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화 (외전) 범려철도여행
두 소녀는 한동안 여러 가지 신변잡기를 재미있게 떠들었다.
기내식이 나오고 조금 들뜬 마음도 진정될 무렵, 예진은 신문과 잡지를 펼쳤다.
한창때 소녀들이 주로 읽는 부류의 잡지들과는 영 달랐다. 저기 앞에 있는 사업가들이나 읽을법한 잡지들이었다.
“넌 여기까지 와서 공부야?”
“응? 아니, 그냥 재미있어서 읽는 건데.”
“어련하시겠어… 그 정도까지 해야 청해대 가는구나.”
지수가 혀를 찼다. 그리고 앞의 화면을 조작해 최근 영화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와 여기 최신 영화나 영상극 거의 다 있네?”
“뭐 있는데?”
예진은 다소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지수는 눈치채지 못했다.
“여왕이여 천수를 누리소서도 있어.”
지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가 말한 영화는, 앙주 1대 여왕, 잔 다르크의 일생을 담은 영화였다.
사실 잔다르크에 대한 영화는 꽤 많았다. 영화사에서도 익숙한 주제였다. 지금의 이 영화가 나오기 전에도 몇 번 연극이나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규모가 크고 영화는 없었다.
작정하고 엄청난 돈을 들여 세세한 고증을 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찍은 장소도 실제로 프랑스와 앙주, 중려의 현장을 오고 갔었으니.
프랑스인과 가톨릭계, 심지어 선주인들 몇몇이 흑역사를 들추는 것에 반대를 했지만, 영화제작사는 앙주 여왕 전하의 정확한 고증을 위해서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사실 영화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그런 소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실존하는 현 앙주 왕가가 문제였다. 어쩌면 그들의 존경해 마지않는 여왕을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간섭은 없었다. 다만 배우의 선택에는 조금의 ‘조언’을 했다는 말도 있었다. 영화사야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니.
그렇게 노력을 한 영화가 걸작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겐 앙주 여왕의 굴곡진 삶이 참 재미있었다. 당대 유럽의 막장 종교상황과 더불어 한창 성장하는 고려의 북중려 팽창 야욕, 아즈텍 정벌과 정북 행성, 고려 정교회 형성 등이 모두 담겨 있는 격동의 시대였으니.
동시에 일반적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잔을 만난 이후 망나니 황실의 후손이 개과천선하여 그녀를 평생 따라다니며 헌신한 이야기는 많은 연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더군다나 출연진들도 쟁쟁했다.
김도빈과 다영 드 비뇰이라는, 효평의 푸야 언덕 영화거리에서 최고로 꼽히는 미남미녀 배우들이 혼신의 열연을 펼친 덕에 영화는 무려 11주간이나 매표소 매출 1위를 지켰다. 지금은 극장에서 내려갔지만, 이미 역대 매표소매출 3위(물가상승률 고려)를 갈아치우기도 했다.
“이거 봐. 엄청나다니까.”
전려항공은 비행기 안에서 무료 공유연결망을 제공했다. 속도는 느리지만 검색은 되었다. 손전화도 이륙 후에는 쓸 수 있었다.
지수가 손전화 화면을 예진에게 들이밀었다. 한 영화평론가의 공개일기장이었다.
[역대 제국 영화 매표소 매출 순위]
1. 쿠쿨칸의 강림 – 109.2억 제국원
2. 삼별초 – 48.8억 제국원
3. 여왕이여 천수를 누리소서 – 29.9억 제국원
4. 반지의 제왕 – 27.2억 제국원
5. 우주전쟁(검왕의 귀환) ― 25.5억 제국원
6. 백악기공원(1편) ― 21.1억 제국원
7. 신비한 도술과 마법학교(3편) ― 20.8억 제국원
8. 누산타라의 해적(젊음의 샘을 찾아서) 19.6억 제국원
9. 창공의 붉은 공주 – 17.9억 제국원
10. 고려대장, 불가능한 임무 – 17.2억 제국원
4, 5위로 떨어진 ‘반지의 제왕’이나 ‘우주전쟁’ 등의 인기도 가히 엄청났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이번 영화의 위력을 익히 알 수 있었다.
사실 고려 영화사상 어떠한 영화도 1위와 2위의 기록은 넘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1위 ‘쿠쿨칸의 강림’은 실로 압도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종교적으로 상징성이 대단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을 것이다. 개봉 당시 쿠쿨칸교도들이 수십 번 줄지어 단체 관람을 했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했다.
제국교도들도 그랬다. 심지어 일부지만 중동―특히 이라트와 아련―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잔혹하지만 세세한 고증, 권선징악으로 대변되는 익숙한 이야기 흐름, 가면을 쓴 초대 청해 통령―태조로 추정되는―역을 맡은 배우의 압도적인 열연까지.
보다가 혼절한 신도들도 있었으니 성공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금자탑은 앞으로 깨질 것 같지가 않았다. 물가상승률과, 가정용 영화상영장치의 등장으로 갈수록 떨어지는 영화관 이용률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2위를 기록한 ‘삼별초’ 또한 제국인들에게 너무 친숙하고 중요한 주제이다보니 흥행을 하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물론 고증에 대한 이야기는 좀 말이 많았다. 삼별초가 그 막대한 거리를 어떻게 갔는지에 대한 서사가 사실상 ‘창작’되었기에 그랬다.
다만 요즘은 반대로 새롭게 발견되는 유물들이 오히려 삼별초의 항해를 뒷받침해주어 영화 자체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현 사학계는 삼별초 예상 항로를 삼별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로 짐작했다. 방사능 동위원소상 영화의 기록이 오히려 고증에 맞게 되었던 건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번 영화는 그만큼 걸작이었다. 안 볼 이유가 없었다.
“난 봤는데 또 보려고. 너도 보자.”
“…….”
하지만 지수의 그러한 권유에도 예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심기가 꽤 불편한 모양이었다.
지수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넌 이런 거 안 좋아해?”
“내 취향은 아니야.”
사실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도리어 예진의 취향과 딱 들어맞는 영화였다. 역사적 사실과 연애적 요소. 그녀가 싫어하기가 힘든 주제였다.
다만 예진은 왜인지 모르겠으나 그 영화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려고 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그래 맘대로 해. 사실 이 재미있는 영화를 이 좁은 비행기 화면에서 보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집에서 제대로 보든가 해.”
하지만 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좌석 화면을 조작해 영화를 틀었다.
그리고는 항공사에서 준 소리띠를 썼다.
예진은 앙주 출신의 매력적이고 풍만한 배우가 프랑스 어느 한적한 농촌에서 신의 계시를 경건하게 받는 장면이 나오자 배우의 가슴에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억지로 잡지를 읽어내렸다.
그러다 탁 잡지를 덮고, 간이 상을 위로 접었다.
‘아 안 읽혀. 잘래.’
* * *
아홉 시간의 여정이 끝나고, 비행기가 마침내 서한주에 착륙했다.
한름국제공항은 그동안 제국―예맥한 노선의 중간 기착지로 번성했었다. 지구는 둥글었으니, 북려로 가는 항공기들은 지도상으로 보이는 하와이보다는 서한주가 더 경로상 적합했다. 따라서 착륙하는 비행기들이 굉장히 많았다.
다만 여객기 항속거리의 증가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직항이 가능하게 되자 예전만큼의 위세는 못 누리게 되었다.
그래도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는데 여전히 화물기가 굉장히 많이 뜨고 내렸고, 범려철도를 타기 위한 승객들도 꾸준히 많아졌으니 한름의 경제는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던 것이다.
소녀들은 시차적응 겸 딱 1박 2일 동안 도시를 구경했다. 여긴 먹거리가 꽤 유명했다. 추운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과 기타 여러 가지 원주민 음식들도 있었다. 개썰매를 타고 싶기도 했는데, 5월이라 안된다는 건 좀 아쉽기도 했다. 물론 겨울에 여길 다시 올 생각은 없었다.
1박 2일의 관광이 끝난 이후 그녀들은 바로 한름역으로 갔다.
잠시 기다리니, 정거장에는 그녀들이 탈 기차가 들어왔다.
황가3색 즉, 금색과 적색, 자색 공존하는 아름다운 2층 기차였다. 황실문양이 정말 예뻤다. 예진은 저걸 볼 때마다 특유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탑승권을 보여주세요.”
“여기요.”
기차 안으로 들어가니 단정하고 깔끔한 실내가 나왔다.
범려철도여행의 승차권은 객관적으로 그리 값싸진 않았다. 다만 그 일정의 길이와 수준을 고려해 볼 때, 솔직히 이만큼 받아도 운영이 되나? 하는 수준의 최신식 객차였다.
여객 수송 위주의 황립철도는 좋은 수준의 운영과 다양한 노선, 그리고 그에 따른 만성적인 적자로 유명했다.
황실의 지원이 없다면 금방 망할 회사일지도 모른다. 황실이 워낙 엄청난 돈을 운용하고 수익을 얻어 철도와 무선연결망 등의 국가기반산업에 투자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요즘들어 범려철도 자체가 유행이 되어 나름대로 꽤 수익성도 개선했다지만 적자는 여전했을 것이다. 애초에 사람들이 많이 타는 노선은 국철과 고속철도 노선이 깔려 있었으며 사철은 화물위주의 노선을 택했다.
반면, 황철은 딱히 수익성을 추구하기보단 제국통합과 지방사람들에 대한 황실의 인기를 위해 운영되고 있었으니 이런 것들이 가능했다. 그런고로 서한주 한름시까지 올 여객열차는 황철밖에 없었다.
“와 침대칸 엄청 쩔어!”
지수가 방방 뛸 만큼 2층 2인 침대석은 굉장히 좋았다.
짐을 수납하고 아래층으로 가니, 찻간과 세신칸, 식당칸, 선술칸, 관람칸, 업무칸, 오락칸 등이 나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 열차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수 있게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진 23,000킬로미터의 거리를 운행하는 열차인 만큼 당연할지도 모른다. 범려종단용 열차는 주요 관광지에 가끔 몇십 분 멈추어 서거나 혹은 정비, 보급용 필수 기착지에 잠시 머무르는 것을 제외하곤 거의 멈춰서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20박 21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실로 대여정이 따로 없었다.
물론 한 열차를 20박 21일을 주구장창 계속 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구간별로 끊고는 중간중간에 며칠씩 관광지나 필수기착지인 대도시들에 머무르다 다음 차를 타곤 했다.
아무리 황철이 좋다고 해도 이십 일이나 열차 안에만 있으면 고행이 따로 없었고, 종단여행을 하면서 들리는 몇몇 도시들은 휙 지나치긴 너무 아쉽기도 했다.
첫 노선은 한름 – 오마코이였다. 3,200여킬로에 달하는 여정 동안 서한주와 북려의 자연환경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겨울에 오면 진짜 아름다운 설국을 구경할 수 있다지만, 가끔 폭설에 기차가 끊기기도 해서 썩 추천하진 않았다.
5월의 늦봄도 겨울만큼이나 아름다웠으니 괜찮았다.
“저기 봐 말코손바닥사슴이야!”
저 멀리 기찻길 방어벽 너머의 들판에 야생동물이 뛰어다니는 광경이 보였다. 다른 쪽에는 한선산맥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이 보였다. 이 한선산맥은 남쪽으로 내려가 태륭산맥과 만날 것이다.
올 만했다.
자연광경만으로 속이 뻥 뚫렸다. 누가 창문을 좀 열었는지 몰라도 객차 내에 들어오는 슁슁거리는 바람 소리도 좋았다.
광활한 대수림과 평야, 강과 호수,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보이는 산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한주의 국립공원들, 야생보호지역들은 때 묻지 않은 자연의 경관을 한껏 드러내었다.
그런 절경에 따사로운 늦봄의 햇살마저 어울리니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열차의 관람칸은 대단히 훌륭했다.
양 측의 벽과 천장의 많은 부분이 투명한 중합체 벽으로 된 관람칸은 열차를 탔음에도 완전히 대자연 속에 녹아든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름시에서 출발해 오마코이를 거쳐 북려 서해안의 북단 대도시, 스콰미시에 도착하면 이전까지와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내륙과 대자연의 아름다운 정취에 흠뻑 빠졌던 열차는 이제 본격적으로 대도시에 속하는 스콰미시와 치누크를 통과하는 것이다.
행정권으로는 서한주에 속하지만, 문화권으로는 미주에 가까운 스콰미시와 치누크는 둘 모두 인구수 백만(제국 기준)이 넘는 대도시였다. 한름시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물론 제국 내에선 스콰미시나 치누크보다 더 큰 도시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그럼에도 이 동네 자체가 건실한 경제 위에 있었으니 도시의 광경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볼거리였다.
예진과 지수도 치누크에 내려 1박 2일 동안 도시를 구경했다. 이곳은 옛 치누크 대지진 때 이후로 지질학 및 지구과학 등의 극도로 발달된 곳이었으며, 과학박물관도 볼 만 했다.
그다음은 미주였다.
서안해양성기후에서 미주성 기후(혹은 지중해성 기후)로 바뀌자 날씨는 보다 건조하고 따뜻해졌다.
비는 적게 내리게 되지만 훨씬 더 햇살이 밝아지게 되었고 바람도 확실히 따뜻해졌다.
종단열차는 가끔은 미주 특유의 아름다운 해안선 옆을 따라 달리기도 했다.
제국 내에서 살기 좋기로는 손꼽히는 미주이니만큼, 저 멀리 해안선을 따라 별장들이 있는 것도 보였다.
“돈 많이 벌면 저런데 살 수 있겠지?”
저 멀리 모래사장에서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그 와중에, 일이 하나 터졌다.
당사자가 별일 아니랬으니 별일 아니겠지만, 여행자로서는 분명 큰일이었다.
지수의 손전화 화면 액정이 깨져버린 것이다. 새벽에 2층침대에서 자다가 떨어뜨렸다고 한다.
“괜찮아. 원래 구린 전화였어. 막 통화도 안 되고 그랬다고.”
“그래도 사진은 찍어야 하잖아?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랬는데.”
그리고 비상시에 연락할 수단이 없는 것도 불안하다. 뭔가 해결책을 내야 했다.
듣던 지수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예진이 오히려 흠칫했을 정도였다.
“그럼 우리 일정 좀만 멈추고 미원에서 적당히 장 볼까?”
― 작가의 말
―
오마코이 : 에드먼턴
스콰미시 : 벤쿠버
치누크 : 시애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