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화 악의 최후
23일, 고려는 장온계의 자살과 중화의 이상을 눈치챘다.
첩보를 입수한 고려군은 상덕에 떨어뜨린 폭탄을 끝으로 다음 폭격 일정을 무기한 연기했다.
“더 이상 주요 도시 핵폭격의 의미가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대부분의 관계자가 동의했다.
몇몇 강경주의자들은 처음에 한 약속대로 의창과 양양에도 떨어뜨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굳이 그렇게 핵투하 약속까지 엄격하게 지킬 필요는 없었다.
고려의 목적은 중화인 학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중화의 빠르고 확고한 패망이었다.
그리고 현 상황으로 보았을 때, 연합군은 자신들의 목적을 5할 이상 달성한 듯싶었다.
“그리고 나머지 4할 9푼은, 저자들 스스로 저지르고 있군.”
고려군 장교들도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자중지란이 일어나길 원했지만, 저 정도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중화군은 지금 자국민들에게 탄저를 쏘기 시작했다. 겨자와 온갖 종류의 독소무기도 썼다.
사람들은 무방비하게 죽어 나가고 있었다.
중화인들은 예방접종도 받지 않았으며 마땅한 치료제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속수무책으로 죽었다.
그들이 뽑은 총통에 의해 대학살을 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업이라 치부하며 방조하기에는 너무 참혹했다.
무언가 결단을 해야 했다.
물론 직접 여섯 발의 핵을 쏘며 수많은 사상자를 만든 당사자인 고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굉장히 이상해 보이긴 했다. 아무리 대피를 종용했다 하나,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은 건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전쟁 중인 나라로서 항복을 종용하며 공격을 하는 것과, 저렇게 마지막 발악의 일종으로 자국민 학살에 돌입한 나라의 경우는 엄연히 달랐다.
지금도 중화는 항복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사람마냥 주먹을 맞았을 뿐이었다.
핵 공격 이후 중화는 더 이상 전술적, 전략적으로 위험하지 않았다. 모든 방면에서의 저항이 잠잠해졌다. 연합군은 빠르게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의식을 잃은 권투 선수와 같았다.
지휘체계는 무너졌고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전쟁수행능력은 거세되었다. 이제 중화국민들은 가혹하고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으며 사방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목표는 이미 10할 이상 달성했다.
고려는 방어 자세를 풀고 의식을 잃은 상대방을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건 내부의 암 덩어리다. 미쳐서 세상과 조국을 이 지경까지 내몬 근본적인 원인. 그것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차라리 무한에 한 방을 제대로 먹이는 것이 이 상황을 빠르고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저놈은 무한 주변의 도시들도 스스로 폭격 중입니다. 저들이 가진 탄저나 다른 생물학 병기들도 전부 쓰는 모양입니다.
우리의 핵이 터지기 전에 아예 제 손으로 사람들을 죽이려는 걸 테지요.”
그 사실엔 모두가 동의했다.
“…대체 왜?”
하지만 모두가 그 동기에 의문을 표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저럴 수 있는지.
허나 연합국 사이에 있는 전(前) 중화군 상장이 묵묵히 있다 입을 열었다.
“순장이지요.”
“…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호원민은 고려군 공수부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구출인지 투항인지 구분하긴 어려웠지만 어쨌든 그는 직접 가족을 이끌고 전투지역을 넘어 고려군에 투항하는 데 성공했다.
어디로 가야 중화군의 이목을 피하면서 고려군을 만날 수 있는지 작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원민은 지금 포로 신분으로서, 또한 정보 공유자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평생 동안 고려의 감시하에 살아갈 것이 분명했지만 고려에 투항한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가 후회하고 있는 건, 자신이 괜히 고집을 부려 차비회의 마지막 수단을 배제시킨 것이었다. 그는 처형된 동료들과 지금 학살당하는 중화국민들에게 큰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다른 계책까지 염두에 두었더라면.
애초에 친위대의 마수가 낭화신에게 뻗어 있었으니 계획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그래도 혹여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며.
전범이지만 지금은 협력자로 변한 호원민의 말에, 다른 연합군 장성들이 귀를 귀울였다.
그들은 호원민을 썩 나쁘게 보지 않았다. 중화군의 수괴 중 하나였지만 한 손에 꼽히는 높은 계급의 장군이기도 하고 유능함은 익히 알려져 있었으니까.
또한 총통 암살 작전을 이끌었던 만큼 아예 끝까지 손 놓고 있진 않았었다. 전후의 재판에서도 이 사실은 충분히 고려될 터였다.
총통에게 직접 명령을 받는 가까운 장군이었던 만큼 그의 말은 굉장히 설득력 있었다.
“놈은 우생학을 종교처럼 신봉합니다. 우등하지 못한 한족이라면 자신의 손으로 끝내는 것을 선택할 겁니다. 새로운 시대의 패자(霸者)를 위해 직접 친절히 무덤 속까지 데려가겠지요.
병마용마냥 가득가득 친위대와 시민들을 가지고 갈 겁니다.”
호원민의 증언은 고려군의 의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도망치지 못한 시내의 사람들은?”
“사령관님, 이미 무한의 사람들도 대부분 도망쳤고, 붙잡힌 사람들은 처형당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구하는 겁니까? 황 요원님.”
구체적인 상황은 사령관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정보총국 요원이 한숨을 내뱉었다.
“저희도 정말 그 정보를 얻기 싫었습니다만….”
이왕 들어온 정보니까 이용하자는 마음가짐으로 그는 계속 입을 놀렸다.
“오히려 주변부의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무한의 지도부를 단번에 제거해야 합니다. 그 이후에는 독소 포탄을 쏴대는 친위대 포병들을 정밀 타격으로 무력화해야 이 모든 것이 끝날 겁니다.”
고심하던 이선 사령관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하지요. 습진균의 광증에 종지부를 찍어요. 아 참, 호 상장. 나머지 중화군 잔당 포섭은 가능하겠습니까? 총통이 없어도 항복은 받아야지요.”
호원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번 차비회 숙청 이후, 얼마 되지 않는 반총통파 장교들이 싹 쓸려나갔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굳이 반총통파가 아니더라도 마음을 바꾸어 먹은 사람은 생겨났을 것이다.
“…무한 방어사령관 양송락, 그자는 포섭하기 힘들 겁니다. 끝까지 저항할 인사라. 다만 몇 명 가능해 보이는 사람은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호원민은 중화군 내에 항복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 그리고 무한의 상세한 군사지도 및 핵심 시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고려의 첩보력이 엄청나다고 해도 파악하기 힘든 고급 정보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전향으로 고려는 습진균과 그 수뇌부들에 대한 내밀한 정보를 얻었다.
― 25일 새벽 3시에 무한을 공격한다.
애초에 무한엔 언제든지 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고 미리 못 박아 놓기도 했으니, 딱히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었다. 특히 고려는 습진균과 그 일파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오에 떨어뜨릴 필요는 없었다.
무한 타격을 위해 준비했던 40만 톤급 명왕소 폭탄, 용염 9호가 준비되었다.
여담으로 용염 9호 이상 가는 파괴력을 지닌 명왕소 폭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등급으로 가면, 폭탄의 종류 자체가 바뀌었다. 더 이상 명왕소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극비 중 극비였지만 효율성과 무게 모두에서 수소가 더 나은 성능을 자랑했다.
50만 톤, 100만 톤급 수소 폭탄은 아직 개발 중이었다.
* * *
3월 25일, 새벽 3시 무한.
이미 세계수도 무한과 그 주변은 죽음의 땅이 되고 있었다.
거리엔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친위포병대는 독소를 마구잡이로 쏘아대었다. 생화학 무기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도 지금 광기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용맹환의 부작용인지, 혹은 그저 인간 본연의 자기파괴적 욕망이 발현되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총통의 명을 근거로 친위대원들은 전우와 동료, 이웃을 학살했다.
현시점 친위대는 총통의 명령을 듣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가 남긴 마지막 명령을 따르고 있긴 했지만 총통은 아예 모든 연락과 관계를 두절하고 칩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당규삼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무한 외곽의 비밀 연구실에서 당규삼은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초살제(포스겐), 겨자, 청산(청화수소), 황우(트리코테신)을 비롯한 화학 무기.
탄저와 흑사병, 천연두, 홍역 그리고 지금 이름 붙인 조류독감과 같은 생물학 무기.
두 분야의 무기화에 지구상에서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재능을 뽐낸 중화 최고의 천재는 극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콜록, 콜록”
그는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무기들을 직접 살폈다.
독소 무기들을 연구하는 데 일평생을 바친 그였다. 지금 와서는 그 또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은 딱히 없었다.
다만 마지막 목적에 대한 집념만 남았을 뿐.
하지만 그때, 무한에 빛이 번쩍였다. 직경 몇백 미터에 달하는 준중성(플라즈마) 구가 태어났다.
규삼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이 아우성치며 연구소의 방공호용 지하실로 뛰어 들어갈 때, 오직 그만이 밖으로 나가 팔을 벌려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하늘을 찢어버릴 듯한 거대한 화염이 솟구치고 있었다.
고리빵처럼 생긴 구름이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도 보였다.
빛 하나 없던 새벽이었던 만큼, 오히려 그 광경은 낮의 폭발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장엄했다.
규삼은 한 번도 저 광경을 보지 못했었다. 말로만 핵의 파괴력에 대해 들었을 뿐이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자신이 발명한 그 어떠한 죽음보다도, 위대한 제국이 만들어낸 죽음이 훨씬 더 아름답고 위압적이었다.
“보아라! 파괴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더냐!”
― 으하하하하!
문명의 본질은 파괴이다.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파괴가 없다면 창조도 없었다. 당규삼은 몸을 떨며 환희했다.
‘나는 구태와 낡은 것을 죽였다. 중화제국을 좀먹는 구태는 습진균 이전의 옛 정치인들이었다. 세상을 좀먹는 구태는 양이들이었다. 그놈들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구태로서 도태되어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구나. 그래, 구태에겐 소각이 어울린다.’
복수마저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당규삼은 마지막에 와서야 그걸 깨달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제국은 새 시대를 열었고, 도태된 한족은 비로소 그에 걸맞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규삼은 세상의 올바른 이치에 대해 깨달았고, 그 운명을 넙죽 받아들였다.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거대한 열기가 그의 몸을 휩쓸었다. 이내 그는 타는 듯한 고통과 큰 충격을 느끼며 뒤로 처박혔다.
핵의 파괴력은 보기보다 작았다. 40만 톤이라는 어마어마한 화력을 지닌 용염 9호조차 대지를 증발시킬 수 있는 범위는 반지름 1.7km 내외였다. 건물에 유의미한 타격을 주고 생명체를 죽이는 범위는 대략적으로 반지름 4km의 원에 불과했다.
다만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폭발을 직관한 당규삼 또한 눈과 코, 입을 포함한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그는 몰랐지만 방사능도 피폭되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로 실려 가 의료진(연구원들)들에게 처치를 받았지만 약품 및 의료기술 미비, 혹은 연구진들의 고의적 수술 실패로 정확히 15시간 만에 사망했다.
당규삼의 시신은 딱히 아무도 수습해주지 않았다.
그는 시신에서 부패한 악취가 풍길 때까지 실험실의 차갑고 딱딱한 금속제 수술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가 그토록 많이 해부한 몽골과 소수민족, 비한족들처럼.
무한에 핵이 터지고 당규삼마저도 그렇게 죽자 폭발에서 생존한 연구원들과 친위대도 연구소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도 이제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 것이다.
연구원들과 친위대원들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길 원했다.
그들은 당규삼이 준비한 폭탄들을 스스로 부쉈다.
하마터면 세상에 보였을 뻔한 여러 생화학 무기들이 파괴되었다.
마지막으로 연구소 시설에 기름을 들이부은 그들은 여러 인체실험 자료들과 기타 등등의 증거를 파기하곤 떠났다.
그들은 옷을 갈아입고 피난하는 일반 중화 대중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마치 그들 자신도 피해자마냥 행세할 것이라 다짐하며.
* * *
용염 9호를 실은 벼락은 총통의 관저 근처에 떨어졌다. 목표지점까지 거리는 294미터였다.
고려는 핵을 쏘면서 점차 탄도신기전 실제 발사의 경험을 얻고 그에 따라 공산오차를 줄여나갔다.
짧은 시기에 회전의(자이로스코프)의 발전과 계산 개선도 이루어졌으니 호원민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폭격의 정확성을 조금이나마 올릴 수 있었다.
총통의 방공호는 핵을 가정하지 않았지만 위력적인 항공폭탄을 막기 위해 꽤 깊고 단단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엄청난 핵폭발의 위력에도 내부 자체는 온존했다.
다만 낙진을 막기 최적화된 설비는 아니었다.
새벽 세 시, 습진균은 자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소음과 진동에 잠에서 깼다. 땅이 무너질 듯 먼지가 떨어졌다. 보강된 강회마저도 깨지고 갈라져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다. 벽에 금이 갔고, 방공호 내의 전기가 모두 끊기며 어둠이 찾아왔다.
습진균은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느끼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불안한 눈빛의 가족과 수발하는 하인들, 그리고 몇 개의 촛불을 치켜든 친위대원들이 총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은?”
“토… 통신이 전부 두절되었습니다.”
단번에 모든 것들이 끊겼다. 이게 무슨 의민지, 모를 사람은 여기 없었다.
끝났다. 습진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황 파악의 시간,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문득 진균은 당규삼처럼 밖의 풍경을 직접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문을 열어라.”
무슨 문을 의미하는진 명백했다.
방문은 아니겠고 방공호의 두꺼운 강철 정문. 저걸 의미할 터였다.
“여보!”
그의 아내 조가령이 기겁했다. 그녀는 딸 시청을 뒤로 숨겼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각하…!”
“문을 열래도!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안 됩니다.”
모경록이 다가와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습진균을 진정시킨 뒤 다시 방 안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진균이 그의 팔을 쳐냈다. 마치 유치한 애들처럼, 둘은 그렇게 투닥거렸다.
마침내 화가 난 모경록이 그를 밀쳤다.
“다 죽자는 겁니까? 여기 가만있으면 살 수도 있는데!”
핵에 대한 보고에 따르면, 그 파괴력은 작은 화산에 준한다고 한다.
일차적 폭발은 견딘 것 같았지만, 열기와 유독기체, 낙진 등은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시간을 두고 열어야 했다. 지금 열자는 것은 모두 다 죽자는 의미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습진균의 목표 중 하나였다.
“이놈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리 목숨에 집착하느냐?”
모경록에게 밀쳐져 바닥에 쓰러진 습진균은 이내 비틀거리며 일어난 뒤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리곤 입구를 개폐하는 기관 손잡이를 쥐고는 문을 열려 시도했다.
모경록은 단번에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습진균을 쏘았다. 어깨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 탕
하지만 습진균의 의지는 대단했다. 그는 총을 맞았음에도 기어코 그 뻑뻑하고 무거운 손잡이를 내렸다. 주저앉듯 체중을 실어서.
한 번 총을 쏘았던 모경록도 두 번 쏘지는 못했다.
총성이 터지자 친위대원들끼리도 우왕좌왕 난리가 나며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총통에 대한 충심과, 일단 살고 보자는 감정이 맞부딪혔다.
― 끼이익
― 쿵
진작 도르래가 끊어져 있었는지, 그 단단하던 방폭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폭발의 영향으로 손상된 것이 분명해 다시 닫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 틈으로 뜨거운 열기가 훅 불어왔다. 동이 터 오를 순간이긴 했지만 밖은 새벽치곤 불길하게 밝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지옥이 펼쳐진 외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한이…!”
세계수도 무한의 중심부는 사라져 있었다.
위대한 한족 위인들의 동상도, 뭐도 이제 없었다. 분수대도, 정원도 사라졌다. 흔적조차 없었다.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 너머엔 불타는 도시가 보였다.
“만족하냐?”
모경록은 욕설을 내뱉으며 습진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부서진 방폭문 너머로 내던졌다. 그의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로 쫓겨났다.
친위대원들은 그제서야 일심동체로 박살 난 방폭문을 수리하려 들었다. 그 무거운 강철문을 조금씩 움직여 다시 닫으려 시도했다. 틈 사이로 여전히 검은 재와 같은 낙진이 들어왔기에 온갖 가재도구를 이용해 틈을 틀어막으려 했다.
내던져진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습진균은 피가 흘러나오는 어깨의 고통을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아무도 총통을 뒤따르는 이가 없었다.
다만 검은 비만이 세 사람을 감싸듯 내렸다.
세 사람은 목적지 없이 걸었다.
“조… 좀만 쉬어요.”
한참을 걷던 조가령이 그렇게 말했다. 습진균도 동의했다.
방공호에서 그리 멀리 온 것도 아니었다. 폭심지 반대 방향으로 조금 걸었을 뿐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저 산책로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숨이 찼다. 머리도 어지러웠고, 구토감도 밀려왔다. 식은땀이 났고 입에선 쇠 맛이 났다.
부부는 매끄러운 돌 뒤에 앉았다. 엄청난 고온으로 인해 유리화된 돌 표면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따끈따끈했다.
“엄마, 힘들어?”
자신의 손을 붙잡은 딸의 말에 가령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은 도저히 못 걸을 것 같으니, 딸보고 계속 걸으라고 했다.
습진균도 앉은 채로 손을 저었다. 총통도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았다. 그토록 강해 보이던 아버지도 그러니, 딸 또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가렴. 걸어가렴. 쭉.”
그는 명나라 공주풍 인형을 든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눈앞에 나타난 누군가에게 떠밀어 보냈다.
저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상관있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기엔 너무 피곤했다.
그 괴인은 시청에게 무언가를 먹이곤 방독면을 씌웠다. 성인용이었는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여웠다. 괴인은 딸을 성큼 집어 들어 어깨에 올렸다.
괴인은 금방 그들을 떠났다. 미련 없이 중화제국의 총통 부부를 남겨두고 떠났다.
습진균은 우두커니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하하하!
그리곤 갑자기 씰룩이며 웃었다.
왜, 대체 뭐가 웃긴지 자신도 잘 몰랐지만.
“시끄러워, 당신. 일평생 시끄럽기만 했다고.”
진균은 조가령의 한 섞인 마지막 말을 들으며 그렇게 검은 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