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17화 (617/653)

617화 악의 몰락

차비회는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중화제국의 수장과 그 부하들이었다.

친위대나 선봉대, 공안과 비밀경찰들의 감시망을 모조리 회피해야 했다.

고난도의 작전임은 틀림없었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지금 작전에 참여한 자들은 의외로 신분이나 계급, 보직이 낮지 않았다. 거사 준비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다.

실로 적재적소의 요인들을 가려 뽑았던 것이다.

호원민은 낭화신이 가택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이 사람들을 전부 다 포섭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을 정도였다.

낭화신은 최후의 복수로서 거대한 계획을 준비한 것이다. 팽당한 원한이 실로 깊었던 모양이다.

그럴 법도 했다. 호원민은 자신과 옛 상관과의 관계가 썩 좋진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화신의 처지를 동정했을 정도였으니.

“자 그럼, 윤곽이 잡혔으니 각기 철저히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으세요.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날짜와 동선이 정해졌다. 인물과 도구도 준비되었다.

나머지는 오로지 하늘이 보우할 것이다.

* * *

그리고 하늘은 그들을 저버렸다.

거사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호원민도 긴장한 탓인지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했었다.

그렇게 늦은 밤 가까스로 눈을 붙이려 들 때, 충복이라 생각했던 그의 부관이 그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늦은 밤인데 아직 잠에 들지 못하시니, 고민이 많으십니까?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묘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예의를 차리는 어조가 아니었다. 호원민은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들어 보니, 부관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권총을 그에게 겨누고 있었다. 총구 앞에서 반응할 시간조차 없었다.

“죽어라, 배신자.”

― 탕

하지만 요란한 소리만 날 뿐, 호원민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가 오백 년 묵은 비늘용마냥 금강불괴라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금 격발된 총알은 탄두가 없는 공포탄이었기 때문일 터다.

혹시나 하여 사전에 당직병을 포섭해 부관의 권총에 들어있는 탄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 탕

원민 또한 곧바로 서랍을 열어 권총을 꺼내 사격했다.

그의 총탄은 공포탄이 아니었다. 부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실패했다.’

목숨은 구했지만 호원민은 실패를 직감했다.

부관은 이미 총통이나 친위대에 포섭되어 있었을 것이다. 충복이라 생각했을 만큼 자신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자가 배신했다면, 사실 믿을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은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보고되고 있었을 것이다. 차비회 또한 마찬가지일 터.

‘그 안에 끄나풀이 있었던가.’

첩자가 있었든 겁쟁이가 변절을 했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방도를 찾아야 했다.

군을 움직여 직접 거사를 행할 순 없었다. 그는 지금 박주(보저우)에 있었기에 무한까지 진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쿠데타를 꾀했다고 군 전체가 그의 뜻에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휘하의 장군들 중 중화주의자들은 거절하거나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다. 설령 그가 신묘한 도술을 부려 자신 휘하의 장군들을 포섭하거나 죽일 수 있어도 무한은 요새화된 도시였다.

그리고 그 길목으로 가는 곳엔 다른 군대들이 쫙 깔려 있었고.

다행히 총소리는 크게 퍼지지 않았다.

군사령부 지휘부는 적의 공습에 대비해 만들어진 방공호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총기 격발 소음 자체는 벽이 두꺼운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원민은 곧바로 관사의 가족에게 달려간 뒤, 사정도 설명하지 않고 대충 옷과 몇 가지 귀중품만 챙기고 관용 차량에 탑승했다. 운전병 대신 그가 직접 차를 몰았다.

최근 고려 공군이 내륙의 군사기지에도 맹폭을 가하는 덕분인지, 내륙에 있는 중화군의 진지 상태도 형편없었다. 야전 상황인 것마냥 경계 초소 대신 참호에 전부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간이 출입문만 간신히 있었다.

호원민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출입문을 통과한 뒤 빠르게 밟았다.

조잡한 관용 차량이 거친 운전에 헉헉거렸다. 가다 퍼지지 않길 기도하는 수밖에.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빨리 사령부를 떠나야 했다. 부관이 독단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친위대가 그를 잡으러 올 것이 분명했다.

* * *

하지만 다른 차비회 구성원들은 호원민처럼 운이나 준비성이 좋지 않았다.

“정말로 성공할 거라 믿었나? 멍청하군.”

모경록 친위대장은 첩보가 들어오자마자 번개같이 움직여 차비회를 대부분 잡아들이는 것에 성공했다.

“차비회라. 그래, 너희들도 형가처럼 실패했구나.”

모경록은 웃음을 터트렸다. 눈치채기 힘들지만 그 속에도 약간의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놈들의 준비는 분명 철저했다.

모경록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운이 따라주었다면 어쩌면 차비회의 계획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진균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허나 공교롭게도 이미 습진균과 그 수하들은 바뵈프의 죽음에 큰 경각심을 가진 상태였다.

내부로부터의 배신. 엔카베데의 배신.

습진균이 충격을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습진균은 군부도 믿지 못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광신적 중화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친위대뿐이었다. 사실 친위대조차 믿을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최후의 보루임은 틀림없었다.

최후의 보루는 습진균을 지켜냈다.

친위대는 애초에 낭화신에게서 감시를 거두고 있지 않았다. 사실 바뵈프가 죽기 이전에도 모경록은 낭화신이 언젠가 문제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를 살려둔 총통의 의도는 어쩌면 순수했을 수도 있겠지만, 모경록은 순수하지 않았다. 그저 저놈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

습진균과 친위대가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을 지켜보며 다시금 경각심을 되새겼을 때, 공교롭게도 낭화신의 태도와 행동이 조금 이상해졌다. 절묘한 시기였다.

결국 모경록이 첩보를 받고 수사력을 집중하자 감자 줄기마냥 주렁주렁 비밀이 파헤쳐졌다.

무려 총통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다.

당연히 규모가 컸고, 규모가 크면 필연적으로 비밀이 새 나가기 마련이다.

낭화신은 처참한 몰골로 고문실에 앉아 있었다.

이미 기력이 쇠한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지금도 시야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낭화신은 그래도 웃고 있었다. 그는 모경록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늙은 개 대신 새로 들여온 강아지였고 딱히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화신은 그 뒤에 있는 주인에게 말했다.

“보아라 진균아. 네 파멸이 가까워지고 있다. 너 또한 바뵈프처럼 어딘가에 거꾸로 매달릴 것이다.”

죽어가는 노인의 저주는 섬뜩했다.

“나가 봐라. 어서!”

습진균은 옛 친우를 바라보더니 주변을 물렸다.

굉장히 신경질적인 명령이었다. 모경록조차도 낭화신의 사슬을 점검한 뒤 서둘러 취조실을 떠나야 했다.

모두가 사라지자 마침내 진균의 본색이 드러났다.

습진균의 표정이 덜덜 떨렸다.

그토록 강인해 보이던 총통의 얼굴이 두려움과 증오에 무너졌다.

원래 빙독을 복용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해진다지만, 그것을 감안해 봐도 괴이하게 섬뜩했다.

“네놈은 실패했다. 실패했다고! 어째서 그렇게 웃는 것이냐!”

습진균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낭화신이 반문했다.

“내가 실패했다고?”

습진균을 처단하는 일? 그래, 그건 아쉽게도 실패했다.

허나 그게 그의 주목적이라니,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나.

“아니지. 아니야. 난 내 손으로 이 나라를 구해 보려고 한 거다. 내 잘못을 내 손으로 수습하려 해봤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났지만. 네 목은 내가 잘라내지 않아도 대신 해 줄 사람이 있지.

이놈아. 고려군이 네 목을 가지러 온단다. 너도 그걸 알고 있지? 준비는 되었느냐?”

낭화신은 비웃었다. 껄껄 웃었다.

“이…이…!”

진균의 얼굴이 더더욱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덜덜 떨었다.

그 두려움의 크기를 제대로 인지한 낭화신의 웃음소리도 더더욱 커졌다. 화신은 숫제 눈물까지 흘리며 박장대소했다.

위대한 철혈의 독재자? 대총통?

보라, 중화인이여, 그런 것은 모두 허상이노라.

남들 앞에선 무언가 묘수를 떠올릴 것 같은 그런 인상조차도 모조리 습진균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니.

전지전능해 보이는 대총통 또한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다.

중화제국의 패배가 이미 눈앞에 있었다. 중화군이 노력해도, 용맹하게 싸운다 하더라도 패배는 목전에 닥쳐왔다.

습진균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끈적한 진흙탕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가 먼저 불씨를 던진 이상, 그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진균도 현실을 알았다. 알았으니까 빙독을 먹어야 머리가 굴러갈 정도였던 것이다.

고려가 본격적으로 폭격을 실시하기 전에도 전황은 계속 한결같이 불리해졌다.

중화는 요령전역에서나 잠깐 승리를 맛보았지, 그 이후에는 오로지 패배 보고서만 올라오고 있었다. 전쟁의 방식을 바꾸고, 중원 내에서 항거하는 식으로 최대한 유리하게 싸워봐도 고려군은 조금 피곤해할 뿐 꿋꿋하게 공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고려는 그 방식을 바꾸었다. 짜증이 쌓일 대로 쌓였는지, 이젠 하늘을 통해 미친 듯이 화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적의 공격은 일방적이었다. 저들의 폭격기와 신기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떨어졌다. 무한의 방공망조차 적 폭격기를 제대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너무 빠르고 너무 고도가 높았다.

저들은 새로운 폭탄들도 만들어냈다. 이제 참호도 적 항폭에 쉽게 무력화되었다. 일반적 화기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효과적인 폭탄들은 부대 하나, 공장 하나를 아예 무력화시켰다. 객관적으로 볼 때, 저들은 전쟁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고 있었다. 중화군은 그저 신무기와 신전술을 시험해보는 허수아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았다.

패착이다.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조금 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다.

일단 고개를 숙인 뒤, 중화가 조금 더 성장한 이후에 승부를 봐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엔 대침체가 아니라 대공황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후임자, 그 후임자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는 늦었다. 그렇기에 진균은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전황 자체가 그에게 이런 무력감과 끔찍할 정도의 두려움을 선사해주는 것은 아닐 터였다.

진균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배신이었다.

한족이, 그를 끝까지 지지하고 응원해줘야 할 한족 장교들이 그를 배신했다. 유목―멘셰비키들이 아니라 한족 장교들이.

그건 정말로 아팠다. 치명적이었다. 진균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산산히 조각난 것과 같았다.

‘아, 바뵈프. 네놈도 이런 느낌이었나? 이렇게 원통한 느낌이었나?’

바뵈프, 멘셰비키 공산주의자.

습진균과 중화주의자들이 증오해 마지않아야 하는 인물.

허나 중소불가침조약 이후 습진균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아군으로 협력할 수 있는 바뵈프를 나름대로 존중했다.

존중을 넘어 동질감까지 느꼈다.

그래서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은근슬쩍 소련을 비난하는 빈도를 줄이고,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차이점을 역설하기도 했었다. 중국 공산당은 잡아들여야 할 대상이고, 소련은 손을 잡아야 할 대상으로 포장했다.

급격히 불리해지는 전쟁 와중에도, 소련을 어떻게 지원할 수는 없나,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들의 이념적 상성을 생각해보면 실로 공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추축국의 수장들은 공통의 적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바뵈프는 죽었다.

장인조차도 사위를 버렸고, 공산주의자들도 서기장을 버렸다.

그가 일군 모든 것이 부정당하고 처참하게 매달렸다.

그렇게 바뵈프의 최후에서 습진균 또한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싸늘한 종말이 피부에 느껴졌다. 희망이, 꿈이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영원히 중화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위대한 나라로 발돋움할 수 없게 되는가?’

화신은 두려움에 떠는 진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설령 실패하더라도 나는 그 반응을 기대했단다. 아우야.

그가 사특하게 속삭였다. 마치 진균의 자조 어린 질문을 예측이라도 한 듯했다.

“균아. 네가 말한 듯 한족이 그토록 위대한 민족이라면 너를 배신하지 않았겠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겠지.

하지만 보아라, 네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족은 패배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네가 말한 그 열등한 민족이 될 거란 말이다.”

진균은 반박하고 싶었다. 저 쓰레기 같은 사분의 일 옥저인의 주둥아리를 그냥 바늘로 꿰매고 쑤셔 틀어막고 싶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구속되어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저 늙은 개인데.

갑자기 화신은 아첨하는 투로 짐짓 어조를 바꾸었다.

그 순간만큼은 실로 조고와 양기, 이임보와 견줄 만했다. 표정도 달라졌다. 안타까운 듯, 처연한 표정이었다.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각하는 수많은 일들을 해오셨소. 이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걸 지켜봐서 아오. 각하는 정녕 이 나라를 반석에 세웠소.”

진균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과거를 떠올리는 늙은 개의 동공에 진균마저도 잠시 과거의 추억 속에 잠겨 들어갔다. 경사로 갓 올라와 승승장구하던 그때의 그 모습으로.

야심에 찬 청년들은 실로 많은 것을 꿈꾸고 이루기 위해 노력했었다.

“허나 각하의 노력만큼, 각하께서 이룬 결실만큼 한족이 따라주었소?”

― 그래 주었어야지요. 각하가 그만큼 했으면 다른 이들도 따라 주었어야지요.

― 맞다. 실로 그러하다. 내가 이 정도까지 해 주었다면, 너희들도 그만큼 해 주었어야 한다.

순간, 화신과 진균의 의견이 일치했다. 진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오. 보시오. 한족마저도 각하를 배신했소. 반란 계획을 세웠소.”

“그건 네놈이 꾸민 흉계가 아니더냐!”

“내가 없어도 이뤄질 일이었소. 많은 순수 한족 장교들이 동참했소. 이번 일에는 엮이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많은 이들이 총통에게 불만을 품고 있을 거요.”

그는 이번엔 간신에서 충신으로 돌아왔다.

충신처럼 말을 했다. 예전과 같이 진심으로 그를 위하는 척, 근심하는 척 어조를 바꾸었다.

“이번에 호원민을 잡지 못했지요? 모경록의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았소.

그놈도 어차피 언젠가 각하에게 비수를 꽃을 셈이었지.

도망쳤으니 어딘가에서 다시 때를 기다릴 것이오. 각하, 그놈을 꼭 잡아야 할 게요. 그건 이 사람의 진심 어린 충고일지니.”

“닥치지 못할까!”

진균이 주먹을 휘둘렀다. 번쩍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바닥을 나뒹군 화신이 입술을 씰룩였다. 어차피 죽어갈 마당에 고통과 폭력이 대수인가.

다만, 그는 입으로 비수를 꽂았다.

“오, 나의 위대한 총통이여, 저들이 그대의 영도를 받을 자격이 있었소? 그들이 각하의 기대에 부응했던 적이 있었소?”

“…….”

“그래, 한족을 위해 그렇게 노력한 각하의 행동이 의미가 있었소?”

이미 배신자의 수괴, 반역자들의 우두머리는 스스로의 행동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준 상태였다.

그 모순적인 상황 속에 놓인 진균이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일 터.

진균은 답답함에 화를 냈다. 격노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 쾅

진균이 책상을 밀쳤다. 위에 올려진 문서가 쏟아졌다. 거세게 밀쳐진 책상은 쓰러지며 화신의 다리를 직격했다. 부러졌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다리 주인에게는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 아하하하!

하지만 화신은 신음 대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웃음과 함께 화신의 표정이 바뀌었다.

화신은 솔직해졌다. 가감 없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응어리진 모든 것이 눈 녹듯 사라졌다.

거사는 실패했다. 하지만 복수엔 성공했다.

참담히 구겨진 진균의 얼굴에서 화신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황홀감에 젖었다.

“이제 네가 뭘 할 수 있느냐. 그렇게 날 노려보는 것 빼고 대체 뭘 할 수 있느냐. 화를 내고 세상을 원망하고, 남의 탓을 하는 것 말고 대체 뭘 할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처… 처참하게 죽여주겠다. 이 배신자, 쓰레기 같은 비한족!”

“그래 비한족! 그것이야말로 내가 자긍심을 느껴야 할 부분이지. 내가 부끄러운 건 나에게 이 중원인의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패배자들의 피가!”

― 으하하하!

“날 죽이거라! 처참하게 죽이거라! 허나 날 조각조각 잘라 돼지우리에, 변소에 던지는 것 말고 네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느냐!

진균아! 제8제국은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단 말이다!”

순간 진균은 아득해졌다.

노여움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 비어버린 자리에는 갑작스레 공황이 찾아왔다.

진균은 바닥에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약, 약은 어디 갔지?’

그는 엉금엉금 기어서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개처럼.

그가 입은 단정하고 위압적인 총통복이 먼지로 지저분해졌다.

“각하! 대체…!”

대총통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본 모경록과 친위대원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지금 진균은 그것조차 신경 쓰지도 못하고 기어갔다. 빙독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겨우 방에 들어온 진균은 서둘러 약통 안에 있는 투명한 구슬을 삼켰다.

안정이 찾아왔다.

안정 이후엔 분노가 찾아왔다.

“위대한 한족들이! 감히 너희들의 구세주를, 너희들의 대총통을!”

진균은 고함쳤다.

원통함에 가슴을 두드리고 꺼억꺼억 울음을 터트렸다.

발을 굴렀다. 물건을 집어 던졌다. 무언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도리어 더 쌓여갔다.

그래선 안 됐다.

중화인들이 그래선 안 됐다.

총통은 너희들에게 너무 실망했다.

이겼어야 했다.

우등한 민족은 이겼어야 했다.

적어도 몇 군데에선 이겼어야 했다.

또 졌다는 소리가 대체 몇 번째인가.

전투를 할 때마다 참담한 패배와 그럴듯한 패배, 둘 중 하나가 날아왔다.

내전을 종결하고 산업화를 하고, 제도를 정비하고 군대를 키웠는데.

이 정도까지 해 주었는데.

내가 이 정도까지 너희를 짊어지고 가 주었는데.

너희는 전쟁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이젠 나를 배신하는구나. 나를 죽이려 드는구나.

한족의 구세주를 죽이려 하는구나.

류용을 죽였듯, 이제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나를 희생시켜 너희들만 살려고 하는구나.

이젠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믿겠느냐.

어떻게 민족을 영광으로 이끌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총통은 그 방공호에서 오직 하나의 생각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탑에 고립되어 홀로 고고히 살아가던 자가 아랫동네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과 같았으니.

극도의 배신감 속에 총통이 마침내 읊조렸다.

“너희는 이겨 줄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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