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화 국제군단
처음, 붉은 군대는 야심만만하게 진군했다.
그들은 전 동유럽을 무릎 꿇렸다. 폴란드와 루테니아를 반 이상 무너뜨렸으며, 그 뒤에 있는 나라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 유럽국도 타수의 깃발 아래에서 단결했다. 단결한 유럽은 소비에트보다 강했다.
소비에트는 단 하나의 전선에 집중하기보다는 너무나 많은 적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전통이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언제든지 함락시킬 수 있다는 근처의 소국 하나조차 제대로 무너뜨리지 못했다.
1차대전 때는 불가리아가 저항했으며, 2차대전 때는 루테니아, 그리고 핀란드가 저항했다.
생각과는 달리, 붉은 이념은 이들 마음속에 제대로 파고들지 못했다.
비단 이들이 충분히 자본적 체제가 자리 잡히지 않아 공산주의가 퍼지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소비에트가 저지르고 있는 일들로 인해 경각심이 들었던 것이다.
크레믈이 혼란을 흩뿌린 발칸에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다른 나라들은 극단주의 이념을 배격했다.
소비에트는 무력으로 이들을 병합해야만 했다.
바뵈프는 폴란드를 짓누른 뒤 루테니아와 핀란드쯤은 여유롭게 짓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루테니아는 버티고 버텼다. 올가 차리차는 소비에트의 선전만큼 무능력하고 사악한 마녀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붉은 파도에 맞서 싸우는 성녀에 가까웠으며, 그녀 덕에 피어난 ‘루테니아’ 민족성의 상징과 같아졌다. 올가라는 이름은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예전보다도 더 커졌다.
그런 저항 속에서 소비에트는 키이우를 점령하긴 했지만 그들의 부수도인 미콜라이프까지 점령하진 못했다. 늙은 재상 키릴로의 최후의 항전은 코자키를 비롯한 루테니아 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후 크림대공 해대헌과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의 주도 아래 반격을 준비했다.
전쟁 발발 직후까지 제3자, 방관자의 위치에 있었던 핀란드는 엉뚱하게도 소비에트가 서카렐리야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에 휘말렸다.
본래 스웨덴령이었던 핀란드는 대북방전쟁 이후 러시아의 입김으로 인해 스웨덴에서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이는 핀란드인들 또한 알고 있어, 그동안 나름대로 러시아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허나 본래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 같은 이웃은 탐욕적이고 무자비했다. 그들은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도 서서히 깨달았다. 러시아가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떼어낸 것은 핀란드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핀란드를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러시아가 무너진 이후 들어선 소비에트라고 대외정책이 크게 바뀐 것도 없었다.
핀란드는 최대한 평화의 길을 모색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크레믈의 노골적인 야욕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핀란드 인민 공화국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혹은 바뀌더라도 그들이 소비에트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였다.
핀란드는 전쟁 이후 곧바로 타수에 가입했고, 고려와 타수에게 전폭적인 군사지원을 받으며 겨울전쟁을 치렀다.
루테니아보다도 더 작고 나약한 이 나라는 시수(Sisu) 정신에 의지해 붉은 괴물의 머리를 누구보다도 아프게 꽉 깨물었다.
소련에겐 피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운명도 있었다.
붉은 군대의 최고 원수, 수보로프가 전쟁 도중 노환으로 죽었다.
사실 개전 전부터 나이 일흔을 훌쩍 넘겼으니 언제든지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얄궂게도 수보로프가 최고 사령관 자리를 쿠투조프에게 인계하고 요양하기 직전까지 붉은 군대는 승리만을 했었다.
그렇기에 수보로프 자체의 인생에서 큰 패배란 딱히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수보로프는 이 혼란한 시대 속에서 붉은 군대의 귀감이었으며, 모렐리와 바뵈프 등의 군사적 스승으로 남고, 고려와 유럽 등에서 최고 명장의 반열에 남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반면 미하일 쿠투조프는 능력적으로는 수보로프만큼이나 대단한 명장이었지만, 타고난 시대가 영 좋지 않았다.
쿠투조프는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붉은 군대를 재정비하고 다시 유럽에 공세를 퍼부으라는 사위의 명령을 받았다.
허나 명령만으로 비단도 뚫지 못할 만큼 약해진 화살이 갑자기 강해질 리가 있겠는가. 그렇기 위해선 풍부한 보급이 필요했다. 개전 이후 반짝 강력함을 뽐냈던 소비에트 연방은 전차와 기타 전쟁병기를 생산하는 중공업에 비해 등한시된 농업, 너무나 낙후된 기타 경공업으로 인해 공세를 제대로 지속할 능력이 없었다.
또 객관적으로 볼 때 쿠투조프 혼자는 몰라도, 붉은 군대의 장교단들은 아직 타수군 장교단들에 비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붉은 군대의 공세가 돈좌되자, 이제는 타수에서 역으로 반격을 가했다.
도이치 기갑군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붉은 군대의 기갑군은 처음엔 숫자적으로 우위에 서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초반이야 소비에트가 전쟁을 꾸준히 준비해온 덕에 전쟁물자가 많았지만, 폐쇄경제와 낙후된 체제의 지속성은 자유무역을 하고 있는 서유럽과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고려는 중화와 대화, 잉글랜드를 모두 상대하면서 막대한 물자를 전 세계에 뿌리고 있었다.
그렇게 전시체제에 들어간 도이치는 꾸준히 기갑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이치 기갑들은 만듦새 자체가 소련의 대량생산용 전차보다 더 좋았다.
그 귀하고 비싼 중석(텅스텐)이나 윤석(크로뮴)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적의 참모장들도 이제 빛나는 소련 원수 쿠투조프나 수보로프에 비해 꿇리지도 않을 만큼 명석한 이들로 바뀌었다. 쿠투조프도 이제는 게르하르트나 카를, 아우구스트 같은 적 참모진들의 존재를 신경 써야 했다.
이들은 쿠투조프보다도 젊고 명석했다. 시시각각 경험이 쌓이고 있기도 했다.
루테니아의 방위를 위해 고려제국군 루테니아방어군까지 상륙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소비에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를 나누어 해결해줄 동지들은 이미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가장 큰 동지인 잉글랜드는 점령당했다.
최고 위원회는 와해되었고, 전범재판이 열렸다.
이들이 적어도 몇 년은 시선을 끌어줄 수 있을거라 기대한 바뵈프조차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책상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그다음의 동지인 이베리아 인민전선도 위기였다.
고려의 원조를 받은 포르투갈군은 이베리아 인민전선에게 매번 승리를 거두며 옛 열강으로서의 명성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했고, 프랑스 또한 이베리아를 압박하면서 도이치와 함께 폴란드 전선으로 참전했다.
큰 기대를 딱히 한 것은 아니지만, 발칸의 혼란도 고려와 이탈리아군의 합작으로 일찍부터 해소되고 있었다.
서기 1806년(개천 531년) 7월의 여름, 날씨가 더워지며 라스푸티차의 위세가 한풀 꺾였을 때 연합군은 유럽 전역에서도 반격의 서막을 올렸다.
이곳에서도 엄청난 수의 군대가 격돌했다.
요령전구는 쌍방이 압도적인 인구가 동원된 전역이었지만, 루츠크―브레스트 전역도 장비의 수에선 이에 못지 않았다.
특히나 전차전은 엄청났다.
요령전구에도 엄청난 기갑군이 동원되었지만, 그건 고려의 일방적 공세였고 중화군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소련이나 연합군이나 상당히 많은 장비를 운용하고 있었다.
T―30과 판처4가 자웅을 겨루었다.
두 명전차는 서로 호적수라 여겨질 만했다.
거대한 실패작이었던 T―25를 대체하기 위해 나온 소련의 T―30은 우수한 생산량으로, 도이치의 판처4는 보다 나은 공업력으로 인한 신뢰성으로 각기 다른 분야에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슈바르차 판터(Schwarzer Panther)라 불리는 제국 흑표는 격이 다른 전차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신뢰성과 성능, 그리고 생산량 모두에서.
연합국 유럽사령관 곽호연 원수가 이끄는 고려제국 루테니아 집단군은 흑표 전차와 들소 장갑차가 편제된 기갑군을 이용해 라스푸티차가 끝난 6월부터 9월 사이, 리비우 포위망을 해소시키고 루츠크 공세를 이끌었다.
파죽지세로 치솟아 오르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라스푸티차 같은 대자연뿐일 것이다. 같은 인간은 감히 상대할 수 없어 보였다.
― 쾅
“도탄!”
그동안 사정거리와 정확성 차이로 일방적으로 먼 거리에서 두들겨 맞는 것을 보다못한 붉은 군대는 농장과 숲에 매복하여 겨우 고려 기갑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최선의 조건을 구축한 붉은 군대의 기갑병들마저도 절규와 같은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상대가 안 돼!”
기습당한 흑표가 무력화되긴커녕 오히려 잔뜩 성이 난 채로 포신을 돌리는 것을 바라본 소련 기갑병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짐작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고려는 흑표를 중전차라기보다는 그저 주력전차로 구분했지만, 여전히 타국에서 볼 땐 중전차급 이상의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형전차 이상의 기동력을 자랑했으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붉은 군대는 패배하고 패배했다. 쿠투조프가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소련군들은 병기와 군수품도 내버려 둔 채 주린 배를 쥐고 북쪽으로 도망갔다. 그들의 조국으로.
* * *
“전하. 키이우를 수복했나이다. 연합의 앞날에 영광 있으라!”
곽호연 원수가 키이우에 입성하며 보낸 역사적인 축전의 내용처럼 9월에는 최전선이 이르핀 북쪽으로 물러나며 키이우가 수복되었다.
이후 10월, 또다시 찾아온 가을 라스푸티차 시절에는 그 전선이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 방어선까지 다시 올라갔다.
남부전선만큼은 원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허나 연합군은 이대로 멈출 생각이 없었다.
10월과 11월의 짧은 휴전 이후에는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연합군은 동계 공세를 재시작했다. 그나마 인간적으로 싸우는 소비에트인 만큼 이 전선에는 중화만큼이나 미친 짓거리를 저지를 놈들이 별로 없었다.
열악한 상황에 놓인 소비에트와 달리, 연합군은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들의 다국적을 고려해보면 굉장한 성과였다.
루테니아 집단군에는 고려 기갑군과 기계화군뿐만 아니라 ‘국제군’이 있었다.
국적이 통일되지 않는 나라에서 온 소규모 부대들은 다 이곳에 속했다. 이곳에는 군단급 이상의 병력도, 대대급 이상의 병력도 있었다.
비교적 강한 불가리아나 아련, 이라크, 그리스 등의 국가는 군단급을, 가나와 기니 같은 아프리카 소국들은 연대급 이하의 병력을 보냈다.
고려국은 작전통일성을 위해 이들을 야전군 규모의 국제군으로 편성시키고, 기갑과 기계화 병력들이 점령하며 나아간 지역의 후방안정화 작전에 투입하고 있었다. 격전지 공세를 담당하진 않았지만, 전선이 워낙 넓어 후방에서도 언제든지 적의 공격이 올 수 있었으니 이들의 몫도 중요했다.
되도록 같은 출신의 병력들을 같은 부대 편제에 집어넣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 병력의 규모가 중구난방이기에 국제군 내 몇몇 부대는 정말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4146보병연대가 바로 그랬다.
“에엣취!”
무타파 승병들이 참호에 모여 벌벌 떨었다.
다른 병사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색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방금 전의 전투까지만 해도 야차처럼 소총과 유탄으로 적을 묵사발 낸 승병들은 전투가 끝난 이후엔 모두 참호 속으로 낑낑거리며 들어가 모포를 덮었다.
“나도 추위 적응이 되진 않지만, 저 친구들은 정말 불쌍하군.”
북아프리카에서 온 알제리인이 껄껄 웃었다.
그도 뜨거운 사막 기후에서 이 추운 땅으로 왔지만, 그래도 사막은 일교차가 컸기에 밤에는 추웠다. 사하라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막들은 밤에 영하까지 떨어진댔다. 추위 자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남쪽 친구들은 열대기후에서 오지 않았던가.
푹푹 찌는 열기와 습도로 옷을 입기 힘든 기후에서 온 만큼, 저렇게 꽁꽁 싸매고 어디 콕 처박혀 있는 환경 자체가 힘들 것이 분명했다.
“보소, 밥은 대체 언제 주오?”
까까머리의 무타파 승병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고려어로 물었다. 시선이 영 곱지 않은 것이, 아까 자신들을 보고 웃은 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언어는 몰라도, 어조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아, 좀 있으면 나와요. 밥도 뜸을 들여야 밥을 주지 않겠습니까?”
본래 고려어 밥은, 쌀이나 잡곡 같은 곡물로 이루어진 음식을 의미하는 단어였겠지만, 이제는 국제적으로 ‘한 끼 식사’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뀐 지 오래였다.
전투가 갓 끝나서 전식을 먹어도 되겠지만, 아무리 전식이 맛있어도 취사병이 식재료를 가지고 조리한 음식보다 맛있기란 힘들다.
수많은 사람들이 밥, 밥 소리를 질렀다. 부대에 편제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아우성치자 이내 사방이 왁자지껄해졌다. 무타파어, 메리나어, 콩고어, 아랍어, 이스라엘어, 머리가 다 아플 정도였다.
국제군 지휘관이자 고려군 장교가 전쟁터에선 좀 조용히 하라고 잔소리를 하려다 그냥 그만두었다. 전투가 갓 끝났고 소련은 패퇴했으며 사방에 정찰대를 보냈으니 지금은 괜찮을 것이다.
알제리인 급양관이 사람들의 외침에 투덜거리며 다시금 야전 취사장으로 들어갔다.
야전 취사장 또한 수많은 출신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명확했다.
세상의 온갖 곳에서 온 국제군 병력은 당연히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었다. 어떤 종교는 돼지고기를 금기했고 어떤 종교는 해산물을 금기했으며, 어떤 종교는 소고기를 금기했다.
특정한 도축 방법을 규율로 정해 놓은 곳들도 있었고, 같은 불교지만 채식을 하는 천태종, 조계종과 그렇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육식을 하는 만종도 있었다.
급양관이나 조리병들은 각 종교가 금기하는 음식이나 조리법을 피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보급이 넉넉해서 다행이었다.
안에서는 튀니스 출신 조리병이 이스라엘인 동료에게 신세 한탄을 하며 토마토 깡통을 뜯고 있었다.
“아니, 내가 글쎄 절반이 이탈리아 사람이라니까 그것만 보고 조리병을 시켰다니까?”
“정말?”
“이탈리아 사람들은 요리는 잘하는데 전투에선 영 믿음직스럽지가 못하다고 조리병이 딱이라는 거야. 나 참 억울해서.”
“맞는 말이긴 해.”
이스라엘인 동료의 긍정에 튀니스인 조리병이 펄쩍 뛰었다.
“뭐라고? 이 탈세국 놈들이…!”
사실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말은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베네치아 사람일 것이다. 여전히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총기를 쥐여주는 것은 여러모로 썩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적이라도 그랬고, 아군이면 더더욱 그랬다. 그들에게 한번 당했던 이스라엘 동료가 비웃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탈세국이라고 놀리는 것도 민감한 사항이긴 했다.
건국 이후, 일 부르봉과 모리셔스라는 두 섬의 맨땅에서 시작한 이스라엘은 굉장히 빨리 경제적 부국으로 도약했다.
유대인 특유의 경제적 근면함도 있었을 터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국가의 부를 쌓기 위해 조세피난처로 활동하기 시작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 사실은 요즘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라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말들을 부인했다. 법인세를 낮게 책정하는 건 국가의 권리일 뿐이라고.
어쨌든 이스라엘은 고려의 눈칫밥을 먹다가 결국 이번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되었으니, 국제군엔 유대인 부대가 꽤 많았다.
알제리 급양관이 서둘러 두 병사의 싸움을 커지기 전에 말렸다.
“이런 것도 그 뭐냐, 중화스러운 인종차별이 아닙니까?”
“내가 할 말이다. 이 자식아.”
알제리 급양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옛날의 악연도 이제는 풀렸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베네치아는 화염 속에서 사라졌지만, 베네치아인들은 어딘가에서 비교적 잘 지내고 있었다. 알제리나 튀니스에서도.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고.
이번 전쟁이 끝난 뒤엔, 아마 루스인들이나 지나인들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급양관은 짜증 나는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야전 음식이 준비되자 사람들이 비로소 환호하며 모여들었다. 이번 전투의 승리와 생존을 축하하는 소소한 자리였다.
“자 보자, 여기는 할랄 음식이고, 여기는 코셔 음식이고… 저기는 불교식 채식 음식이오. 아, 만종용 고단백 육류 음식은 맨 끝에 있소. 명패 잘 보고 먹으시오. 괜히 나중에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사람들이 식판을 가지고 줄을 섰다. 여느 날의 평화로운 한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