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화 (외전) 일상(3)
대양주에서 시선을 돌려보면 인도가 나왔다.
반도에 자리 잡은 주요 국가, 무굴, 시크, 마라타, 비자야나가르, 벵골은 단위면적당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구집적도를 가진 나라들이었다.
국가 경제의 핵심이 인구라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미래가 기대되는 국가들이라 봐도 되었다.
반대로 아직은 낙후되어 그 인구수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나마 시크와 마라타가 잘살았고, 그다음 무굴과 비자야나가르, 벵골 순으로 국민 소득이 적었다.
인도 지역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종교도 많고 인구도 많아서 싸울 법도 했는데, 소규모 분쟁은 몰라도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이들이 본격적으로 싸울 시기는 각국이 대판 싸우는 2차대전기밖에 없었기에 그 시기를 놓친 것이 제일 컸지만, 또 나름대로 세 세력 균형도 전쟁을 방지할 만큼 절묘했다.
무굴과 시크, 마라타 등은 이득에 따라 서로 견제와 대립, 협력을 했다. 주변국들, 비자야나가르와 벵골, 라다크, 아프가니스탄까지 낀다면 더더욱 복잡해졌다. 한 국가가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는 구도였다.
게다가 그들이 전부 합쳐봤자 인도양에 있는 제국 제7함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선진국인 유럽이나 동아시아가 고려에게 안보를 위임하며 군축에 들어가니 이제는 오히려 군축을 실시하지 않는 지역―중앙아시아 및 인도양―의 함대들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7함대 또한 이제 무시무시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압도적 세계단극체제하에서, 지역적다극체제는 지루할 정도의 평화를 선사해주었다.
지금 무굴과 시크, 마라타가 서로 싸우는 거라곤 세 국가의 접경지 관문소에서 어떻게 이륜차를 멋있게(괴상하게) 타는지 겨루는 정도였다.
대체로 스탄이 국명의 뒤에 붙는 중앙아시아는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별 탈 없이 지냈다. 카자흐스탄은 여전히 지역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그와 동시에 북캅카스의 알라니야가 신흥 성장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시비르 공화국이 자원부국이라는 이점을 통해 옥저 시장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아시아의 강대국을 꼽아보자면 단연코 아련과 이라크, 이란을 꼽을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안정된 두 이슬람 국가는 민주주의적 체제하에서 세계적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련은 이슬람권에서 특출난 정치선진국이었다. 이슬람 민주정의 모범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각 지역의 부족자치를 인정하면서도, 대통령(대에미르) 체제하에서의 단결력을 강조할 땐 강조했다. 메카를 소유하고 있기에 이슬람권의 진정한 맹주라고 봐도 무방했다.
두바이가 따뜻한 고려의 품을 떠난 이후에도 별문제 없이 순순히 아련과 조약을 맺어 자치령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에도 아련이 가진 이슬람적 명분이 존중할만한 것이란 점이 한몫했다.
이라크의 알 바키 왕조는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었고, 주변국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중앙집권적 측면에서 보면 이라크가 아련을 능가했다. 이들은 이슬람권의 교육적, 경제적 중심으로 발돋움했고 특유의 종교적 관용을 통해 여러 종파도 포용했다.
사실 이라크는 이제 종교적으로 굉장히 느슨해졌다. 이슬람 성직자와 율법가들은 이슬람 종교 최대의 위기라고 가끔 화상기에 나와 떠들었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선진국 축에 속하는 이라크 국민들은 필연적으로 종교와 괴리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여자가 몸을 가리는 옷을 입는 것도, 모스크를 가는 것도, 심지어 이젠 기도를 드리는 것도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했다.
유럽 기독교인들이 주말마다 교회나 성당을 가는 것을 깜빡하듯, 이들도 이제 모스크를 가는 걸 깜빡했다. 어쩌면 자의적 망각일지도 몰랐다.
할랄과 하람의 경계도 희미해졌으며, 이라크의 주류시장 및 여성 자외선차단제의 시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이란은 여전히 맹주 중 하나였지만, 아무래도 일찍부터 안정된 이라크와 아련의 성장세보다는 미치지 못했다.
이들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도 전 세계적으로 불어온 7.17 인권혁명 이후였다.
다만 현시점 부동의 자원부국 고려를 제외하면 사우디, 이란, 이라크가 전 세계 석유 매장량 2위부터 4위까지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천혜의 축복을 통해 객관적으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순 있었다.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도 투닥거렸지만 크게 싸우지 않았다. 그나마 가끔 튀르키예가 쿠르디스탄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성질을 냈는데, 이라크의 기세에 밀려 소리만 요란할 뿐 뭘 해볼 순 없었다.
기독교계 소국인 안티오키아와 기독교와 이슬람 비중이 거의 반반인 레바논도 조용했다. 팔레스타인은 굉장히 평화로웠으며,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상당히 많은 재정을 충당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서쪽,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의외로 경제가 고만고만 비슷했다.
상업적 측면에서 튀니스는 독보적 지위를 누렸다. 이 나라는 이슬람권 지중해에서 가장 큰 무역국이었다. 억압자 베네치아가 다른 건 몰라도 그들에게 무역 기풍 하나는 제대로 심어주고 갔다.
반면 관광과 운하 수입에서 이집트는 대체 불가능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입지적 측면에서 아프리카와 서아시아를 잇는 것도 그랬다. 약간의 석유도 나왔다.
마라케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왼쪽에 있고, 고려령 카나리와 가깝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마라케시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치안 좋은 국가였기에 페스에선 골목마다 제국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동안 알제리와 리비아 정도가 상당히 낙후된 채 살아갔던 것이다.
허나 알제리와 리비아에서 석유가 터진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두 국가가 엄청난 자원 혜택으로 빠른 성장률을 기록했고, 나머지 세 국가가 허겁지겁 뒤따라가는 정도였다.
중앙아프리카의 경우 여전히 북과 남보다 살기 힘들었다. 석유가 나는 하우사나 콩고를 제외한다면 여전히 낙후되었고 개발이 요원해 보였다. 상투메 같은 섬에 있는 도시국가가 아닌 이상에야 붉고 척박한 토질과 녹색 사막이라고 불리는 열대 기후를 이겨내기란 상당히 힘들었다. 또 유럽의 식민지였던 곳은 군벌과 부족 문제도 잔존했다.
다행인 것은 고려 개입 이후엔 정치적으로는 과거보다 훨씬 안정되었다는 점일 테다. 고려에겐 태평양과 예맥한을 끼고 있는 중화 땅보다도 아프리카를 더 신경 써야 할 당위성이 있었다. 전후 고려는 2차대전에 참전했던 아프리카 연합군들과 함께 지역 안보 장악에 나섰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서쪽과 중앙과 달리 동쪽과 남쪽의 사정은 괜찮았다.
무타파와 악숨―아주란 등은 모두 지역 강국으로 꼽혔다.
무타파는 먼 과거부터 만종을 받아들여 정치체제가 상당히 견고한 나라였다. 므웨네에 대한 지지도 높았다.
이런 안정된 기반을 바탕으로 무타파는 그동안 수많은 유랑민들을 받아들였고(혹은 강제적으로 흡수했고) 그 덕에 압도적 인구를 자랑할 수 있었다.
인구가 폭증했음에도 경제 또한 탄탄한 지하자원 덕에 나름대로 잘 굴러간 편이었다.
당연히 무타파는 국제연합에서도 지역 대표이사국이었고 남아프리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권리만큼 의무도 뒤따랐으니 무타파는 나미브와 루바룬다, 부간다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줘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들과는 과거에 몇 번 싸우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동쪽의 지배자 악숨 왕국은 지금도 전통의 강국으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호시탐탐 동쪽의 땅을 노렸다.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이 지방을 확보한다면 무역적 측면에서 유리한 고지를 얻을 수 있었다.
아주란은 원래 척박하여 인구가 적고 경제력이 약한 지역이었다. 정치적 세력도 희미했다. 1차대전 이후에나 식민지 보상을 받기 위해 조약국들이 정부를 만들어준 경우에 속했다.
이렇게 한동안 방치된 땅에, 입지는 좋으니 해적들이 슬슬 머리를 디밀 수밖에 없었다.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는 배들이 피해를 볼 정도였다.
여러 이유 끝에 국제연합은 악숨이 아주란을 동군연합의 방식으로 흡수하는 걸 방관했다. 방식에 대한 비판이 좀 있긴 했지만, 덕분에 이곳은 지금 꽤 안정된 상황이었다. 아주란 항구 도시 보사소나 무크디쇼(모가디슈)에는 지금도 상인들이 북적였다.
메리나는 조용하게 그들끼리 잘 지냈다. 그들도 밖에 관심이 없었고, 다른 나라들도 그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메리나가 유명한 건 세계 최대의 백란(바닐라) 수출국이었다는 것과 섬유 산업 정도였다.
다만 메리나가 유일하게 짜증을 내는 이웃 나라가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옆 섬에 이사 온 건 그러려니 했다. 열강의 식민지였던 이곳은 그전에도 무인도였으니 메리나가 딱히 소유권을 주장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옆집에 이사 온 국가는 이웃들에게 떡을 돌리는 고려의 아름다운 풍습 대신 거드름을 빼며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잘난 민족이니, 자신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니 그렇게 말들을 늘어놓았다.
또 자신들에게 금융을 맡기면 부를 크게 증가시켜 주겠다느니 하는 말들도 했다. 내심 이웃들을 미개하다며 은근슬쩍 깔보는 눈치마저 있었다.
아마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났을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말이 완전히 거짓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천부적인 금융가였고, 시온 제도(일 부르봉과 모리셔스를 통칭한다)를 가지게 된 이후부터 빠르게 섬을 가꾸어 나갔다. 금세 이들은 1인당 구매력평가지수에서 상위권을 기록했으며, 시온 제도엔 상당히 많은 회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 회사들이 어딘가 구린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은 소소하고 무시할만한 사항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려가 어느 순간부터 이런 조세회피처에 대한 금융제재를 한다 선포하자, 이스라엘은 궁지에 몰렸다.
고려의 약속을 받으면 성장세도 크게 둔화될 것이다. 돈세탁을 하지 못하면 굳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반면 금융제재를 받으면 아예 나라가 폭삭 망할 것이었고.
결국 이스라엘은 미적거리던 계좌개설방어와 기타 여러 가지 규제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제국 국세청과의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금융제재 자체는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또 다행스럽게 동시기에 2차대전이 터진 것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전 세계 각지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참전을 독려해 면죄부를 얻었다.
또 2차대전 이후에는 고려가 다른 조세회피처들에게도 철퇴를 휘둘렀으니 상대적으로 이득을 본 측면도 있었다.
아프리카 유일의 유럽계 국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무타파와의 기나긴 대립을 청산한 이후에는 안정적이고 무난하게 살았다. 여전히 만종 승려들을 볼 때마다 두려워했지만.
다만 지금도 유럽계와 아프리카계의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이 남아공을 강국의 반열까지 오르는 것을 방해했다.
2차대전 이후, 찢어진 소련의 핵심 국가들은 이제 그야말로 눈 내리는 아프리카가 되었다.
어쩌면 그 말도 일부 아프리카 강국들에게는 비하적 발언이라 여겨져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나타난 신생국, 노브고로드 인민공화국과 블라디미르―카잔 인민공화국은 내부모순으로 처참하게 몰락했다. 더 이상 그들에게서 옛 러시아 제국의 품격(있다고 가정한다면)을 찾아볼 순 없었다. 여전히 넓은 땅덩이에서 나오는 천연자원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못살았을 터다. 물론 알라니야나 아스트라한, 시비르가 가져간 땅덩어리가 여전히 탐이 나긴 했지만.
반면 슬라브계 국가의 자존심, 루테니아는 전후 꾸준히 우상향하는 경제 곡선을 보여주었다.
비옥한 흑토지대와 2차대전으로 형성된 루테니아 민족성을 토대로 이들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식량 생산은 고려에 이어 세계 2위를 자랑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전 유럽과 서아시아 일부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량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식품 산업 자체도 거대했다.
키이우 가장 중심부에는 지금의 루테니아를 만든 올가 차리차와 크림대공 해대헌의 동상이 있었다. 세계 지도자 순위에서 항상 수위로 꼽힌 그녀는 나라의 영원한 자랑으로 남을 터였다.
그 밑에는 어쩌면 올가 차리차보다도 세계 지도자 순위에서 거의 최정상을 지킨 위인―자애왕―이 만든 국가가 있었다.
불가리아―왈라키아는 루테니아보다 인구수는 확연히 적었지만 그렇기에 살짝 더 높은 1인당 국민소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건실한 공업국가로 꼽혔고 저가 자동차와 화장품, 제약 등이 유명했다.
물론 요구르트도 빠질 수 없었으며 의외로 최첨단 연결망 산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질은 좀 떨어지지만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만든 회사도 있었고, 전자오락을 만드는 회사도, 보안체제(안티바이러스)가 유명한 회사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유럽에서 제일 낙후되었다고 평가받았던 땅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 사학자들은 이를 도나우강의 기적, 혹은 아센재웅의 기적이라 불렀다. 도나우강이 워낙 기니, 아센재웅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더 올바를지도 몰랐다.
재웅이 죽은 뒤에도 아센 가문은 대대로 명군을 배출했다. 하지만 설령 명군들이 아니라 범군들이었어도 상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센 가문은 투자왕 재웅의 유지에 따라, 여유자금이 있을 때마다 고려 주식을 사놨는데, 나중엔 그 자금이 엄청난 규모로 되돌아왔다. 아센 가문은 그 자금을 토대로, 고려 황실과 비슷한 정책들을 펼쳤으며 나라의 복지와 환경도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누구보다도 고려와 친하다고, 혹은 고려 그 자체라고 자부하는 그리스는 경제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여튼 그랬다.
고려가 괜히 그리스인들에게 북쪽 국가들을 좀 보고 배우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는 호시탐탐 연방에 편입되려고 노력하는 것 빼곤 다른 것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고대 그리스의 관광산업과, 고려의 지중해함대에게 섬을 임차하는 대가로 좀 받아먹는 돈이 있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리스가 항변을 좀 하자면, 자국 내 머리 좀 굵다 하는 지식인들은 전부 테르샤로마에 넘어간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프랑스도 그러했지만, 애초에 프랑스와 그리스를 비교하는 건 잔혹한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할지 몰랐다.
여러 국가가 모여있는 발칸, 일리리아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목가적 분위기를 자랑했다. 정교회 절반, 기독교 절반인 이 땅은 종교적 갈등이 거의 없었다.
2차대전기 공산주의자들의 발흥이 위협거리로 대두되었지만 소련이 자멸한 이후에는 그 목소리도 사그라들었다.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3국(잉글랜드,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카잔)이 전부 삽질을 하고 있는 지금엔 그 아무도 도나우 연방의 수립이니 뭐니 하는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크라인은 이중 가장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였고, 헝가리가 국가체급이 가장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