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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08화 (608/653)

608화 적적내전(2)

개천 532년(CE 1807) 1월, 연합군은 볼가강과 돈강 사이의 좁은 길목에 위치한 스탈린그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멀리서 도시를 관찰하던 고려군 수색대 병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불길한데….”

“뭐가?”

“왜, 저기 요령전선에서는 신의주에서 엄청나게 죽어 나갔다잖아. 아주 그냥 도살장이 따로 없었다더라. 도시가 그냥 핏물에 잠겼다고 하던데.”

“중화 강시 놈들이 꾸역꾸역 밀고 오는 거 하나는 잘하니까.”

“여기도 그럴까?”

“저놈들이 대조국전쟁이니 뭐니 하면서 씨부리긴 했는데…… 그동안의 전투는 모르겠네.”

확실히 주전장 모스크바―스몰렌스크 지역보다는 이곳의 소련군들이 더 ‘말랑말랑’했다. 연합군은 이 북캅카스의 넓은 땅을 한 달 만에 점령한 것이다.

아무리 연합군이 전력상 훨씬 우위에 있다고 하나, 저항이 컸다면 이룰 수 없는 전과였다.

서기장의 대조국전쟁 선포 및 애국심, 애당심 고취는 의외로 주전장을 제외한 변방의 전선엔 잘 먹히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연합군이 인간적이라는 사실이 가장 컸을 것이다.

지금은 아주 백발의 노인이 되었거나 혹은 늙어 죽었겠지만, 1차대전에서 살아남은 제정 러시아군들은 고려군에게 잡혔던 포로 생활이 패잔병으로 터덜터덜 귀환한 뒤의 암담했던 생활보다 더 좋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배신자를 처단할 총구가 등 뒤에 있지 않았다면 지금 이 전쟁에서 총을 버리고 연합군에 투항할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바뵈프도 이를 알아 정치장교들에게 즉결처분권을 내렸지만 정치장교들이 병사들을 하나하나 전부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이유로 소련군은 날마다 늘어나는 탈영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또 자신들의 병사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에게도 가혹했다. 아들과 남편을 전쟁에 보낸 남은 가족들은 이제 그들이 먹고 살 식량까지 빼앗기고 굶주려 죽어갔다.

이번 스탈린그라드엔 도시 내에 남은 민간인들이 꽤 있다는 사전 첩보가 들어왔다. 도시 방위망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퇴각시키지 않는 중이랬다.

개전 초 조선과 같은 나라는 중화의 기습공격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려고 발버둥 쳤다는 것을 기억해보면 대조적이었다.

“한눈에 봐도 민간인들이 많아 보이는구만.”

“…여자도 있습니다. 어린애도 보입니다. 이 나쁜 놈들!”

“미치겠군.”

이 사실을 확인하러 정찰을 온 고려군 병사들도 인상을 구겼다.

정규군 훈련을 받은 여군이라면 사살해야 했다. 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무기였고, 갓난아이도 범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민간인이라면?

분명히 지금 스탈린그라드에는 민간인 복장을 한 여인들이 군수품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들이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비자발적이라면, 그들을 사살한 연합군 병사들이 가지는 정신적 충격은 상당히 클 것이었다.

전쟁으로 겪는 심리적 충격은 예사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을 줄여주는 가장 큰 요인은 전쟁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민간인 사살은 심리적 충격뿐만 아니라 전쟁의 명분조차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러니 소련 지휘부의 저런 잔혹한 행동은 고려군 입장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행동이었다.

차라리 중화마냥 적극적으로 적에 부역했다면 사살 명령이 떨어지겠지만 소련은 그것도 아니었다.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대중적인 환상(주로 당사자들이 가진)이라 함은 소련이 정말로 공산주의, 전 인민이 평등한 나라라는 점일 테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인종적 측면에서는 더 그랬다.

모렐리나 지금의 바뵈프, 그리고 숙청된 마레샬과 뒤파이 등 지금 이 소련의 지휘부에는 프랑스 피난민 출신의 정치인들이 많았다.

이제는 시대가 지난 만큼 그 피가 대체로 희석되었지만, 지도부 내에선 가끔 프랑스어로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경우도 있었을 만큼 공산당 고위층의 프랑스 혈통은 꽤 자랑스러운 것들로 여겨졌다.

그 일부의 사람들을 차치하면, 대중적인 소비에트 기득권자는 루스인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스크바 주변에 사는 루스인들이었다.

이들이 일반적 의미에서의 기득권자처럼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아니고, 차별받는 다른 이들보다는 그래도 나았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소비에트에도 차별받는 이들이 많았다.

연합군이 지금까지 점령한 북캅카스의 알라니야 지방엔 이곳에 오래전부터 살던 체르케스인들, 체첸인들, 인구셰티아인들뿐만 아니라 남쪽 사카르토벨로에서 온 사람들, 그리스인들, 튀르키예인들, 이란인들, 동부 유목민들, 루스인들이 전부 다 있었다.

이들의 인종을 무엇으로 규정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스크바 근교의 순수 루스인, 즉 백인들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았다.

당의 주장과 이념에 따르면 공식적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했다. 그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아무도 소비에트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이상처럼 아름답게 돌아가지 않았다. 여전히 소련은 백인, 그중에서도 루스인들의 세상이었다.

이질적이 소수민족들은 당의 고위간부층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순수 루스인들로 구성된 부대에도 끼지 못했을 정도로 차별을 받았다. 심지어 어머니 조국을 지키고자 자원을 했는데도 쫓겨나는 경우까지 있었다.

다른 정책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수민족들에게 부과되는 강제노동과 가혹한 징수 등은 루스인들보다 적어도 삼 할은 더 많았다.

물론, 항상 팽창하던 시기 제정 러시아는 친러시아 카자크들을 이용해 정복전쟁을 벌일 때 북캅카스인들, 특히 체르케스인들을 거의 5할 이상 학살하며 민족성의 씨를 말렸다. 소련의 치세는 그것보다는 관대했다.

하지만 소수민족들은 소련의 치하에서 더 나은 세상을 원했다. 정말로 소련 지도층들이 주장하는 공산낙원이 도래하리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혁명에 동참한 것이었다.

허나 지금 보니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려고 하고 있었다. 같은 소련인, 소련군이라는 이름은 받긴 했지만, 이들은 정말 같은 소련군이 될 수 없었고, 항상 불신과 의심, 불평등의 차별을 받았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소련군들이 주전장의 소련군보다 쉽게 항복하고 저항하지 않았으리라.

스탈린그라드도 마찬가지다. 이 도시는 위치상 유럽러시아와 아시아의 러시아를 잇는 우랄산맥, 볼가강, 캅카스산맥 선의 주요 도시였다.

유럽인과 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보기 쉬웠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심지어 저 멀리 몽골에서 피난 온 사람들까지.

‘그런 것치곤 소수민족만 보이는 건 아니다.’

동원된 루스인 여자들도 많았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노인들도 많았다. 소비에트는 정말 절박해 보였다.

절박하면 이런 짓거리를 해도 되는 거냐? 수색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정찰을 끝내고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복귀하는 와중, 고려군 수색대는 마찬가지로 정찰을 떠나고 복귀하던 소련 수색대와 마주쳤다.

“쏴!”

몇 차례 교전이 일어났다.

장비의 질과 훈련도가 낮은 소련 수색대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고려군 수색대도 피해를 입었다.

여기는 저들의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이었고, 저들은 이 근방을 훤히 알았다. 반면 고려군은 저들이 숲속에 깔아놓은 지뢰 때문에 기동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그냥 가, 명령이다!”

고려군 수색대원 세 명이 전사했다. 교전하는 와중 어깨와 다리에 총상을 맞은 수색 소대장도 신음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된 방편복을 부여잡고 나무에 기댔다. 느낌상 치명상은 아닌 듯했지만 당장 빠르게 움직일 순 없어 보였다.

지휘관을 냅두고 가야 할 상황에 처한 수색대원들은 머뭇거렸지만, 부소대장이 빠르게 상황판단을 마치고 조장에게 말했다.

“꼭 다시 돌아올 겁니다.”

“지랄 말고 빨리 가! 빨리!”

고려군 수색대가 아슬아슬하게 떠났다.

뒤이어 소대 하나가 궤멸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투입된 소련의 추가적 수색병력이 도착했다.

“Вон он Сука!”

“쑥갓 뭐 어쩌라고 이 개….”

― 퍽

소련군 병사가 개머리판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수색소대장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정찬기 수색소대장은 본래 갓 임용된 교사였다. 결혼은 한 적이 있었지만 이혼했고 자식은 없었다.

찬기는 전쟁 발발 이후, 중화와 소련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입대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교편을 잡고 있었다.

초창기 어리숙한 선생 특유의 모습을 보여 동료들에게 알게 모르게 욕을 먹은 적도 있었지만, 도덕관과 지휘력, 기타 여러 가지 장점으로 인해 어느 순간 정교 계급을 달았고 믿음직한 평가를 받는 소대장까지 되어 있었다.

급격한 군증으로 장교가 부족한 현 고려의 특성상, 일선 소대장급 자원들은 대체로 부사관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자원들은 금방금방 지나쳐갔을 뿐이다.

군인정신의 귀감이라 불리는 정찬기는 정작 스스로를 군인 반, 민간인 반이라 생각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다시 교단에 설 수 있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근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찬기는 아직도 두개골이 울리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마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복부와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의외로 상처는 꽤 꼼꼼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물론 항생제나 소독 등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조치를 취하진 못한 것 같았지만, 소련군 사정상 붕대라도 깨끗한 것을 쓰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특히나 포로에겐 더더욱.

그는 절뚝거리며 이 축축하고 낡은 방을 돌아다녔다. 무슨 일인지 이들은 감옥에 그를 처넣지 않았다. 여긴 그냥 소련식 연립주택이거나 일반 건물처럼 보였다.

심지어 창문도 있었다. 그는 유리 없는 유리창 너머의 밖을 바라보았다. 전쟁을 앞둔 도시는 긴장 속에서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 어린애들.

도시에 모래주머니를 쌓고, 대포탄과 총탄을 옮기고, 벽돌을 나르고 있다. 오히려 소련군은 어디에 올라가 확성기로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담배를 물고 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점령군인 줄 알겠다.

‘진짜군. 정말 사람이 많다. 포격이 시작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까.’

그는 하급 지휘관이라 자세한 작전은 하달받기 전까지 몰랐다. 하지만 눈치 같은 것이 있었다.

곧 연합군에 의한 대규모 폭격이 있을 것이다. 시가전에 쌩으로 보병을 밀어 넣는 짓은 최대한 지양해야 했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 당연한 조치에 이렇게 소련군의 비상식과 무자비함이 끼어든다면, 학살에 준하는 비극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린 당사자는 때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고.

― 끼익

“엇!”

“앗!”

갑자기 문이 열렸다. 찬기가 깜짝 놀랐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군인 특유의 군화 소리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찬기는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그럴 이유를 발견했다.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있긴 했지만, 발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가냘픈 미녀가 붕대와 약을 들고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기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들고 온 붕대와 물건들을 본 뒤엔 딱히 저항할 생각이 없어졌다. 무기도 없었고, 구태여 소란을 일으키기보단 정보를 얻고 싶은 생각이 컸다.

그리고 들어온 여인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굳이 저 목을 움켜쥐고 드잡이질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루스인? 루스인 미녀들도 세계에 명성이 자자했지만, 이 여인은 루스인의 느낌도, 그동안 본 체르케스인들과 타타르인의 느낌도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찬기의 아주 주관적 생각일 뿐이었다.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여인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찬기는 저항할 의지가 없다는 듯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이후에야 여인이 안정을 찾은 듯 떨리는 손으로 그의 지저분해진 붕대를 갈아주었다.

상처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다리 상처는 깔끔하게 관통되어서 출혈만 잡히면 오히려 나았고, 방편복은 총탄 전부를 막진 못했지만 탄자의 위력을 상당 부분 감소시켜 상처가 얕았다. 나중에 제대로 파편 제거 수술이라도 받으면 될 것이다. 그 와중에 주요 혈관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 천운이긴 했지만.

묘한 분위기였다. 찬기는 대체 지금 이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다.

자신이 포로인가?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적군 포로를 이렇게 후대한다는 게 이상했다. 감방으로 쓰이는 방도 그랬고, 험상궂은 병사와 고문 기술자 대신 체르케스 여인이 온 것도 그랬고.

‘하지만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야….’

오만하기 그지없는 고려인들은 대부분 국제공용어인 자신들의 언어를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서 말해주리라고 기대한다. 고려인들은 외국어를 배울 이유가 적다. 정치도, 경제도, 학문도, 체제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려어와 려글을 쓰지 않으면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물론 그건 지식인들에 한해서였고, 전쟁 중인 적성국의 일반인들에게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괜찮아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어설프게나마 구사하는 고려어가 들렸다.

찬기는 상황 파악을 하는 질문 대신 영 엉뚱한 말부터 먼저 나가는 것을 참지 못했다. 한 소대를 책임졌고, 방금 전까지 죽음의 근처까지 갔다가 살아오며 쌓아 올린 군인정신은 대체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자신도 궁금해졌다.

“이름이 뭐죠?”

그의 말에 잠깐 머뭇거리던 여인이 곧 고개를 저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제 이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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