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13화 (613/653)

613화 형제들

개천 532년. 여름.

태평양사령부 고려제1집단군 3야전군 12군단 82기계화보병사단.

격한 전투 이후, 실로 오랜만의 여유 시간이다.

박진수 상병은 집과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연필을 잡은 지도 벌써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쥐는 느낌이 어색할 정도였다.

전장에선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빠르게 흘렀다.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종이와 연필을 챙겨 탁자에 앉은 진수가 어떻게 서두를 쓸지 고민하다 겨우 첫 운을 떼었다.

― 너는 잘 지내고 있어?

보고 싶다. 진수는 그렇게 적었다.

당장 지금 그의 품속에 있는 제국교 성경에 그녀의 사진들이 꽂혀 있긴 있지만, 너무 자주 본 탓에 진작 너덜거렸다.

사진으로 채울 수 없는 간극도 있기 마련이다. 진수는 그녀의 환한 웃음을 지금 당장 앞에서 직접 볼 수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뭘 하고 있을까.

별다른 의문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신뢰했다.

나중에 함께하자는 미래를 약속했으니 그녀는 그를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 진수 또한 그녀를 위해 무사히 돌아갈 것이었다.

다만 진수는 그녀가 말한 꿈들 중에서 지금 그녀가 어떤 것을 이뤘고, 어떤 것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조잘거리는 말들이 듣고 싶었다. 심지어는 불평불만까지도.

진수는 그렇게 편지를 써 내려갔다. 이 주 전에 그녀의 편지가 도착했기에, 그 내용에 대한 답장이 주였다. 그녀의 생각과 푸념 등에 대한 맞장구, 또 여러 가지 추억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절반과 소통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근황과 속마음까지 편지에 전달해 그녀에게 보낼 순 없었다.

군사기밀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과연 이해가 가능한 부류일까? 지금 그가 처한 이 환경이.

[김강식 병장]

그는 자신의 막사 옆자리에 있는 관물대를 봤다.

텅 비어 있었다.

대신 관물대 위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곳엔 당사자가 챙기지 못한, 본국의 가족들에게 송환할 물품들이 들어 있었다.

― 야, 신병. 니 애인 되게 예쁘던데. 친구라도 소개시켜 주면 안 되냐.

“…….”

진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 나도 무사히 잘 지내고 있어.

그는 그래서 그렇게 힘겹게 적어 내렸다. 실제로는 정말 그렇지 않았음에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근심은 오롯이 그의 것이어야 했다. 나중에, 나중에 그녀와 실제로 대면하여 그녀의 무릎에 누워 털어놓을 수 있다면, 그때서야 마른 얼굴에 눈물이 터질 것이었다.

그래, 나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지 않아.

* * *

박진수 이병이 갓 자대배치를 받은 시절이었다.

“진짜로?”

석가장(스자좡) 인근의 논밭.

장갑차로 호젓한 농촌의 도로를 지나는 행렬 속, 소대의 고참들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병에게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안 올 수도 있었는데 제 발로 여길 기어들어 왔다고?”

“네.”

신병 대신, 그 옆에 앉아있던 일병 계급의 다른 병사 하나가 툭 던지듯 말을 했다.

“정대환 참교님도 2년 전엔 자원입대하셨잖습니까?”

“…그야 개전 초였으니까. 아니, 그때 안 그런 사람이 여기 있긴 하냐?”

개전 초, 펄펄 끓는 전쟁지지도 덕에 수많은 젊은이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소비에트는 이제 정리될 것 같았지만, 중화전역은 아직 지지부진했다.

자연스럽게 병사들에게도 피로감이 뒤따랐다. 순환배치가 이루어지면서 일선 병력들이 개성이나 한양, 평양 등에 휴가를 다녀오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충족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전쟁은 환상이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특히 참전하는 군인들에겐 더더욱.

냉담하고 차가운 현실이었다. 금속과 피 맛이 나는 우울한 환경이다. 고막이 상할 정도로 시끄러운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침묵이 찾아오면 그것만큼 불안한 경우도 없었다.

힘들고 힘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그저 하루하루 버티고 살아가는 데 목표를 두지 않으면, 먼 미래의 일을 꿈꿀 수조차 없었다.

“근데 얘는 그때 어려서 못 왔다잖아. 야, 너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을 거 아니야. 신문 기사 같은 걸로. 그런데도 왔다 이거지?”

“네. 그래도 오고 싶었습니다.”

신병이 직접 대답했다.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탄저 예방접종을 맞아가면서?”

“네.”

박진수 이병은 그저 네 네, 대답했다.

“거참 희한한 놈일세. 미친놈이라고 봐야 하나?”

덜컹거리는 장갑차 속에서 정 참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살아남아 봐.”

정 참교는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고참들은 무관심한 얼굴로 신병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휘관이나 지휘자가 아닌 이상에야 같은 병사끼리 뭘 하라고 할 순 없었다. 신병이건 뭐건 남의 일이다.

원래 이들이 이렇게 냉담하진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옛날부터 함께한 전우가 아니면 정을 주기가 힘들어진 것도 있었다.

누군가 죽고, 그 자리를 메우는 병사들도 언젠간 죽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상실은 누적될수록 고통스러웠다.

반면 신병으로선 어떻게든 고참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해야 했다.

전장은 얼빠진 놈들에게는 더 가혹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박진수도 이를 알았다.

그래도 부소대장인 정대환 참교는 부사관으로서 신병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대략 알려주었다. 훈련소 생활 동안 뼈저리게 교육받긴 했겠지만, 그래도 전장은 훈련소와는 또 달랐다.

“철모 벗지 마. 고개를 함부로 막 내밀지도 마. 소총이랑 방독면은 절대 몸에서 멀리 떨어뜨리지 마. 세신할 때도, 잠잘 때도 네 색시마냥 꼭 끌어안고 자란 말이야.”

갑자기 다른 상등병 하나가 말에 끼어들었다.

“야, 너 애인 있냐?”

정대환 참교가 그 말을 쳐냈다.

“조용히 해라, 김강식이. 그리고 너 신병, 첫 전투니까 오늘은 그냥 뒤에 있어라. 그리고 전투가 끝나도 긴장 풀지 마라. 적을 사살하면 되도록 시신 곁으로 가서 뒤적거릴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특별히 구체적인 지시였다. 박진수 이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왭니까?”

김강식 상병이 대신 대답해줬다.

“호기심이 많구만. 그거 안 좋은 습관이야. 호기심이 네 목을 긋는다고.”

김강식 상병이 손날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쉿, 도착했다.”

장갑차가 멈추었다. 병사들의 잡담도 멈췄다. 고려군은 소총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목표 작전지역이 근처였다.

부위 계급의 중대장이 말을 시작했다.

“모두 주목! 우리 중대의 목표는 저 멀리 있는 중화식 농촌이다. 농원 안의 사합원을 정리하여 주도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안에는 작은 박격포대와 간이 땅굴이 있단다. 기동에 각별히 조심하도록.”

“민간인은 없습니까?”

박진수 이병의 질문에, 중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고참들의 질문엔 대답했다.

“아군 화력지원은 있습니까?”

“이미 포병대가 한번 터트렸단다.”

쌍안경으로 봐도, 중화식 사합원의 모습은 썩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중대장은 그 효과에 대해선 회의적인 모양이었다.

“땅굴에 박혀 포격을 피하는 놈들이니 별 소용은 없었겠지만… 어쨌든 전투가 벌어지면 그놈들도 기어 나올 테니까. 통신은 언제든지 화력요청 준비하고.”

“예, 중대장님.”

병사들이 홍강 525를 들고 천천히 빗자루를 쓸듯 나아갔다. 사합원은 아직도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무너진 장원의 벽에 처참한 몰골의 중화군 시신들이 보였다.

널브러진 건물 잔해를 치우며 전진하는 고려군 사이,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르듯 중화군이 나타났다.

“적이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려군이 금방 총알을 퍼부었다. 신속한 대응에 중화군이 허우적거리며 쓰러졌다.

“좆같은 새끼들, 이럴 줄 알았다!”

하도 많이 당한 터에, 고려군 병사들은 울분을 터트리듯 시신에 확인사살을 가했다.

“젠장!”

그 와중 누군가 비명 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맞았나?”

“아 씨발… 옆구리가….”

근거리 전투다. 방편복은 근거리에서 발사되는 기관단총을 막을 수 없었다. 부상당한 고려군 병사가 헐떡거렸다.

중대장이 의무병에게 고갯짓했다.

“빨리 후송해. 작전은 속행한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공기 찢는 소리. 직접 들어본 사람만 아는 불길한 소리였다. 자신이 박격포 공격에 노출되었다는 소리였다.

“적 포탄 낙하!”

“산개하라!”

병사들이 후다닥 엄폐했다. 중화군 박격포반이 한차례 포탄을 쏟아붓자, 고려군도 꽤 많이 다쳤다.

다행인지 방편복이 이번에는 제 기능을 많이 해주었다. 부상자들이 생겨도 사망자는 없었다.

고려군도 박격포반의 위치를 파악했다. 농원 북쪽에 있는 작은 마구간이었다. 소총을 갈기자니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고, 유탄도 닿지 않았다.

“통신!”

“좌표 보냈습니다! 아군 포탄 낙하 예정!”

“고개 들지 마! 그냥 그 자리에 있어!”

중대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파공음이 들렸다. 150미리. 연합군 제식 곡사포의 탄두가 내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 콰아아앙

박격포와는 차원이 다른 화력이 요청한 지점에 착탄되었다. 마구간은 단번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 옆의 땅들도 요란하게 파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했다.

땅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이 아니면, 절대 저놈들을 박멸할 수 없다. 마치 바퀴벌레와도 같은 놈들은 정말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고려군은 땅굴 구멍 여럿을 확보했다. 일부는 총을 겨누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가지고 있는 백린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 쾅

안에서 폭음이 들렸다. 하지만 아직 잠잠했다.

아무 소용이 없는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박진수 이병은 앞서가는 다른 고참들의 얼굴에서 아까보다 더 큰 긴장감을 발견했다.

“아래에 놈들이 있다.”

정대환 참교가 그렇게 확신했다.

놀랍도록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꺽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확인되지 않았던 땅굴의 다른 입구에서 목을 움켜쥔 중화군이 나타났다.

하필 사태를 관망하는 박진수 이병의 앞에.

백린 파편이 몸에 박혔는지, 혹은 유독한 기체에 중독되어 저러는지 자세한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중화군의 얼굴 표정이 실로 고통스러워 보여, 박진수는 얼이 빠진 채로 손을 뻗었다. 무의식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건넨 것이다. 그는 문명인이었으니까.

“뭐 하는 거야, 이 자식아…!”

김강식 상병이 신병을 발로 차 옆으로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베레타 권총을 뽑아 중화군의 가슴과 머리에 정확히 한 발씩 쏘았다.

― 또르륵

중화군 특유의 막대 수류탄이 굴러왔다. 김강식 상병은 그것을 집어 들어 중화군 시체의 배 부분에 넣고 덮은 뒤 엎드렸다.

― 쾅

시신이 터지고 내장이 비산했다. 폭압의 위력 대부분을 시신이 흡수해 큰 부수적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너 시발,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여기서 허무하게 뒤지고 싶어?”

김강식 상병이 삿대질을 했다.

정대환 참교가 그를 진정시켰다.

“아직 안 끝났다.”

이런 땅굴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 농원에 빼곡히 있었다.

압도적 화력 열세에 처한 중화군은 이런 식으로 저항했다. 굉장히 피곤하고 피곤한 일이었다. 포탄도 땅을 완전히 뒤집어놓긴 힘들었다. 대지는 생각보다 튼튼했고, 그곳에 살아가는 바퀴벌레는 정말 끈질기게 생명력이 질겼다.

고려군도 이런 싸움에 적응하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전까지의 전면전과는 완전 다른 양상의 싸움이라 배는 힘들었다.

* * *

“그….”

“뭔데. 왜.”

“낮에 제 목숨 살려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

김강식 상병은 딱히 그 감사를 듣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다형 전투식량에 들어있는 수정과 분말을 찬물에 타 흔들어서는 후식으로 나온 달짝지근한 앙주식 벌꿀―과일청 크레페와 같이 먹고 마셨다.

“딱히 네놈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내 목숨을 구한 거지.”

김강식 상병이 크레페를 우물거리며 박진수를 노려보았다.

“네가 네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너만 죽는 게 아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그래. 우리가 다 죽어.”

그래도 달달한 것이 입에 들어오니 아주 약간 인상이 펴졌다. 강식이 말했다.

“나도 예전에 그랬어. 여기 있는 애들 다 그랬을 거야.”

모두가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을 거다. 한때는 모두가 정의감이 넘쳤다.

하지만 현실은 항상 사람을 바뀌게 만들었다. 바뀐 사람만이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기도 했다.

“충고하건대, 마음속 갈등은 좀 넣어 둬. 우린 전쟁 중이야. 갈등할 시간에 선택해야 산다. 인권? 하! 저 창양의 정치인들이나 인권쟁이들은 속 편한 환경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불대는 거에 불과해. 우린 사람 언저리들과 싸우니까.”

그는 고갯짓을 했다.

“너, 여기 보충병으로 왔잖냐. 그전에 있던 놈이 어떻게, 왜 뒤졌는지 알아?”

“모릅니다.”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진수는 대답을 기다렸다.

“중화군 시체에서 기념할 만한 전리품을 챙기려다가 얼간이폭탄에 당했다. 그래, 그 얼가니새(부비)처럼. 병신 같은 새끼….”

욕설에도 참 다양한 의미가 있었다. 진수는 강식의 욕설에 참으로 많은 감정이 있는 것을 느끼곤 입술을 깨물었다.

수정과를 담은 수통을 내려놓은 강식이 약간은 풀린 얼굴을 했다.

군인들은 감정을 담아두지 않았다. 정말 빠르게 풀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가 주어질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저 그날 하루에 충실하면 되었다. 강식은 얼빠진 신병을 미워하진 않았다. 모든 신병은 전부 다 저랬다.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이제 점점 보고 배울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띨빵했는지 몸서리를 치게 될 때도 있을 터.

“야, 신병.”

“예.”

강식은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애인 있냐?”

[작가의 말]

얼간이폭탄 : 부비트랩

소비에트와 중화, 그리고 기타 지도들은 아마 조금 더 뒤에 나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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