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99화 (599/653)

599화 새로운 국면

워싱턴은 한숨을 쉬며 눈을 비볐다. 철의 의지라고 불리는 고려 시중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 건 다름 아닌 신문들이었다.

회의실 앞 책상에는 수많은 문서가 있었다. 보고서도 있었지만 신문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문짝만한 머리기사들이 보였다.

[6세기의 아즈텍, 중화제국!]

[인두겁을 쓴 악귀 무리들이 저지른 참상.]

[민족주의의 실체.]

내용을 읽어보지 않아도 유추가 가능했다. 그는 신문을 들어보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니, 아예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던지듯 치워버렸다.

“나 하야하면 안 될까?”

“또 그 소리십니까, 당하.”

내각의 상서들이 워싱턴을 달랬다.

전쟁 도중 시중이 빠진다? 말이 되는 소린가. 절대로 안 되었다. 시중은 황제의 특별 용인에 따라 전쟁 끝까지 임기를 유지할 예정이었다.

대신 거국내각이 편성되었지만 불협화음은 의외로 없었다.

정치인들은 무릇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곤 했지만, 그들조차 공통의 대적 앞에서는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들이 의견을 달리하기에는 저 중화제국이라는 악마적 국가가 저지르는 만행들이 너무 대단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래. 외무상서께선 안 그러시오?”

전시거국내각 중 내무상서의 일을 보고 있는 제퍼슨이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여론을 당기기 위해 노력했던 워싱턴이었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 그럴 필요도 없었을 만큼 중화제국의 거침없는 막장 행보는 도를 한참 넘어버리고 있었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소이탄을 들고 불로 뛰어드는 형국이었다.

도저히 일반인의 눈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의 나라가 저럴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물음만 계속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워싱턴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의 이 현상이 다시금 어느 특정한 민족에 대한 증오로 바뀌지는 않을까 하고.

“당하, 질병관리청장입니다.”

“들어오시라 하게.”

뒤늦게 도착한 질병관리청장이 내각긴급대책회의에 참여했다.

본격적인 회의에 앞서, 내각 구성원 전부는 질병관리청장의 직원들이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탄저에 대한 정보를 요약한 것들이었다.

시중과 군무상서 등 몇몇은 이미 하도 많이 보고받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다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았다.

의학과 생물학은 일반인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몇몇 분껜 탄저가 완전히 생소한 질병은 아닐 겁니다.

실제로 이십일 년 전, 시리아에서 탄저가 유행한 적이 있었죠. 그때 외무부에서 질병관리청을 통해 국제원조를 했었습니다.”

“그래, 그런 기억이 있었지요.”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탄저(炭疽)는 어느 날 뚝 떨어진 역병이 아니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 문명과 함께한 질병이었다.

이십일 년 전의 시리아 발병 사건 이전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기록이 있었다.

그 역사는 옛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등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오르기까지 했다. 고대 그리스까지도.

오죽했으면 히포크라테스의 기록에서도 등장할 정도일까.

유목민들에게서도 발병했다. 몽골과 위구르, 중앙아시아 등에서 맹위를 떨쳤다. 고려의 한 저명한 사학자는 서기 839년 사라진 토구즈 위구르 칸국이 탄저로 인해 멸망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즉 탄저는 두창과 홍역, 학질 등과 다를 바 없는 역사적 질병이다.

그랬기에 질병의 무기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균을 구하는 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화는 땅이 넓고 인민의 집적도도 높으니 생물학무기로 쓸 만한 다른 질병들도 충분히 확보해 놓았을 것이다.

허나 항생제와 예방접종 등의 개발로 홍역과 두창, 학질이 모두 인간에게 무릎 꿇려진 지금, 탄저도 더 이상 과거의 맹위를 떨치진 못했다.

“다른 질병들처럼 탄저도 항생제가 만들어진 지금은 충분히 치료가 가능합니다.”

질병관리청장이 급하게 뛰어오느라 생긴 땀을 닦았다.

“정말이오?”

상서들이 그렇게 되물었다. 탄저로 인해 긴급회의가 열렸는데, 질병관리청장이 저렇게 탄저를 내려치니 혼란스러웠다.

“탄저가 특별히 다른 질병들보다 강했다면, 진작 인류 문명이 크게 위협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흑사와 홍역, 두창, 학질 등의 다른 무시무시한 질병들도 많았지요.

탄저는 그들보다 더 무섭지도, 덜 무섭지도 않은 수준입니다. 아니 전염성 측면에서 볼 때 탄저는 두창과 홍역에 비할 바가 되지 않습니다.”

질병관리청장이 예를 든 홍역은 무시무시한 전파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염병의 전파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수는 기초감염재생산지수였다. 그중 홍역은 압도적인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천행후비(디프테리아)와 두창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기초감염재생산지수가 높다고 꼭 강력한 질병이 아니듯(보통은 오히려 반대였다), 모든 역병의 위력은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탄저는 굉장히 낮은 재생산지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재감염 확률은 현저하게 낮습니다. 수용소에서 탄저에 걸린 대부분의 병자는 포자를 직접적으로 흡입했을 겁니다.

중화군은 악랄하게 포로의 의복에 탄저균을 묻히거나 직접 용기를 매달고 항복을 시켜 감염시키는 경로를 채택했습니다. 허나, 이 방법은 솔직히 말하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비인간적이기 전에 비효율적이었다.

중화제국이 제대로 하려면 겨자 독가스처럼 대포를 쏴서 포자를 공기 중에 널리 퍼트려야 했다.

허나 그들조차도 그 병원체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지, 혹은 단순히 여러 현실적 제약 때문에 그런 방법을 선택한 것인지, 이번 탄저 공격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고려의 경각심만 건드렸다.

생물학 무기는 피아를 가리지 않았으니 철저하게 계산된 환경 속에서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요령전구의 현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생물학 무기를 공세국면이 완전히 물 건너간 지금까지도 쓰지 못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패퇴하는 국면에 되어서야 부랴부랴 준비한 이유는 아무래도 아직도 불안정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리라.

“우리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건 후순위의 목표였겠지.

당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간을 얻었으니, 계획은 나름대로 성공했다 말할 수 있을 거요.”

군무상서는 그렇게 판단했다.

탄저 공격 덕에 태평양사령부의 육상 공세는 뒤로 더 미뤄졌다.

고려군도 탄저 공격을 포함한 작계를 새롭게 세워야 했다.

한창 전쟁영웅으로 인지도를 쌓아가는 그 대단한 나폴레오네 국장도 자연의 무기를 초월할 순 없었다.

그 틈을 타, 중화군은 적봉과 열하로 도망가고 있었다.

고려 공군과 해군항공대는 그 좁은 탈출구에 소이탄을 떨어뜨리며 최대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지만, 필사의 탈출 자체를 막진 못했다.

경로가 좁고 험하니 요령전구의 병력이 단시간 내에 전부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어쨌든 사람 사이의 기초감염재생산지수가 높았다면 부여성 포로수용소의 다른 수많은 병사와 포로들도 전부 다 감염되었을 겁니다.”

구토와 같은 탄저병 증상은 감염된 지 하루는 지나서야 발현된다. 만약 전파력이 높았다면 그사이에 더욱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염병이 아니라는 소리요? 일차적인 포자만 흡입하지 않으면 된다고?”

“사람의 신체에서 나오는 분비액과 직접적으로 접촉한다면 전염될 확률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신은 철저하게 밀봉되어 격리되어야 하고, 반드시 즉각적으로 화장되어야 합니다.”

탄저균은 운동성이 없었다. 호흡을 통해 감염될 확률이 존재한다지만 굉장히 낮았다.

심지어 바로 옆에서 기침을 하더라도 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를 같이하거나 상처를 통해 혈액이 옮겨가거나 한다면 그 확률은 증가했다. 이것은 비단 탄저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닐 테다. 수많은 병이 혈액과 타액으로 전염되었으니까.

“흐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발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질병관리청장은 집광투영기 위에 다른 자료들을 올려놓았다.

“전파되는 역병으로서의 탄저의 위력은 그렇습니다. 허나 탄저가 무서운 것은 다른 요소에서 기원합니다.”

탄저는 네 형태로 발병할 수 있다.

피부에 발현되는 것과 혈액 안에 침투하는 것, 소화계로 퍼지는 것, 그리고 흡입했을 때 폐에서 발병하는 것.

후자로 갈수록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중화가 공격 방도로 선택한 탄저의 기전은 호흡을 통한 전파였다. 사실 무기로 쓰려면 호흡기 탄저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도 했겠지만.

“치료를 받지 않을 시, 무기화된 호흡기 탄저의 사망률은 최대 9할에 육박합니다.”

질병관리청장은 일단 탄저의 위력부터 말했다.

“…….”

모두가 헉, 숨을 들이켰다.

말이 9할이지, 사실상 호흡기 탄저에 걸리고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필히 죽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연에서 10할이라는 경우는 없었기에 9할의 표현을 쓰는 것이다.

피부로 발현된 탄저가 치료를 받지 않으면 2할 3푼 정도의 ‘미미한’ 사망률을 가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호흡기 탄저의 위력을 알 수 있었다.

“호흡기 탄저는 설령 즉각적으로 치료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위험합니다. 아직 사례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지만, 저희 연구진은 제대로 된 치료를 하더라도 사망률이 2할 이하론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만약 초기 대응이 늦고 병원 접근성이 떨어진다면, 그 사망률은 가파르게 치솟을 겁니다.”

실제로 감염된 중화군 포로는 8할 7푼이 죽었다. 무시무시한 수치였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그나마 항생제를 몇 개라도 처방받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포로수용소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잖소? 중화군 포로 감염자 말고 아군 감염자 말이오.”

“그건 모집단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야 합니다.”

의무상서가 질병관리청장을 대신해 대답했다.

부여성 포로수용소에서 감염된 고려군의 사망률은 1할 3푼 정도로 추산되었다.

1할 3푼도 객관적으로 볼 때 굉장히 높은 사망률이다.

하지만 호흡기 탄저의 무시무시한 치명률을 미루어 볼 때 이는 굉장한 성과였다.

“이는 기적입니다. 복합항생제 처방도 그러했고 일단 화학대 실무자가 황금시간을 놓치지 않았지요.”

고려군은 중화군의 화학병기를 극도로 경계했다. 모든 병사가 방독면을 항시 휴대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이처럼 빠른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황금시간을 놓치고 탄저병이 전격(fulminant) 단계로 진입한다면, 그땐 항생제로 치료해도 늦는다. 그저 물 떠 놓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고려군 장병들이 면역력이 강한 나이대의 건강한 청년들이라 기본적 상태가 양호했기에 나올 수 있는 결과일 겁니다.”

생략한 말이지만 위생과 영양도 큰 몫을 해냈을 것이다.

고려가 만약 장병들에게 기본적 위생과 영양 조건을 후하게 챙겨주지 않았다면 그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탄저균이 만약 고향으로 돌아온 조선의 민간인들에게 전염된다면 사망률이 가파르게 치솟을 겁니다.

탄저같이 위력적인 질병은 기본 건강이 양호하지 않은 노인층이나 영아층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입힐 테니까요.”

“후우….”

다른 상서들이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하지만 제퍼슨이 갑자기 손을 들어 질문했다. 의무상서의 말에 무언가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로부터의 전파가 가능합니까? 방금 청장님께선 사람 사이 전파력은 그렇게 높지 않다면서요.”

의무상서가 질병관리청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빌어먹을 균 무기가 왜 고려를 괴롭게 할 것인지 알려주어야 했다.

“사람 사이의 전파력은 높진 않지요. 허나 탄저는 본질적으로 아주 끈질긴 역병입니다.”

탄저가 끔찍한 이유는 위력도 위력이지만, 그 생명력도 엄청나게 강인하기 때문이었다.

운동성 없는 탄저균은 아포(芽胞, 포자)를 이루었다.

그들은 강력한 전염성 대신, 아포의 내구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탄저는 숙주의 몸에 있을 때는 다른 병균처럼 행동하다가 숙주에서 나올 땐 아포를 형성해 자연적 방어막을 쳤다.

이는 마치 껍데기 속에 들어간 소라게의 형상과 같았다.

아포의 단단한 껍데기는 안에 들어간 탄저균이 새로운 숙주에 도달할 때까지 장시간(수십 년 넘게) 가혹한 자연환경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심지어 척박한 사막에서도.

“탄저균 아포는 온도와 산성도, 건조도에 모두 강합니다. 주정과 같은 살균제에 대한 내성도 뛰어납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비동도 기준 110도가 넘는 습열을 5분 이상 가해야 파괴됩니다. 이는 일반적 자연에선 흔하게 찾아볼 수 없는 환경이지요.”

물의 끓는점보다 높은 습열(습도 높은 상태에서의 열)에 5분 이상 있어야 사멸한다.

그 말인즉, 건열(건조한 상태에서의 열)이라면 훨씬 더 높은 온도가 요구된다는 말이었다.

“그럼 소이탄이라도 터트려야 하오?”

“소이탄 수준의 열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만약 탄저가 넓은 지역에 살포되었다면 그렇게 큰 효과를 볼 순 없을 겁니다. 완벽히 불태우지 않는 이상, 계속 생존하고 있을 테니까요.”

특히나 아포가 흙 속으로 파고들어 가면 골치 아파졌다. 청장이 자세한 실험을 해보진 않았지만, 그럴 경우엔 정말로 탄저 아포가 수백 년 이상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들었다.

지금도 가끔 자연적으로 발병되는 탄저병은 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재유행하는 것일 터다.

“다른 방법은 있소?”

“갑산화주정(포름알데히드)과 같은 물질엔 약합니다. 십 분 정도 노출되면 사멸합니다.”

허나 그런 화학물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위험한 발암물질이었다.

함부로 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탄저가 심각하거나 제독 지역이 확실히 규정되면 모를까.

“그래서 청장께서 갑산화주정을 통해 감염경로를 제독하라 하셨군요.”

군무상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에… 아, 제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추 되었소이다. 다행스럽게도 포로의 이동 경로는 한정되어 있었지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이번 포로수용소에 대한 생물학 공격 여파가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보고였다.

겨우 내각이 희망적인 분위기를 되찾았다.

― 짝짝

“자 그럼 대응 방법을 논의해 봅시다. 청장님, 뭘 어찌해야 합니까?”

항생제로 탄저를 치료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치료약은 걸려서 죽는 자들을 완벽히 막아내지 못했다.

치료약이 만능이라면, 병원에서 병들어 죽는 사람이 대체 왜 있겠는가. 모든 사람의 신체는 절대로 동일할 수가 없다. 질병에 대한 치명성도 마찬가지였고.

탄저는 생물학 무기로 쓸 수 있는 정도의 위력을 가졌기에 더더욱 심각하게 대응해야 했다.

아무리 방호태세가 철저하더라도 희생자가 계속 생겨날 것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칠 순 없었다.

그러니 치료제 말고도 예방접종이 필요했다.

“아국에는 이미 약독화포자를 이용한 예방접종 개발에 들어갔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말입니다.”

약독화 예방접종은 생물학 무기에 대한 전제를 놓고 개발한 것은 아니었다. 맨 처음 말했듯, 역사적 질병이었기에 만들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안전성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부작용이 크단 소리요?”

“…그렇습니다.”

질병관리청장이 시인했다.

고려는 태조 개천제 시절에 약독화 예방접종(인두법)을 실시했다.

물론 당연히 황량한 빈 땅에 건국을 하시던 태조 시절엔 세계를 영원토록 바꿀 엄청난 업적이었지만, 자그마치 오백 년이 훌쩍 넘으며 온갖 기술이 발전된 지금도 그렇게 위험하게 할 순 없었다. 인두법 이후에 곧바로 우두법을 도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약독화 예방접종이 다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일단 최대한 덜 치명적인 탄저균 균주를 찾아서 개발에 들어가야 했다. 사람의 천연두 대신 소의 우두를 찾는 것처럼.

탄저균은 파악된 바로 수십 가지가 넘는 변종 균주가 있었다. 이 변종들은 비슷비슷하지만 달랐다.

탄저균 변종 균주들 사이의 관계는 우두와 천연두 관계와는 달랐다. 그보다 훨씬 가까워 모두 다 인간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래도 덜 치명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있어야만 했다.

또 고려는 중화군이 쓴 탄저 균주도 명확히 알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야 대처가 가능했다.

질병관리청장은 다시 땀을 흘렸다.

‘대체 어떻게 이런 수준의 탄저 균주를 무기화할 생각을 다 했을까? 이런 생물학 병기는 개발과정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난해한데.’

아직 구두 증언 빼고는, 중화가 인체실험을 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허나, 질병관리청장은 의학과 생물학의 권위자로서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동안 들었던 흉악한 괴담들이 대부분 사실일지 모르겠다는.

‘과학자도 연구윤리를 지켜야 해. 미친 과학자 한 사람이 세상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구나.’

고려의 학계에서도 당규삼은 이름이 있었다.

그가 예전에 학계에 발표한 논문들 중 가치 높은 것들은 심지어 연서궁에도 사본이 있었을 정도였다.

허나 그 정도의 재능 넘치는 과학자가 연구윤리를 배반하고 인간의 문명을 향해 칼날을 겨누니 실로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왔다.

“청장의 말에 따르면 전시상황을 가정해 전군에 모두 강제적 예방접종을 하더라도 비전투손실이 커질 수도 있겠습니다.”

청장의 말을 유심히 듣던 군무상서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제국으로서도 지금 수준에서 탄저에 대한 확실하고 안전한 예방접종은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워싱턴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더니 결론을 내었다.

“파병된 일선 병력들은 어쩔 수 없어. 전투는 속행되어야 해. 저런 미치광이 나라에게 시간을 더 줄 순 없네. 개발된 예방제를 최대한 안전하게 접종해주게. 항생제를 비롯한 의약품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하고.”

“알겠습니다.”

“허나, 지금 훈련받고 있는 2차 모병자들의 예방접종은 꼭 자원자만 받게. 그마저도 철저히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예방접종이 불가능하면… 집에 돌아가야 하겠지.”

안 그래도 자원해서 입대한 자들이다.

이제는 조국에 대한 헌신을 탄저균에게까지 증명해야 했다.

‘그들은 또 자원하겠지만.’

워싱턴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전시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신중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전쟁을 계속해 나가며 승리를 얻기 위해선 희생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각의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제국으로선 드물게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더 안전한 예방접종의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질병관리청장이 울먹이듯 그렇게 다짐했다.

내각 사람들도 그의 고충을 짐작했기에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청장은 보고가 끝나자마자 다시 뛰듯 정녕당을 빠져나갔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앞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잠깐, 의무상서는 이야기를 좀 더 합시다.”

긴급내각회의가 파하고 의무상서도 물러나려는 때, 군무상서 박용찬이 그를 붙잡았다.

군무상서는 시중과 상서령, 그리고 의무상서 둘을 제외한 사람들이 떠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 질문했다. 질문을 하기 전에, 뜸을 많이 들이는 것이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그 혹시, 탄저 아포가 방사선에 취약하진 않소?”

“방사선 말입니까?”

“그렇소. 그 방사선.”

의무상서가 머리를 굴려보았다.

“충분히 취약할 겁니다. 결국 탄저 아포조차도 생물의 한계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방사선에 버티는 생물과 반생물은 제가 알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까 군무상서께서 언급하신 소이탄도 국소지역에서는 효과적일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효용성은 극히 떨어지지만… 소이탄 수준의 열기에 살아남을 반생물이나 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호열균이라도 그 정도엔 죽습니다.”

물론 소이탄마저도 토양에 깊숙이 파고든 탄저 아포까지 절멸시킬 순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깊게 파고든 탄저는 지구에 운석이라도 충돌하지 않는 이상 완전히 걷어낼 수 없었다. 혹은 운석이 충돌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만큼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의미는 나오기도 힘들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예 압력과 온도를 받아 퇴적암이 돼버릴 수도 있었으니 애초에 배제하는 것이 현명했다.

고려해야 할 것은, 언제든지 전파될 수 있는 토양 겉표면의 탄저 아포였다. 그 정도는 소이탄이 해결할 수 있었다.

허나 아까도 말했듯, 탄저가 만약 공격목적으로 제대로 살포된다면, 그 정도 넓이를 모두 불태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고려라도.

하지만 군무상서와 시중, 상서령 등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소이탄은 애초에 진지한 고려 대상도 아닌 모양이다. 괜히 이상한 선택을 할까 봐 열심히 설명한 의무상서가 머쓱할 정도였다.

워싱턴이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각에까지 비밀로 할 것도 아니었소. 언제고 알려드리려 했지. 허나 그 전에 의무상서께서 먼저 확인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워싱턴은 두루마기와 갓을 챙겼다.

“황상 폐하께 갑시다. 그 실험장에 가기 위해선 나조차도 보안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작가의 말]

2022년 현재, 미국 FDA 기준으로 허가된 유일한 인간 탄저 백신은 ‘Biothrax’가 유일합니다.(부작용은 적지만 이마저도 호흡기 탄저에 대한 유효성 논란은 완전히 종식시키지 못했고 매년 추가접종을 해야 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소련과 러시아식 생백신은 효과 자체는 좋으나, 상당한 수준의 부작용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2022년 지금까지 파악된 탄저병 박테리아의 균주 개수는 89개입니다.

그중에는 백신으로 개발되기 적절할 정도로 약한 ‘Sterne 균주’가 있습니다.

반면 현존하는 가장 위험하고 유명한 탄저 변종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무기화하기 위해 생산한 ‘836 균주’와 영국이 무기화하려고 시도한 ‘볼룸 균주(Vollum strain)’ 등등이 있습니다.

ref)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 감염병센터 병원체방어연구과, 2021.03.24. 탄저백신개발동향

Inglesby, T. V., T. O'Toole, et al. 2002. Anthrax as a biological weapon, 2002: updated

recommendations for management. JAMA. 287: 223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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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lino M, et al. (2005), "Anthrax vaccines" Archived 2 January 2016 at the Wayback Machine, Annals of Saudi Medicine; 2005 Mar–Apr;25(2):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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