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화 업보(2)
“이런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격전지 근처에서 포로가 잡혔는지 줄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장갑차 후미에서 걸터앉아 이동하던 병사 하나가 그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땅에 내려 그들에게 달려갔다.
“이 인간 말종 새끼들아, 너희들이 그러고도 문명인이냐?”
“그만해! 야, 뭐 해! 말려!”
병사들이 우르르 내려 오 토치틀리 상병을 막아냈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그를 막기 위해선 몇 명이나 달려들어야 했다.
장교가 서둘러 다가왔다.
“오 상병! 그만하라니까!
한참을 씩씩대던 오 토치틀리 상병은 결국 구두 경고를 받고서야 다시금 장갑차로 복귀했다.
이 사건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오 상병 같은 선주인뿐만이 아니었다. 아즈텍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같은 문화권이었던 틀락스칼라 같은 중려 5주와 마야주, 그리고 그곳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는 쿠쿨칸교의 신자들은 격노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적인 식인 행위는 후납 쿠(Hunab Ku, 일신론)적 쿠쿨칸 교리와 정면으로 어긋나 있다.
쿠쿨칸교 자체가 의도적으로 마야와 아즈텍 지역에 광범위하게 있었던 인신 공양 문화를 억누르기 위해 태어난 만큼, 그들이 느끼는 반발심은 거대했다.
본국에 이 사실이 전파된다면 아마 다시금 모병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폭증할 것이다. 그들로선 지금의 전쟁이 성전이 될 수 있었다.
반응이 이렇게 즉각적이다 보니 고려군 지휘부는 전쟁의 현황과는 별개로 식인 사건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명령했다.
정훈실과 종군기자, 여러 군 내 수사기관들이 달려들었다.
헌병들도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헌병들의 업무는 그리 고되지 않았다.
헌병은 병사의 군기나 탈영 등을 신경 써야 하는 직무였다. 고려군은 여러 지원 덕에 군기가 높고 탈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었다.
허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른 문제들이 생겼다. 고려군 내에서 포로에 대한 폭행 및 학대 사건들이 터진 것이다.
태평양 사령관 이선 원수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천인공노할 사건이 일어났다. 끔찍한 일이 자행되었다.
나 또한 귀관들의 감정에 공감한다.
허나 그대들의 행동에는 반대한다.
우리는 민족에 대한 증오를 용납하지 않는다. 귀관들이 증오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상과 이념이다. 저들의 행동은 우리가, 국제사회가 단죄할 것이다.
사적제재는 엄벌에 처한다.
군 내에서 자행되는 여러 범죄는 군법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부디 이성과 품위를 되찾으라.]
세계대전은 수많은 시선이 쏠린 대전이다. 고려는 국제연합의 맹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했다.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선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싸우진 않았더라도, 포로로 잡아 후방에 이송시켜놨다면 국제사회의 규범에 알맞게 처분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포로로 잡힌 중화군들은 진작 왜 항복하지 않았는지 후회하고 있을 정도였다.
고려도 개성 공습으로 인해 쌓인 것이 많았다. 그래서 중화 포로를 굉장히 후대하진 않았다. 딱 철저히 해줄 것만 해주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더없이 인간적인 대접이었다. 음식과 물, 잠자리와 의복을 공급받은 중화군으로서는 그동안 극심하게 결핍된 것이 충족되며 위안을 누렸다.
빙독 과다 복용과 장기간에 걸친 학대 수준의 영양실조로 이미 처참히 망가져 버린 건강까지 돌아오진 않겠지만.
또 남의 시선뿐만 아니라 자신들, 내국민들의 의견과 생각도 봐야 했다.
고려는 전체주의적 사회가 아니었고, 다양한 생각과 시선을 가졌다.
오히려 중화주의의 추잡함과 끔찍함이 고려의 도덕성을 해치면 그것이야말로 역겨운 결과가 아니던가.
게다가 워싱턴과 고려의 정계는 전쟁 시작부터 전후 처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지나의 땅에 대한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 * *
봄이 다가오자 고려의 기갑과 기계화사단도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
공세종말점이라기보단,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과정일 터였다.
파도치는 듯한 제파(諸波)공격도 파도와 파도 사이의 짧은 시간이 있었다. 특히 뮈라의 기갑 같은 파도는 지진해일마냥 미친 듯이 밀어쳤기에 더더욱.
이 짧은 휴식기에 중화군 수뇌부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중화군 장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이지 못하는 장군들도 참모를 보냈다. 야간 항공공습을 대비해 작은 가옥에서 불도 못 켜고 도둑쥐마냥 회의해야 했다. 고려군이 조선령 도시에 항폭을 마음껏 하진 않겠지만, 장군들이 싸그리 몰려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할 법도 했다.
모인 장군들의 안색은 처참했다.
요령전구의 완전한 승리는 이미 한참 전에 물 건너갔다. 그건 낭화신 원수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요령과 그동안 점령한 지역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을 터다.
중화군은 그들의 급소를 파고든 남부집단군에 총공세를 가했지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반면 고려군의 기갑부대들은 북쪽에서 중화군의 숨통을 조여들었다. 중화는 기갑이 들어오기 힘든 적봉 등의 산악지대에서 겨우 버티는 셈이다.
그리고 지금은 최전선, 즉 적의 주력 본대인 신의주 전선에서 강력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화는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이를 막지 못했다. 적은 이미 압록강을 도하했고 비사포에 있는 조선군과 함께 요동반도를 남쪽에서부터 수복 중이었다.
명확하고 적나라한 패배였다.
하지만 패배보다 그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무너진 희망 그 자체였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고려군을, 연합군을 이길 수 있는가?
장군들조차 사기가 완전히 꺾여 있었다.
아니, 그들 같은 고위급 장교들이야말로 지금 이 전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전역에서 압도당했다. 중화군은 패배만 거듭했다. 무기도 식량도 지원도 없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도 모자라 굶어 죽기까지 하고 있다.
차라리 죄다 굶어 죽었으면 말이라도 안 나왔을 것이다.
‘식인까지 하고 말이야.’
고려군이 뿌리고 있는 선전물에는 중화군 수뇌부가 자행하는 온갖 범죄 행위들이 샅샅이 기록되어 있었다. 중화군, 중화인 전부가 그 행동을 면밀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의 의심과는 별개로, 중화 최고사령부는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식인 행위는 중간 정도의 군 지휘부, 즉 사단급 정도의 체계에서 이루어진 것일 테다.
중화주의가 아무리 전 국민에게 분골쇄신을 강조하는 이념이라 하나, 분골쇄신한 신체를 다른 이들의 영양분으로 쓰도록 만들기까지 하는 이념은 아니었다. 열등한 비한족이라면 모를까, 우수한 한족끼리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중화제국의 원죄는 명백했다.
극도로 인명을 경시하는 사상을 만들었던 것이 첫 번째요, 그리하여 자국 군인들을 대포 사료로 쓰는 사회를 만들었으면서 불가능한 목표를 강요한 것이 두 번째일 터.
불가능한 목표에 직면한 일선 지휘관들로선 상급지휘부에 가서 권총 자살을 당할 바엔 미친 짓이라도 저지르지 않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을 만든 채 아랫것들이 독단적으로 자행한 일이라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후퇴하지.”
결국 낭화신이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
본국으로 후퇴한다면 대총통의 극심한 질책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
하다못해 지금 이 회의를 참관하고 있는 무장친위대장 모경록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조차 자기 목숨 아까운 것은 알고 있었다.
“후퇴 작전을 세워 보시오.”
낭화신의 말에 대답하는 인물은 없었다. 이미 예전에 답을 내놓은 호원민은 지금 적 본대의 공세를 막고 있었다. 그때 상책을 채택해 후퇴했다면 지금의 꼴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체사레 1세를 모셨던 이탈리아 왕국의 재상,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명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된 것이다.
― 전쟁은 당신이 원할 때 시작되지만, 당신이 원할 때 끝나지 않는다(Comincionsi le guerre quando altri vuole, ma non quando altri vuole si finiscono).
중화군이 후퇴를 결정한다 해도 그것을 고려군이 용인할 리가 만무했다.
아무도 말이 없자 모경록이 회의를 중단했다. 다른 이들은 이 답답한 분위기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낭화신은 하급자의 월권행위조차 지적하지 않고 지친 듯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모경록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조가 유난히 친절했다.
“원수, 이제는 옥석을 가려내야 합니다.”
“뭔 옥석이요.”
“모두가 이 전역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순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후퇴로는 산악이라 비좁으니 한정된 인원들만 퇴각할 수밖에 없지요. 자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순수한족병사와 순수한족장교, 그리고 충성심과 능력이 검증된 장군들을 위주로 후퇴시키십시오. 누군가는 전역의 전선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네의 무장친위대는 그 속에 껴 있겠지?”
낭화신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웃을 사안이 아닙니다. 제 사견으로는 오로지 오분의 일 정도의 병력이라도 건지면 다행입니다.
양송락, 이견휘, 장온계 장군 등은 대총통께서 아끼시는 인물이니 그들도 포함돼야 할 것입니다.”
낭화신이 모경록을 노려보았다.
“호 상장은 빠졌군. 호 상장이야말로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했는데 말이야.”
“그리고 원수께서 직접 그 상책을 거절하셨지 않습니까?”
“…그게 내 판단이었나?”
“그럼 대총통 각하의 판단일까요? 위험하신 발언입니다?”
낭화신은 대화를 나눌수록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모경록이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호 상장도 무조건적인 명단에 올리지요. 허나 제 계획대로 하십시오. 지금 당장.”
낭화신은 그의 천성적인 무례함을 지적하는 대신 방법을 물었다.
순전한 궁금증이 들었다.
“그래, 모 대교. 방법은 있나? 고려군이 3월에 다시 전면적인 공세를 펼칠 것으로 예상하는데, 핵심 주력이 빠지는 상황에서 아군 병사가 저들을 막을 방법 말일세.”
강철과 화염의 파도가 몰려온다. 보급은 없다.
포위망이 형성된 이후 패퇴에 패퇴를 거듭한 중화군은 이제 총 한 정조차 병사들에게 고루 배분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총 한 정에 병사 셋이 달려들어야 했다. 사수를 제외한 두 병사에게는 총알 세 발씩이 주어졌다. 총알 세 발의 가치가 중화 병사 한 명이었다.
반면 적 병사는 두꺼운 동계피복에 든든한 방편복, 정밀한 소총과 광학조준경, 권총과 대검 등의 부무장, 수류탄과 유탄발사기, 기관총과 기타 분대지원무기를 들고 왔다. 기갑과 장갑차에 앉아서.
허나 모경록은 낭화신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가 있습니다. 아주 쓰기 까다롭지만 파괴력 하나는 엄청날 겁니다.”
그런 패를 왜 진작 쓰지 않았는지, 낭화신은 질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토록 대단한 무장친위대의 지도자조차도, 동공 안에 눈치채기 힘든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 * *
“이 새끼들이 대체 뭘 잘했다고 위에선 싸고도는 겁니까?”
고려제국 북부집단군 포로수용소.
분위기는 흉흉했다.
사령관 직속 명령의 하달은 그들도 전파받아서 인지한 상황이다.
더 이상의 폭력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젠 군 법무관과 헌병들도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그래도 사람 감정이라는 게 참 그렇게 통제가 쉽겠는가.
아무래도 전보다 더 쌀쌀맞아졌고, 더 냉담해질 수밖에 없었다.
장교들도 그랬다. 오후 일과 중 짧은 다과 시간에 휴게실에 모인 그들은 삼삼오오 현 상황에 투덜거렸다.
“에이, 그래도 얘네들이 다 그런 놈들은 아니다.”
“식인종 중화 놈들이 다 끔찍한 놈들이 아니면 대체 뭡니까?”
“외딴곳에서 사는 소수민족들은 어거지로 끌려와 총알받이로 쓰이고 있다. 대리, 월, 묘, 하북….”
포로의 조사를 담당하는 장교 하나가 커피를 홀짝이며 그렇게 두둔했다. 성을 낸 장교도 그 말엔 할 말을 잊어버렸다.
“…가지가지 하는구만, 중화 새끼들.”
― 쿵쿵쿵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있던 장교 하나가 나가 문을 열어보았다. 숨이 차는지 어깨를 들썩거리는 병사 하나가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정 병장, 뭔가?”
“위급상황입니다!”
“적 독소포탄이 낙하했나?”
폭음이 들리지 않았다. 독소포탄이 아무리 조용하게 떨어진다고 해도 소리는 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는 아무 특이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병사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장교들도 반사적으로 단독군장에 결속된 방독면을 꺼내 썼다.
중화제국은 지금껏 고려와의 전투 속에서 몇 번 독소무기를 사용했다.
겨자독소와 질식독소 등이 그런 무기였다.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독소는 제독 때문에 일시적으로 고려의 진군을 막긴 했지만, 유의미한 피해를 주진 못했다. 차라리 그런 면에선 재래식 폭탄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고려는 이미 전군이 화학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기갑까지도 그랬다.
게다가 이 포로수용소는 전선의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가 계속 진격해 나가는 지금의 상황에선 여기가 공격받으리라는 예상은 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사의 대답은 다른 의미로 예상과는 달랐다.
“아닙니다, 포탄이 아닙니다.”
장교들이 서둘러 나가보니, 그야말로 끔찍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구토를 하고 있었다. 중화군과 고려군을 가리지 않았다. 고려군은 지급된 방독면을 썼는데도 구토를 했다.
“구토작용제요? 겨자독소는 없는 모양인데….”
군단 소속 화학대대가 곧바로 달려왔다. 화학대대장은 오자마자 포로수용소에 대한 철저한 격리를 지시했다.
포로수용소장은 그 처사에 불만을 가지기보단, 의문부터 제기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아닙니다.”
“그럼?”
“어떤 무기화된 질병에 이미 감염된 것 같습니다.”
“화학제가 아니라 질병? 무슨 질병?”
“아마 생물학 무기인 것 같습니다. 많은 증상들이 탄저를 가리키고 있어요.”
수용소에 근무하던 장교들이 침묵했다.
화학전 대비 방호훈련은 빡세게 받았기에 후방 자원인 그들도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화학무기는 시간이 지나면 해소된다. 바람이 알아서 공기 중에 흩뿌려준다는 의미였다.
반면 지금의 생물학 병기는 화학 병기에 비해 굉장히 까다로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령부 휘하 화학여단이 곧바로 오는 중입니다. 그 전까진 군단 소속 화학대대의 지휘에 따르세요.”
중화가 탄저를 무기화한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놀라울 뿐만 아니라 심각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학방호사령부에서는 진작부터 병균의 무기화에 대한 방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흑사병과 호역, 홍역과 두창 등의 역병 무기화는 많은 나라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였다.
설령 그런 무기를 쓰지 않을 나라라도, 적이 그런 무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방어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탄저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아주 강력한 무기화 후보군 중 하나였다.
‘일단 항생제를 혼합해 쓰자. 최대한 빠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은 심각해진다.’
화학대대장은 기본 지침에 따라 곧바로 비축된 항생제를 풀어 초기 조치를 시작했다.
현 군납용 항생제는 한 개가 아니었다. 여러 개가 있었다.
한승태와 유민창이 만든 최초의 항생제가 나온 지도 벌써 사십 년이 흘렀다.
그 이후, 꽤 많은 항생제가 개발되었다.
현 항생제 종류별 기전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세포벽에 작용하는 항생제, 세균의 단백질 합성에 작용하는 항생제, 핵산합성을 억제하는 항생제, 세포막에 작용하는 항생제.
화학대대장은 가용한 모든 항생제를 사용했다.
원래는 내성을 의식해서 그런 방법을 쓰진 않았다. 섞어도 두 개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촌각이 위험했기에 말 그대로 때려 부은 것이다. 무기화된 탄저에 대한 명확한 임상 결과가 없다는 것도 그 판단의 근거였다.
그 판단이 결국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다.
수송기를 타고 서둘러 날아온 화학여단장이 그를 격려했다.
“잘했네. 침착하게 잘했어. 귀관의 행동은 귀감이 될 것이야.”
호흡기 탄저의 사망률은 처치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시 9할이 넘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도 멀쩡하지 않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허나 치료를 한다면 그 사망률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여전히 위험한 질병이나, 감내할 수준이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초동조치가 잘 이루어졌다.
수많은 병사들이 살아남았다.
복합항생제 처방이 주효했다.
탄저균은 4고리탄화수소계(테트라사이클린계)으로 추정되는 일부 항생제에겐 힘을 잘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계열의 항생제인지는 추후 면밀한 검사를 통해 알아가야 할 것이었다.
허나 격려를 받는 화학대대장의 표정은 썩 좋지가 않았다.
“…아무리 적이었어도 사람이 저 지경으로 저렇게 죽어가는데,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항생제 보급은 충분했다. 감염된 많은 고려군이 생명을 구했다.
고려는 감염된 병사들에게 복합항생제 처방을 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의약품을 비축해 놓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대단했다.
하지만 중화제국군 포로에까지 해당하는 물자는 없었다.
누가 그것까지 예상했겠는가. 특히 항생제를 때려 붓는 방법을 선택한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러니 고려군을 노린 중화의 생물학 공격은 오히려 고려군보다는 중화 포로들을 대량학살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중화는 포탄 대신 포로를 썼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군수품을 하도 많이 파괴했으니….”
후퇴국면에 항공폭격까지. 적들의 군수품이 많이 남아있을리가 만무했다.
“아닙니다, 선배님. 그래도 요령전구에 포탄 몇 발이 없었겠습니까. 저들은 그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해서 그랬을 겁니다. 포로의 의복에 탄저를 묻히고 항복시켰지요.
어찌 나라 자체가 저렇게… 저렇게 악랄할 수 있습니까?”
화학여단장은 말을 아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충격을 받은 대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독이 남았네. 이젠 끈질긴 탄저와의 싸움이 시작될 거야. 마음 단단히 먹게.”
중화가 탄저를 썼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태평양사령부도 화학여단장을 호출해 보고를 들었다. 탄저가 뭔지, 무슨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가 끝나니 모두가 차가운 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침묵했다.
사방에서 승전 소식이 날아오고 있는 이 순간이지만 전쟁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지금에야 NBC를 다 묶어 화생방이라 부르지만 아직은 화학대대, 화학여단으로 불리고 있습니다.