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화 (외전) 재회(2)
* * *
그날 이후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상민은 예진을 잡아끌었다. 아니, 예진이 상민을 잡아끌었을지도 모른다. 둘은 식당을 나섰다.
예진은 최고급 초월차에 아주 익숙하게 타면서도, 이 차의 이름이 적제인 것을 듣고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적제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났다.
딱히 어딘가 계획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저 상민의 마음이 내키는 곳으로 갔다. 청해는 너무 사람이 많은 대도시였다. 조용한 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적제는 쏜살같은 속도로 동해안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고려의 일부 고속도로는 일반 도로구역과 화물차들이 주로 오가는 구역, 그리고 제한속도가 없는 무제한도로가 따로 나뉘어 있었다. 다 합치면 실로 광대한 면적이었다.
무제한도로는 권장속도는 있었지만 법적 제한은 없었다. 차량을 스스로 잘 통제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달려도 된다는 소리였다.
인외의 경지에 오른 상민은 지구상에서 가장 괴물 같은 차량마저도 미세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무제한 도로를 달려 도착한 북쪽 합천 인근 한 작은 휴양지―우바투바 해변―의 아담한 별장에서, 둘은 하룻밤을 묵었다. 별장은 상민이 가진 것들 중 하나였다.
폭풍의 눈이 잠잠했던 만큼, 그 뒤에 몰아친 폭풍은 난폭했다.
하지만 거칠었던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간절하고 애절했다. 즐거웠고 신났다. 아름다웠고 황홀했다.
교감 덕에 텅 비었었던 마음이 마침내 충족되었다. 예진의 마음에 있던 공허는 비로소 사라졌다. 그녀는 그때서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
상민도 마침내, 마침내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주고 인정해주고, 고마워해 줄 유일한 사람을 찾았다. 근본이 없던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던 그녀만이 그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
둘은 밤새도록 서로에게 눌러놓았던 감정과 열정을 쏟아냈다.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복잡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둘은 차를 타고 나가 아이작 겹빵을 승차구매(드라이브스루)하여 왔다. 그리곤 별장 앞의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주저앉았다.
태양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광경 속, 둘은 마침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피곤하지 않아?”
“하나도 안 피곤해.”
다행스럽게도 이 젊은 ‘노부부’는 드디어 자신들의 실제 육체의 나이에 어울리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둘은 아무렴 상관없었지만,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말을 쓰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은 더 진해지는 것 같았다.
둘은 될 수 있는 한 ‘요즘 젊은이들’ 말을 쓰자고 합의했다.
예진은 상민이 건네주는 겹빵을 받으며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너무 늙었나 봐. 그치?”
“당신은 아니지. 나는 맞지만.”
둘 모두 육신은 젊다.
예진은 객관적으로 젊다 못해 어렸다.
상민은 여전히 전성기였다.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민은 문득 갑자기 마음 한편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여전히 필멸자일 테고, 자신은 여전히 불멸자일 테다. 그러니 이런 만남이 있다면 작별도 있을까? 또 언젠가는 그녀를 잃어야 할까? 하지만 그는 지금 이 불안감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은.
육신은 젊었지만 마음은 둘 다 나이가 지긋했다.
상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예진마저도 합쳐보면 여든에 가까운 나이가 아닌가. 정신만큼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맞았다.
상민은 그녀의 손을 매만졌다. 서로 할 말은 많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날 보러 여기까지 온 거야?”
“응.”
예진의 기나긴 이야기를 들은 상민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수업 시간에 볼 수도 있겠네.”
예진이 당황했다.
“뭐?”
상민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취미생활 중 하나는 코아케 우주기지에서 처박혀 인류의 우주 진출을 논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었다. 매년 여름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상민은 특별교수로 청해대에서 직접 강의했다.
과목은 역사학이었다.
그의 정체를 미루어볼 때 실로 뜬금없는 취미가 아닐 수 없었다.
경제학이나 정치학 같은, 그야말로 장구한 세월 동안 일가를 이루었던 분야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민은 굉장히 진지하게 일하고 있었다. 따져보면 역사학자 중 가장 역사를 잘,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는 올바른 역사관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
오로지 그의 정체를 아는 소수의 사람만이 그의 진실된 목적을 이해할 터였다.
“당신도 어쩌면 내가 가르치는 과목을 들을 수도 있을 거야.”
문득 상민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된다면 상민은 교육자로서 또 한 번 몹쓸 짓거리를 하는 셈인데.
제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물론 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수백 년 전 잠들었던 자신의 첫 아내가 살아 돌아올 줄은.
변호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불건전한 관계도 아니었다. 신성한 고려의 역사가 그들의 관계를 증명했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는 없더라도 겉보기에는 만인의 도의적 지탄을 받을지 몰랐다.
특히 상민은 이미 한 번 전과가 있었다. 에이다라는.
예진은 옛 남편의 그 미묘한 감정 변화를 빠르게 파악했다.
“그 사람은 대체 누구야?”
상민은 불현듯 몸을 떨었다.
총과 포탄이 날아드는 전장에서조차 단 한 번도 몸을 떨지 않았던 그마저도 방금의 잔잔한 질문이 불러올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눈치채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는 막아내거나 피하지도 못했다.
처음으로 무력하게, 자신을 내리찍는 냉엄한 칼날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뭐? …누구?”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같던 상민의 동공도 하염없이 떨렸다.
“에이다 김 말이야.”
“…왜?”
예진은 담담하게 상민을 바라봤다.
“그녀에게서 당신의 체취가 났어.”
예진은 손을 뻗어 상민의 팔을 들고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둘이 무슨 관계야?”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상민이 기르는 북슬북슬한 사모예드도 저런 수준의 후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여자(특히 아내)의 신비로운 예감일 터다.
어쩌면 상민이 가진 대단하다는 예지력조차, 이런 면에선 그녀들의 힘에 못 미칠지도 몰랐다.
오로지 정직함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상민은 온갖 미사여구를 빼고 그저 상황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예진은 한참 동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별말을 하진 않은 채 모래사장의 모래를 발로 문질렀다.
“화났어?”
“딱히?”
애초에 중전의 자리에 있을 때조차, 그녀는 상민이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제국통합을 위해선 부족장들의 딸을 서열에 맞게 후궁으로 책봉해야 했다. 긴 시간이 흘러 지금은 일반시민이 된 제국 친왕계는 계승서열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원주민들 통합에는 더없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히려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그녀가 스스로 나서 후궁을 들이길 주청하고 궁내 법도를 바로 세웠다. 그녀는 타고난 정치가였고, 한 사건에 크게 매몰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자신이 그의 정실로서 여겨지기만 하면 만족했다. 자신의 아이가 제위를 잇는 것. 그것만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짐작한 상민은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예진은 곧바로 입을 열어 다음 칼날을 상민의 부드러운 가슴에 푹푹 찔러넣었다.
“지금까지 한 명은 아니었을 테고… 대체 몇 명이야?”
딱히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지만, 그가 마음을 준 상대를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다.
예진은 자신이 그동안 역사를 공부하며 수상하게 여겼던 인물들을 떠올렸다.
“…이따가 말해줄게.”
상민은 알아서 털어놓으라는 무언의 압력에 굴종했다.
이렇게 누구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다.
상민은 결국 황금산을 보여주겠다는 약속마저도 해야만 했다.
‘젠장, 안에 있는 짐 정리라도 시켜놓을걸.’
* * *
그들은 해변에서 일출을 보았다. 해변 근처에 어느샌가 다가온 흰긴수염고래 무리가 한바탕 물을 뿜으며 축하한다는 듯 난리법석을 떨었다. 상민은 보지 않아도 그 무리의 정체를 잘 알 수 있었다.
“당신의 귀환을 축하하는 거야. 서해 용왕의 귀환을.”
예진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개성 왕씨가 작제건 설화를 통해 서해 용왕을 자청한 건 잘 알고 있지만, 그저 허무맹랑한 건국 이야기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다만 지금 보니 그녀의 남편이 동해 용왕 비스무리한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아침이 되자 새벽호에서 직승기가 날아왔다. 특수한 재질과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직승기 날개 회전음이 상당히 조용했다.
초월차도 모자라 이제는 군 특수부대나 쓸 법한 직승기를 타고 개인 항공모함으로 날아가는 상황이다. 이해가 안 될 법한 예진을 위해 상민이 여의국에 대한 것들을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여의국은 진이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기관이야.”
상민은 태종 해진을 언급했다. 예진도 스스럼없이 그 말을 받았다.
“그 아이가?”
그녀는 배 아파 낳은 자신의 둘째를 떠올렸다.
그럴 법도 했다. 말이 없고 과묵했던 둘째는 항상 아버지를 동경했었으니까. 어미로서 아버지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어쩌면 형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도 하긴 했었다.
그래도 결말은 좋게 마무리된 모양이다.
“당신 덕분이야. 당신이 교육을 잘 시켜서 그래. 우리 애들 사이 좋았어. 잘 지내다 갔어.”
상민은 여전히 예진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예진도 웃고 말았다. 그녀는 답변에 진심을 담았다.
“아니지, 당신이 살아가며 계속 중심을 잡아주었기에 애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던 거야. 그 애들의 애들도.”
직승기는 금방 갑판에 도달했다.
코아케에 있는 몇 명 빼고 새벽호에 있는 전 사도와 핵심 인원들이 갑판에 도열해 있었다. 아까 상민의 연락을 받고 준비를 한 모양이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니만큼 여의국 요원들도 보기 드물게 당황한 모양이다.
사실 상민은 이들에게 무언가 더 세밀한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예진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에 대한 꼼꼼한 지시사항들을.
여의국 내에서 있었던 안토니아와 같은 경우도 있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어색하지는 않을 터.
허나 그래도 주군의 본처이자, 창립자 태종의 어머니다.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그들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상민도 이놈들과 저놈들(광명회), 그놈들(광신도들)이 이 사건을 대체 어떻게 해석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예진은 당황한 이들 사이에서 주저 없이 행동했다.
아들이 수백 년 전 아비를 위해 세웠다는 기관이다. 그리고 이들은 남편을 위해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봉사해 온 사람들이다.
직접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남편은 절대 쉽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정말로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예진은 마냥 저자세로 나가지도 않았다. 공을 치하하되, 오만을 유도치는 말게 해야 했다.
남편이 알아서 어련히 잘해 왔겠지만, 무릇 군주의 곁에 서는 자가 그 본분을 깨닫지 못한다면 조직의 위계가 흔들린다.
기나긴 역사 동안 주군의 눈을 가리고 패악질을 부렸던 흉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까지 존속해왔다는 것만 봐도 이들이 그럴 조직은 아니라지만, 모든 조직은 반대로 언젠가 부패할 수도 있었다. 삼별초처럼.
예진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직승기가 땅에 닿았다.
예진이 내렸다. 그녀는 단 세 걸음 만에 자신의 모습을 완벽히 바꾸었다.
턱을 약간 들면서도, 시선은 다소 아래로.
손짓과 몸짓, 걸음걸이에도 소녀 특유의 귀여움과 발랄함 대신 위엄과 우아함이 자리잡혔다.
좋은 옷과 장신구를 걸친 것도 아니다. 아직 물건을 많이 구매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격식에 맞추기 위해선, 상민과 따로 장을 보러 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옷가지를 걸친 것은 그저 그 나이 또래의 한벌옷일 뿐인데도.
그녀가 내보이는 분위기, 그 분위기를 이루는 위엄에 모두가 동요했다.
누가 그녀를 갓 입학식을 앞둔 파릇파릇한 대학교 새내기로 보겠는가.
무언으로 그녀가 고했다.
여기 대고려제국의 첫 번째 황후가 왔노라고.
당황함이 서려있던 사도들의 얼굴엔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예진이 본격적으로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앞에 걸어가 섰을 뿐인데.
여의국 사도들, 그리고 사도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실로 모든 요원들의 뜻이 하나로 모였다.
그들은 모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기적은 여러 번 보았다. 어쩌면 지금의 기적도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허나 이들 모두는 감격했다. 드디어 빈자리가 채워졌다. 전설로만 남겨진 설화가 이루어졌다. 진의를 깨닫지 못하더라도, 어찌 신하 된 도리로 그리고 자손 된 도리로 예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불멸의 용 옆에 나란히 선 환생의 용에게 지고의 예를 바쳤다.
“강림을 경하드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