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화 징벌(2)
3월 1일 정오, 악서현에 탄도신기전이 착탄했다.
목표지점과 오차는 조금 있었다. 하지만 핵무기의 특성상 별 상관은 없었다.
눈이 멀 듯한 섬광 이후, 열기와 압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폭심지에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뚜렷하고 대칭적인 버섯구름이었다.
테우엘체 핵실험에서 관측된 폭발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대지는 끓어올랐고 뒤집어졌다. 화염이 대별산맥을 휩쓸었다.
낙진은 인근 도시까지 퍼져 나갔다.
폭발은 안경과 무한에서도 관측될 수 있었을 정도였다.
한 발의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가 입혀졌다.
악서현의 군수공장들은 원래 폭격을 대비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수차례의 항공폭격으로 너덜거리고 있는 상황 속에 핵폭탄이 떨어지자 완벽히 무력화되었다.
핵폭발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방공호는 중화에 아직 없었다.
악서현엔 중화군 나름대로의 대비책도 있었다.
세세한 일정도 미리 공지했으니 대비를 안 하는 게 바보 멍청이였다.
중화군도 고려가 공지한 그 일정에 맞추어 방공포대를 몇 개 증축하여 최대한 대공화망을 구성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적의 폭격기는 대체로 일반적인 기관포는 닿을 수 없는 고고도에서 폭격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고도라도 대구경 대공포는 닿을 수 있었다.
정확도나 연사력 같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가능성 자체는 있었단 것이다.
중화군은 대구경 대공포를 온갖 곳에서 끌어온 뒤 악서현 주변부에 배치시켰다. 고려의 호언장담을 어떻게든 파훼하고자.
하지만 악서현의 대공포병들에게 떨어진 무기는 폭격기에 탑재된 폭탄이 아니었다. 저 멀리 남동쪽에서 대공포병들이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섬광이 날아왔다.
그리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도무지 믿지 못할 파괴였다.
압도적이며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너무나 압도적이라, 일견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악서현 부근에서 폭발을 관측할 수 있었던 중화군 장교들은 망원경을 떨어뜨렸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폭심지 근처의 휘하 병력들이 증발되어가는 와중에도 무슨 지시나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징벌을 받아들여야 할 뿐이었다.
* * *
무한은 처음 이 사실을 부정했다.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단 한 번의 폭발로 그 지역이 통째로 증발했다는 소리를 대체 누가 믿겠는가. 몇몇 장군들은 이를 겁쟁이들의 보고라 생각했다.
다만 그들은 폭탄의 ‘과장된’ 위력보다는, 폭탄이 투발된 수단을 경계했다.
신기전 공격은 박용찬이 시중의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폭장량의 한계인지 항공 융단폭격처럼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었다. 정확성도 최근 들어서야 조금씩 나아졌지 초창기엔 썩 대단치 않았다.
하지만 그 한계도 이제 서서히 극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피 같은 사흘을 낭비했다.
3월 5일 12시.
구강에 폭탄이 떨어졌다.
이번 폭발의 위력은 악서현에서 관측된 것보다 더 강했다.
중화군은 몰랐지만, 고려는 1만 톤이 더 증가한 3만 톤급 폭탄을 사용했다.
점차 강력한 공격을 한다는 선전물의 내용마저도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대총통의 집무실이 얼어붙었다.
구강 근처엔 중화군 고위급 장교들과 친위대까지 파견되어 있었다. 물론 구강 내부에는 가지 않았지만, 구강을 볼 수 있는 강 건너편에 관측장비를 들고 위치해 있었다.
그래놓고 구강 해군기지엔 대피 명령을 내리진 않았던 것이 실로 중화스러웠다.
어쨌든 이번 보고는 왜곡의 여지가 없었다.
보고를 들은 습진균은 아무런 화를 내지 않았다.
빙독을 따로 먹지도 않았건만 그는 침착하고 평온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저런 것들을 계속 쏠 순 없을 겁니다. 저렇게 엄청난 무기를 대량생산할 수는…!”
보고하러 들어온 장군 중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허나 그 말에 호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균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보라, 그리고 조금만 더 수고해 주게.”
총통에게서 드물게 따뜻한 말을 들었건만, 오히려 장군들은 큰 불길함에 몸서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그날 습진균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악사를 불러 노래를 들었다.
가극단을 불러 재미있는 경극도 보았다.
손뼉을 치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밤에는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습시청은 그의 유일한 딸이었다. 그를 가장 순수하게 바라봐 주는 존재였기도 했다.
진균은 밤새도록 딸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딸이 이미 곯아떨어져 책을 읽어주는 게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계속 읽었다. 새벽이 지나 동이 터올 때까지 계속 그렇게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있었다.
* * *
중화는 항복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고려는 3월 9일의 공격을 준비했다.
공격이 예정된 형양은 아비규환이었다.
안경 악서현의 폭발은 솔직히 민간인들에겐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산맥에 있었던 것도 모자라, 지역에 군수공장들이 있었으니 민간인 출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구강은 달랐다.
이 장강 유역의 도시는 장강 내륙 수운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곳이었다.
특히 구강 남동쪽에 위치한 파양호(鄱陽湖)는 굉장히 유명한 터라, 나름대로 중화에서 한가락 했던 사람들이라면 그 부근으로 유람을 떠나본 적이 있을 터였다.
그런 유명한 도시가 하루아침에 박살 났다는 건 악서현 폭발보다 훨씬 더 피부에 와닿았다.
도시뿐만이 아니었다. 핵폭발은 장강과 파양호까지 영향을 미쳤다. 장강의 흐름마저도 일시지간 크게 뒤틀렸다. 파양호 또한 큰 충격을 받아 호수가 흘러넘쳤다.
중화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보를 통해서, 입을 통해서 모두에게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둘만 모여도 폭발을 논했고 근심했다.
패배가 이미 목전에 드리웠다는 충격 따윈 여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러려니 하며 넘기고 있었다.
국공내전도 겪어보았으니 지금의 처참한 환경이 나름대로 익숙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은 항상 일어났고, 변하지 않았다. 개인은 수긍하며 살 뿐이다.
허나 지금의 핵폭발은 달랐다.
그야말로 개인이 믿던, 모든 상식과 개념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이건 비유하자면, 미간에 드리워진 총구였다.
총구도 아니었다. 대포의 포구였다.
자신을 완벽히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위압감. 항거불능의 폭력.
특히나 형양 사람들은 충격이 컸다.
안 그래도 선전물을 받은 이후에 사형 날짜가 정해진 사형수마냥 전전긍긍하고 있던 시민들은 구강의 폭발 목격담이 생생하게 전달되자 큰 충격에 휩싸였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도시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중화군들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마저도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남아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방공포병도 허무하게 죽긴 싫었는지 무기와 포를 내버려 두고 산으로 도망갔다.
그 와중 친위대는 끔찍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도시의 주요 검문소에서 도망가는 동족들을 사살했다.
― 타타탕
“물러서지 마라! 한족의 긍지를 지켜라! 패배자로 살아갈 테냐! 그럴 거면 차라리 나에게 죽어라!”
허나 그들의 만행도 얼마 가지 못했다.
벼락같은 총소리와 함께, 친위대원들이 쓰러졌다.
형양 내의 친위대는 많지 않았다.
친위대는 말 그대로 대총통의 지근거리를 경호하는 부대라 대부분은 무한에 있었다.
전쟁 후반부에 습진균이 군부를 불신하며 키운 병력들도 전선에 나가 있었지, 도시에 처박혀 있지 않았다. 중화는 그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친위대도 이제 인적 손실이 너무 커서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았다.
형양에 있는 친위대는 기껏 연대급이었고, 연대급이 전부 도시 주 길목에 흩어져있었으니 한 방면에는 중대 하나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중대급이라도 중화제국 최고의 지원을 받는 병사들이었다.
‘저렇게 한 명이 달려든다고 우릴 이길 수 있을 리가…!’
놈은 추레한 옷을 입은 남자였다. 정체는 몰랐다. 탈영병일 수도 있을 것이고, 고려 첩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핏 본 기골은 사서에서나 나올 영웅들과 같아 보였다.
관운장이나 항우가 전생해도 저렇지는 못했을 터.
저자는 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람이 벌레를 짓밟는 데 살기를 품지 않듯, 저자도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면서도 딱히 큰 적대감이나 결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으깨고 짓밟았을 뿐이다.
놈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뒤 친위대 병사 하나를 발로 차 흉부를 함몰시키고 병진 기관단총을 들어 능숙한 사격으로 분대 하나를 갈아버렸다.
사격하다 탄이 떨어지면 다른 친위대를 죽여 총을 빼앗았다. 친위대의 장구류 속에 있던 막대 수류탄을 뽑아 던지기도 했다.
놈은 살육자였다.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받은 친위대원들조차 저렇게 싸우는 사람이 없었다.
놈은 불가사의한 신체적 능력을 이용해 엄폐물과 엄폐물 사이를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누볐다. 사수의 총구가 따라가기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신선이 저럴까,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 속에서 친위대원은 발작적으로 총알을 사방으로 뿌려대는, 그야말로 엊그제 모집한 신병이나 할 법한 추태를 부리고 있었다.
그들은 사냥당했다. 권총도, 기관단총도, 소총도, 기관총도 통하지 않았다. 수류탄도 통하지 않았다. 대전차폭탄이나 박격포도 통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죽음은 착실히 다가왔다.
구강의 핵폭발이 항거 불능한 파괴와 죽음이었다면, 눈앞의 수상한 자 또한 다른 의미로 그러했다.
막지 못하는 죽음. 상식과 이해를 넘어선 존재. 이유도, 동기도,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악마, 요괴.
― 탕
중대가 전부 바닥에 누운 뒤, 마지막으로 땅을 디디고 서 있던 친위대원은 기어코 그의 가슴팍을 향해 총을 발사할 수 있었다.
허나 이미 구부러진 그의 총구는 하늘로 들려 있었다.
탄환은 그의 가슴팍에 닿지도 못했다.
설령 닿았다 한들, 저자가 고꾸라졌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마지막 친위대원은 원통함에 소리쳤다.
“네… 네놈은 대체 뭐냐? 대체 왜 이런 짓을…!”
상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이야 그가 더 하고 싶었다. 너희들은 그럼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의미 없는 질문을 하는 대신, 상민은 친위대원의 머리를 붙잡고 돌렸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친위대원의 목이 완전히 돌아갔다.
검문소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친위대원들을 피해 숨었던 사람들이 슬며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도시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 말고도 추가적인 피난민들이 몰려왔다.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민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검문소를 향했을 뿐.
추모를 위해. 그는 마지막으로 죽인 친위대원의 물음에 스스로 답했다.
[우리가 과거의 굴레에 벗어나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얻는 꿈이 있소.]
어설피 내민 발화갑에 대한 후회를 담아 상민은 발걸음을 옮겼다.
* * *
3월 9일, 형양에 폭탄이 떨어졌다.
이 폭발은 구강에 떨어진 핵무기보다도 더욱 강렬했다. 아니 정확히 따지면, 구강과 악서현에 떨어진 폭탄 두 개를 합친 것만큼 강했다.
5만 톤의 위력을 자랑하는 폭탄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철근강회로 단단히 지은 건축물만이 버틸 수 있었지, 어설피 지은 대다수의 중화 건물들은 그야말로 완전히 파괴되어 불타거나 돌 더미만 남게 되었다.
인명피해는 추산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적을 수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수많은 선전물과 사전에 실시한 경고성 폭발 두 번으로,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그 와중 친위대가 자국민을 학살하는 만행이 있었지만, 폭발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내부 반란으로 추정되는 모종의 사건으로 전멸하는 상황이 일어났기에 더이상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다.
남아있었던 자들은 하루 세 번 총통관저 방면으로 절을 올리는 극성 중화당원이나 혹은 비극마저도 자신의 배를 불리는 시기라 생각하는 강도가 다였을 것이다.
콧방귀를 뀌며 고려의 경고를 무시했거나, 혹은 위험은 인지했지만 달아난 사람들의 가재도구를 챙겨 한몫 단단히 잡아보려고 했던 사람들.
허나 폭발이 터진 이후, 그런 자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설령 생존한 이들도 천천히, 누구보다도 고통스럽게 죽을 운명에 처했다.
형양에 폭탄이 떨어지자, 합비와 장사, 상덕의 사람들도 대피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선 친위대의 학살조차 저지당했다.
중화군 내부에서 진짜 반란이 터졌다. 모두가 압도적인 폭력에 죽을 운명에 처하자, 중화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진 사람들이 속출했다.
날아오는 유성(중화인들은 고려인들이 유성을 부린다 생각했다)은 거대한 폭력이었고, 친위대는 작은 폭력이었다.
총을 거꾸로 잡는 것이 생존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13일에 합비가, 17일에 장사가, 21일에 상덕이 버섯구름 속에서 무너졌다.
중화가 무너지고 있었다.
21일 저녁, 장온계 원수가 급히 소환되었다.
그가 받은 총통의 명령은 정확했다.
― 아무도 도시를 떠나게 하지 마라.
장온계는 그 명령을 듣고 당황했다.
분명 선전물에는 3월 9일 이후 무한에도 언제든지 핵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고려군의 속내는 약간 달랐지만, 중화인들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온계도 믿었다.
저 미친 나라는 진짜 공습을 계획대로 실행했다.
심지어 시간까지도 정각으로 지정했는지 오차가 5분 이내였다. 정말로 해괴한 나라가 따로 없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역겨울 정도의 정직함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하면 하는 나라다.
막을 수도 없다. 계획된 종말을 받아들이거나,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러니 무한은 언제든지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질 수 있는 운명인 것이었다.
하지만 습진균은 항복하지 않았다.
항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뭘 원하고 있는지 몰랐다. 처음엔.
그러다 장온계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각하께선 순장할 사람이 필요하신가? 수많은 사람을 순장시킨 진의 영정처럼 역사상 가장 많은 동반자가 필요하신가?’
온계는 항명하지 못했다.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도피를 선택했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권총을 뽑아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이 시점에 벌어진 무한 방어사령관의 자살은 충격적이었다.
지휘체계가 와해되었다.
후임자로 강성 중화당원인 양송락 원수가 전권을 받아 방어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혼란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 중화군의 틈을 노리고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핵폭발 이후에 오히려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휘하 제장들의 노고를 격려하던 대총통도 결국 그 광경에는 격노하고야 말았다.
격노는 참았던 만큼 더 컸다.
“배신자들!”
총통은 밖으로 달려나갔다.
한족의 세상이 열린다면, 긍지 높은 세계수도가 되어야 할 무한에서조차 사람들이 겁에 질려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네놈들에게 해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습진균의 치세에서 무한 시민들은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경사에서 천도한 뒤 근위세력을 길러야 했던 습진균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후대했다.
무한 시민들도 그걸 잘 알았다. 잘 알았기에 콧대까지 높아졌다. 다른 지역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받아 처먹고도 갈 때는 저리 치졸하게 도망가느냐? 어림도 없다!’
“막아! 막으란 말이다!”
― 타타탕
총통은 자신의 옆에서 황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위대원의 총을 빼앗아 사방에 갈겼다.
달아나는 저 무한 시민들에게 정확히 닿을 리가 만무했지만, 그 광적인 모습에 친위대원들마저 주춤주춤 뒷걸음질했다.
“이 열등한 민족들, 쓰레기 같은 민족들! 다 죽어버리라지!”
습진균은 비척대며 다시 그의 굴로 들어갔다. 그는 곧바로 모경록과 당규삼을 호출했다.
“생화학부대는?”
“지정된 곳에서 정위치하고 있습니다.”
“쏘라. 배신자들에게, 겁쟁이들에게 쏘라. 열등민들에게 쏘라. 이게 내가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가… 각하…!”
모경록조차 입이 떡 벌어지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당규삼이 모경록을 재촉했다.
“안 들리시오? 각하께서 마지막 명령을 내리셨소.”
총통은 그 명령을 끝으로 아예 방공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다른 명령은 없을 것이다. 총통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모경록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을 받은 친위대원들이 무전을 보냈다.
함녕과 황석, 악양, 수주 등의 무한 근교 방어선에는 생화학 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포들은 본래 남쪽, 고려군 방면으로 겨누어져 있었다. 고려군이 진군하는 곳에 균과 반생물, 독소를 퍼붓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하지만 그 포들은 이제 무한의 외곽을 조준했다.
둥글게, 무한을 감싸는 형태로 방렬했다.
자신들의 심장을, 중화의 심장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