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12화 (612/653)

612화 러시아의 미래

모스크바에 가장 먼저 달려온 자들은 쿠투조프의 희망대로 남부의 고려군, 국제군과 자유군단이었다.

모스크바의 저항은 크게 없었다. 이미 고위 관료들은 나라를 떠났거나, 혹은 광대한 러시아 어딘가로 도망갔다.

사실 모스크바 수비군과 엔카베데 병력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세르게이 보그다노프에게 속아 서기장을 지켜야 할 순간에 움직이지 못했다. 서기장이 죽은 이후에는 아무리 충성심 강한 자들이라 해도 항전을 지속해야 할 의미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고려군은 봉기한 소련 인민들을 통제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을 떠맡았다. 바뵈프를 매단 소련 인민들은 어느새 크레믈을 약탈하고 심지어 불까지 지르고 있었다.

화재는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불타버린 곳이 조금 있었다. 몇몇 고려군 사람들이 오히려 안타까워 발을 굴렀다.

자기네 문화유산을 자기네들이 불태우는 거야 자유지만, 인류적으로 볼 땐 손실이 아니던가.

고려군은 폭도들을 죄질에 따라 체포하거나 혹은 타일러서 집에 보내야 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건장한 장정들은 대부분 전쟁터에 내보내진 상황. 폭도들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흑표전차가 떼를 지어 도시를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고려군 보급부대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좀 나누어주자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소련의 수도를 완전히 장악한 고려군은 마침내 크레믈 꼭대기에 걸려있는 소련기를 내렸다.

2년이 넘어가는 대전쟁이 마침내 절반이나마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 빨갱이들의 심장에 위대한 제국기를 내 손으로 걸다니.”

어찌 위대한 순간이 아닐 수 있겠는가.

고려군들은 소련의 낡은 깃발들을 한데 모아 장작불에 던졌다.

이처럼 모스크바 시가지에선 깃발과 군복, 항복한 소련군들의 나무 총들이 곳곳에서 함께 불타고 있었다.

“저건 어떻게 하지?”

흑표에 올라 붉은광장을 감시하던 고려군 병사 하나가 저 멀리 동상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시신들을 가리켰다.

소대의 다른 이들이 고개를 으쓱했다.

연락병이 무전기에 대고 무언가 말하더니, 상부의 지시를 전달했다.

“치우시란다.”

누구나 못된 악인을 교수형에 처하는 광경을 볼 때, 통쾌해하는 감정은 들 수 있었다. 하물며 대전쟁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한 장본인이면 더더욱.

하지만 그런 사람조차 시간이 지나 썩어가는 시신을 보는 악취미까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 밤이 되면 영하까지 떨어지긴 했지만, 낮에는 서서히 날씨가 풀리고 있었다. 저렇게 내버려 두면 결국은 부패할 것이다. 살이 썩어 들어가면 시신의 장기가 터져 나오는 끔찍한 광경도 보일 것이며, 위생상 좋지도 않았다.

“동상이 꽤 높던데. 대체 저기엔 어떻게 건 거야?”

고려군은 군용 사다리를 구하려다, 공병대가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냥 시신의 발목에 있는 밧줄을 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시신이 바닥에 떨어지면 난리가 나지 않을까? 머리가 박살 나고 뇌수가 튀고….”

물론 지금까지 헤쳐온 전장에선 너무나 흔하게 본 광경이다. 다른 동료가 뚱하게 대답했다.

“뭐 어때.”

그런 전장을 만든 당사자도 그런 꼴을 당해봐야지.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있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바뵈프가 살아 있었다면 재판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살렸겠지만, 저렇게 처참하게 죽은 이상에야 시신 따위에게 예우를 할 이유가 있던가.

하지만 그때 고려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련의 탄압에 피폐해진 몰골로 성 바실리 대성당에 돌아온 정교회 성직자들이었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병사 하나가 그들의 말을 번역해줬다.

“조심스럽게 내려달란다.”

“당신들을 핍박한 자들인데 왜 그러냐고 물어봐.”

통역병이 뜸 들이는 사이, 정교회 십자가를 목에 건 퀭해 보이는 늙은 신부가 직접 고려말로 담담히 대답했다.

“전 소비에트의 서기장이 아닌, 한낱 죄 많은 인간을 다시금 신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하려는 것뿐이지요.”

“…….”

바뵈프와 나머지 열두 명의 시신들은 곧 조심스럽게 동상에서 내려졌다.

정교회 성직자들이 그들의 시신을 직접 염습했다. 자유군단은 그 모습을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종교적 관례를 존중했다.

망자들로서는 그나마 고려군과 자유군단이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 다행스러울 것이다.

두 번째로 도착한 인물들은 마레샬―뒤파이주의자로, 동부 멘셰비키 봉기군이었다.

이들은 크레믈과 모스크바에 휘날리는 국제연합과 타수, 고려국기에 이를 꽉 깨물었지만, 별말 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했다.

사흘이 지나 마지막으로 유럽군과 미하일 트레챠코프의 볼셰비키군이 도착했다.

사실 이보다 더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지만, 모스크바의 상황을 확인한 쿠투조프가 항복했기에 유럽군도 전쟁을 멈추고 큰 저항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유럽군은 쿠투조프에게 나름대로 예우를 해 주었다. 비록 적장이지만 그래도 전쟁범죄는 저지른 흔적이 없었고 마지막엔 깔끔하게 항복한 것에 대한 답례였다. 바라나비치 학살과 같은 대부분의 전쟁범죄는 정치장교들에 의해 자행되었으니 전범재판에서도 종신형은 몰라도 사형까지는 구형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쿠투조프는 처참한 몰골로 죽은 장녀와 손자의 염습된 시신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다.

고려군과 유럽군, 국제군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붉은 광장에서는 세 군이 뒤섞인 축제가 열렸다.

― 펑

음악이 울려 퍼졌고, 간간이 폭죽이 터졌다. 여전히 대다수의 군인들은 그 폭죽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한껏 웃을 수 있었다.

동부전선이 승리로 끝난 것에 대한 축제였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지방의 전선에선 여전히 총격전이 일어났지만, 전쟁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동안 엄격했던 군율도 오늘만큼은 넉넉하게 풀렸다. 헌병들도 얼굴에 웃음기가 있었다. 모닥불 위에 얹힌 꼬챙이에 꿰여 빙글빙글 돌아가는 닭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면 그 누가 웃지 않을 수 있겠던가.

날씨도 이제 완연히 봄처럼 느껴졌다. 동계피복을 꼭꼭 껴입으면 덥기까지 했다.

바뵈프와 그 일당이 밤새 얼어 죽은 그날을 기점으로, 거짓말처럼 봄의 따뜻함이 모스크바에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세 부류의 저항군들 사이엔 아직도 봄의 훈풍보다는 겨울의 삭풍이 불었다.

그들은 축제가 열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채, 서로 눈치를 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물론 압도적인 전력의 연합군이 두 눈을 새파랗게 뜨고 있는 이상 무슨 헛짓거리를 시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겠지만, 그들끼리의 분위기는 전쟁 중인 것마냥 아직 날카로웠다.

* * *

그 예리한 분위기는 러시아의 분위기를 결판 짓는 볼쇼이 회담에서도 이어졌다.

해방제 블라디미르 1세에 의해 건축되었던 모스크바의 아름다운 볼쇼이 대극장은 용케 소련의 시절에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크레믈이 아직 화재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 연합군 수뇌부와 세 저항세력의 수뇌부가 볼쇼이 극장에 모였다.

고려 측엔 유럽사령부 총사령관 곽호연 원수와 휘하의 장군들, 외무상서 이산(태평양사령부 원수 이선의 아들이었다) 등이 자리했다.

프랑스에서도 탈레랑 외무장관이 직접 왔고, 도이치에서도 메테르니히가 참석했다.

볼셰비키 측의 미하일 트레챠코프와 반바뵈프 멘셰비키 측의 알렉산드르 피그너, 자유군단의 대표 스네자나 표도로브나 바그라티온이 참석했다.

그 와중에 일개 정교 한 명도 고려군과 자유군단 측의 관계자로 참석했다. 계급상으론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낮았지만, 쌍룡대훈장 수여 예정자라 그러한지 특정 세력의 특별한 이유나 요청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무도 별말을 하진 않았다.

“시작하지요.”

사람들이 이산의 입을 주목했다.

모든 일에는 다 순서와 몫이 있었다. 전쟁에도 공헌도가 있었고, 많은 피를 흘린 나라들과 많은 군대를 보낸 나라, 많은 지원을 해준 나라 등이 발언권이 강했다.

연합군은 전쟁 후반부에 들어서 저항군의 몫을 인정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부차적인 세력에 불과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연합군은 소련을 필연적으로 짓뭉갰을 터다.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될 겁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논할 것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해 나가느냐, 그것이지요. 기탄없이 말씀들 나누셨으면 합니다.”

전쟁을 일으킨 대가는 받아야 했다. 연합국(엄밀히 따지면 조약국)은 1차대전에도 러시아에서 루테니아를 분리하긴 했지만, 그것으로도 불충분했다.

세 번째 전쟁은 절대로 불가했다.

고려는 소비에트 연방을 조각조각 잘라낼 예정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감히 고개조차 빳빳하게 쳐들지 못하게.

괜히 고려의 정치가들에게 루스가 반역의 땅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루스인들은 좀 억울하겠지만, 세계정부를 지향하는 고려인들에겐 걸핏하면 어깃장을 놓는 반역의 땅이 맞았다.

그리고 고려인들은 이들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잉글랜드야 원체 작은 땅이다. 그들이 날뛰어봤자 이젠 뭘 못 했다. 실제로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금방 함락되지 않았던가.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오히려 예전의 베네치아가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 사이에도 엄중한 철책과 초소, 방어요새가 생겼으니 이전만큼 날로 먹을 순 없을 터다.

하지만 루스는 아직도 컸다.

면밀하게 탐사한 것은 아니지만 지하자원도 굉장히 많다는 소문이 들렸다. 여러모로 종합해 볼 때, 적어도 셋에서 다섯으로 잘라 내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리하여 자유군단이 고려의 품에 왔을 때 고려군은 뛸 듯이 기뻐했다. 세 저항군 중 가장 나약한 이들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후원해 강력하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했었다.

모스크바 경주가 종료된 지금, 자유군단은 숫자는 몰라도 전력상으론 오히려 다른 두 저항군보다 강했을 정도였다.

암묵적인 모스크바 경주의 승리자로서, 자유군단의 대표자 스네자나는 다른 저항군들의 탐탁잖은 눈길을 받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아스트라한과 서시베리아의 독립.”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두 저항군 대표가 벌떡 일어나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곽호연 원수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자 같은 그의 분위기에, 저항군 수뇌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곽호연 원수가 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스네자나에게 말을 했다.

예부터 북캅카스 땅의 미녀들은 세계사적으로 아주 유명했다던 말이 맞았다. 물론 그 사실도 사실이지만 딸뻘의 아가씨였기도 했고, 그녀의 아버지가 숭고한 희생을 한 터라 개인적인 호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알라니야로는 부족하오?”

“원수께선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북캅카스와 그 위에 살아갔는지 모르십니다. 시베리아의 땅도 마찬가집니다. 타타르 사람들,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 많은 민족들이 러시아 당국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의 동진에.”

그 말에 미하일 트레챠코프가 벌컥 성을 내었다.

“그것은 너무 먼 과거의 일이잖소. 거긴 이미 백 년 넘게 루스의 땅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께서 마치 민족주의자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이산이 껄껄 웃으며 공격받는 스네자나의 변호를 위해 끼어들었다.

유리할 땐 러시아 제국의 후신, 불리할 땐 러시아 제국과는 다른 국가. 소련은 그저 매번 저렇게 모순된 말만 잔뜩 늘어놓았다.

차라리 그런 면에선 중화제8제국이 훨씬 더 일관성 있을 것이다. 그 일관성이 너무 심해서 문제였지만.

자유군단이 이렇게 과감한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전에 미리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인즉, 고려가 시비르와 아스트라한의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카자흐와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트탄 등도 잘라냈는데 곧 소련에 병합되었지. 이번 기회에 더 많이 잘라야 한다.’

전통적인 루스의 땅은 어디인가?

그 계승 명분(Claim)은 누구에게 있는가?

소련이 정통성이 있는가, 류리크의 차리차가 존재하는 루테니아가 정통성이 있는가.

소련은 어디까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아니 전범 주제에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긴 하는가?

그들의 국민들은 어떻게 투표할 것인가.

이에 대해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회의는 하루로 끝나지 못했고, 나흘에 걸쳐 갑론을박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국제정치는 힘으로 귀결되었다. 약하거나 명분이 없는 자들은 결과를 받아들이든가 혹은 다시 고개를 들고 대적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사실상 후자를 절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이상, 판도는 오로지 국제연합의 뜻에 의해 결정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연합엔 오로지 하나의 의장국만이 존재했으며, 명분과 공헌이 압도적인 고려의 전후처리에는 다른 이사국들마저도 감히 그 뜻에 반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종합해 봅시다.”

이산이 큰 지도에 손을 뻗었다.

“일단, 소비에트 연방의 옛 영토 중, 일부는 피해국에게 전쟁 배상의 의미로 수여될 것입니다.”

모든 지도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갔다. 폴란드도 그랬고 다른 나라들도 그랬다.

그 이후에는 소련 땅을 피해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절차가 있었다.

이건 사실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실행해야 할 문제였다. 그것이 싫다면,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면 되었다. 피해자 보상은 최우선의 절차였다. 물론, 거주이전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핀란드는 카렐리야를 얻었다. 썩 좋은 땅은 아니지만, 스칸디나비아반도로 진입하는 길목을 확보한 것 자체가 국가 안보에 한없이 유리했다. 무르만스크 등의 해군기지도 귀중했고.

루테니아도 엄청나게 광대한 영역을 확보했다. 그들은 볼가강까지 다다랐고 보로네슈와 사라토프는 루테니아의 땅이 되었다. 전쟁 전과 비교하면 나라의 덩치가 거의 두 배 이상은 커진 것이다.

완전히 비옥한 흑토지대만 골라 먹었으니, 고려에 뒤이어 세계 제2위의 식량 생산국으로서의 입지는 완벽하게 확보한 것과도 같았다.

비로소 올가는 루테니아의 차리차라는 명칭의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폴란드는 영토를 얻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걸 바라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폴란드는 스타니스와프 2세가 죽은 이상 당장 왕정과 셰임을 뒤집자는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이라 영토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배상금으로 충분했다.

“국제연합의 의장으로서, 아국은 알라니야, 시비르, 아스트라한. 이 세 지역에서의 국가 설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승인합니다.”

고려는 이미 알라니야에 새 국가를 만들길 원했다.

이제 그것도 모자라 자유군단의 요청대로 시베리아 즉 시비르와 아스트라한에 새 나라를 탄생시킬 예정이었다.

국민투표가 실시될 예정이지만, 민심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투표 자체가 독립을 의미했다.

트레챠코프의 말대로 시비르와 아스트라한, 알라니야 등의 지역은 이미 러시아에게 정복된 지 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주민들에겐 어떻게든 루스 민족의 피가 흐르긴 했다. 당장 스네자나도 그걸 부인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역 차별은 존재했었다. 같은 러시아, 같은 소련이라도 유럽에 가까운 우랄 서쪽이 아시아에 가까운 동쪽을 얼마나 차별했는지, 차별받았던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절대 모를 것이다. 아스트라한같이 옛 타타르 땅으로 여겨졌던 곳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자유군단은 모스크바 자체엔 관심이 없었다. 모스크바 경주는 이 목적을 위한 공헌도 점수 쌓기에 불과했다. 그들은 오히려 이 사악한 악마의 도시와 될 수 있으면 떨어져 있길 원했다.

마침내 원하는 목적을 받아든 스네자나가 천장을 바라보며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혹시 귀하께선 제가 생각하는 그 바그라티온 가문에 속하십니까?”

메테르니히가 갑자기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그런 말을 했다.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 바그라티온 가문이라면, 서유럽의 많은 가문들조차도 빛이 바랠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이다. 현 사카르토벨로의 왕조이기도 했다.

이는 알라니야에 새롭게 들어설 나라가 입헌군주국일지 공화국일지 결정할 수 있는 사항도 되었다.

“맞아요.”

그녀의 아버지, 표트르 바그라티온 대령은 방계라도 바그라티온 가문이 맞았다.

메테르니히는 이 대답의 신빙성을 굳이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고 곧바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굉장히 의도적인 제스처였다.

메테르니히가 탈레랑을 흘깃 바라보더니 그녀에게 속삭였다. 스네자나의 옆에 있던 찬기가 인상을 구겼다. 저 젊은 백작이 유서 깊은 도이치 명문가 귀족이니만큼 더더욱 짜증이 났다.

“국가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군주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스네자나는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요, 그러진 않을 거예요. 저와 아버지는 우리 가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어난 게 아니니까.”

당혹한 메테르니히의 얼굴을 보던 탈레랑이 흡족하게 웃더니, 갑자기 찬기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메테르니히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가 컸다.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훈장을 받은 사내지 않소. 도이치 명문가의 귀족보다는, 그대 가슴팍에 달린 훈장이 더 값진 것을.”

“가… 감사합니다.”

찬기는 그 덕담에 감사함을 표하면서도 눈을 끔벅거렸다.

“어디 보자. 우리나라에 한번 오시오. 내 대통령께 주청하여 그대를 공화국 훈장(Ord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에 추천할 테니까.”

“저를 말입니까?”

“평화를 위해 노력한 분이잖소. 당연히 추천해야지.”

‘이 사람은 또 왜 이래?’

앞으로 창설될 유럽연합의 패권을 놓고 벌써부터 경쟁에 돌입한 프랑스와 도이치의 관계를 모르는 찬기로서는, 무려 한 나라의 외무장관이 자신에게 친한 척을 하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이치 대사 메테르니히는 혀를 차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스네자나에게 접근해 알라니야의 군주국화를 꾸미는 것 자체는 실패했지만, 그는 당장 큰 성과를 얻었다.

메테르니히는 서부 러시아를 독립시키자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서부 러시아는 백루테니아, 백러시아, 벨라루스, 벨로루시 등으로 불렸다. 여기 들어설 나라는 폴란드 동쪽의 완충국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게 한껏 당한 폴란드와 루테니아도 이에 찬성했다.

이 나라의 정식 국호는 폴로츠크 대공국으로 정해졌다.

올가 차리차의 입김이 있었다. 그녀는 옛 과거의 고문서에서 그들의 국호를 찾아내었다. 먼 공국들의 시대에 존재했던 나라를.

이 국호는 루스의 주도권이 모스크바가 아니라 키이우로 다시금 돌아가는 상황을 단적으로 상징했다.

폴로츠크 대공국의 군주는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되었다. 전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2세의 조카이자, 올가 차리차의 사위였다.

남은 문제는 두 공산주의 반군들의 나라였다. 그들은 국호부터 영토까지 다투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고려가 명확히 선을 그어줘야 했다.

“일단 국호에 소비에트나 러시아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정당한 루스니 러시아니 그런 표현은 자중하시지요.”

“그건….”

“뭐, 3차대전이라도 하실 거라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만약 그러하다면 다음 국가는 베네치아와 같은 운명을 걷게 되리란 걸,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리죠.”

이산의 딱딱한 말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논쟁이 얼추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미하일 트레챠코프와 볼셰비키 잔당은 노브고로드와 잉그리아에 둥지를 틀 예정이었다.

그들의 국호는 ‘노브고로드 인민공화국’으로 잠정 결정되었다.

여기서의 노브고로드는 니즈니노브고로드가 아니라 그보다 작지만 훨씬 오래된 고도시, 벨리키노브고로드를 의미했다.

반면 반바뵈프 멘셰비키 잔당은 블라디미르―카잔 인민공화국으로 잠정 결정되었다. 수도는 카잔이 될 것 같았지만, 국호와 명분은 옛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에서 기원했다.

문제는 모스크바를 둘 중 대체 어떤 국가가 소유하느냐였다. 자유군단은 모스크바 자체엔 관심이 없다는 걸 재확인한 이상, 두 인민공화국 중 하나에 이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고려와 타수는 의도적으로 이 문제를 완벽히 결정짓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몇 년간 군정을 실시할 동안 모스크바를 자유시의 지위로 만든 뒤, 그 이후에 상황을 봐 가며 결정하겠다고 문제를 연기했다.

물론 그 이후에 결정을 내릴지, 그저 방관할지는 또 몰랐다.

냉혹한 현실정치였다.

두 공산주의 국가가 하나로 합치지 못하게 갈등 요소를 남겨두는 것도 좋았다.

미하일 트레챠코프와 알렉산드르 피그너가 서로 이를 악물면서도 태연히 악수했다. 모스크바의 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작가의 말]

다음 주는 화요일이 아닌 수요일 연재로, 월/수/목/금 연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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