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화 모스크바 경주
개천 532년 봄.
모스크바 진군,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모스크바 경주’가 불을 붙었다.
연합군 유럽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와 루테니아 방면의 고려군 및 국제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핀란드 방면의 유럽군으로 이원화되어 진격했다.
유럽군은 스몰렌스크를 반쯤 점령해냈다. 고려군과 국제군은 하르키우와 차리친(스탈린그라드 점령 후, 도시의 이름을 원래대로 바꾸었다.) 너머 보로네슈와 사라토프를 점령했다.
그 사이 연합군의 병력은 또 한 번 크게 늘어났다.
도이치와 프랑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도 각기 징병해 유럽군의 규모가 크게 늘었지만, 가장 극적으로 늘어난 것은 역시나 또 고려군이었다.
개전 2년 차가 되자 고려는 또다시 대규모 징병을 완료해 훈련과 보급을 끝내고 유럽전선에 투입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번엔 빙성작전 개시 때 마냥 한 번에 투입한 것은 아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위해 병력을 꾸준히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 편성한 군대의 규모는 이전보다 더 많았다. 자그마치 육군 7개 집단군 규모였다.
고려군의 사단 편제는 대략 만이천 명에 달했고, 한 집단군에 대략 80사단 정도가 편성되었으니 거진 560개에 달하는 생생한 사단이 대소비에트, 대중화 전장에 투입된 것이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2차대전 이후 고려가 징병한 ‘육군’ 병력은 천백만에 달했다.
물론 이는 오류가 많았다.
해군이나 공군 등의 다른 군종도 있었고 육군도 그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면서 계속 징병하고 교체 투입했으니, 그 수는 진작 천만 단위를 훌쩍 넘은 지 오래였다.
고려는 2차로 편성한 병력 중 절반을 유럽 전선에 투입했다.
탄저 예방접종 관련 문제와 중화의 거친 저항, 그리고 유럽과 고려의 관계 등 기타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고려 정부는 소비에트의 전장도 그저 유럽군에게만 맡기지 않고, 같이 빠르게 정리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소련 지휘부는 또 한 번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중화와 소련의 병력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려는 그 병력의 ‘총합’이 되는 수를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운용하는 사단의 개수가 천 개에 육박한다.
세상에 무슨 이런 군대가 있는가.
물론 무지막지한 인해를 구사하는 중화군도 이미 요령전역에 그만큼의 병력을 밀어 넣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사람행세를 한 고깃덩어리들과 잘 훈련된 고려군은 엄연히 달랐다.
심지어 고려군 천 개의 사단은 어설프게 무장한 것도 아니었다. 최고의 장비에 최고의 보급을 받으며 진군했다.
개별 사단은 전차와 통신, 의무와 수색, 공병과 정비, 화학, 방공, 보급수송대, 헌병 등의 지원부대도 하나도 빠짐없이 완편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양면전선을 운운한 건 정말 웃기는 소리였다.
바뵈프와 습진균은 중소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둘이 같이 힘을 합치면 고려가 양면으로 압박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었다.
그저 머릿속의 모든 긍정적인 회로를 돌리고 돌려, 마침내 그 온도로 새하얗게 타버린 아둔한 멍청이들의 편협한 생각이나 다름없었고 희망사항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던 독재자들의 오만한 판단일 뿐이었다.
고려는 이미 대륙을 지배하는 국가였다. 그리고 그 대륙은 오히려 구대륙보다 비옥하고 풍요로울지언정, 척박하고 황폐하지도 않았다. 국민은 인종이 아나라 국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고, 문화와 경제도 흥성했다.
고려인들은 명분만 있다면 세계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중화와 소련이 정말로 합일하여 혼연일체가 된다고 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 명백했다. 두 국가는 기껏 유라시아의 일부만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니.
만약 중화와 소련이 전 유라시아를 점령하여 그 잠재력을 온전히 뽑아낼 수 있다면, 그때야 비로소 고려와 호적수라 불릴 수 있겠지만 타수와 예맥한을 점령하지 않는 이상 어디까지나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소련이 믿을 수 있는 건 라스푸티차 뿐이었다.
봄과 가을철에 러시아의 땅에서 나타나는 이 거대한 진흙탕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지금까지 연합군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방해물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연합군도 라스푸티차에 적응하고 있었다.
늪지를 극복하기 위한 광폭궤도가 전차와 장갑차, 수송대에 보급되었다. 시간은 여유로웠고, 연합군 공병대는 천천히 늪지에 도로를 깔면서 진군했다.
유럽군은 통나무를 잘라 임시로 길을 만들었고, 고려는 아예 본국에서 재조립(모듈화)도로와 철도를 가져와 깔기도 했다.
대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세워졌던 전려국토개발국이 한몫을 했다.
전쟁 전부터도 이미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를 진행해 본 고려 공병대와 노동자들은 이미 상당한 경험을 축적해 놓고 있었고 전시에서도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동장군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장군이 문제가 되려면, 형편없는 보급이 전제되어야 했다.
세상에 추운 곳은 러시아만 있지 않았다.
루스인들이 다른 한대지방에 사는 이들보다 특출나게 추위에 강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비슷하게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살아가는 예맥한계 옥저인, 몽골인, 북려인 이누이트가 좋은 예시였다.
고려도 마찬가지다.
남려 남단과 북려 북단, 남극, 빙주도 러시아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추웠다. 가끔은 조선도 추위라면 뒤지지 않았다. 옛 궁예가 도읍한 철원이 모스크바보다 추울 때도 많았다.
동장군을 이겨내기 위해선 잘 준비된 동계피복, 음식물, 몸을 데울 연료,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고로 동장군은 오히려 소련군들에게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스몰렌스크 전선을 방문한 쿠투조프도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쿠투조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이 소소한 승리를 거둔 최전방 전투 현장에서 사살한 유럽군의 시신을 둘러보았다. 도이치 군복을 입은 시신과 프랑스 군복을 입은 시신들이 있었다.
쿠투조프는 그들의 유품을 들추었다. 일국의 원수인 그가 유품이 탐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들이 입고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두툼한 솜이 잔뜩 들어차 있는 도이치와 프랑스 군복, 하지만 소총과 탄약은 넉넉했다.
품속에 지니고 있는 음식도 많았다.
소련군의 한 끼 식량은, 딱딱해서 물이나 다른 액체 없이 도저히 못 먹을 호밀빵, 그리고 그 빵에 발라먹을 버터 혹은 정체불명의 지방, 카샤(러시아식 죽)나 보르시(야채 수프)를 해먹으라고 나오는 곡물가루와 야채, 국수나 생선 등이 있었다.
물론 이런 식단은 전쟁 초창기, 그것도 서류 상에나 보이는 보급이었다.
현실은 날이 갈수록 시궁창으로 바뀌었다.
전황이 암담해질수록, 식단도 빠르게 악화 되었다.
국수와 생선은 원래부터 거의 나오지 않았고, 보기도 힘들었다. 생야채도 순무를 제외하곤 거의 보기 힘들었다.
곡물가루엔 톱밥이 섞였다. 빵은 갈수록 딱딱해졌고 갈라보면 곰팡이와 벌레가 안에 들어가 있었다. 주먹 크기의 육포는 이제 손바닥만 해졌다가, 나중엔 엄지손가락만 해졌다.
버터는 사라졌고, 이제는 돼지는 물론 여느 짐승 지방의 대체품도 귀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도이치 병사와 프랑스 병사의 보급품을 보라. 아주 호화롭지 않은가.
시신을 뒤질수록 쿠투조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유럽군의 보급도 감히 소련이 따라 할 지경이 아니다.’
잘먹고 잘사는 고려군은 이미 추축국 내부에서 유명했다. 그놈들은 전쟁터에서도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협동일관용기로 만든 간이 체력단련장에 가서 쇠질(헬스)을 하면서 남는 열량을 소비하는 괴물들이다. 애초에 비교할 대상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쳐도 다른 곳의 전선도 격차가 엄청났다. 쿠투조프는 그제야 일선 지휘관들이 보급을 원한다는 절박한 요청이 순화에 순화를 거쳐 자신의 앞으로 보내진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현장엔 소련군의 시신들도 널브러져 있었다. 저것들을 수습해야 하지만, 지금 그들은 다음 공격 때 퇴각을 해야 했기에 망자에 대한 예우조차 제대로 할 기회가 없었다.
쿠투조프는 얼굴을 문질렀다.
소련을 지키기 위해 저렇게 죽어간 영웅들이 얼마나 많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을 더 밀어넣어야 조국을 지킬 수 있을까. 나는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필요한가.
과연 그 더운 피를 얼어붙은 땅에 전부 쏟아붓는다고, 조국을 지켜낼 수는 있을까.
그 젊음들이 사라진 국가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무엇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세상에 혼란과 죽음을 뿌렸느냐, 바뵈프.
쿠투조프는 미하일 마튜슈킨의 최후를 기억했다. 1차대전에서 제정 러시아를 위해 싸웠던 장군은, 결국 권총을 뽑아 총구를 제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겨 삶을 마감했다.
자신이라고 해서 그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할 이유가 단 한 가지라도 있을까 싶지만, 쿠투조프는 필사로 그 유혹을 참아냈다.
‘적어도 고려군이 모스크바에 빨리 도착해야 한다….’
전쟁범죄는 막을 수 없었다.
총알이 오고 가는 전쟁터에서 인간성이 결여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이 다치지 않아도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은 불같은 복수심에 불타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곤 했다.
추축국의 전쟁범죄는 일반적으로 연합군보다 더 심했다.
중화는 아예 다른 수준이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소련이 폴란드와 루테니아를 침공하며 저지른 일들은 도무지 용서받기 힘든 일이었다.
소련이 진군하며 만들었던 브레스트 인근의 바라나비치 포로 수용소에서 그 적나라한 현장이 드러났다.
이곳에서 많은 고위급 폴란드, 연합군 장교들, 귀족들, 부르주아지들, 성직자들, 그리고 일반병들이 학살당했고 수용소 옆의 숲에 암매장되었다.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지만, 바라나비치 학살의 규모는 거진 수만 단위였다.
일반적 하급 군인들은 그래봤자 같은 노동자와 농부들이었을 텐데 소련군은 ‘계급 각성’을 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사살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럽군도 복수심에 불타는 이들이 많았다.
폴란드인, 루테니아인들 뿐만아니라 도이치나 프랑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왔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러시아가 일으킨 두 번째 세계대전이었다. 어떤 사람들 눈에는 루스인 혐오는 지나인 혐오마냥 정당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포로 사살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인 살해나 강간, 방화나 같은 일들도 일어났다. 연합군도 최대한 준법을 하려고 했지만, 일선 병력들의 그런 분노를 막을 방도는 엄중한 처벌 뿐이었다. 그런 엄중한 처벌은 곧 사기를 떨어뜨리기도 했으니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쿠투조프는 차라리 남쪽, 보로네슈 방면에 있는 고려군이 모스크바에 먼저 도달하기를 원했다.
소련군 원수가 바라는 것이 고려군의 준법정신이라니, 참 모순적인 태도가 따로 없었지만 그로선 기댈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었다.
고려군에서조차 전쟁범죄는 일어났지만 적어도 고려군만큼 그 처벌을 엄하게 하는 나라는 없었다. 게다가 원체 국민성이 고지식할 정도로 준법정신이 강했다.
그렇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군대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전쟁범죄의 수는 열강 중에서 제일 적었다.
고려할 건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유럽이 만약 소비에트를 점령한다면, 어쩌면 예전처럼 식민화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폴란드는 동진할 것이고, 괴뢰국들이 세워질 수도 있었다.
쿠투조프는 고려가 잉글랜드에 내린 처사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잉글랜드에 주둔한 연합군은 대략적으로 오 년 동안 군정기 이후, 국민 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랬다.
쿠투조프는 소비에트가 그렇게 될 수 있길 희망했다. 잘게 쪼개진 채 서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탈출 전략을 꾀해야 할 때였다.
그는 사위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충성도 접었다. 그가 제일 걱정하는 건 지금 딸들의 안위였다. 그는 슬하에 딸 넷이 있었다. 그 딸들은 그의 인생의 전부기도 했다.
그는 딸들에게 비밀 연락을 보냈다. 전황이 좋지 않으니, 니즈니 노브고로드에 있는 별장에 가 있으라는 말을 가족끼리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장녀 프라스코비아는 바뵈프의 아내였으니 이게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기장도 아내와 자식을 그렇게 잃어버리고 싶진 않을 것이 아니던가.
* * *
“어째서?”
바뵈프는 부정했다.
그의 머리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자유군단이라는 잡것들, 그리고 어디서 살아남았는지 모르지만 기어코 살아남은 트례차코프, 그리고 마레샬과 뒤파이의 망령들.
바뵈프로서는 진군하는 연합군보다도, 지금 그들 내부에 있는 반역자들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 반역자들이 다시금 돌아와 나에게 총을 들이대? 가라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죄…죄송합니다. 세르게이 그놈이 배신자였을줄이야…!”
대머리 남자, 보리스 가라닌이 진땀을 흘렸다. 현 엔카베데의 수장인 그는 이고르 페트로프의 공백을 전혀 메워줄 수 없는 무능력한 인사였다.
“세르게이를 잡았나? 죽였나?”
“이미 달아났습니다. 카잔은 완전히 그놈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제서야 바뵈프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소련 초창기의 활기에 막 자라나고 있던 유능한 관리, 군인들을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자신 스스로 잘라낸 것을 후회했다.
이 순간 눈을 떠 보니 자신의 옆에는 달콤한 말만 나불대는 인간들만 있었다. 어떻게든 서기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말만 하는 보신주의자들만 있던 것이다.
이렇게 눈과 귀가 제대로 보이고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 서기장은 자국의 능력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그는 중화와 손을 잡았고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실로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바뵈프는 동시에 다른 측면에서 후회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숙청이 불충분했다는 것을 후회했다.
왜, 진작, 더 숙청하지 않았는가.
아예 싸그리 다 반동분자들을 몽땅 다 죽였다면 지금 이렇게 반기를 들고 일어난 놈들도 없었을 텐데.
지금 바뵈프는 엔카베데조차 믿을 수 없었다.
저 다한증 걸린 대머리 새끼도,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장인도, 아내도 믿을 수 없었다.
아내 파라스코비아 바뵈프는 장인의 서신을 받은 뒤 아들을 데리고 니즈니 노보고로드로 가려다 붙잡혔다. 뭘 하진 않았지만, 그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바뵈프는 극도의 불신에 시달려 모스크바 근교 클랴지마 강 근처의 별장(дача, 다차) 안으로 칩거했다.
‘내가 이제 뭘 어떻게 할 수 있지…?’
하지만 다차에서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며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서기장이 그렇게 넋이 나가버리자 소련 지휘부도 큰 혼란에 잠겼다. 소비에트 고위 관료들은 그들이 축적한 재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연합군에 개별적으로 항복을 문의하러 도망쳤다.
바뵈프의 곁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이제 사라졌다. 크레믈은 텅텅 비었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조차 주울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