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37화 (637/653)

637화 (외전) 궁

대중들에게 궁은 동경의 대상이다.

특히나 황실의 인기가 대단한 고려에선 더더욱 그랬다.

대중들은 황실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졌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광하고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쓰고 말하는지는 예전부터 전 사회의 표준이 되었다. 모든 이들이 궁중용어를 쓴다는 건 아니었지만, 단어의 억양이나 용례가 궁궐에서 나왔다는 건 현대의 역사학자나 언어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사항이었다. 오히려 황실은 통합을 위해 이런 것을 부추기기도 했다.

상의국과 맵시업계를 보면, 당연히 민간이 황실이 어떤 옷을 입는지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길거리맵시나 자연스러움, 일상적 매무새에 대한 대중의 수요도 충분히 많았다. 다만 여전히 공적이고 진지한 자리에선 황실의 의복을 참조하는 게 널리 인정받기에 가장 편한 방법 중 하나였다.

또 어떤 식사를 먹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일거수일투족도 관심사였다.

황제나 황후를 비롯한 구성원들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할 때마다, 은근히 제도 내의 음식점들이 피고 지었다. 태상황 해안이 생도 시절 즐겨 먹었고, 지금까지도 잊지 못했던 부대찌개집은 딱히 그 음식과는 인연이 없었던 쿠스코에도 거리를 이루어 만들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궁의 특수성상, 궁 내부와 외부는 항상 정보의 괴리가 있었다.

궁 안에서의 일은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궁 안에 있는 근무자들이 이를 유포할 리가 만무했으며, 설령 유포하더라도 보안국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었다.

범인들로선 그 안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기껏 영상매체, 연속극을 통해 보는 것이 전부였다. 궁 속의 소식에는 항상 굶주려 있었다.

그래서 사실도 퍼졌고 거짓도 퍼졌다.

거짓된 소문은 황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종류의 말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과 나라가 고려 황실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제국에도 아주 극소수나마 있었다. 공화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 법과 원칙을 싫어하는 무법적 혼돈을 가진 사람들, 촌구석에서 사이비 종교로 한탕 해보려 했지만 주요 종교들, 예컨대 제국교와 쿠쿨칸교에게 머리가 깨져 국외로 도망쳐야 하는 사람들.

나라들도 꽤 많았다.

옛 소비에트 연방이나 중화제국에서 쪼개진 일부 나라들은 과거의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반성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려를, 고려 황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고려도 그들 전부에게까지 잘 보일 생각은 딱히 없었다. 이제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없었으며 사람들도 다른 나라를 싫어할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들 중 일부가 퍼트리는 이런 헛소문은 황실의 위신과 국가 통합에 저해가 된다.

막아보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류의 소문은 막아서 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키니.

때문에 태상황 해안은 황실이 개천 6세기,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7세기에 보다 더 민간에게 친근하고 대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통신매체와 연결망시대가 가속화됨에 따라 더더욱 그래야 했다. 비밀주의는 한계가 있었고, 오히려 드러내어 활동하며 인기와 지지도를 챙겨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초청의 밤’은 이러한 취지에서 실행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동안 열리지 않았었지만, 최근 태상황은 다시 이를 재개할 필요성을 느꼈다.

황실의 헤이해진 기강을 잡기 위해서도.

“너희들도 좀 도우려무나.”

“…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 손녀들, 증손자 증손녀들이지만 해안은 짐짓 엄하게 말했다. 요 근래 황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제위 계승에 관해서 큰 문제나 잡음이 일어났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건 해결하기 굉장히 쉬웠다.

현 황제는 자신의 후계를 지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워낙 전통이 되었으니 이에 대한 잡음도 잘 일어나지 않았다.

훈요 128조로 대변되었던 능력 검증은 상민의 혜안(밑천)이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금 시대엔 알맞은 수준의 현대교육으로 대체되었지만 여전히 굉장히 난이도가 높았다.

인성적 측면에서도 황제의 후계 보는 눈은 대부분 옳았다. 600년 묵은 태조의 훈수 덕이었다. 기껏 수십 년 살아온 애들이 자신의 영악한 속내를 숨기려 시도해봤자, 태조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때문에 해안은 별 고민 없이 해공에게 제위를 물려주었고, 그 차남도 딱히 큰 고민 없이 현황에게 제위를 물려준 것이다.

제위 승계는 깔끔했다.

다만 이제는 다른 황실구성원들이 문제가 되었다.

제위와는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아직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은, 만약 현 황제의 후사가 없거나 능력이 미달하면 어쩌면 운좋게도 제위를 노려봄 직한 사람들.

즉 혈통에 따라 여전히 황실구성원의 지위를 누리는 현 황제의 사촌, 오촌들이 문젯거리가 되었다.

통신매체가 딱히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 같았으면 적당히 알아서 잘 먹고 잘살다가 방계로, 방계에서 일반적 국민의 위치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되었을 터다.

허나 지금은 이 과도기적 상황에도 관리가 필요했다. 이들에 대한 소문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들의 행동이 황실에 대한 품위와 신뢰를 결정짓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예 손 놓으셨지. 이젠 당신이 뭘 못 하신다고.’

해안은 선조의 그 무식한 해결책(질 나쁜 후손을 바다에 던져넣는다든가)을 지지하진 않았지만, 가끔은 그 결단이 이 골치 아픈 황가를 거의 육백 년 동안 유지시킬 수 있었던 핵심적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당연히 지금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사람을 그렇게 처리하는가. 태조께서 그렇게 행동하셨던 건, 방계 혈통의 만행이 국가존망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과거였기에 그랬다. 입헌군주제가 완전히 정착된 현대엔 조금 더 우아하고 깔끔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동물이 원래 간사하듯, 이 황실 구성원들도 제각기 여러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돈 많고 부유한 황가에서 떨어져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또 자신이 원하는 사회활동을 하고 싶기도 하고, 인기도 얻고 싶고.

그러니 지금 엄격하여 씨알도 안 먹히는 황제 해호가 있는 창천궁 대신, 그나마 부드러운 태상황과 상황이 있는 쿠스코 별궁에 찾아와 이렇게 아양을 떨며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 하는 것일 터.

허나 이 애들은 완전 자리를 잘못 골랐다.

* * *

“우와!”

“와…!”

스무 명의 초청자들이 별궁으로 발을 옮겼다. 발걸음마다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초청자들은 모두 입구에서 방문객이라 쓰여있는 작은 중합체 명패를 목에 걸고 있었다. 다만 복장은 제각각이었다.

다들 뜬금없이 이 자리에 있게 된 셈이니까. 두 소녀도 이를 보면서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쿠스코 별궁은 정궁이 아니다 보니 건물들의 생김새나 분위기가 창천궁마냥 위엄차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실생활에 목표를 두어 편하고 아늑했다. 정원도 넓었고, 편안했다.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제국의 기상이 적용되는지 범인은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돌바닥과 벽에 새겨진 돋을새김, 벽에 걸려있는 회화나 장식품, 조각상과 돌탑. 이 하나하나가 초일류 객원조차도 따라 할 수 없는 예술적, 심미적 가치를 자랑했다.

역사와 전통 때문일까.

별궁이 자리한 타완틴수유 문화 기반에 고려가 대들보를 세웠고, 추후 유럽의 문화가 흘러들어오며 겪은 문화 통합의 과정이 전 궁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실로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웠다.

주변을 오가는 궁내 직원들도 그 모습을 나름대로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좋겠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전부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나중에 황실 전속 사진사가 개별적으로 기념사진을 찍어준다니 그건 기대해볼 만했다.

예진은 그 와중 무리에서 이탈해 있었다. 그녀는 긴 복도로 향했다. 발걸음이 그녀를 무의식적으로 이끌었다.

역대 황제들의 어진이 걸려 있는 복도였다.

평상시엔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고 그저 황가 구성원들이 생각에 잠길 때 산책하는 곳이었을 터.

어진들은 별 설명 없이 휘만 붙여놓은 채 그렇게 수수하게 걸려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가훈 하나와 함께.

[치국의 도를 살피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

예진은 개인적으로 구 외스터라이히의 유치찬란한 문구(A.E.I.O.U)보다 이 담백한 문구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곳을 둘러보았다.

여기엔 태조의 어진만 없었다. 준이와 진이는 있었다.

사실 그 뒤의 손자 손녀들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역사책으로만 배웠을 뿐.

예진은 천천히 그곳을 거닐었다. 마치 이곳의 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초청자들을 이끄는 내관은 이미 저 앞에 가 있었다.

하지만 무리의 뒤를 따라오며 초청자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내관이 자연스레 이탈자를 발견했다.

이제 소녀티를 벗은 여인이 어진들 사이에서 뭔지 몰라도 깊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손님? 그쪽은….”

내관이 그녀를 불렀다. 첫 번째 부름에서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길 안내를 하려는 찰나, 노인의 손이 내관의 어깨를 막았다.

“독특한 아가씨로구나.”

어느새 다가온 태상황 해안이 그렇게 말했다.

“생각만 하고 있다면 방해하지 말자꾸나.

위대한 지성이 눈을 뜨고 있을지 우리가 어떻게 알까. 어진에서 보고 느끼는 바가 있다면, 그 또한 기뻐해야 할 일이다.”

어차피 역대 궁중화가가 그린 실어진은 황실 금고와 태묘 보관소에 있었다. 저건 굳이 따지자면 모작에 가까웠다.

해안은 그렇게 말하며 내관을 잡아끌었다.

무언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노인은 그녀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 인상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

어쩌면 노인의 몸에 흐르는 피가 반응하고 있는 듯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태상황도 손님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예진은 몇 분의 시간이 더 흘러서야 정신을 차리고 접견준비실로 향했다.

사람들은 이미 접견준비실에서 내관에 의해 간단한 궁중예법을 숙지 중이었다.

황실은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많은 예법을 요구하지 않았다.

초청받은 일행 중에서도 그저 교수님 대하는 대학원생 정도의 수준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누군가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썩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지만.

그렇게 그들이 준비를 마치고 연회장으로 들어가자, 정갈하고 많은 음식들과 함께 늙은 태상황이 그들을 반겼다.

그 뒤에는 종통과 방계의 사이에 있는 황실 구성원들도 서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아이고 폐하!”

일반인들은 감개무량한 듯 태상황의 환대를 받았다. 누구는 내관의 말을 까먹고 넙죽 엎드리려다 태상황에게 직접 일으켜 세워지기도 했다.

고려군에서 복무했다는 한 아저씨는 목례 대신 기어코 경례를 하기도 했다.

그런 몇 가지 웃긴 일화를 제외하곤 큰 소란은 없었다. 사람들은 질서 있게 연회장에서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고려식 궁중만찬은 보통 한상차림을 의미했다.

다만, 몇 가지 음식들은 시간차를 두어 내왔다. 또한 시대가 발전하며 연기가 덜한 주정화로나 기체연료화로 같은 것들이 발달하자 화로에서 즉석으로 찜이나 탕을 데워먹는 풍습도 생겼다.

음식은 기본적으로 각자 준비된 접시에 반찬을 덜어내어 밥이나 기본 빵과 함께 먹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타인과의 식기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원래는 모든 반찬에 전용 젓가락이 있었지만, 지금은 집게를 사용했다. 꽤 혁명적인 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요즘은 아예 상의 음식이 이동하기도 했다. 현황 해호가 그런 걸 좋아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궁내 전통도 다양하게 변화하는 중이었다.

태상황은 나이가 드신 만큼, 비슷한 연배의 노인 두 분과 열심히 대화 중이셨다.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은 사람이면 몰라도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껴들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였다.

대신, 황실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다. 대부분은 사실 태상황에 끌려 나오다시피 해 이곳에 서 있었지만 이들도 명색이 황가 사람들인 만큼 공적인 사회생활을 많이 해본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과 소소한 대화를 할 순 있었다.

태상황은 그 와중에도 힐끔힐끔 애들이 잘하고 있나 살폈다.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자리에서조차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애들은 불러 크게 혼을 낼 작정이었다.

예진과 지수는 또래의 한 공주와 합석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저씨 아줌마들과 말이 도저히 통하지 않을 나이의 공주는 이곳에서 드물게 표정이 적나라한 애였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마침내 예진이 그렇게 물어볼 정도로.

“네? 아, 미안해요.”

그제서야 공주는 퍼뜩 놀라며 사과했다.

적어도 사과하는 걸 보니 심성이 나쁜 애는 아닌 듯싶었다. 딱히 표정이 좋지 않은 게 사과할 것까지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예진의 물음도 순전히 호기심에 가까웠다. 궁 내의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행복하고 좋은 삶만 영위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 무슨 고뇌가 있는지 궁금했다.

공주는 저 멀리 할아버지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그녀 또래의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기회가 전혀 없었기도 했다.

초청된 스무 명 중 여대생이 두 명이 있는 것도 기회라면 기회일까.

“비밀로 해줘요. 그럴 수 있어요?”

“네.”

예진은 원래 입이 굉장히 무거웠고, 지수도 진지할 때를 구분하는 애였다. 둘은 딱히 황실의 이야기를 어디 퍼 나를 동기도 없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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