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46화 (646/653)

646화 (외전) 일상(4)

공산주의 3개국은 따로 가끔 교류를 하곤 했다.

하지만 애초에 잉글랜드는 혼자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노브고로드와 블라디미르―카잔 사이도 좋지 않고 세 국가의 공산주의 노선 자체도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에 3개국이 진심으로 함께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노브고로드와 블라디미르―카잔, 폴로츠크 대공국 사이에 낀 ‘모스크바 독립시’는 전후 이곳을 가지겠다는 3국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 곳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역천의 땅(역대로 고려에게 대든 놈들이 나온 땅)을 그 누구도 소지하게 두지 않겠다는 고려의 꿍꿍이였는지는 몰라도 인근의 3국 모두가 공평하게 가지지 못한 도시였다.

한때는 찬란했던 모스크바였다.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였으니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가 작지 않은 곳임은 분명했다.

허나 전후 주변 3국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할 바엔, 그냥 망가뜨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속셈이었으리라.

덕분에 비슷한 다른 도시국가들의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것에 반해, 모스크바 독립시는 오히려 주변 3국보다도 상태가 좋지 않아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대부분 폴로츠크로, 아니면 다른 두 국가로 도망갔다. 지금은 도시의 기능을 유지하기도 벅차 보이는 소수의 빈민들과 용감한(혹은 겁대가리를 상실한)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인세의 지옥이 강림한 중화의 무주지보다는 상태가 나았지만 그럼에도 모스크바 독립시는 유럽에서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도시이자 범죄의 본거지로 꼽혔다.

루테니아의 한 오락회사에서 만들어진 전자오락 ‘모스크바에서 살아남기’는 이 모스크바 독립시의 막장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자오락 중 하나였다.

폴로츠크 방면에서 투입된 평화유지군과 나머지 두 공산주의 국가에서 투입되는 군인들, 약탈자 및 청소부 현지인들이 전부 나오는 이 오락은 악랄한 현실성으로 악명높았다.

반면 폴로츠크 대공국은 독립 이후 루테니아의 사위국으로 잘나갔다.

모스크바가 몰락한 것과 대조적으로, 폴로츠크 대공국의 두 도시, 비쳅스크와 스몰렌스크는 피난 온 모스크바 시민들을 대부분 받아들이며 엄청나게 성장했다.

시간이 흐르자 이 도시들은 대공국의 이름이 기원한 수도 폴로츠크보다도 훨씬 더 커졌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7.17혁명 이후 옆 나라 폴란드에서 왕실과 셰임의 잔재들이 해체되며 공화정으로 바뀌자 오히려 폴로츠크의 포니아토프스키 왕조가 폴란드 왕실의 적법한 후손이 되었다.

그럼에도 폴로츠크의 대공 유제프 2세는 그들이 폴란드 왕위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며 폴란드 국민들의 결단을 존중한다는 말로서, 구시대적 왕실 문제로 양국이 긴장 상태에 놓이지 않게 했다.

다소 혼란한 구소련의 땅에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면, 비로소 평화로운 유럽의 땅이 나왔다.

개천 6세기 말이 되자, 유럽에는 유럽연합(UE; Unio Europaea)의 체제가 완전히 자리잡혀 있었다.

맨 처음 유럽 주요 10개국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체제는 차츰차츰 구성원들을 확대해 나가 지금은 유럽 국가 대부분을 포용했다.

현시점 원년 10개국인 [프랑스, 도이치, 포르투갈, 에이레, 네덜란드, 루테니아,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덴마크]에 더해 [카스티야, 아라곤, 알바, 노르웨이, 핀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아이슬란드] 등의 1차 가입회원국, 이후 간을 보다 가입한 몰다비아, 불가리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나바르, 발트3국, 폴로츠크 등등까지.

사실상 공산3국 혹은 중립국이라는 명분을 고집해야 하는 스위스, 크라인, 콘스탄티노플과 모스크바 같은 도시국가인 경우나 진심으로 자신이 고려연방에 속하고 있는 모 국가와 같은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전부 다 가입한 셈이다.

전후 고려의 경제력이 어마어마하게 팽창해나가며 전 세계가 완전히 고려화되겠다는 미증유의 공포에 잠식당한 유럽인들은, 필연적으로 이 동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가 아무리 관대하고 자비로우며, 정당하다 하나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미 고려는 군사적, 정보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실 전후 세계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전에도 북대동양조약기구 등으로 유럽의 안위를 앞장서서 보호하는 수호자였다. 하늘눈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는 감시자였기도 했다.

그래서 유럽은 대전쟁 이후 오히려 다른 지역들보다도 상당히 빨리 고려에게 안보를 위임한 곳이었다.

이미 고려가 북대동양조약기구를 통해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군축과 안보 위탁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나 안보와 경제는 또 다른 문제였다.

오히려 다른 방면에서 그렇게 고려에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경제권까지 고려가 집어삼키면 대체 나라의 존재 목적이 뭐냐는 회의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든 나라는 주권을 지킬 명분이 있었다. 이는 고려도 인정하는 것으로, 그랬기에 국제연합이라는 체제를 만들어 각국을 수호하겠다 천명한 것이다.

주권 속엔 경제적 주권도 있었다. 어쩌면 일반 국민들에겐 그것이 체감상 제일 클지도 모른다.

다만 가냘프고 가냘픈 자국 경제력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지금의 상황.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힘을 합치게 되었으니, 그것이 유럽연합의 설립 목적이자 존재 이유였다.

유럽연합은 미주대 오영진 교수가 제시한 경제통합의 다섯 단계 중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자유무역지역―관세동맹―공동시장―경제동맹―온전한 경제통합)에 있었다.

협력의 수준을 넘어, 거진 통합의 단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세계는 이미 국제통화기금과 국제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 세계은행동맹 등으로 굉장히 가까워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유럽연합은 시장 통합과 더불어 유로라는 같은 통화를 사용함으로써 현존하는 다른 경제협력기구(예를 들면 예맥한 주도의 서태평양경제기구)들보다도 더욱 효과적인 정책들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서태평양 경제기구도 이를 보고 배우려 했으나, 몇몇 국가들에게는 오히려 고려의 제국원체제와 멀어지는 것이 손해를 불러올 것이 명백했기에 주저하기도 했으니, 실행 가능성은 미지수였다.

고려도 유럽연합을 존중했다.

이들의 시장지배력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7할 8푼 이상의 세계경제는 고려가 장악했으니 큰 위협이라 볼 순 없었다. 오히려 몇몇 제국경제인들은 연방제국의 경제가 너무 타 지역을 압도하여 다른 경제를 초토화시키는 것 또한 오히려 제국의 경제적 측면에서 썩 건전하지 않을 것이라 보기도 했다. 역전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 속에서, 경쟁은 좋은 것일 테니. 고려의 경제인들은 세계의 이상적인 경제 비율을 7할 대 3할(물론 고려가 7할이다)로 꼽았고, 다른 국가들의 발전을 독려했다.

그러면 남은 것은 오로지 고려대륙만 남았다.

만종교국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종교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무술의 성지인 이곳은 별다른 산업적 기반이 없었어도 관광수입만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굉장히 높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만큼 인구는 굉장히 적었다. 좀 땅 넓은 바티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애초에 만종승려들도 승려인 만큼 혼인을 하지 않았고 전 세계의 수련생들을 통해 교파를 유지해 나가는 곳이었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고려는 세계 육지면적 중 3할(정확히 말하자면 0.2857)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한 초대륙국가였다.

인구적으론 이미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고, 사방에서 이민자들이 문을 두들기고 있었기에 그 증가율이 내려갈 것 같지는 않았다.

군사력으론 설명이 필요 없었다. 패권 경쟁국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 세계는 안보위탁의 형식으로 제국군을 각지에 주둔토록 했다. 가끔 제국군은 국제연합군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기도 했지만 어쨌든 형식과 절차상의 문제일 뿐, 그 실체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제력은 몇몇 침체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우상향했다. 꾸준한 기술 투자로 압도적인 기술 선도국(동명의 단체를 말하는 바는 아니었다)이기도 했다.

그러니 고려는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했다.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의 정수는 바로 고려제국이며, 고려제국만이 앞으로 쌓아 올릴 문명의 유일한 주체일 것이라고.

우리가 세계며, 세계가 우리다.

그러니 제국의 근본에 대한 사실은 인류의 역사에 대한 논쟁인 것이다.

그 기단에 대한 장난질을 어찌 용인하는가?

* * *

학기는 끝났다. 지금은 여름방학이었다.

악랄한 교수 상민은 학기 내내 예진과 학생들을 괴롭혔었다. 과제 이후에는 깜짝시험(팝퀴즈)으로 달달 볶았고, 중간과 기말을 통해 학생들의 입에서 한숨이 마르지 않게 만들었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될 수 있으면 좋은 학점을 주긴 했다.

예진은 역시나 가 학점을 받았다.

상민이 편의를 봐준 건 없었다. 1학년 때부터 진심상태에 들어간 그녀는 대부분의 과목에서 최고 학점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제출한 과제들 대부분은 상민의 뜻과는 영 반대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교수들은 자신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주장을 펼쳐도 그 논리가 정연하고 올바르다면 굉장히 높게 쳐주곤 했다. 상민도 동시대의 저명한 역사학자들, 즉 창양대의 구정표, 알바의 토마스 칼라일, 도이치의 레오폴트 폰 랑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등의 관점도 충분히 존중했다.

그리하여 랑케의 논리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wie es eigentlich gewesen)’을 따른 예진의 과제도 굉장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예진은 실증주의적 측면에서, 삼별초의 항해에 대한 물적 증거가 모순되는 것이 있고 어떤 면에선 빈약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했다.

아프리카와 인도, 또 누산타라 일부 지역에서 발견된 삼별초 항해 시기 유물들은 모두 진품이지만, 유물들이 묻힌 지층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보면 유물과는 시기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

삼별초 초창기에 조지서의 부재로 기록이 미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동고려 시절 초에 만들었던 목간과 죽간은 존재한다는 점.

하지만 그 긴 항해에서 기록했을 목, 죽간들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삼별초 선단의 구조가 대양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고, 존재했다는 누선의 복원도가 여러모로 견고하지 않았던 점.

추정된 항해 경로를 보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운에 의존하여 건너와야 했다는 점.

기타 여러 가지를 조목조목 짚었다.

예진이 알아서 떠올린 건 아니다. 지금도 이미 다른 사학자들이 반론으로 제시한 것들을 나열했을 뿐이다.

괜히 지금 사학계가 세계 최고 난제에 속하는 삼별초 문제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경로와 방법의 차이를 논했을 뿐, 실증주의적 사학자들 대다수는 대양항해설 자체를 부인하진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적인 해석이 곁들여진 ‘이적설’로 해석할 수밖에 없으니.

학자들은 종교적 논리가 학문에 도입되는 걸 끔찍하게 꺼렸다.

반면 종교인들은 계속 태조의 기적에 대해 어깃장을 놓는 교수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때로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주장했다.

물론 진지한 주장은 아니었다. 초고위층 종교인들은 딱히 아무 말 못 하는 상태였다. 그 주장을 하고 있는 당사자 중 한 명 때문에라도 그랬다.

그리고 마침내 예진은 그에 대해 물어볼 기회가 생겼다.

종강 이후 여름방학이 시작하자 둘은 비행기를 타고 제국을 같이 돌아보는 중이었다.

전용기는 넓고 쾌적했다.

상민은 예진에게 예전의 바람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천하의 절경들을 보여줄 기회가 있음에 더없이 감사하고 있었다.

둘은 첫날 청해에서 가장 가까운 절경으로 향했다.

이과수. 과라니 어로 큰 물을 뜻하는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

우기에 방문한 이 장엄한 폭포는 역시나 손에 꼽히는 절경을 자랑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이 계속 울려 퍼졌다.

예진은 이때만큼은 한없이 내려놓고 감탄하며 절경을 즐겼다. 오히려 예전 지수와 다녔을 때는 동갑내기 친구였어도 약간 언니 같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할 사람 옆에 있으니 신경 쓸 것도 거의 없었다.

사실 상민은 이미 몇 번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세월이 몇 년이었던가. 가면시중 시절에 주요 관광지 개발 및 보존을 위해 자연보호구역 설정을 했었고, 몇몇 핵심적인 곳은 자신이 직접 걸어서 답사하기도 했었다. 다만 예진의 옆에선 눈치껏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 둘은 쿠스코 쪽으로 넘어갔다.

일기예보상으로는 다음 주에나 비가 온다니, 일단 둘은 우유니를 건너뛴 채 직승기를 타고 나스카 지상화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상민은 예진의 물음에 대해 그렇게 답변했다.

“지상의 저 문양, 저건 인간들이 만든 거야.”

그 정밀함을 미루어 볼 때, 혹자는 지상화에 외계인이 개입했다는 가설을 주장했지만, 주류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나스카 문명의 원주민들이 아직 모르는 의도로 저런 것들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는 상태였다. 종교적, 혹은 역법적 이유로 옛 나스카인들이 저 그림을 바닥에 그렸고, 그것이 건조한 기후 덕에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해석했다. 아직 완벽한 해석은 나오지 않았지만 상민도 대체로 그렇게 보았다.

“우리의 역사도 그래. 결국은 인간이 만든 거잖아?”

역사 행동의 주체를 인간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린다면, 참담한 결과만 남을 것이다. 독립적이지 않고 종속적인 무언가가.

뭐가 어떻게 되었든, 결국 맨땅에서 문명을 세운 것은 우리가 아니었냐고, 상민은 그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나 기억나. 당신이 말했어.”

남편은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예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래에서,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 왔을 수도 있다고. 당신이 그때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불로불사의 비밀을 제외한 가장 큰 비밀.

오로지 왕예만이 최후의 순간에 들을 수 있었던 말.

상민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녀의 살갗 밑에서 맥동하는 피가 느껴졌다. 그는 사소하게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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