀는 인류 문명의 역사나 문화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조직을 맡았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선 반대로 과거와의 연결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그녀는 이 방대한 자료들을 저편으로 가지고 가길 원했다.

그녀 또한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 정말 떠나는 거야? 어디로?

지수와 정화공주는 정확히 똑같은 물음을 했다. 가장 크고 살기 좋은 나라를 떠난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게다가 대학까지 잘 나와 놓고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들도 그랬으니, 가족들은 훨씬 더 걱정했을 것이다.

― 죽을병이라도 걸린 거야?

한동안 이들을 달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예진은 기운을 탕진했을 정도였다.

이들과 작별하기엔 6년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예진은 가족들을 만나 앞으로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한양에 방문했다.

부모님은 여전히 건강하셨다. 상민의 말에 따르면 인연이 아니었을 관계였지만, 부녀, 모녀 관계가 된 것은 축복과 다름없었다.

집에는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된 동생들도 있었다.

영진은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해 집에서 출퇴근 중이었다.

환서는 굉장히 유명한 오락 선수였고 평상시에는 선수단 기숙사와 연습실을 오가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경기가 없었기에 집에서 쉬고 있었다. 모두가 간만에 모일 수 있었다.

예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제국인 남자친구, 아니 이제는 예비 신랑을 데리고 왔다. 모두가 경악했다.

예진의 부모도 당연히 잘난 큰딸이 언제고 독신으로 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언제 이렇게 관계가 진전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미 둘은 결혼식만 앞둔 예비부부인 셈이었으니까.

예진의 아버지, 왕온규가 볼 때 예비 사위는 대단히 독특한 인물이었다.

덩치를 말하는 건 아니다. 물론 범인의 인식을 넘는 덩치와 근육은 실로 그 앞에 마주 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예절을 주입해주기 충분했지만, 그래도 사위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데 크게 고려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건강하기만 하면 되니.

다만 다른 모든 것들도 비범했다.

재력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온규도 나름 잘살았다. 요 근래에 회사 일이 유난히 잘되었다. 수상한 재단이 수상한 동기로 후원을 했지만, 법적으로 불법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곧바로 장인과 장모에게 몇 가지 선물을 준 배포를 싫어하진 않았다. 허나 그런 물질적 선물로 인성 됨됨이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딸이 힘들게만 안 살면 괜찮았다.

가장 중요한 건 인성이었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너무 과할 정도였다.

진중함, 사려 깊음, 그리고 위엄까지.

모든 사내가 꿇어 엎드리고, 모든 여인이 경배할 존재였다. 군림하는 자였으며, 통치하는 자였다.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저 분위기만으로 장인이 될 사람이 사위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을 뻔했으니.

회사 일을 하며 많은 유명인을 만나왔던 온규조차,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대체 큰딸이 어디서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는지 아버지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예진이와 어울릴 남자라면 고려 황실 사람밖에 없다는 자신의 헛소리가 실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옛날에 만났어요. 아주 먼 옛날에.”

큰딸이 배시시 웃었다. 온규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네가 행복하면 되었단다. 어디로 떠나든지 간에.

장인과 사위는 한동안 술을 나누었다.

온규는 상견례에서 대담할 사돈 어르신들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지만, 이후엔 사위를 배려하여 언급하진 않았다.

둘의 대작은 잔잔히 이어졌다. 예진도, 장모와 처제, 처남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둘은 몇 시간 동안 술을 기울였다.

마침내 온규가 취해 엎어졌다. 상민은 그를 가볍게 들어 올려 안락의자에 눕혔다.

“이쯤이면 당신도 만족하겠지.”

상민은 온규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온규는 육신과 혼백이 일치한 예진의 경우와는 좀 많이 달랐다. 왕온과 동일인은 아닐지 몰랐다.

그럼에도 상민은 그의 늙은 얼굴에서 옛 주군을 떠올렸다. 한 번도 제대로 충성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명목상은 자신의 위에 존재했던 승화후 왕온. 이번 삶에선 무탈하게 지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평안하시오.”

예진은 조선에서도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사실, 둘의 개인적 결혼식은 이미 고려에서 한 상태였다.

둘은 성품이나 지위상 대단히 화려하거나 남들의 이목을 끄는 예식을 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저 소박하게 옛 동고려 건양의 궁전에서 황가 인원 몇 명만 초빙해 식을 했을 뿐이다.

위대한 역사의 재현에 황제도, 태상황도, 상황도 모두 포함된 하객들이 전부 모두 꿇어 엎드려 존숭했다는 일화가 특별했겠지만.

때문에 조선(개성)에서의 결혼식은 그저 장인 내외와 친구들을 위한 선물일 터였다. 몇 년 전 함께 여행했던 지수도, 대학과 고등학교, 중학교 때 사귄 친구들도 많이 왔다.

또 그 와중, 그녀의 축가를 부르기 위해 고려에서 이색적인 가수가 전용기를 타고 도착했다.

정화공주 지예는 조선식 혼례복을 입은 예진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껴안으려 했다가, 신부 화장을 보고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본 예진이 반대로 그녀를 껴안았다.

여러모로 워낙 유명한 가수라 그녀의 방문은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밖의 기자들이 덩치 큰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하는 것이 보였다.

지예는 그 와중에 ‘축가의 제왕’이라는 불멸의 사랑을 노래했다. 그녀의 곡은 아니었고 좀 오래된 곡이었다.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던 영화 삼별초의 수록곡이기도 했다. 특히 태조와 황후의 이어짐 때 나온 곡이기도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굉장히 적절한 곡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식이 끝나고, 그녀는 비로소 모두와 작별할 기회를 얻었다. 신혼여행은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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