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외전) 여명항천사(2)
‘엄청난 장관이야.’
에이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슬쩍 내밀었다.
세계 최고 기업의 회장인 자신조차도 이 엄청난 규모의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물론 시가총액상으론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회사를 멀쩡하게 운영하면서 이런 일을 할 순 없었다.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이는 자신을 포함한 세계 50대 기업, 아니 그것을 넘어 세계 100대 이상의 기업들의 재력을 조금씩 합쳐야 했다.
즉, 동산과 부동산을 막론하고 압도적인 규모의 재화를 지닌 ‘황금용’만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추진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제국 경제는 황금용에 의해 움직인다.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모든 기업은 직간접적으로 용의 영향권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계속 성장 중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당사자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커졌다.
상민은 전쟁이 끝난 이후, 자신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행동들을 계속해서 해왔지만 실패했다. 그는 스스로의 영향력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했다.
모순적이게도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없애려 하는 모든 시도―반독점법 및 기타 여러 가지 경쟁체제 구축―가 그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로 돌아왔다.
대침체 이후, 그가 수많은 건실한 기업들을 구원하겠다며 직접 돈을 뿌리며 구제한 기업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엄청난 크기로 몸집을 부풀렸다.
놀라울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건실하지 않은 기업, 부도덕한 기업들은 구원하지도 않았으니까.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알짜배기 회사들을 저가로 수확하는 행동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상민의 인재수집활동은 더 활발했다.
그는 에이다는 물론이고, 그녀의 경쟁사인 별구름의 찰스 배비지, 무물의 한석진, 일반전기회사의 마이클 패러데이 등등을 발굴하여 자신의 휘하에 거느려 각 회사의 최고개발자, 최고경영진으로 올렸다.
그리하여 해당 회사를 맨바닥부터 세우거나, 성장시켰다.
지금 표면적으로 피 터지게 경쟁하고 있는 거대기업들조차도 애초에 모두 그의 영향권하에 있다는 의미였다.
상민은 현대의 거인들을 발굴한 것도 모자라 엄격한 재정건전성 및 도덕성 요구, 주주친화적 경영, 친환경 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광명회 위주의 기업들에게.
분명히 이는 거대 기업들 입장에선 큰 손해를 유발할 수 있는 정책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100미터 달리기를 할 동안, 우리는 마치 200미터 장애물달리기를 하는 느낌이었다는 한 광명회 소속 기업인의 소고에서 그 감정의 편린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광명회는 헉헉대면서도 그의 노력에 최대한 부응했다.
반면 역으로 오만해야 할 고려의 기업들이 그렇게 행동하자 오히려 세상의 기준이, 규칙이 조금씩 바뀌었다.
다른 나라들의 기업들 또한 훨씬 더 가혹한 환경 속에서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다른 회사들도 다음 경기부터는 장애물을 신경 써야 했고, 완주해야 하는 경주선의 길이도 길어졌다.
반면 처음엔 힘들어했지만 한번 그렇게 경주장에 적응한 고려 회사들은 이제야 적응하는 다른 나라의 회사들과는 달리 오히려 더욱 익숙하게 질주하며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나라 경쟁자들이 고려 기업들을 추월한 적은 산업혁명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선제 적응을 끝마치는 과정에서의 진통이었다고 생각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극 체제 속에서 ‘국제표준’을 지키지 않는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나라들은 없었다.
국제표준 속에는 환경문제도 포함되었다.
세계대전 동안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지만, 전쟁이 끝난 뒤 내려앉은 범지구적 평화 속에서 세계 인구수는 빠르게 회복했다. 지금은 그 인구수가 계속 증가추세에 접어들었다.
이에 자연스레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이 전지구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는 강력한 지도력이 성립되어있지 않은 세상에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강대국들은 내정간섭이니 주권이니 하는 권리들을 필요할 때마다 들먹이며 제멋대로 환경을 파괴했고 폐수와 미세먼지를 공해와 공영에 흩뿌리고, 이웃 나라들은 그러한 강대국들의 횡포에도 참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강력한 지도력이 있다면 달랐다.
가난한 나라가 어쩔 수 없이 지키지 못한 건 있어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얌체같이 행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려는 국제문제를 일으키는 나라에겐 은근슬쩍 무역제재의 칼날을 보여주며 위협했다. 또한 고려는 여러 환경 및 민간단체를 주물럭거려 해당국 여론을 유도하는 데 통달이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뭘 어쩔 수 있을까. 단극체제는 꼬우면 다른 쪽에 붙을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
또한 객관적으로, 인류가 안정된 단극체제하에서 괜히 헛짓거리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꽤 명백했다. 그러니 제국은 온갖 비영리단체들을 휘두를 권리가 있던 것이었다.
그런고로 제국의 경제는 계속 성장 중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구축된 세계 무역 질서에서 고려는 고려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국내총생산을 합한 것보다 더 강력한 경제력을 자랑했다.
세계총생산에서 고려의 국내총생산 비율은 6할 5푼 3리에 달했던 것이다. 충격적인 수치였지만, 각국이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당연해 보였다. 물론 고려도 그때 막대한 인력을 전쟁터로 보냈으니 감안해야 하는 수치였지만.
하지만 전후 이 비율은 오히려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았다.
개천 560년을 기점으로 고려 경제가 엄청난 성장을 할 때, 이 비율은 무려 8할 3푼 이상으로 치솟아 오른 적이 있었다.
지금은 고려 경제가 견조해지며 7할 9푼 선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전 세계 비고려시장을 합쳐 봐야 고려의 사분의 일 수준의 경제력을 자랑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로 결론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전 세계 시장의 5분의 4를 점유한 국가에서, 그 부를 ‘대체로 점유’한 인물은 얼마나 돈이 많겠는가. 그 수치는 아득하고 아득해 도무지 범인의 머리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의 돈이 허투루 쓰이지 않게 통제하는 것조차 거의 나라 운영에 버금갈 정도로 힘들고 복잡했다. 황금산과 용의 재보를 담당하는 사도가 매번 우울한 얼굴로 다른 여유로워 보이는 사도들에게 업무를 어떻게든 짬처리하려고 돌아다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용은 허드렛일들을 사도들에게 죄다 떠넘긴 후 자신의 남는 재력과 여력을 우주개발에 쏟아붓고 있었다.
요즘은 그의 전용선, 오하이오급(10만 톤급) 중항공모함 새벽호가 바다에 떠다니는 일도 잘 없었다. 주인이 여기 눌어붙어 있으니.
정말 가끔 할머니가 된 심청이가 일가를 이끌고 코아케를 방문할 때―귀신같이 알아차렸다―빼고는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에이다도 자기가 직접 여기에 와야 했다.
문이 열리고, 7연구실의 전경이 드러났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정면의 거대한 화면엔 온갖 복잡한 계획도가 떠다니고 있었다.
“계획은 6할 이상 완성….”
“정확한 시기와 날짜를 알 수 없고, 또한 그 위력도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
“어쨌든 라―1의 라그랑주점에 설치하기 위해선 반드시 유인 우주선이….”
많은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이 한 연산기 화면 뒤에서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다.
“이번 발사가 성공하면 이제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그 와중,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거구의 사내가 팔짱을 끼고 있다, 간간이 몇 마디의 말을 거드는 것도 보였다.
에이다는 마침내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발견하고는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상민은 계획에 집중하다가 뒤에서 누가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놀랐다.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니, 약간의 방심이 침입자의 기습을 허락한 것이다.
악의는 없었고, 오로지 애정이 가득했기에 몸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요…!”
그 애정이 노골적이며 지나칠 정도였지만.
딱히 에이다가 키가 작지는 않았다.
다만 매달릴 상대방이 원체 거구의 남자라 에이다는 높이뛰기를 하는 것마냥 껑충 뛰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의 목에 달라붙는 것에 성공한 에이다는 상민의 체취를 맡는 것도 모자라 이제 아예 목덜미를 핥을 기세였다.
“크흠.”
상민은 헛기침을 하며 손바닥을 내저어 사방의 시선을 돌렸다.
사실 몇몇 연구원들에겐 익숙했던 광경이었는지, 일부 연구원들은 애초에 이곳을 보지도 않고 여전히 토론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연구원들만이 화상기로 보았던 기업인으로서의 도도한 에이다와 지금 저렇게 고양이처럼 매달린 에이다의 괴리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상민의 옆에 서 있던 나이 많은 연구원은 두 종류 모두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어머,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여명항천사 수석개발자 중 한 명이자 에이다의 옛 대학 수학 스승이 오랜만에 보는 제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우스는 본래 누굴 가르치는 걸,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보다 멍청한 애들을 가르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청해대학 교수 시절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지만 그런 그마저도 에이다의 천재적 능력은 예전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다’학점 뿌리기로 유명한 그마저도 에이다의 논문에는 매번 가를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주친 세월이 어느 정도 쌓였는지, 가우스는 그답지 않게 짓궂은 농담도 던졌다.
“옛날부터 참으로 불건전한 사제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 관계가 완전히 역전이 되었군요.”
상민은 예전에도, 지금도 청해대학에서 특정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자격 미달은 전혀 아니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과목―즉 특정 시기 역사학―을 담당했다.
물론 에이다도 그 수강생 중 하나였었다. 그 전부터 막장 집안에서 가출해 상민의 휘하에 들어와 있었긴 했지만.
“어머, 저 그렇게 늙어 보여요?”
“농입니다. 얼굴은 전혀 늙지 않았지만, 하는 행동은 이제 완전히 태수왕구렁이(아나콘다)가 되었으니 하는 말이지요.”
노교수와 여제자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좀 이따 이야기하지.”
“예.”
상민은 고갯짓을 했다.
가우스가 그의 지시에 따라 티 나지 않게 몸을 돌리며 계획서를 에이다의 눈길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연구원들을 재빨리 입단속시켰다.
하지만 에이다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이동하면서도, 가우스가 치우려 했던 계획서의 제목을 재빨리 파악했다.
‘태양 방패…?’
둘은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에이다는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그의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있었다.
오늘은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상민은 몇 번 그녀의 팔짱을 풀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사실 평상시에도 이렇게 물러터지게 반응해서 지금 이 사달이 난 것이긴 했다. 에이다는 아이샤나 루크레치아보다도 영악하며 색기가 넘치는 여자였고, 그를 가지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행동들도 하곤 했었다.
그나마 이제 딸을 가지고 나이를 먹으며 어릴 적처럼 자해 협박은 안 하니 망정이지.
그래도 에이다는 그의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주었다. 정보통신시대를 여는 최고의 기수였기도 했으니 그저 기특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저녁 함께 먹자고? 다 같이?”
“네.”
“…그러자.”
하지만 상민은 이제 그녀에게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연인의 감정변화에 민감한 에이다가 이를 느끼지 못할 리도 없었다.
그녀는 가끔 밤에 눈물을 흘리곤 했지만, 상민의 그런 거리를 두는 행동이 모든 이들, 모든 인류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꾹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둘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람회 발표 잘 봤다. 여론도 좋은 모양이구나. 축하한다.”
“고마워요.”
에이다가 어울리지 않게 겸연쩍어했다.
세간에는 혁신과 발명의 상징이 되어 있는 그녀다.
하지만, 애초에 에이다사는 상민이 그녀에게 막대한 자금을 불어넣어 투자한 회사였기도 했다.
심지어 상민은 손전화 혁신의 방향성을 직접 제시한 사람이었기도 했다. 단순하고 투박했던 휴대용 전화기가 이제는 온갖 일을 할 수 있는 복합도구로 진화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에이다가 그의 전망을 의심 없이 수용했던 덕분이었다.
다만 본인은 에이다의 생각을 극구 부정했다.
― 그것조차도 내 고유한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너와 같은 천재들의 혁신으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이었을 거야. 난 그저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었을 뿐이고.
“발사 보고 갈 거니?”
“네. 그러려고 왔죠.”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마냥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에이다는 이번에야말로 둘째를 낳길 희망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상민은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았다.
에이다가 원하는 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콘스탄티나 콤니니가 아니었다. 그녀보다 훨씬 더 욕구에 충실했고, 소유욕도 강했다.
다만 상민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그의 계획 때문에 앞으로 그녀와 친구, 혹은 사제처럼 지내길 원했다. 밀접한 관계에서의 이별은 더 큰 상실감만 초래할 것이니까.
에이다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악몽이 깊어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불안감도 커졌다.
불안감은 두 종류였다. 누군가 그를 집요하게 따라붙는 듯한 작은 불안감도 불안감이었지만, 악의는 없었기에 지금 당장 그가 신경 쓰는 바는 아니었다.
다만 다른 불안감이 다가왔다.
드디어 때는 가까워졌다는.
허나 이런 감정, 이런 느낌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었다. 가까울수록 공유하지 못했다.
상민은 그렇게 감정을 눌러 담으며, 평온한 일상을 연기했다.
[작가의 말]
오하이오급 : 제럴드 R 포드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