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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14화 (614/653)

614화 형제들(2)

박진수는 곧 일병으로 진급했다.

신병티도 어느덧 많이 사라졌다. 진수도 이젠 제 몫을 해냈다. 그는 유탄 사수가 되었고, 소대장 지시로 한곳에 모여 있는 적을 섬멸하는 임무를 맡아서 이행했다.

보고 듣게 되는 것도 많아졌다. 전황도 자세힌 모르지만 대충은 알았다.

지지부진하긴 했지만 분명 연합군은 조금씩 조금씩 중화 전역에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처음 박진수가 속한 제1집단군은 해성작전의 시작을 알리며 봉명관을 돌파했다. 3야전군 12군단은 그 유명한 나폴레오네 군단장의 휘하였고, 누구보다 빠르게 전공을 세워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화북의 핵심 도시, 연경은 꽤 수월하게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중화의 주요 도시를 처음으로 점령한 연합군 수뇌부는 곧 무한도 점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땐 소비에트도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때이니, 라스푸티차도 없는 중화가 소비에트보다 더 먼저 무너질 것이라 예상하는 군사 전문가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고려는 봉명관을 넘으며 북쪽에서 중화를 찍어 들어갔고, 주나라와 협력해 바다에서 계속된 견제를 시작했다. 해성작전도 마치 빙성작전처럼 언제든지 상륙을 할 수 있다는 압박감을 준 것이었다. 비록 중화군은 태평양 해안요새선을 거의 완공했고, 그 단단한 해안요새선을 통해 상륙자들에게 큰 부담감을 주기도 했지만, 고려가 화력을 집중하면 그 방어선도 멀쩡하진 않을 터였다.

그 와중에 고려는 말레이반도의 전선에서 꼰바웅 왕조를 저지하고, 그들의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작전도 시작했다. 최종적으론 대월 지방에서 시작해 밑에서 위로도 중화를 공격해 나가자는 대전략을 꾸몄다.

이렇게 삼면에서 공세를 가하면, 중화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중화 땅 내부에서 싸우는 것은 중화가 점령한 조선 땅 요령에서 싸우는 것과 또 달랐다.

중화는 요령에선 대패했다. 요령전구는 개박살이 났고, 중화도 부담스러울 만큼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잃어버렸다.

허나, 습진균의 총력전 연설 이후 중화는 병력을 어떻게든 다시 모았다. 그 병력으로 습진균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의 전쟁을 치렀다.

전면전임에도 유격전의 양상이 나타났다. 중화군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며 싸웠고, 땅이나 나무, 자연에 의지하며 싸우기도 했다. 땅굴을 깊이 파고 들어가 숨어 기다리다 기습했고, 온갖 추잡한 짓들을 저지르면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전쟁은 더럽고 피곤해졌다.

물론 그중 제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독소였다.

“독소다!”

누군가 외치자 병사들이 서둘러 방독면을 착용했다. 진수도 빠릿빠릿하게 방독면을 썼다. 중화군 독소포탄이 낙하하자, 역한 느낌의 기체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물론 시각적으로 보이진 않으니 느낌에 불과하겠지만, 실제로 방독면이 없다면 목을 움켜쥐며 죽어갈 것이 자명했다.

몸에서 방독면을 한 치도 떨어뜨리지 말라는 정 참교의 말은 많은 신병들의 목숨을 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독소마저도 그 종류가 너무 많았다. 전통적 겨자독소와 질식독소, 구토작용제 등은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경험해 본 것들이다.

하지만 정말 힘든 것은 균을 비롯한 생물학 무기였다. 당장 정화통에 의지해 걸러냈다 하더라도, 의복이나 다른 곳, 심지어 땅에 남아 계속 고려군을 괴롭혔으니 질기고 까다로웠다.

놀랍게도 중화군은 자국 내 영토에도 생물학 무기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뒷감당은 오히려 점령한 측이 지게 되는 것이라 판단한 것인지, 그저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요령전구 때 포로를 통해 수용소를 탄저 공격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무기들이 떨어졌다. 그 방법도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해졌다.

“청야전술의 일종이겠지….”

중대장은 그렇게 읊조렸다.

다행히 고려군은 약독화 탄저 예방접종을 받았긴 했었다.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그걸 감수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추가된 병력들은 약독화 예방접종 대신 비세포 불활성화 예방접종을 받을 예정이었다.

허나 중화는 비단 탄저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다.

“개자식들이 이번엔 또 뭘 발명했을까.”

“모르지, 또 이유 없이 끙끙 앓는 애들이 나오겠구만.”

고려군은 정화통을 갈면서도 초조해했다. 중화군은 수많은 생물학 실험장을 운용하고 있었고, 그만큼 많은 생물학 무기를 연구 중이었다. 탄저에 비할 정도로 엄청난 균이나 반생물을 무기화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간문제일 듯싶었다.

그동안 고려군은 하북으로 진군해 들어가면서, 몇 가지 중화의 주요 시설들을 확보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하북 흔주(신저우) 근처의 대현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대현공공의학연구소였다.

진수는 그땐 고려에 있을 때라 잘 몰랐지만, 12군단이 직접 대현공공의학연구소를 점령한 병력이라 했다.

고려가 봉명관을 넘은 직후, 이 시설은 폐쇄되었다. 자료 또한 소실되었거나 이관되었을 것이다. 고려군이 그곳에 도착했을 땐, 대현공공의학연구소는 그저 텅 빈 건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고려군은 이 시설에서 많은 ‘인체실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흔적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들이 절대 아니었다.

― 그… 근처에 엄청난 수의 유골 매립지가 있습니다!

― 시설 지하에도 엄청난 수가 있습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단다. 중화가 사람을 대량학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말문이 막힐 정도로 비인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요령전구 식인사건과 탄저포로공격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리고 지금 대현공공의학연구소에서 자행된 인체실험의 규모는, 요령전구 식인사건과 탄저포로공격에 비해 훨씬 더 잔혹하고 압도적이었다.

식인사건이야 아주 아주 관대하게 생각한다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중화군은 같은 중화군 시신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잡아먹는 끔찍한 짓거리를 하긴 했지만, 배고픔이라는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이를 악물고 포장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인체실험은 그저 한없이, 정말 끔찍할 정도의 악의와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악의와 증오가 현대 과학의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미덕과 합치된 것 자체가 전례 없는 불쾌감을 자아냈다.

대현공공의학연구소의 실체를 본 고려군 병사들은 한동안 먹은 것을 게워내며 구역질을 했단다. 생화학 무기가 잔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 위험하니 화학대대가 오기 전까지 얼씬도 하지 마.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고려군 부대장도 학을 떼며 몸서리쳤다. 그는 아예 연구소를 닫아버렸다.

중화의 미친 과학자, 당규삼은 단번에 습진균과 바뵈프 정도로 유명해졌다. 인류 최악의 부도덕함을 가지고 있는 이 미친 과학자는 그야말로 현대 문명이 인류 자체에게 칼날을 돌리면 얼마나 위험한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 * *

“미쳤군요.”

그 현장에 있었다는 김강식 상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친놈들이야.”

그는 총을 앞에 겨누었다.

82기보사단은 이제 한단을 점령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꽤 규모가 있는 도시인 만큼 사람도 많았다.

고려군은 중화 민간인들에게 일단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습진균의 총력전 연설로 인민들 중 일부는 ‘인민적 자세로 항전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의 태도를 취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항상 그렇듯, 현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소수민족들도 있었다.

고려는 하북에 따로 나라를 쪼갤 예정이었다. 본래는 백지 계획이었지만,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통해 비교적 통합하기 쉬운 소비에트도 잘 잘라낼 수 있었던 만큼 자신감이 새로 붙기도 했다.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옛 연나라를 다시 부흥시킬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니 중화민간인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것은 그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북인들은 분명 많은 차별을 당했고, 습진균의 중화를 증오하니 그 증오의 시선이 고려에게까지 오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고려군이 하북인과 일반적 중화인, 남인들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북과 남쪽의 사투리가 다르다는 것은 오로지 중화 현지인들이나 알아차릴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고려인들에게는 똑같이 땍땍거리는 기분 나쁜 언어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한단인데….”

“한단이라서 더 그렇지. 이제 코앞이 황하고, 황하면 정말 이젠 중화주의자들이 많아질 거다. 이놈들 우리 쳐다보는 거 봐봐. 적대감만 가득하잖아.”

전차와 장갑차가 오가는 와중에도, 시내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중화 민간인들은 무너진 건물의 벽돌을 옮기면서도 고려군을 계속 노려보았다.

불길한 시선은 다가올 공격을 예지해주었던 걸까. 금방 또 전투가 일어났다.

“총통각하만세(总统阁下万岁)!”

시가지를 오가던 행인들이 중화어로 요란스레 외치며 옷을 벗고는 그 안에 숨겨진 자돌폭뢰를 가지고 달려들었다.

“쏴! 절대 다가오게 하지 마!”

고려군이 급하게 교전했다. 장갑차와 전차 상부에 탑재된 기관총좌에서 미친 듯이 총탄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보병들도 서둘러 밖에 나와 교전을 시작했다.

자돌폭뢰는 너무 흔하게 당한 적 병기였고, 현 12군단장 나폴레오네도 그 작전을 항상 유념하라 강조한 바가 있었기에 맥없이 당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런 교전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또 민간인 사상자가 생긴다. 중화군이 민간인을 고기방패로 삼아 그 사이에 숨어서 기습하면, 고려군은 주변의 민간인도 적대적 세력으로 분류하여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중화군은 고려군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전의를 다독였다. 그렇게 전의를 다독이면, 다시 다른 민간인들이 이런 공세를 벌였다. 악순환의 고리였다.

“익숙해지라고 신병.”

박진수는 자신의 애인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인의 시신 앞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무엇이 그리 원통한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여인의 손에는 아니나 다를까, 장전된 병진기관단총이 있었다. 턱없이 조잡하지만 근거리에서 대충 쏴도 수 명의 고려군을 죽일 수 있는 병기다. 놓치면 소대가 전멸할 수도 있었다.

박진수는 소총으로 그녀의 머리를 다시 한번 쏴 확인사살하고는 투덜거렸다.

“언제까지 신병으로 부를 겁니까?”

“그래, 일병.”

김강식이 씩 웃었다. 박진수는 장갑차에 돌아와 탄창에 삽탄을 시작했다. 아직도 그를 바라보며 죽어가는 중화 여인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와 조금 많이 닮았다.

진수는 손을 문질렀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왜 죽어가야 했는지, 왜 가슴팍에 병진기관단총을 품고 있었는지, 왜 자신은 그녀의 가슴과 머리를 쏴야 했는지, 왜 이 꼬라지가 나고 있는 건지.

수많은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 어떤 답도 구할 수 없었다.

“도시 내에는 또 저항조직이 있을 거다. 제남에 간 우리 애들도 혹독하게 당하고 있단다. 밤이라고 긴장을 늦추지 마라. 오히려 밤에 저놈들이 머리를 쳐들 거다.”

그날 저녁 대대장이 특별히 중대를 전부 돌며 지시사항을 전파했다.

“지금 뭘 고려할 상황이 아니야. 적이 식별되면 주저 없이 당겨. 아군 오사만 주의하고.”

예전 같았으면 약간이나마 얼굴을 찡그렸을 병사들도 지금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경계근무도 확실하게 서고. 여긴 벌레 소굴이다. 이놈들이 언제 슬금슬금 기어와 너에게 독이 든 침을 꽂을지 그 누구도 모른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중화식 도시 가옥은 농촌지대의 사합원과는 좀 달랐다. 중화도 효율성을 위해 도시지역에는 연립주택을 짓도록 권유했는데, 고려나 조선보다는 그 층수가 낮았다. 재료도 귀하고 비싼 철근 대신 대나무로 이루어진 죽근강회(죽근콘크리트) 공법이 주를 이었다.

한단은 이러한 저층 연립주택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석탄도시로 유명한 만큼, 노동자들이 많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의주마냥 한쪽이 바다에 막히고, 다른 쪽이 산맥에 막히진 않았다. 사방이 뚫려 있어 요새도시라고 부르긴 힘들었지만, 시가전 양상으로 들어가면 충분히 짜증 날 만한 구석이었다.

중화군도 이를 잘 알았다.

한단에 밤이 내려앉자, 어디선가 중화군들이 몰려왔다. 연립주택의 지하나 어딘가에서 숨어있었을 것이다. 혹은 도시 지하의 땅굴도 있을 수 있었다. 하수구나 기타 이상한 통로들도.

고려군도 이를 예상했기에 곧바로 대응했다. 사전에 철조망을 배치하고 수평지향성지뢰(클레이모어)를 매설했었다.

적군이 다가오자 조명탄이 쏘아졌고, 연립주택에 거치한 기관총에서 사격이 실시됐다. 사방에서 폭발음도 들렸다.

하지만 야음을 틈탄 적은 무시할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적의 공세가 격렬했다. 왜 우리 땅에 왔느냐는 외침마냥.

“이 새끼들은 벽도 제대로 못 만드나 봅니다!”

박진수가 그답지 않게 욕을 퍼부으며 몸을 날렸다. 적의 기관총 사격에 그 단단한 강회가 터지듯 사방으로 비산했다. 고려식 철근강회라면 어림없는 일이었지만, 앞에 고려 대신 중화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 안 좋은 쪽으로.

터진 벽의 속에서 썩어버린 대나무 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진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탄창을 갈았다.

촌사람인 진수도 대나무와 강회로 간단한 건축물들을 만드는 방법은 알았다. 다만 유기물질로 화학처리가 되지 않는 조잡하기 그지없는 대나무는 강회와 어울리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게다가 단층건물도 아닌 연립주택을 전부 이렇게 짓다니.

정말이지 건축방법도 딱 중화제8제국의 본질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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