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47화 (647/653)

647화 (외전) 속재

둘은 마침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우유니에 도달했다.

평상시라면 관광객들이 많이 들렀을 곳이다.

사막이 넓다 하나 제국 최고의 관광지니만큼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누군가 그들을 볼 법도 했다.

다행인지 지금 시기는 자연관리기간이라 폐쇄되는 기간이었다. 일반인들은 오지 못할 테다.

둘은 달랐다. 예진은 사막마저도 전세를 낼 수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상민은 관광객들이 오지 않은 객원도 전부 빌렸다.

사막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그리고 밤 때까지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든 순간순간이 천하의 절경이었다.

게다가 때마침 내린 비가 바닥에 고여 있으니 더더욱.

우기 때의 소금사막은 이 장소가 정녕 지구인지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선사했다.

물 덕분에 땅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했다. 바다를 걷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수면에 비친 구름을 보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느낌도 들었다.

“…….”

예진은 남편이 한참 전에 했던 약속을 이행해주는 것 자체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고맙다는 말조차 부족하다는 걸 알았기에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마주 잡은 손을 통해 감사를 표하곤 낭만적인 순간에 젖어들었다.

둘은 그렇게 낮 동안 사막을 걸었다. 사진을 찍고 달리기를 했다. 여느 연인처럼 그렇게 놀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상민은 짐차에 싣고 온 의자를 꺼내 차양막을 깔고 쉬기로 했다.

예진은 그 와중에 화상통화를 했다.

절경을 바라보니 가족들이 생각난 모양이다. 지구 반대편의 시간대라 늦은 저녁일 텐데, 용케 전화를 받았다.

“여기, 나중에 정말 꼭 와서 봐!”

― 언니 남자친구랑 있어?

무언가 예리한 동생의 말이다. 예진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상민마저도 처제의 눈치에 웃으며 감탄했다.

“동생들은 잘 지내?”

“영진이야 뭐 잘 지낼 거고. 환서는 이번에 진지하게 오락 선수단에 시험을 쳤나 봐.”

둘은 한동안 사담을 나누었다.

상민은 그녀의 가정이 평화로웠던 것에 감사했다. 앞으로는 자신, 혹은 여의국에서 지켜볼 수 있을 테니, 큰 문제가 생기지도 않을 테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의 그녀는 평화만 누려야 했다. 그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이내 대지에 깔린 거대한 거울에 노을이 비추는 장엄한 절경이 다가왔다.

노을은 야속하게 짧았다. 붙잡고 싶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곧이어 어둠이 내려앉았다.

예진이 그동안 설치한 사진기에 담긴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상민이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

“고백할 게 있어.”

“무슨 고백?”

사랑 고백은 아닐 것이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했다. 세월이 두 용을 서로 또아리 틀게 만들었다.

둘은 결혼해서 나라를 세웠다. 애도 여럿 낳았다. 그 애들도 결혼했고, 그 애들의 애들도 결혼했으며,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른 사이다.

그들만큼 볼 장 다 본 사이가 또 있을까. 일반적인 말은 고백이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허나, 분위기는 진중했다. 그녀는 상민이 더 숨겨놓은 여자가 있나, 그렇게 농담이라도 던지며 분위기를 환기하려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처음엔 당신을 의심했어.”

“응?”

“당신의 존재를.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어선 안 될 존재니.”

“…내가?”

가슴 아픈 말이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인생이 부정당하는 말일지 몰랐다.

하지만 상민은 예진이 충격받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르면 나 또한 존재해선 아니 될 존재야.”

상처를 주려는 말이 아닌, 존재론적 질문이었다. 예진도 상처를 받는 대신 문맥을 이해했다.

난해하고 어려웠다. 남편이 일생 동안 궁구해봐도 몰랐던 질문일 터다. 자신조차 의문을 가지고 있긴 했다.

“해답은 구했어.”

상민은 잠시 머뭇거렸다.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이겠지. 근데 당신에겐 이런 비밀을 숨기고 싶지는 않아.”

“…무슨 비밀인데 그렇게 거창하게 말해. 불안하게.”

“일단 알아둬.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당신의 곁에 있을 거라고.”

예진은 대답 대신 손을 꼭 잡았다. 반대의 말도 성립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녀 또한 그의 곁에 있을 테니까.

* * *

여름방학 전.

예진이 정신없이 학교 생활에 매달리고 있을 때 상민도 바쁘게 지냈다. 교수란 자리는 마냥 노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다른 일로도 여전히 바빴다.

예진의 존재에 파생된 문제도 그의 일 중 하나였다.

그녀가 대체 어떻게, 왜 돌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 처리해야 할 문제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상민은 그녀의 존재를 총 세 곳에 알렸다.

먼저 그녀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여의국이 첫 번째요, 직첩을 내리며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바이런 현비의 광명회가 두 번째였다. 마지막은 황실(현황과 태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예진은 이미 태상황과 면식이 있다고 한다. 무슨 운명의 이끌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면 알리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알게 된 자들도 있었다. 쿠쿨칸교 교단이었다.

교단의 정보력은 굉장히 뛰어났다.

이들이 비밀인물도 아닌 일반인에 불과한 예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예진은 가리기에는 너무 눈에 잘 튀었다. 여러모로 유명해지지 않기 힘든 존재였다.

하지만 교단의 반응은 생각 외였다.

‘확실히 이상하구나. 이렇게 반응할 놈들이 아니다.’

상민은 쿠쿨칸교가 엄청난 호들갑을 떨 것이라 생각했다.

기적이 또다시 이루어졌다며, 신성한 용에 걸맞은 배우자가 환생했다며 찬양 일색을 할지도 몰랐다.

교리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용의 전능함에 또 하나의 경구와 문구가 만들어질 것일 테다.

어쩌면 누군가는 감동에 너무 젖어 이번의 기적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다닐지 몰랐다.

매체가 너무나 발달된 세상이니만큼 이제는 어떻게 입단속을 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였다.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팠다.

하지만 교단은 이상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오히려 최고 수뇌부가 직접 사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상민은 그들의 행동들에서 명백한 당황의 심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당황?’

상민은 수상함을 눈치챘다.

그는 구태여 멀리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교단의 수뇌를 모두 소환했다.

소환된 자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앞에 엎드렸다.

가장 앞에는 흰 수염이 길게 난 노인―총대주교―이 있었다.

노인은 약간 떨고 있었다. 환희의 떨림은 아니었다.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너희가 내게 고하는 것에, 한 점 거짓이 없음을 믿노라.”

상민은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선두의 노인도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느냐고, 그는 그렇게 무언으로 말했다.

‘하지만 거짓을 고하지 않더라도 너희들이 내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도 있으렷다.’

말하지 않으면, 거짓을 고하는 것이 아닐 터이니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행동이 있었을지도.

그러니 질문은 날카롭고 예리하게 핵심에 찔러 넣어야 했다.

“너희 중 일부가 예의 환생에 무언가 개입한 바가 있느냐?”

노인의 몸이 한 차례 격렬하게 떨렸다.

용의 물음은 곧바로 본질 부근을 건드렸다. 거짓을 입에 담을 수는 없으나, 무지로 변호할 수도 있었건만 후자의 선택지조차 사라졌다. 노인은 몸을 떨며 위대함 앞에서 오로지 사실만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총대주교로서 그는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처음 그가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그는 선대의 행동에 경악했다.

다만 여전히 그는 총대주교로서 선대의 비밀과 죄악을 계속 계승해왔던 것이다. 그 또한 우리의 선택이었으니까.

노인은 일부 파벌이 비로소 용을 붙잡기 위해 시도했던 방법을 고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하나의 물음에서 기원했다. 어느 날, 어떤 신탁을 받았는지 몰라도, 한 총대주교가 모든 성직자들에게 물음을 던졌다.

― 묻겠소. 그분을 섬기는 올바른 길이 무엇이오?

물음을 던진 총대주교는 꽤 유명한 자였다.

불멸의 용께 정치적 거래를 통해 감히 ‘면죄부’를 받은 당사자였기도 했다.

또한 신학적으로 굉장히 저명한 자였기도 했다.

그렇게 저명한 자가,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저명한 신학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었다.

공의회라면 공의회일 터.

다만 숭배하는 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의사와는 영 관련이 없었다는 게 어쩌면 불경의 씨앗이 되었으리라.

― 만약 그분께서 우리를 떠나신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홀로 남겨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오?

그분의 뜻을 한없이 존숭함이 옳은 것이오, 혹은 우리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오?

이는 쿠쿨칸교 내의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옆 친척 종교인 제국교 또한 이에 영향을 받았다.

전자는 그분의 뜻 자체에 따른다는 의미에서 충성파라 불렸으며, 후자는 그분이 영원히 우리의 곁에 계셔야 한다는 점에서 속재(續在, 계속하여 존재함)파라 불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총대주교의 주장은 후자였다. 전자였다면 애초에 공의회 또한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총대주교의 주장과는 별개로, 두 세력은 거의 비등했다. 둘 모두 신도들을 설득할 만한 핵심적인 논리가 있었다.

그러게 쿠쿨칸교는 그때부터 아주 조금씩 믿는 주체의 의지와는 다른 생각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단 한마디 꾸짖음으로 와해될 생각이었을 테지만, 그는 너무나 바쁜 마당에 그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어쩌면 일부러 거리를 두었기에 신도들의 동태를 헤아리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당장 격렬하게 다투거나 싸운 것은 아니었다.

감히 그분의 눈앞에서 그러진 못했다. 게다가 속재파는 이론적으로 쿠쿨칸께서 ‘멀쩡히 계신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파였다.

허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속재파의 위험성은 시간이 지날 수록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민이 멀어지려 할수록 다른 생각을 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쿠쿨칸이 그들에게 건넨 먼 과거의 면죄부, 심지어 일부는 기억조차 못 하는 이 낡디낡은 권한은 추후의 일에 대한 용서권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꿍꿍이를 먼저 실행하는 동기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번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단 하나라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지 않나?’

그 이후 개천 550년에 한 사건이 벌어졌다.

기술선도국에서 비밀이 유출되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었다.

물론 위태로운 시기가 지나고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기술선도국 대부분이 이제 기업화되어 독립한 상태다. 남아있는 부서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만큼 감시와 감독의 눈길도 많이 사라진 상태긴 했다.

그러나 가장 충성스러운 과학자들이 있는 집단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상민도, 사도들도 놀랐다.

허나 의외로 아무리 충직하다고 평가받는 단체에서조차 배신자는 생겼다. 배신은 충성심의 부재 때문에만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은 충성심보다 대의가 더 커 보일 때 일어났다.

배신을 꾀한 연구원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실험실에서 혈액 시료 하나를 들고 도망쳤다.

“이것만 있으면…!”

한낱 하나의 혈액 시료가 아니었다. 이 혈액은 그가 속한 연구실의 존재 목적과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기술선도국 부서들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비밀 중의 비밀을 탐구하기 위한.

가장 존엄한 존재의 피다.

그분께서 가장 믿는 과학자들에게 연구를 허락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연구원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셈이었다.

또 그렇게 큰 믿음을 배신하기 위해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연구원 또한 소위 말하는 대의를 믿었다.

마치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권우일이 외부로 핵무기 기술을 유출하려 했던 것처럼, 배신자 또한 그가 믿는 대의를 위해 신성한 혈액을 들고 도망치게 된 것이다.

연구원이 악인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선인에 가까웠다.

그럴 만한 동기도 있었다. 그에게는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딸이 있었다.

이 시료를 이런 폐쇄 연구실이 아니라, 조금 더 개방적인 환경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연구한다면 어쩌면 그 불치병 또한 근시일 내로 치료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면 자신의 딸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인류의 고통 또한 줄어들 것이었고.

실로 거창한 대의였다.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그렇게 매도해도 될 정도의 논리였다.

신을 배신하기 위해선, 반대로 그 정도의 대의가 필요했다.

연구원은 치밀하게 준비해 왔었다.

그는 미리 접선 장소에 작은 어선 한 척을 준비했으며, 기술선도국에서 빠져나감과 동시에 그 배에 타 다른 나라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제국 바깥이 안전하다고 볼 순 없었지만, 적어도 제국 내에서 떠나야 연구 시도나마 할 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가 섭외한 작은 어선이 마침내 뭍을 떠나 바다에 나왔을 때, 그는 비로소 품속에 소중하게 모셔둔 시료를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해안경비대라는 난관이 있긴 했지만, 해안경비대도 이 작은 어선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채 울부짖는 남쪽 바다 근처를 통해 나아가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정말 당신이 성공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허나 권우일도 결국 실패했었다. 연구원 또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일개 과학자에 불과했다. 그는 사도들의 존재를,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가진 힘 또한.

있어선 안 될 사람이 배 갑판 위에 이미 서 있었다.

잠수복을 입은 늘씬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모두에게 당황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당황한 배 선장이 연구원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빼어 든 권총의 총구가 선장의 이마를 겨누었다.

― 탕 탕

소음기는 필요 없었다.

여인은 빠르게 움직였다. 선장을 포함한 세 명의 선원이 그 자리에서 전부 사살되었다.

망망대해에 총성이 퍼져 나갔지만, 듣는 이들은 아무도 없으리라.

나머지 한 명만 남았다. 처형자, 12사도가 그렇게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제국 시민 세 명을 사살했음에도 그녀의 눈에 감정은 없었다.

제국에도 범죄자는 있었고, 이러한 중요한 사항에 결부된 범죄자는 즉결 처분해도 상관없었다.

죽은 선장과 선원들은 이번 말고도 이미 여러 번 사회에 해가 되는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상태였다. 어중간한 재판 대신 납탄이 머리에 박혔지만 억울하진 않으리라.

너 또한.

“…날 보내 주시오. 제발! 이것만 있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데, 이것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

“관심 없어. 그딴 말 따위.”

중요한 것은 네 행동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무언으로 말했다. 설득당하지 않는 사신의 모습에 연구원은 눈물을 흘렸다.

“그분께서도… 이해해주셨을 텐데.”

연구원이 울먹이며 유언을 뱉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해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아버지’의 피를 탐한 자, 너 또한 피 흘리리라.

― 탕

연구원도 힘없이 쓰러졌다.

여인은 능숙하게 시신들을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는 배를 끌고 뭍으로 되돌아갔다.

“완료했다.”

― 확인.

1사도에게 그렇게 보고한 12사도는 곧바로 기지로 되돌아갔다. 이미 날은 늦어 있었는지, 기술선도국의 사람들은 모두 퇴근해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녀는 죽은 연구원의 자리를 수습했다. 몇 가지 개인적 물품들을 정리해 그의 유가족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유가족들이 진실을 안다면 끔찍하게 여기겠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허나 연구원의 물품들을 정리한 12사도는 정작 혈액 시료를 파기할 때가 오자 한참을 고뇌했다.

피를 담고 있는 중합체 시료관을 그저 폐기함에 밀어넣으면 된다. 그럼 바로 소각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12사도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마저도 연구원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 혈액 시료를 파기하지 않고 몰래 빼돌린 것이다.

일 처리를 끝냈으니, 이 시료는 존재 자체가 사라졌을 테다. 숨긴다면 ‘완벽한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조차도 그 완벽한 유혹에 넘어갔다.

12사도가 자신이 직접 납탄을 머리에 박아준 연구원의 주장에 동의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피는 용의 피였다. 용은 스스로의 신체를 알아보기 위해 기술선도국의 연구원들에게 자신의 피를 주셨다.

자신이 무슨 이유로, 어떤 원리로 늙지 않고 죽지 않는지 연구하라는 목적이었다.

그녀가 죽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교적으로 충직했기에 비밀은 그동안 기술선도국을 떠나지 않았었다.

원래라면 12사도도 더없이 충직했기에 이를 폐기해야 했었을 것이다.

그녀는 용의 안위 빼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인류의 보편적 이익? 그딴 것을 왜 신경 써야 하는가?

용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이익이다.

시료를 유출한 연구원은 대의 뒤에 사리사욕을 숨겼다.

돈, 혹은 명예를 숨겼다. 딸을 앞세웠지만 일부일지언정 전부는 아니었다.

가장 성인처럼 보이는 자들도 속 깊은 곳엔 시커먼 구석이 있었다. 하물며 신을 배신한 배신자야 더더욱.

12사도는 자신의 저주받은 핏줄 덕인지 위선자들을 더없이 잘 구분했다.

그랬기에 12사도가 저지른 지금 이 불충은, 인류의 보편적 이득 같은 대의를 위해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독하게 그분을 위했기에 시료를 들고 찾아간 것이다.

아버지를 배신한 딸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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