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외전) 재회
잠이 들면 어김없이 그 꿈이 찾아왔다.
예전에 어렸을 땐 그 꿈이 무섭고 싫었다.
하지만 커가면서는 달랐다. 잘 만든 사극을 1인칭으로 생생하게 직접 본다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예진은 나중에 그 꿈을 절실히 기다리기까지 했다.
무섭지만 재밌었다.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다.
매일 예진은 부푼 가슴을 안고 침대에 들어갔다. 오늘은 무슨 장면이 나올까 하며.
꿈에서 그녀는 원 간섭기 이전 고려의 마지막 황실 후손이었다.
처음엔 승화후라 불렸다가 후에 해씨 고려 황제 해권에 의해 추존된 결종(潔宗) 왕온의 딸, 왕예였다.
지금과 달리 그때의 왕예는 막내였고, 몸 약한 오빠와 언니를 위에 두고 있었다.
예진은 왕예의 시선으로 보고 느꼈다. 어린 시절 우악스러운 무인들의 손에 이끌려 가족 전체가 강화행궁을 떠나 배에 올라야만 했던 순간도.
기적처럼 그들과 함께 남려에 떨어진 순간도.
그리고 ‘그’를 만났던 순간도.
그와 사랑하고 결혼하여 위대한 제국을 맨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던 것도.
마침내 그와 작별한 순간까지, 모두 영화처럼 보고 느꼈다.
한 편의 장구한 연속극이었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며칠, 거의 몇 달 동안 걸핏하면 눈물이 쏟아지기까지 했다.
허나 어느 순간 예진은 그 꿈들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꿈을 꾸면서 내면속에 자리한 자아가 조금씩 발아했다. 그 자아는 현실의 자아와 융합되었고, 곧이어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작별의 꿈 이후, 그녀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지만 반대로 자아는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과정을 겪었으니 예진의 삶은 이상하고 독특했다.
부모님도 자신이 이상했다셨다.
특히 둘째와 막내를 모두 키워보면서, 맏딸의 육아가 터무니없이 쉬웠다고 깨달으셨댔다. 어린 시절 그 나이 또래처럼 철없이 지내야 할 예진은 너무 조숙하게 철이 들었다.
인생 2회차, 마치 유행하는 소설의 내용처럼.
부모님도 그러셨으니 그녀 본인은 얼마나 잘 느꼈을까.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처음 꿈속에서 접한 초등학생 무렵 때부터 정신적으로 빠르게 성숙해졌다.
그 나이대 애들이 할 법한 투정도 전혀 부리지 않았고, 묵묵히 조용하게 자기 할 일을 해 나가는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조금씩 커갈수록 예진이 인지하는 사실도 선명하게 되었다.
특히,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차 강화도에 간 것도 기억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몽골의 공격때 고려왕실의 피난처로 쓰였던 강화행궁은 이상하게 낮이 익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려 여행을 하면서, 예진은 스스로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왕예진은 또 다른 나―왕예―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내가 정말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환생한 걸까?
혼자선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책을 보고 공부를 해도 정답을 구할 수 없었다. 다녔던 절에서조차 해답을 궁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여길 꼭 오겠다고 했던 것이다.
당신에게 답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을 만난다면 모든 질문이 해결될 테니까.
당신을 만난다면 지금까지 줄곧 비어있었던 허전한 마음도 채워질 수 있을 테니까.
* * *
사력을 다해 노력한 결과,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청해에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청해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모든 기억을 완전히 되찾았다.
감개가 무량하면서도 설렜다.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두려운데 너무 보고 싶었다.
허나 그녀는 지금 당장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역설적이고 모순적이었다. 하지만 그런게 여자 마음인걸.
청해국제공항에서 내려 공항철도를 타고 구도심에 속한 청해대역으로 가는 와중, 그녀는 자꾸만 시선이 가는 청해 통령관저역 종점 방면에서 억지로 눈을 돌렸다.
복잡한 속내였다.
미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솔직히 말해 너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그 감정을 참고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저 먼 한양에서 이곳 청해까지 오기 위해 대체 얼마나 노력했던가.
예진은 그가 자신을 보러 오길 기다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당신이 나를 보러 올 차례라고.
오라고. 와서 확인하라고. 그녀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바보 같은 짓일까? 내 존재를, 내 마음을 당신에게 읽어달라고 강요하는 미련한 짓일까?
아닐 거다. 다른 평범한 남자에겐 무리겠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아닐 테다. 그 사람만은 알 수 있을 테다. 나의 존재를, 내 감정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공명하고, 교감하고 있으니까.
‘성화전의 궁궐담을 넘은 그때처럼 다시 한번 날 보러 와 주면 안 될까요?’
예진은 그렇게 물었다. 그 물음이 제대로 전해졌으리라고 확신하며.
그렇게 겨우 겨우 감정을 눌러담은 예진은 일단 지예와 함께 숙소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지예는 창밖에 그 유명한 홍현대교가 보이는 근사한 숙소를 빌렸다.
때마침 노을이 질 무렵이라 야경이 황홀하게 보이는 곳이었다. 수많은 차들이 청해 구도심과 신도심을 오가는 광경이 보였다.
그녀들은 숙소 부근의 고급식당에서 멋진 저녁식사를 했다.
토마토와 숙주, 온갖 해산물이 들어간 청해식 해물 요리를 함께 먹었다. 예진은 술이 가능했지만, 술을 잘 못 마시는 지예를 배려해 술 대신 무열량 파라콜라를 마셨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건만, 지예는 식사 이후 꾸벅꾸벅 졸았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좀 피곤한 모양이다.
예진과 지수는 종단열차를 탄 초반에는 좀 힘들어했지만 여정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체력이 붙었는지 지금은 오히려 괜찮았다.
하지만 정화공주는 이런 여행이 처음이었는지, 쿠스코에서부터 누적된 피로가 몰려든 모양이다.
게다가 항공기에서도 자지 않았으니까.
“언니 미안해, 나 먼저 들어가 잘게.”
예진은 선선히 승낙했다.
다만 그녀는 식당에서 조금 더 남아있기로 했다.
접객원이 와서 식기와 그릇을 치워주고 후식을 내왔다.
예진은 일부러 포도주를 한 잔 더 시켰다. 성인이 되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번 멋부려 보고 싶었다. 술이 마시고 싶은 순간이었다.
3층 식당, 열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밖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향기로운 포도주를 마시며 보고 있으려니, 정말로 극락에 온 것 같았다.
‘아니야. 그곳은 당신이 없어서 재미가 없었어.’
아름다운 여자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몇몇 사람들이 다가왔다.
하지만 예진은 그들을 정중히 사양했다.
그녀는 기다렸다. 십 분, 십오 분, 이십 분.
“늦네….”
그녀가 속상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
거짓말처럼 차 한 대가 다가왔다.
납작한 검은 차였다. 마치 검은 표범을 보는 듯했다.
이름이 기원한 옛 애마의 특징을 따서 바퀴살과 바퀴테만이 피처럼 붉었다.
‘적제’는 맹수였고, 지배자였다. 날카로운 전조등부터, 배기구까지.
배기음조차 사나운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정숙하면서도 폭발적인 능력을 모두 챙긴 대가였다. 마치 애마 주인의 성격과 흡사했다.
차체를 이루는 곡선과 직선은 예술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이었다. 동시에 유체역학적이며, 과학적이었다.
일견 전투기가 생각나면서도, 자연의 동물이 가진 심미적 특징도 따왔다.
외관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성능 또한 압도적이었다.
자동차 내부에 장착된 최신형의 12기통 충배기관은 가장 진보한 전기기관의 보조를 받으며, 순간적으로는 현존하는 모든 자동차 기관 중 가장 강력한 성능―무려 1,500마력에 달하는―을 내뿜을 수 있었다.
도로를 달리는 전투기.
이 차의 소유자는 그 말에 공감했다. 차 주인은 자신이 가진 항공모함에서 전투기를 운용한 적도 많았으니.
그야말로 무결한 차리라.
세상엔 많은 차가 있다.
고려 내에선 가장 규모가 큰 주항이나 허먼―크리스티안슨, 삼만리, 망한 제일자동차를 인수하여 새롭게 기본을 다지는 시대자동차, 대중적이며 가성비가 좋은 테우아칸 자동차, 앙주의 자랑이자 한창 떠오르는 전기차 사업을 주로 이끌어가는 앙페르 자동차(쌍룡―주항 소속)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저 멀리 도이치의 바이에른원동기주식회사(BMW)나 이탈리아의 토리노자동차공장(FIAT), 조선의 정우자동차, 성래자동차, 백제의 발산자동차 등이 있었다.
이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회사는 고성능차(슈퍼카)를 만들었다.
그래야만 이 힘든 시장에서 자신들의 기술력과 앞으로의 야망을 제시할 수 있었다.
허나, 한 자동차 회사는 격이 달랐다.
쌍룡만큼은 아직 범접하기 힘들었다. 이름에 붙은 그 역사와 상징, 독보적인 기술력은 쌍룡의 차만이 오직 진정한 초월차(하이퍼카)로 불릴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차들은 그저 참칭자일 뿐이라고.
그 쌍룡의 초월차 중에서도 적제는 세상에서 오직 단 한 대만 생산되었고, 범인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자동차였다.
허나 그토록 소중한 애마를 탔음에도 거인은 식당의 주차대행 직원에게 자동차 열쇠를 거리낌 없이 건네주었다.
수많은 명차들을 주차해본 직원마저도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상민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설령 흠집이 나면 뭐 어떠랴. 실제 적제도 아니고 한낱 기물일 뿐인데. 책망하지도 않으리라.
지금 거인에게는 저런 금속 쪼가리보다는 다른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상민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단번에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켰다가 팽창시켜 3층으로 도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또한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그녀의 앞으로 나아가는 계단 한 발짝 한 발짝을 즐겼다.
기다림이 오히려 행복을 만들었다. 시적인 표현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허나 행복은 불안과 공존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행복이다. 자신이 누려도 되는 행복인지 의심부터 들었다.
대체 왜? 어떻게? 지금?
당장은 상관없으리라. 상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상민은 2층에서 3층을 올라가는 계단에 멈추었다. 그리곤 남자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고 두루마기를 가다듬었다.
홀로 세면대 앞 거울을 독점한 덩치 큰 괴인에게 불만을 가질 법했지만, 다른 남자들은 아무 말 없이 볼일을 보고 나갔다. 상민은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홍현대교 저편에 걸린 노을은 마지막 붉은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과 같았다. 상민은 많은 영화제작에 관여했지만, 단연컨대 지금처럼 엄청난 감정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상민은 천천히 그녀의 탁자에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의 얼굴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맑은 눈동자, 잊지 못했던 밤색의 눈동자가 그를 담았다.
상민을 인지한 그녀의 눈동자가 문득 호선을 그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보고 싶었다고, 기다렸다고.
상민은 진부한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너무나 격렬한 감정은 오히려 차분하고 고요했다. 맹렬한 폭풍이 모든 것을 찢어발기더라도 폭풍의 눈에 들어간다면 순간적으로 차분해지는 것처럼.
상민과 예진의 감정 또한 그랬다.
그리하여 둘은 마치, 정말 전형적인 연인처럼, 부부처럼 보였을 것이다.
덩치 큰 괴인과 아름다운 미녀의 조합이라는 특이함을 가지고 있었으니 필연적으로 시선을 끌겠지만.
그럼에도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저 연인이 여느 때처럼 퇴근하고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한, 그런 일상적이고 깊은 관계라 생각할 것이다.
시선을 돌린 사람들이 웃고 떠들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향기로운 음료, 술을 마셨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
누가 그들이 그 압도적인 세월을 넘고, 또다시 재회한 사람들이라 생각할까. 누가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까.
누가 이들이 당신들의 머나먼 조상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할까.
이토록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불멸의 용은 자신의 적법한 진정한 반려를 바라봤다.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쌍룡의 다른 용을.
환생을 거쳐 기어코 그에게 돌아온 용을.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차분하고 낭랑한 목소리. 편안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
그리워했던 목소리. 다시는 들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목소리.
상민의 대답도 편안했다.
“그랬지요.”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많은 말이 맴돌았지만 내뱉진 못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기껏 내뱉은 말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말이었다.
“밥 잘 챙겨 먹었소.”
진지는 거르지 말라는 유언에 대한 답변.
예진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잘했다고 토닥토닥하고 싶었다.
“그리고 애들도 잘 돌봤고.”
허나 두 번째 말에 예진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은 저렇게 자랑스럽게 말을 하고 있지만, 이제 그녀는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치광이 해완을 제외하곤 오직 그녀만이 제국을 지탱해온 늙은 용의 어깨를 보았다.
너희 후손들이 잘못한다면 언제든지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그렇게 엄포를 놓으면서도 자신과 그녀의 핏줄을 위해 헌신한. 오로지 책임감 하나로 이 제국과 세계를 이끌어온 위대한 철인을 보았다.
또한 동시에 미쳐버릴 자유조차 없는 용을 보았다. 제국의 번영과 세계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 자신이 저지른 업보와 모순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언젠가는 그것을 속죄할 수 있길 기원하는 한낱 짐승을 보았다.
그리고 예진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 남자의 모든 헌신은 자신과 했던 그 작은 약속에서 기원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