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외전) 궁(2)
정화공주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예진의 여동생과 동갑이었다.
그녀도 또래의 애들이 그렇듯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냈다.
고려 사람들은 한창때의 조선 청춘들처럼 미친 듯한 교육열에 시달리지 않았다. 진로는 다양했기에 그중에서 학업에 뜻을 둔 사람만 하는 추세였다. 땅은 넓고 사회는 다양했으니 실로 여러 종류의 인재들이 필요했다.
다만 인구가 많고 공부에 뜻을 둔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의 비율도 대단하여 진학 경쟁 자체는 굉장했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과학의 영실상이나 발명의 상운상(전화기를 발명한 박상운의 이름을 땀) 수학의 대길―승수상(미적분학의 창시자 최대길과 한승수의 이름을 땀) 수상자들의 명단을 봐도 제국인이거나 혹은 제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 8할 이상에 달했으니.
마찬가지로 제위를 노리는 사람도 열심히 준비해야 했다.
해안 시절 개정된 계승법상 이제는 제위에 도전할 수 있는 제약이 거의 사라졌다.
제약이 사라졌다는 말이 제위가 쉽게 얻어진다는 소린 아니었다. 제위에 오르지 않은 사람들은 노괴의 존재를 모르니, 그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제위의 기본적 조건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몇 가지 표면적으로 여겨지는 자격이 있었다.
제위에 뜻이라도 있으면 군종 상관없이 일정 기간 입대하여 고려가 떠맡게 된 세계 수호자의 자격을 얻어내야 했다. 세계 경찰이 되어버린 나라의 최고 군통수권자가 군에 대한 조금의 이해라도 없으면 말이 되지 않았다.
해안은 모두가 알다시피 숭무감이 배출한 해당 기수 최고의 졸업생 중 하나였고, 아들 해공도, 손자 해호도 각기 합동화력함과 전투직승기 조종사로 3년간 군에서 복무했다.
또 동시에 학업적 성취도 빼어나야 했다.
훈요 128권은 박물관에 있고, 그 개정판 제국통치론도 옛말이 되어버린 지금은 황제 위에 오르기 위해선 적어도 통치적으로 중요하다 여겨지는 학문들을 공부하여 학위는 따 놓는 것이 좋았다. 공부는 많이 할수록 좋았다.
물론 정화공주는 제위에 뜻이 없었다. 아직은 종통의 범위에 속하는 그녀가 제위에 도전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을 터인데 애초에 그녀는 공부에도 뜻을 두지 않았다.
다만 정화공주는 그녀 나름대로의 고충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가수가 되고 싶다고요?”
정화공주는 조금 많이 독특했다.
황실에 관련된 사업체나 기타 경제적 이권에 어떻게든 발을 걸치고 싶어 하는 다른 친척들과는 달리, 그녀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꿈이 있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되겠어요? 황실에는 죄다 꼰대밖에 없는데.”
정화공주가 그렇게 대뜸 말을 내뱉었다.
말을 내뱉은 이후에는 행여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었는지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귀여웠다.
예진은 고소를 머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수도 지금 이 말을 들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된다는 얼굴로 예진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 입이 뚫린 정화공주는 거침이 없었다.
“뭔 놈의 집구석이 모든 게 다 규제 덩어리예요. 해야만 하는 거, 해도 되는 게 다 정해져 있다고요.”
황실규범은 필수적으로 숙지해야 하는 것만도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이다. 그것도 줄이고 줄인 것이었다. 숨이 턱턱 막힌다는 표현을 쓸 법도 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직업 선택의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지.”
특히나 황실 일가들은 직업선택도 자유롭지 않았다.
친족들이 전문경영인들로 충분히 돌아가는 황가 사업에 한 발 걸치려는 것도 그 이유였다. 다른 무슨 일을 하겠는가.
물론 황실에서 품위유지비를 충분히 주었다. 먹고사는 문제는 없었다. 황실이 워낙 부유하니 그런 돈에 세금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사람이란 본래 일을 하기 싫어했다. 허나 반대로 정작 하지 말라 하면 하고 싶어 하는 생물이기도 했다.
“그야… 밖으로 보이는 게 있으니까요?”
이해는 갔다. 체면 문제가 걸려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황실 사람이 대부업체에서 근무한다고 생각해보라. 합법적 선에 있는 대부업체라도 당연히 온갖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황실 사람들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자선업체나 후원재단, 공익적 단체에서 활동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새로운 세대, 흔히 연결망, 혹은 에이다 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는 그것조차 받아들이기 싫은 모양이다.
정화공주는 더한 자유를 원하고 있었다.
제국의 현세대 구분은 전쟁을 치른 ‘영광의 세대’, 전후 폭발적인 출산율을 보인 ‘전후 세대’, 이후 7.17 인권혁명을 겪은 ‘717세대’, 기술과 통신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나 연결망과 손전화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는 현 ‘에이다 세대’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것도 아니고, 일부 언론이나 호사가들만 말하는 개념이었다.
황실이나 학계 등은 이를 공식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사회 구성원들의 갈등을 경계하는 자들은 소국적 분열정치보다는 대국적 통합정치를 우위에 두었기에 그런 세대구분은 지양했다.
어쨌든 정화공주는 다 때려치우고 가수가 되고 싶단다.
눈빛이 간절해 보였다.
“곡도 이미 몇 개는 작곡했어요. 아 내 통현금을 보여주고 싶다.”
통현금(어쿠스틱 기타)은 발현금의 한 종류로 시간이 지나며 인기가 많아진 악기 중 하나였다. 또 다른 발현금의 종류엔 가야금이니 거문고 같은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들과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온 전현금(일렉기타)도 있었다.
정화공주가 몸을 비틀었다. 진짜로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문득 무슨 결심을 내렸는지, 갑자기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태상황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그때였다. 예진과 지수가 정화공주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사이 갑자기 잘생긴 한 남자가 다가왔다.
행동과 복장, 예의범절 모두 흠잡을 데가 없었다. 누가 봐도 황가 인원처럼 보였다.
“실례지만 아름다운 아가씨, 성함이나 번호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예진은 마시던 식혜를 뿜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잘생긴 남자의 눈은 미동도 없이 그녀에게 못 박혀 있었다.
“이름이야 여기 명패에 적혀 있구… 번호는 죄송합니다.”
‘왜 그래!’
지수가 뻐끔거렸다. 예진이 원래부터 철벽녀라 불리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연속극 같은 순간에서조차 저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공후인데, 공후가 번호를 따는데!
영제공 해제훈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예진이 거절하자, 그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안타깝군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예진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조각같이 잘생긴 남자였지만, 아예 끌리지 않았다. 예전에도 자주 이랬지 아마?
“뭐 하는 거야, 빨리 꺼져.”
어느새 다가온 정화공주가 영제공을 밀쳤다.
“지예야, 말조심하렴. 손님 앞인데….”
여동생의 성질에 오빠가 투덜거렸다. 정화공주가 콧방귀를 뀌더니 고갯짓을 했다. 그제서야 영제공은 저 멀리 태상황의 시선이 이곳에 닿아있다는 걸 느끼곤 어마 뜨거라 하며 물러났다.
“여미새예요. 관심 주지 마요.”
예진은 어디서 많이 본 광경에 피식 웃었다. 갑자기 환서와 영진이가 보고싶었다.
― 크흡….
옆의 지수가 문득 코를 훌쩍였다.
그제서야 예진은 아예 존재감이 없는 취급을 당한 그녀를 다독였다. 저번에 우상이었던 에이다도 예진에게만 관심을 가졌는데, 지금 이렇게 불쑥 찾아온 왕자님도 그러니 마음이 아픈 게 당연했다.
“너랑 있으면 항상 그랬어. 난 괜찮아….”
원래 초청의 밤은 당일 저녁 식사를 끝내고 다시 귀환하는 일정이었다.
열여덟 명의 사람들은 행복한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다시 숙소로 귀가했다.
허나 정화공주는 예진과 지수 두 명을 기어이 자신의 손님으로 다시 초대하는 절차를 거쳐 궁에 묵게 해주었다.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 신이 난 모양이다.
예진은 불과 한 살 차 언니인데 왠지 모르게 의지가 되었고, 조근조근 솔직하게 말을 하면서도 사람을 불쾌하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지수라는 언니도 재미있고 유쾌했다.
정화공주가 아까 태상황께 여쭈어 보러 간 것도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예진과 지수는 궁궐의 더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들을 의무적으로 관찰하던 눈도 사라진 상태였다. 너무 편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들은 공주님의 방에 도착했다.
공주님의 방이라고 대단한 건 아니었다. 넓고 화려했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났다. 방향제 냄새도 좋았다.
특이한 점이라곤 진열된 악기가 참 많았다.
건반부터 발현금, 찰현금, 장피리와 플뤼트(플룻)까지.
첨단 현대악기도 보였다. 음악을 뒤섞는 복잡한 전자기기도 놓여 있었다.
또 방의 한편에는 안에서 고함을 질러도 밖에서 잘 들리지 않는 방음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이거 들려줄게요.”
정화공주는 연산기 앞에 앉더니 소리띠를 두 개 내밀고 써보라며 독촉했다. 예진은 소리머리띠에서 들려오는 좋은 선율에 또 한 번 더 놀랐다.
― 있잖아, 나는…♬
공주는 배시시 웃으며 작사와 작곡 모두 자신이 했다고 자랑했다.
음대 준비생 수준을 훌쩍 넘어 있었다. 현직 작곡가 정도일까.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엄청나 보였다.
그제서야 예진은 지금까지 정화공주가 했던 이야기 중 일부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음대 준비해요?”
“음… 아뇨? 일단은 노래가 먼저예요. 음대에서 배울 건 다 이미 배웠기도 하고. 뭐 도움이 되면 갈 수도 있어요.”
그들은 안락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정화공주가 열심히 떠들었다.
정말 열정이 있는지,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선천적 인맥으로 온갖 종류의 음악인들을 만나며 재능을 흡수할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두 명의 스승님이 있었어요. 한 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은 고향으로 귀국하셨죠.”
그녀는 파가니니라는 이탈리아 찰현금 거장(발현금도 능숙하게 다루었다)과 쇼팽이라는 폴란드 건반 거장에게 음악을 배웠단다.
그중 쇼팽 교수는 여전히 예당 명예 회원으로 폴란드와 고려를 자주 왔다 갔다 하고 있댔다.
스승들 덕분인지 정화공주는 복잡한 음악적 이론부터 대중적인 음악계 흐름까지 잘 알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녀는 빼어난 음악가였다.
천부적 재능만큼은 옛 음악황제 예종 해광의 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해광이 정립한 관형파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지만.
대화가 약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정화공주는 다과를 내오라고 한 뒤 절전상태로 들어간 연산기를 켰다.
그리곤 바탕화면에 있는 간편대화(메신저)에 들어갔다.
무물사의 ‘잡담’은 전 세계 가장 큰 간편대화 체계였다. 전 세계 표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예진도, 지수도, 저 멀리 폴란드 사람도 가입되어 있을 정도였다.
― 신재효 이사 : 결단만 내리시면… [1 안읽음]
― 멘델스존 단장님 : 전하의 배려에 항상 감사드리며… [1 안읽음]
― 쇼팽 교수님 : 누누이 말했지만, 음악이란 악보를 만들고 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1 안읽음]
― 요슈2 : 그래서 진짜 한다고? [1 안읽음]
― ㅇㅇ
정화공주는 가장 최근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온 문자만 건성으로 답하고는 잡담을 꺼버렸다. 손님들 대접이 우선이다.
“근데 진지하게 내 노래 어땠어요? 언니들?”
“진짜 좋았어요…!”
공주의 방 안락의자에서 배부른 고양이마냥 늘어져 있던 지수가 열심히 호응해줬다.
지금 그녀는 약간 구름 위를 누비고 있는 심정이었다. 극락에 초대한 신선의 심기를 전혀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도 공주의 노래는 훌륭했다.
하지만 예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지향하는 바가 뭐예요? 아이돌?”
우상이라는 단어가 있긴 했지만, 어쩐지 종교적 의미가 강했기에 같은 의미를 가진 진주식 그리스 단어에서 파생된 ‘아이돌’은 현 대중문화의 일환이 되어 있었다.
아이돌이란 저 옛날, 전후 세대에 속하는 가수 양지태가 누렸던 거대한 인기 이후에 만들어진 문화적 용어였다.
이 흐름은 이후 뒷골목 소년들 같은 위대한 남자 아이돌 가수단부터 소녀시대 같은 위대한 여자 아이돌 가수단까지 성장을 거듭했다.
“에이, 아이돌은 언니 정도 되어야죠?? 언니는 아이돌 중앙자리도 가능하겠지만.”
세상에. 공주도 겸양을 떨고 아첨을 한다.
놀라운 사실에 지수가 눈을 끔벅였다. 물론 예진 앞에선 저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공주들은 이슬만 먹고 사는 상상 속의 신수인 줄 알았는데!
“난 못 해요. 전 작사작곡가수 홀로가 되고 싶어요.”
허나 아무리 아이돌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고 하나, 여전히 고려의 ‘주간음반순위’는 홀로 가수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예진은 어떻게 하면 말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정화공주는 음악적 감각이 특출난 작곡가였기에 선율 자체는 흠잡을 구석이 없을 만큼 좋았다.
다만 아이돌도 아니고 작사작곡가수(싱어송라이터) 홀로(솔로)로 성공하기 위해선 이런 음악들로 깊게 성공하진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음악 평론가의 입장이 아니라 그냥 음악을 즐겨듣는 대중의 입장이니만큼 다른 의견도 있겠지만….
그녀의 곡들은 너무 두드러지게 공주스럽다고 해야 할까.
곡의 가사에서 깊이감이라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주간순위에서 가볍고 경쾌한 사랑노래가 유행한 적도 있지만, 유행은 돌고 돌았고 그런 깊이가 없는 가수들은 한 번 반짝이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젊다. 고3한테 뭘 바라겠어, 이런 생각이 들 만도 하다.
다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른 몇몇 유명 십 대 가수들이 어릴 적부터 기똥찬 곡을 써내 성공했다는 것을 보면 경험이 음악 세계에 끼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정화공주는 자신의 가려운 부분을 짚어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어렴풋이 비슷한 생각은 하고 있었다.
갑자기 정화공주가 이 야밤에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언니들 그럼 남려여행 나도 껴 줘요. 같이 가도 돼요?”
“네?”
“아까 청해로 가신댔죠? 청해까지만 동행할게요. 거기에 마침 음반사들이 있거든요. 민폐 안 끼칠 자신 있어요. 남은 경비도 내가 부담할게요.”
졸지에 짐 덩어리가 하나 붙었다. 예진은 그녀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워 거절하려 했지만, 오히려 지수가 환영했다. 미주에서 손전화를 산 이후에 예산이 빠듯해진 지수의 뒷사정 덕이었다.
* * *
그렇게 삼인조가 결성된 야밤.
영제공 해제훈은 태상황 앞에 끌려가 단단히 혼이 났다.
“인연을 진중하게 대하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겠니. 응?”
“송구하옵니다.”
“보다시피 네 동생이 교분을 맺고자 하는 모양이다. 그 손님들에겐 접근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해제훈은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괜히 이상한 변명을 하는 것보다 잠자코 있는 게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비는 최고의 자세였다.
해안은 곧 표정을 풀었다. 미워도 내 강아지다. 그는 후손들이 다 같이 잘, 오순도순 살길 원했다.
“그나저나, 그 아가씨, 그렇게 마음에 들었느냐?”
“예….”
하지만 제훈은 무언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족들은 자연스럽게 엄청난 미녀들과 교분을 쌓을 인맥이 있었다. 예진도 폐월수화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대단한 미녀였지만,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근데… 너무 친숙했습니다. 어디서 본 사람 같기도 해서요.”
“밤무도회장에서? 요즘도 그런 곳 가니? 기자들이 얼마나 달라붙는데…!”
“아닙니다. 안 간 지 몇 달은 됐습니다!”
아! 제훈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서둘러 주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명백해 보였다.
“태묘에서 뵌 것 같기도 합니다.”
워낙 엉뚱한 말이었기에. 해안은 증손주의 의도대로 단번에 주제가 옮겨갔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사실 증손주의 말을 아예 따라가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천덕태성황후 폐하의 어진과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요. 마침 왕씨고 하니….”
워낙 현실성 없는 말이라, 제훈도 자신의 말이 웃긴지 큭큭대었다.
“크흠, 아, 죄송합니다.”
제훈은 슬쩍 증조할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해안의 표정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해안은 증손주를 보낸 이후에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묘하다, 아니다 생각했던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체 왜? 어떻게?
그는 보안국 요원을 부르기로 했다. 마침 한 요원이 태상황의 명이 있기도 전에 다가와 정화공주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보고했다.
“시기가 절묘하구나. 그 아이들을 계속 지켜보렴.”
“예,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