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42화 (642/653)

642화 (외전) 재회(3)

“응, 모레 들어갈게. 응. 별일은 아니야.”

예진은 먼 손녀―정화공주―에게 그렇게 전화를 했다.

지예에겐 자고 일어나니 예진이 옆에 없는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으리라. 물론 상민이 이미 조치를 했지만, 정화공주로서는 자신의 경호원보다도 더 수상한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었다.

어쨌든 예진은 새벽호에서 직승기를 타고 또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황금산에 있는 추억의 방에 도달했다.

“소신들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들을 호종하던 사도들이 속삭이듯 고하고는 후다닥 도망쳤다.

어찌나 행동이 신속한지 상민은 화조차 내지도 못했다.

“…….”

“…….”

잠시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예진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고, 상민만 마른침을 삼켰다.

“외로웠나 보네?”

그동안 남편의 곁엔 많은 여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그랬을 터다. 긴 시간 동안 외로웠을 테고. 예진은 상민이 살아간 육백 년에 달하는 세월을 충분히 존중했다. 정말이다.

또, 그가 무관심하더라도 다른 여자들이 가만히 두지도 않았을 거다.

세계 최강의 남자를,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사람을 두고 누가 그 옆자리를 탐하지 않을까. 꿈꿔보지도 않았던 자들은 미련할 것이며, 미달한 자였을 것이다.

그러한 유혹 속에서 이 정도면 양호하다 볼 수도 있겠지.

다만, 예진은 배가 아팠다.

그들 중엔 가벼운 관계도, 분명히 상민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름하여 성녀라 불렸던 사람들. 여기 조각상이 있는 여자들.

그녀는 조각상들을 천천히 뜯어봤다.

이곳엔 남편이 지금껏 사랑한 여인들의 동상들이 있었다. 굉장히 실제 인물과 흡사했다.

상민 자신이 직접 장인을 시켜 대리석을 조각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주 약간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있었다.

제일 먼저 자신의 동상이 나왔다.

예진은 그곳에서 옛날의 자신이 썼던 보관이며 기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발견했다. 모두 손상 없이 온전히 보관되어 있었다.

상민은 서둘러 보석함에서 익숙한 반지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예진은 그걸 보고 아련한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에 꼈다. 딱 맞았다.

‘하지만 이걸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녀는 다음으로 다른 여인들의 동상을 보았다.

잔과 연화, 루크레치아와 아이샤, 안토니아 같은 부인들과 콤니니, 에이다 같은 사람들까지. 그녀들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한 명씩 설명해 봐. 무슨 관계였는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올 것이 왔다. 상민은 눈을 질끈 감고 마침내 그의 방종을 고해성사하듯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이 사람들은 평생 당신의 공식적인 반려로 여겨지지 못한 거네?”

대화가 끝났다. 예진이 마침내 짧은 침묵을 걷고 말했다.

“그런 셈이지.”

상민이라는 존재와 사랑을 했고 후사를 남겼다.

하지만 모든 여인들이 그 진정한 실체, 즉 고려 태조 해민의 반려로 남은 기록은 없었다.

당연한 말이다. 그녀들은 망나니 방계 황족, 가면시중, 첩보요원 등과 결혼한 셈이었으니 제대로 된 ‘황후’로서 대접은 불가했던 것이다.

‘…….’

예진은 아주 약간의 승리감을 맛보았다.

자신만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 있었다는 승리감. 이런 감정이 드는 것 자체가 조금 유치하다 생각했지만, 실로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다만 그녀는 이들 모두에게 가련함도 느꼈다.

다 똑같이 사랑했을 텐데. 자신처럼 이 남자에게 미쳤을 텐데. 그럼에도 실체와 결혼하지 못했으니 어찌 딱하지 아니할까.

그러니 그녀는 최초의 정실로서, 중전으로서 할 일을 해야 했다.

“붓과 먹, 종이를 가져와.”

“예, 예!”

단둘만 있어도, 아까 형성된 예진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어쩐지 얼음가시가 돋친 아내의 말에 상민이 서둘러 발을 움직여 주문하신 물건들 대령했다.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먹을 곱게 갈아 공손히 바쳤다.

그동안 예진은 좌정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상민이 그녀의 앞에 종이를 깔아주자, 예진은 먹을 충분히 머금은 붓으로 종이에 단번에 써 내려갔다.

이번 생에선 단 한 번도 서예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서예를 하는가. 원주필이나 연필, 자동연필을 쓰지. 요즘 시대엔 동아리나 그런 방과 후 활동을 따로 하지 않는 이상 서예용 붓 한 번 잡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붓을 잡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몇 번의 연습만으로 곧바로 능숙하게 붓을 다루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써 내려갈 때도 한 번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글자 또한 실로 단아하고 고아했다.

그녀는 그렇게 정궁황후(正宮皇后)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행사했다.

국문으로 내명부의 교지를 내린 것이다.

전생에서 상민이 국문을 제정하고 반포하기도 전에, 이미 예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그 글자를 직접 배운 사람 중 하나였다. 그것도 당사자에게.

― 아르크(Arc) 부인 잔은 장무(莊武)의 시호(諡號)를 내린다.

강대한 무력과 힘을 갖추어 여러 차례 전장에 나아가 외적을 정벌하며 국가를 평안하게 한 정앙의 잔 다르크는 장무의 시호를 받았다.

또한 그녀는 자동적으로 상민과 예진이 공유한 태(太, 태조의 태)에 더해 성(聖)의 후호(后號)를 받았다.

즉, 그녀는 장무태성황후가 되었다.

번거롭고 긴 존호는 따로 내리지 않았다.

― 테우엘체 사람 연화에겐 덕비(德妃)의 직첩을 내린다.

연화에겐 다소 불쌍하지만, 그 시절의 법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연화는 덕비의 직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 보르지아 부인 루크레치아에겐 정강(靖康)의 시호를 내린다.

고려의 예술을 크게 떨쳐 만백성을 즐겁게 하였던 루크레치아는 정강태성황후가 되었다.

― 샴마르 부인 아이샤에게는 소헌(昭獻)의 시호를 내린다.

상민의 말을 널리 잘 전파하고, 서아시아와 아랍의 땅에 평화를 내린 아이샤는 소헌태성황후가 되었다.

― 진주 사람 콘스탄티나 콤니니에겐 숙비(淑妃)의 직첩을 내린다.

승은을 입은 콤니니는 혈통이 명확했지만, 정치적 관계는커녕 혼인 관계조차도 명확하지 않았다. 예진은 그녀 또한 귀비로 삼았다.

― 호엔촐레른―합스부르크 부인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안나에게는 선경(宣景)의 시호를 내린다.

상민의 명령을 잘 수행하고, 말을 잘 기록한 안토니아는 선경태성황후가 되었다.

거기까지 정리한 예진은 붓을 멈추었다. 한 사람이 더 남아있었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같은 시기를 공유하게 생긴.

‘예쁘긴 예뻤지. 나이도 많았는데도.’

능력도 좋고, 똑똑하기도 하고. 가슴도 크고.

‘그놈의 가슴….’

예진은 상민을 쳐다보고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렸다. 상민이 그녀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느꼈는지 쭈뼛거렸다.

붓이 다시 움직였다.

― 아발론 사람 에이다 바이런에겐 현비(賢妃)의 직첩을 내린다.

표면상으론 에이다 김이지만, 예진은 예법에 따라 그녀의 전 성씨를 기록했다.

다행스럽게도 예진은 에이다에게 지금까지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었다. 에이다의 좋은 업보일 테다.

상민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진은 그렇게 역대 상민의 배우자들의 시호와 직첩을 명확히 정리했다.

제국의 안주인으로 돌아온 그녀는 단 하루 만에 중궁전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였는지, 앞으로도 누구여야 하는지 명확히 선언한 셈이다.

상민을 포함하여 그녀의 위엄에 황금산 근처에 있는 이들 중에서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정실황후라 할지언정, 계실(후실)황후에게 시호를 내릴 권한은 없었다. 위계는 높을지언정, 권한은 동격일 테니.

애초에 고려의 법도상 정실이 멀쩡하면 웬만해선 다른 황후가 있지 않았다. 후비(後妃)는 많더라도 황후는 오로지 한 명이었다. 상민도 오직 예진만이 황후로 존재했다.

황후가 동시대에 많이 존재한 건 대체로 원나라의 기풍이었다. 해씨 고려와는 영 상관없는.

이는 계실황후도 마찬가지라, 정실이 죽거나 자격을 상실해야만 존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진의 행동은 사실 전례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미쳤다고 그런 소리를 할까.

상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행이다 실로 다행이다. 아주 무난하고 행복하게 끝났다.

예진은 방금의 행동으로 상민의 방종을 용서한 것이다. 그가 관계했던 그 여자들을 인정하고, 포용한 것이었다.

심지어 중요한 정치적 배우자들, 즉 앙주와 유럽을 다루기 위한 잔, 이슬람권을 다루기 위한 아이샤, 교황과 이탈리아를 다루기 위한 루크레치아, 도이치와 오스트리아를 다루기 위한 마리아 안토니아 등 주요한 인연들은 모두 계실로서 인정하기까지 했다.

상민은 그녀의 배포와 결단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함박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허나 상민은 예진에게 몇 가지 잔소리를 듣는 걸 피하지 못했다.

몇몇 귀비들의 존재가 예진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예진은 책임감 문제를 지적했다.

“어중간하게 행동하지 마. 책임은 져야지. 대체 그 여자들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유구무언이다.

상민은 한동안 천장에 시선을 고정해 고풍스러운 문양을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바이런 현비에게 직접 주겠어.”

예진은 방금 작성하여 먹도 채 마르지 않은 교지에 추억의 방에서 꺼낸 자신의 황후어보를 쾅 찍었다.

현 고려의 옥새는, 쿠쿨칸의 눈이라는 역사상 최고의 옥을 세공하여 만든 제국옥새였다. 만든 이후 황제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치가 높았고 실제적으로도 무겁고 크니 일상에서 사용하는 결재용 옥새는 따로 두었지만. 명목상으론 그 옥새가 황실의 권위를 상징했다.

다만, 태조 해민 시절엔 그 옥이 없었다. 쿠쿨칸의 눈을 제국으로 가져온 게 상민의 청해통령시절(태종시절)이었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제국옥새는 상민이 후대의 황제들을 위해 준 선물 중 하나였다.

상민은 즉위할 당시 이문경과 곽연수, 김지숙 등 신하들이 황금으로 만들어 바친 천자지새를 사용했었다. 용이 날아갈 듯 꿈틀거리는 형상의 금보였다.

예진도 그때 자신의 황후금보를 얻었다. 두 금보를 나란히 두면 용이 서로를 의식하며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아마 금보를 만든 장인이 의도한 것일 테다.

창천궁 박물관에 있는건 가품이다. 자신의 실제 도장은 여기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예진의 도장도 이곳에 있었다.

수억, 수십억 원을 준다고 해도 팔지 못할 국보다.

살살 다뤄야 했다. 하지만 본주인인 예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쿵 쿵 쿵

그녀는 성질을 담아 황후어보를 연속적으로 다른 교지에 내려찍었다.

“자… 잠깐만.”

아직 광명회와 광신도들에게는 알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하지만 상민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예진의 서늘한 눈동자를 바라보니, 거부의 말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 * *

그렇게 해서 두 여인은 새벽호에서 다시금 만났다.

“오랜만이네요.”

“예… 황후 전하.”

꽤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덕에 웬만한 일에도 잘 놀라지 않는 에이다마저 지금의 상황 속에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의심도 들었다. 수학적, 과학적 천재로서.

그러나 경영인으로서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옆에 있는 상민조차 현 상황을 인정하고 있었다. 반문을 제기하는 건 미련했다.

애초에 태조의 존재 자체도 기적이며 종교적 상징이었다. 천덕태성황후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망극하옵니다.”

에이다는 사극에서 본 말투를 따라 하며 다소곳하게 절하며 황후의 교지를 받아들였다.

세계 최고의 기업인이자 천하에서 한 손에 꼽히는 천재, 심지어 광명회의 부회주라는 직함조차도 예진의 앞에서 빛이 바랬다. 미주에서 처음 만났던 에이다도, 예진도 단 한 순간에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허나 누군가 에이다에게 지금 이 순간이 불쾌하느냐고 묻는다면, 에이다는 부정할 것이다.

그녀로서도 실로 다행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차라리 좋았다.

‘교지는 자격증이잖아?’

이로써 상민과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셈이다. 지금까지 어중간하게 그녀를 거부하던 상민도 에이다를 받아들여야 했다.

에이다는 고소를 삼켰다.

약간은, 아주 약간은 질투가 나고 부러웠다. 함께 또아리를 튼 두 용의 사이가.

그럼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녀는 이과적 두뇌를 굴렸다.

예진은 그녀를 보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다음 천천히 에이다를 향해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생 많았어요.”

“…흑….”

순간, 거짓말같이 에이다의 표정이 무너졌다.

예진의 가슴에 안긴 에이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에이다는 예진의 육신보다 나이가 두 배가 많았다. 관리를 열심히 한 덕에 전혀 그래 보이지는 않았더라도 엄연히 나이 차는 존재했다.

하지만 에이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숫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상민은 한순간에 인간 언저리로 떨어져 내린 기분이 들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예진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외면하기란 불가능했다.

다시는 버리지 마.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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