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9화 (외전) 범려철도여행(4)
예진과 지수, 그리고 흑경과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공주가 쿠스코역에 모였다.
정화공주도 이제 엄연한 성인이라 혼자 움직일 수는 있었다. 다만 왠지 두루마기가 두툼해 보이는 덩치 사내 두 명이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소속이 근위대인지 보안국인지는 모르겠지만, 치안에는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부턴 그냥 이름대로 해지예라 불러줘요.”
정화공주는 그렇게 말하며 두 언니들의 팔에 팔짱을 꼈다. 과하게 친근한 그 모습이 적응이 잘 되지 않는지 지수는 남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황가 사람들은 특히나 부담스럽게 예쁘고 발육이 좋았다. 예진은 몰라도 지수는 자꾸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 근데 시간 너무 많이 지체했는데?”
문득 계산해보니 원래보다 일정이 보름은 더 늦어졌다. 원래 두 소녀의 일정은 촉박하고 힘들게 대신 여유 있게 다니자는 주의였던 데다가 예상치 못한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다 보니 이젠 시간적인 여유가 사라진 상태였다.
물론 에이다 박람회나 궁 초대 등 지금껏 경험했던 사건은 돈 주고도 경험하지 못하는 천금과 같은 순간이었다. 단 하나의 후회도 없었다. 후회는커녕 행복하게 기억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빠듯하단 건 변함이 없었다.
8월의 입학과 개강 일정은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청해대와 기주대는 7월 동안의 예비대학과 새내기배움터 등, 입학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필수는 아니라지만 입학하자마자 외톨이로 살기 싫다면 참여하는 게 좋았다.
“뭐 하나는 포기해야겠어.”
“전부 다 봐야할 것들인데… 뭘 포기할까?”
소녀들은 잠시 여행계획서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예진이 주장했다.
“우유니를 빼자. 우유니는 황철경로에서 좀 벗어나있는데 워낙 유명해서 나중에 언제든지 다시 올 수도 있으니까.”
우유니 사막은 고려대륙 10대 비경 중 최고 수좌로 꼽혔다. 죽기 전에는 꼭 가봐야 할 곳이란 소리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황철 노선은 우유니 근처를 지나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주요 관광지를 이어주긴 했지만, 황철도 최대한 적자를 면하기 위해 여객 수송량 위주의 도시 노선을 택했다.
그렇기에 굳이 길을 틀어 고산지대 한복판에 있는 곳까지 가기란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우유니는 철저한 자연환경보호구역 중 하나라 태수열대우림처럼 될 수 있는 한 무분별한 철도 노선 개발은 지양하는 곳 중 하나였다.
우유니 사막은 사곡 등 가장 근처의 역에서 내려 승합차로 이동할 수 있었는데, 승합차라 시간이 좀 걸렸다. 일정이 빠듯해진 그녀들에게는 이동으로 긴 시간을 소비하는 건 썩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우유니는 근처의 포토시(은광산이 유명한)와 함께 나중에 따로 제대로 보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포토시 공항을 이용하면 비행기로도 접근이 가능하니까.
“맞아요. 지수 언니. 나중에 언니 남자친구랑 같이 12월 이후 우기 때 와요. 내가 근처 객원 예약해 줄 테니까.”
지예도 동의했다. 그녀는 황족답게 우유니 사막을 몇 번이나 갔는데, 될 수 있으면 우기(12월~3월)에 가는 편이 낫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7월이 지나고 있으니 말 그대로 비쩍 마른 소금사막만 볼 것이 분명했다.
건조한 소금사막도 장관이긴 하지만, 우유니 사막의 진면목은 물을 머금은 날에 느낄 수 있단다. 그렇게 세 소녀는 최고비경을 근처에 두고 비켜가기로 했다. 지수가 못내 아쉬움을 삼켰지만, 공주의 약속은 그 아쉬움을 달래주기엔 충분했다.
“진짜죠…?”
지예가 옛 삼별초 시절 건국기에나 나오는 호걸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이 동생이 꼭 이레니아 특별실로 예약해 줄 테니까 걱정 마요. 언니가 준비할 건 남자친구뿐이니까.”
지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맹랑한 공주 같으니.
“…….”
“예진 언니도 해줄게요.”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예진은 손을 내저었다. 배려는 고마운데 필요 없었다.
“전 괜찮아요.”
반드시 그와 ‘함께’ 갈 거라고 약속했으니까.
* * *
우유니가 아니더라도 쿠스코 남부의 황철 노선경로는 여러 가지 볼 만한 곳들을 지나쳤다.
쿠스코 바로 남부에는 후아이나푸티나라 하여 옛 남려에서 일어난 자연재해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사건을 일으킨 화산이 있었다.
후아이나푸티나 화산 피해를 정면으로 입은 백석이라는 근처 도시엔 화산 박물관과 유적지 등이 있었고, 이곳도 볼 만했다.
철도는 그 남쪽 해안가로 빠져 사곡으로 향했다
이곳은 또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이자, 지금은 쓰이지 않았지만 제국의 힘을 이끌어내었던 초석의 산지로 유명한 아타카마 사막이 있었다.
다음에는 그 유명한 효평이 나왔다.
효평엔 영화산업의 성지이자 수많은 연예인들이 살아가는 자퇴꽃―푸야―거리도, 아이소포스사 소속이자 세계 최대의 놀이공원인 ‘꿈동산’ 본점도 있었다.
이곳에선 정신없이 놀아도 사흘은 걸렸다.
한창때의 여자애들이 꿈동산을 가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초대 탐험가들의 일화에서 따온 격렬한 놀이기구 [울부짖는 바다]도, 옛 마야에 납치된 모험가의 일화에서 따온 [치첸 이트사]도, 물리학적 원리를 손수 실험해볼 수 있는 [자유낙하] 같은 기본적인 놀이기구들도 있었지만, 영화사와 협력해 제작한 [백악기 공원], 직접 광선검을 휘둘러볼 수 있는 [우주전쟁], 도포와 로브를 펄럭이며 돌아다닐 수 있는 [마법과 도술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등도 절대 빼놓으면 안 됐다.
세 명은 아주 신나게 놀았다.
사흘 동안 놀이공원이 모든 장소를 방문했을 정도였다. 찍은 사진만 거의 몇천 장에 달했다.
정신없이 놀다 보니 이제는 니가 공주인지, 내가 유학 온 조선인인지 잘 모르는 지경이었다.
예진과 지수는 한 살 터울의 공주 동생에게 말을 놨으며, 지예도 언니들에게 더더욱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다.
효평 밑에는 천감산이 있었다. 유명한 비경이자, 전 세계 산악인들이 정복하고자 하는 세계 7대 산 중 하나(솔직히 높이와 난도는 히말라야보다 낮았다.)였지만 세 소녀 모두 산악인은 아니었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쳤다.
그 뒤로는 한주를 통과할 때처럼 열차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다만 막 한름에 도착했을때와 달리 이제는 계절이 완벽히 반대가 되어, 눈 덮인 광야를 볼 수 있었다.
초여름에 시작한 여정은, 겨울에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거대한 지구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위대한 여정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열차를 타면 느끼는 것이 있었다.
인간은 지구적 규모로 볼 땐 한없이 작지만, 그 반대로 위대하기도 했다. 이 기나긴 길이를 이렇게 편하게 오가며 밖의 도시를 경험하고 절경을 볼 수 있다니, 대체 우리는 얼마나 대단하며, 제국은 또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제국인은 한없는 조국애를, 비제국인은 한없는 동경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이 종단열차여행의 마지막 과실이라고 볼 수 있을 터다.
6월 말, 소녀들은 기나긴 남려 여행을 마무리했다.
그녀들은 중간의 켈렌코호(헤네랄카레라호) 대리석 동굴에 내려 10대 자연 비경 중 하나를 둘러보며 대자연에 전율했다.
이후에는 울부짖는 바다를 피하고 태평양으로 나설 수 있는 유명한 ‘남부항로’를 볼 수 있었고, 여러 야생동물들이 자주 출몰하는 자연공원에서 먼발치에서나마 뒤뚱새, 바다사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7월이 되어, 지수와 예진, 지예는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면 예진과 지예는 청해로, 지수는 기주로 가는 항공편을 두고 헤어졌다.
“다음에 봐! 잡담하고!”
“그래.”
둘 모두 이제부터 완전한 타지에서 친구도 없이 유학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다. 그녀들은 앞으로의 고난을 앞서서 달래려는 듯 서로를 꼭 껴안았다.
* * *
“음….”
예진은 비행기 안에서 호사를 누렸다.
일반석이면 그러려니 할 텐데, 공주는 자신이 번거롭게 둘의 일정에 껴들었으니 이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며 한사코 예진과 지수의 항공편을 일등석으로 바꾸어주었다. 우등석도 아니라 무려 일등석이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흥, 흐흥.”
지예가 달라붙는 건 빼고.
좌석 간의 거리가 넓다 못해 공을 차도 될 만큼 광대하기까지 한 일등석이지만, 지예는 굳이 두 명의 좌석이 붙은 곳을 지정했다. 그리곤 예진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예진은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칸막이를 올리는 건 실례라 생각했는지,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언니 대학생활 진짜 재밌겠지? 정말 부럽다!”
“그럼 너도 입학하면 되잖아.”
“음대에 가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근데 난 말해놓은 것들이 많아서 수상쩍게 볼 거야.”
해광 덕분에 관형악(關形樂)이라든지 하는 고풍스러운 음악을 했던 황족들도 참 많았다. 다만 이렇게 상업가수가 되려고 실용음악을 했던 사람은 그녀가 최초였다. 연주회와 무대는 좀 달랐으니까. 복장도, 관습도, 시선도.
“루크레치아 음대는 생각 없어?”
전통적 경쟁자인 효평음대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음대라 꼽히는 루크레치아 음대도 청해에 있었다. 말 그대로 옛 가면시중과 결혼했던 그녀는, 가면시중의 가족 중 거의 유일하게 드러나는 사회활동을 했던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것도 예당과 예술의 어머니라고 불릴 만큼 많은 업적들을 쌓았으니.
루크레치아 음대는 그녀의 후손에 의해 세워지고 지금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예는 후광이 아닌 실력으로 그곳에 입학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몰라. 생각 좀 해보고.”
지예는 일단 악단 활동을 먼저 해보고 싶은 모양이다. 틀에 박힌 체계는 궁으로 족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녀도 젊었으니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기엔 충분히 많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나저나 언니, 기숙사는?”
“이제 구해야지….”
서두른 덕에 아직 시간이 조금 있었다. 예진은 가자마자 기숙사부터 구해야 했다.
땅덩어리가 큰 만큼 제국의 대학들은 대부분 공간을 넓게 쓰고 건물들도 많았다. 다만 청해대학은 그 명성만큼 부지가 객관적으로 크진 않았는데, 도시의 땅값이 워낙 비싸서 그랬다. 애초에 대학이 밖으로 밀려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터다.
대학의 재정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청해대학은 수상할 만큼 돈이 많은 대학이었다. 논술 시험료도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기까지 했다. 건물 한두 개쯤 올리는 건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역사와 전통이 가끔 발목을 잡긴 했다.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만큼, 옛 건물들과 유적지, 여러 위인―해인규, 뉴턴, 애덤 스미스, 리카르도 등 수도 없이 많은―들의 동상과 기념물들을 보존하면서 새 건물을 올려야 하다 보니 이래저래 불편한 것들도 많았다.
재작년에 새롭게 올려진 신관들이 완공되어 편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기숙사 문제들은 답보 상태였다.
그 와중 제국 국적의 학생들은 대학에서 싼 가격에 기숙사를 주었다.
다만 예진과 같은 외국 유학생들은 그 혜택을 받진 못했다. 그녀 같은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곳의 외부협력기숙사를 살아야 했다. 외부협력기숙사는 대학이 자신들이 소유하지 않는 외부 건물에 세를 받고 기숙사처럼 쓰는 곳이었다.
“외부협력기숙사? 거기 막 아무나 들어가는 곳 아니야?”
“…뭐 그렇지는 않아.”
예진은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감이 없어 말끝을 흐렸다.
치안이야 문제 될 건 아니다. 청해 구도심의 핵심 지역인 데다가 돈 많은 사립대, 세계 최고 명문대에서 대체 무슨 흉악범죄가 일어나겠는가. 으슥한 곳에는 방범녹화기도 설치되어 있었고 애초에 다들 시민의식도 뛰어나 지갑과 손전화를 두고 다녀도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하도 전세계에서 유학생들이 오다 보니 괴상망측한 일들이 벌어지곤 한댔다. 층간소음에 대한 걱정은 없는지 밤새 술 먹고 춤추는 유럽 애들부터 새벽에 신께 기도를 드리는 중동 사람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짜증을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랬다. 그 후기를 적은 사람도 결국 내려놓으면 편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다만 예진의 꼼꼼한 성격상, 내려놓는 것 자체가 좀 힘들지도 몰랐다.
“그냥 같이 방 쓸래?”
“응? 넌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공주가 뭔 기숙산가. 어디 숙소 하나 빌려도 무방할 텐데. 하지만 지예는 고개를 저었다.
“돈은 쓰면 쓸수록 명분만 없어지는 거야. 앞으론 허리띠를 졸라매고 절약해야지.”
“퍽이나….”
예진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응?”
“음… 그래, 알았어.”
지예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언니를 껴안았다. 언니와 함께 있으면 너무 좋았다. 어딘가 익숙한, 경험해보지 못한 어머니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한달까.
예진은 웃으며 포옹을 받아들였다.
여행은 끝났고, 대학 생활이 다가왔다. 대학에서 누구를 볼지, 어떤 사람을 사귀게 될지, 평정심 강한 그녀조차도 너무나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 도시의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이제는 ‘그’ 또한 그녀의 존재를 명확히 알아차린 것 같았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지, 몇 번이나 그녀의 곁에 다가온 거대한 존재의 시선이 있었다.
예진은 그 시선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녀도 그 시선을 받을 때마다 간질간질했다.
속에서 무언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품은 심상의 알의 껍질에도 조금씩 균열이 갔다.
[작가의 말]
고려제국 10대 자연 비경(순서는 가나다)
1. 나이아가라 폭포
2. 대협곡(그랜드 캐니언)
3. 로라이마 테푸이 국립공원
4. 아와니 국립공원(요세미티)
5. 우유니 소금사막
6. 이과수 폭포
7. 천감산(아콩카과)
8. 켈렌코 호(헤네랄카레라 호) 대리석 동굴
9. 태수열대우림
10. 황석 국립공원(옐로스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